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혐의로 한 여자가 기소됐다. 사망한 이는 그녀의 남편인데, 집 앞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다락에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머리에 큰 손상이 있어 앞뒤 정황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검사는 범죄를 의심하고 변호사는 자살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가운데, 부부가 지나온 인생의 파편들이 하나둘 증거물로 제출된다. 불행으로 점철된 듯한 편린들은 언뜻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들의 사고, 외도, 자살 시도처럼 자극적인 말들이 법정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추락의 해부>는 법정 스릴러가 아니다. 여기 교묘한 술수, 은밀한 음모, 판세를 뒤집는 결정적인 증거 같은 건 없다. 피고인석의 산드라(산드라 휠러)는 가련하게 혐의를 뒤집어쓴 것도, 범죄를 저지르고 속내를 숨기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그녀는 애써 무고를 주장하기보다, 차라리 삶의 복합적인 성질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건 일부일 뿐이에요. 진실이 아니죠.” 격렬한 부부싸움이 녹음된 파일을 듣고 법정 안의 사람들이 제각기 충격에 휩싸일 때도 그녀는 날 선 목소리 너머에 켜켜이 쌓인 가족의 시간을 생각한다. 빛과 어둠이 공존했고, 희망과 절망이 함께 했던 날들. <추락의 해부>는 특정한 장면들로 간략히 요약되지 않는 그들의 시간을 천천히 해부한다.
부검의는 사뮈엘(사뮈엘 테스)의 죽음에 대한 의학적 소견과 법의학적 소견을 구분한다. 직접적 사인은 두부 손상이지만, 그 손상이 언제 어떻게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규명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누군가 그를 폭행했을 수도 있고, 다락에서 밀쳤을 수도 있다. 이는 사인(死因)을 밝히는 데 부검 말고도 여러 가지 활동이 필요하다는 걸 드러낸다. 수사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밝히는 과정이라면, 재판에서는 그 모든 증거와 정황을 두고 좀 더 총체적인 판단을 내린다. <추락의 해부>는 여기에 한 가지 층을 더한다. 그를 추락하게 한 근본적 요인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산드라의 친구이자 변호사인 뱅상(스완 아를로)과 독기가 잔뜩 오른 검사(앙투안 레이나츠)가 각각 확인한바, 산드라와 사뮈엘의 관계는 이미 붕괴를 향해 가고 있었다. 유명한 작가인 산드라와 달리 사뮈엘은 번번이 소설 쓰기에 실패했다. 가사와 양육이 불공평하게 분담되고 있다고 여긴 사뮈엘은 종종 불만을 토로했지만, 늘 바쁜 산드라는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하지 못했다. 문제의 사고가 있던 날에는 한 대학원생이 산드라를 인터뷰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왔는데, 사뮈엘이 음악을 너무 크게 트는 바람에 인터뷰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예시가 무엇이든 산드라와 사뮈엘 사이에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는 건 확실해 보인다. 어쩌면 사뮈엘은 그 틈새로 추락한 건지도 모른다.


산드라와 사뮈엘의 아들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너)과 관련된 사건은 좀 더 분명히 부부의 균열을 지시한다. 다니엘이 4살일 때, 글쓰기에 빠져있던 사뮈엘의 부주의로 다니엘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들이 시각장애를 갖게 되자 사뮈엘은 홈스쿨링을 자처했고 이는 이후 그가 “내 시간이 없다”고 말하게 하는 한 요인이 된다. 비극적 사고는 사뮈엘에게 죄책감을 심었다. 훗날 법정에 선 산드라는 사고 때문에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느냐고 질문받는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의 절망감을 아들에게 투사하는 걸 견디기 어려웠다고 답한다. 사고가 만든 둘 사이의 간극을 끝내 누구도 좁히지 못했다. 이 비극의 한편에 사고의 당사자이자 가족 관계의 구성원이며 사뮈엘의 죽음에 관한 중요한 증인 다니엘이 있다. 어느 날 벼락처럼 아빠를 잃고 엄마와도 헤어질 위기에 처한 11살 소년. 고도 근시로 앞을 거의 못 보지만 피아노를 잘 치고 산책도 씩씩하게 하는 그는 이 어려운 순간에 진실을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전진한다. 모든 재판에 참석하고 기억을 찬찬히 헤집으며 결정적인 실험까지 감행한다. 가장 많이 다치고 제일 많이 울었던 작은 소년은 이 모든 소란이 잦아들 무렵 홀로 성장한다.
무거운 사건을 다루는 것치고 <추락의 해부>의 법정은 다소 번잡스럽고 때로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여기서는 가정과 추측의 언어가 난무한다. 검사 측 증인들은 물론 검사까지도 여러 정황 증거들 속에서 적극적으로 ‘2차 창작’을 해낸다. 검사는 급기야 산드라의 소설 속 한 인물, 남편을 죽인 여자의 존재까지 들먹이며 살인의 가설을 세운다. 산드라가 양성애자라는 것 역시 중요한 정황으로 다뤄진다. 사뮈엘의 상담사도 증인석에서 부지런히 산드라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다. 이쯤 되면 어지럽기 시작한다. 심지어 카메라도 갈피를 못 잡겠는지 안절부절못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린다. 이러한 법정의 형상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재현되는 미국이나 한국 법정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미국의 법정이 전문가들의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는 범죄 수사물의 배경으로 제시되거나, 한국의 법정이 주인공의 결백과 소시민적 정의를 되뇌는 장소로 사용되는 것과 비교하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추락의 해부>에서 심리 재판이 진행되는 곳은 프랑스의 법정으로, 독일인인 산드라는 남편의 나라에서 친숙하지 않은 언어로 재판받는다. 몹시 덜컹거리는 이 과정은 그 자체로 불완전하고 예측 불가능한 삶의 한 단면을 재현하는 듯하다.


<추락의 해부>는 재판의 결과까지 전부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그러고 나서도 일말의 미스터리가 남는다. 이는 플롯보다는 연기의 영역이다.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을 연기할 때 늘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산드라 휠러는 이번에도 다면적인 소설가에게 의뭉스러운 얼굴을 하나 더했다. 그녀는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 가정 안에서 자기 자리를 지켜내려는 아내, 취약함을 인정하는 엄마, 욕망에 솔직한 여성의 면면을 오가며 영화를 든든하게 채운다. <추락의 해부>는 국내에 <시빌>(2019)로 잘 알려진 쥐스틴 트리에의 네 번째 장편 영화다. 겁 없이 타인의 세계에 뛰어들고 욕망을 외면하지 않는 여성의 초상을 지독한 코미디에 담아내던 솜씨가 여전하다. 쥐스틴 트리에는 <추락의 해부>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역대 세 번째 여성 감독이 됐다. <피아노>(1993)의 제인 캠피온, <티탄>(2021)의 쥘리아 뒤쿠르노에 이은 수상이다. 신비로운 눈으로 사태를 관망하다가 험한 일까지 겪은 안내견 스눕 역의 메시도 뛰어난 연기를 펼친 개들에게 돌아가는 팜도그상을 받았다.
추락의 해부 Anatomy of a Fall 감독 쥐스틴 트리에 출연 산드라 휠러, 사뮈엘 테스, 밀로 마차도 그라너, 스완 아를로 수입 그린나래미디어 배급 스튜디오디에이치엘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151분 등급 15세이상관람가 개봉 2024년 1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