한밤중 장애인 시설에 흉기를 든 20대 남성이 침입해 19명을 살해하고 26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피해자 대부분 저항이 어려운 중증 장애인으로 취침 중 무방비로 습격을 당했다. 가해자는 과거 해당 시설에서 일했던 직원으로 입소자를 폭행한 사실이 밝혀져 사건 당시엔 해고당한 상태였다. 그는 체포 직후부터 재판 과정 내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장애인은 불행을 낳을 뿐이다”, “장애인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따위의 혐오 발언을 지속하며 범행을 정당화했다. 전후 일본 최악의 ‘증오 범죄’ 중 하나로 꼽히는 2016년 가나가와현 장애인 시설 집단 살인 사건의 내용이다.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트린 이 참극은 하야카와 치에 감독에게도 커다란 물음표를 남겼다. ‘사회에 불필요한 인간은 살 가치가 없다’는 차별적 주장을, 그것이 심지어 정의를 구현하는 목소리로 둔갑하는 현상을 어떻게 비판해야 할까? 약자에게 관용을 베풀기는커녕 배척을 조장하는 듯한 정부의 태도도 실망스러웠다. 감독은 오싹한 상상력을 발휘해 문제의식을 펼치기로 했다. <플랜 75>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제작한 옴니버스 영화 <10년>(2019)에서 선보였던 동명 단편을 장편화한 작품이다. 영화 배경은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일본의 근미래. 젊은이들은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며 울분을 토하고, 전국에서 노인을 겨냥한 범죄가 급증한다. 대안 마련에 나선 정부는 75세 이상의 노인에게 안락사를 장려 및 지원하는 정책을 해법으로 내놓는다. 과연 ‘플랜 75’는 고령화 문제를 타개할 묘수일까?
영화는 70대 중반의 여성 미치(바이쇼 치에코)와 시청 공무원 히로무(이소무라 하야토), 필리핀 이주노동자 마리아(스테파니 아리안)를 오가며, 새로운 제도가 사회에 자리 잡는 과정과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추적한다. 카메라가 가장 눈여겨보는 인물은 플랜 75의 대상자이자 당사자인 미치. 그녀는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며 호텔 룸메이드로 일한다.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아도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고, 휴일엔 친구 이네코와 어울리며 외로움을 나눈다. 그러나 플랜 75 시행 이후, 미치의 평온했던 삶은 빠르게 무너져 내린다. 처음엔 건강검진을 받는 일이 “오래 살려고 용쓰는 것 같아서” 눈치가 보이는 정도였지만, 얼마 안 가 미치는 친구와 일자리를 연달아 잃는다. 주택 재개발로 인해 살던 집에서마저 쫓겨날 위기에 처하는데, 생활고에 시달리는 미치를 구제할 복지 제도는 미비하다. 사방에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주체적인 행위인지, 얼마나 큰 경제적 이득을 낳는지 광고하며 플랜 75의 긍정적 효과를 강조한다. 미치는 결국 ‘서비스’를 신청하고 지원금 10만 엔을 수령한다. 한편, 히로무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응대하는 일만큼 그에게 플랜 75를 홍보하는 일에도 친절하게 임한다. 항상 웃는 얼굴로 제도 이용의 자발성을 역설하던 히로무는 어느 날 20년 만에 나타난 삼촌의 신청서를 받고 혼란에 빠진다. 히로무가 정책의 집행자라면 마리아는 파생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다. 젊은 엄마인 그녀는 본래 요양원에서 일했으나, 딸의 수술비를 마련하고자 훨씬 급여가 높은 플랜 75 센터로 이직해 유품 관리 업무를 맡는다.
<플랜 75>는 주요 인물이 한 장소에서 만나는 순간을 최대한 미룬다. 이전까지 그들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로 그려지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된다. 플랜 75는 그렇듯 동떨어진 이들을 거미줄처럼 한데 엮는 시스템이다. 인물들의 행위는 어떻게든 서로에게 파장을 일으킨다. 미치는 플랜 75를 선택한 이상 히로무와 마리아가 대기하는 공간에 입장할 수밖에 없고, 그저 역할에 충실할 뿐 무결해 보였던 히로무와 마리아는 그 순간 방관자 또는 부역자라는 묘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감독은 플랜 75가 내세우는 이상적 죽음이 실은 은밀하고 집요하게 강요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히로무와 마리아 또한 플랜 75의 실제 이용자가 TV 공익광고에서 “죽음을 택할 수 있어 감사하다”며 미소 짓는 모델이 아니라, 사회에서 가장 힘없고 가난하며 위험에 쉽게 노출되는 존재임을 알아차리고 회의감에 휩싸인다. 채도를 낮춰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화면에서 인물들은 점차 표정을 잃는다. 말투에선 생기가 사라지고 얼굴엔 누적된 피로와 절망이 여실히 드러난다. 뭔가를 저버리는 기분, 인간으로서 선을 넘어버렸다는 자괴감을 짐작할 만하다. 어떤 물리적, 정서적 안전망도 없이 사각지대로 내몰린 미치는 플랜 75 콜센터 직원 요코(카와이 유미)와의 15분짜리 통화에 의지한다. 카메라는 종종 혼자 있는 노인들의 모습을 비춘다. 빛을 차단한 좁은 거실에서 전화기를 바라보는 미치, 식탁에 고꾸라진 채 죽음을 맞이한 이네코의 뒷모습, 골목 끝에서 손을 흔들며 서 있는 히로무의 삼촌. 그러한 장면은 홀로 남은 이를 확대해서 보는 이미지인 동시에, 영화 밖에 실재하는 고립을 상기시킨다.
현재 일본 사회가 마주한 진짜 위기는 무엇인가. 고령화와 저출생이라는 동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국내 상황에 비출 때, 영화 속 질문은 유독 날카롭게 다가온다. 실제 사회를 메운 분노와 원망 위에 플랜 75라는 설정 하나를 추가하자, 가치의 우선순위는 거침없이 흔들린다. 영화에서 플랜 75는 대성공을 거두고, 3년 후 정부는 대상자의 연령을 낮춰 플랜 65의 가동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더불어 살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는 대신 특정한 사회 구성원을 제거하는 ‘편리한’ 방식으로 위기를 무마하려는 욕망이 노골화되는 것이다. 미디어는 인간의 존엄보다 효율과 생산성을 우선하라는 메시지를 연일 내보내고, 약자의 고통은 약자 스스로 책임져야 마땅하다고 선전한다. 노인으로 특정했으나 <플랜 75>는 표적이 빈곤층, 장애인, 이주민 등으로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참담한 근미래 속에서 영화가 포착하려 애쓰는 것은 머뭇거림이다. 근심 어린 얼굴로 주저하는 이들, 고민 끝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 보려는 움직임이 영화에 담긴다. <플랜 75>에서 가장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장면은 콜센터에서 일하던 요코가 정면을 응시하는 순간이다. 이용자들이 도중에 마음을 바꾸지 않도록 유도하라는 상급자의 지침이 그녀 귓가에 울려 퍼진다. 위선과 부조리를 학습하는 직원들은 곧 자기 합리화에 능란한 사회의 얼굴이나 마찬가지다. 시선을 떨군 채 침묵하던 요코는 갑자기 고개를 들고 과녁을 조준하듯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본다. 영화는 그 순간 약속된 막을 찢는다. 허구라고 합의한 세계를 배반하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려 한다. 이것은 단지 꾸며낸 이야기인가? 당신은 부끄럽지 않나? 그래서 플랜 75가 작동한다면, 세상은 정말 더 살 만한 곳이 될까?
플랜 75 Plan 75 감독 하야카와 치에 출연 바이쇼 치에코, 이소무라 하야토, 카와이 유미, 스테파니 아리안 수입·배급 찬란 공동제공 소지섭, 51k 제작연도 2022년 상영시간 113분 등급 15세이상관람가 개봉 2024년 2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