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김정은 감독은 <경아의 딸>과 함께 전국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디지털 성범죄 문제를 비롯해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과는 진지하게 머리를 맞댔고, 영화와 더불어 일상의 축제를 일구어나가는 이들과는 환한 미소를 나눴다. 독립영화 라이브러리에 선정된 감독을 대상으로 공동체 상영 초청 지원을 진행한 인디그라운드는 <경아의 딸>이 2023년 최다 지원작이라고 귀띔해 줬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궁금해하고 계속해서 만나고 싶어 한 영화라는 뜻이다. <경아의 딸>은 디지털 성범죄라는 우리 시대의 매우 민감하고 시급한 소재를 다루면서, 마냥 피해자를 연민하거나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는 대신 일상을 지키는 빛에 시선을 둔다. ‘피해자다움’에 갇히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연수(하윤경)의 몸짓은 자기를 돌보기 위해 애쓰는 모든 이들을 위로한다. 보고 나서 말이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경아의 딸>은 영화를 본 이들에게 첨예한 이슈부터 내밀한 속내까지 하나둘 꺼내놓게 한다. 차분하면서 열정적인 김정은 감독은 최적의 대화 상대다. 그간의 대화 속에 무엇이 들었을지 궁금해서, 이제는 달릴 준비를 하는 감독을 잠시 붙잡았다.
평일에는 매일 출근하고 있다고. 어떤 일을 하는 중인가.
<경아의 딸> PD였던 정승오 감독이 차기작을 찍는다. 제목은 <철들 무렵>. 이번엔 롤을 바꿔서 내가 제작 실장을 하게 됐다. 촬영을 앞두고 있다. 작년엔 줄곧 해왔던 영화 제작 수업도 쭉 진행했고 틈틈이 차기작도 조금씩 썼다.
수업은 보통 누굴 대상으로 하나.
고등학교 정규 시간에 영화와 연계해 진행하는 수업이다. 그와 별개로 모씨네 사회적협동조합에서 마을 주민, 청소년 등을 대상으로 하는 단편 영화 만들기 수업도 쭉 해왔다.
<경아의 딸> 개봉이 2022년이니 시간이 꽤 흘렀다. 영화와는 거리가 좀 생겼나. 감독들은 종종 “내 손을 떠났다”는 표현을 쓰는데.
2024년이 되니까 비로소 떠나보냈다고 생각하게 되더라. 극장 개봉을 마무리하고도 작년까지 계속 공동체 상영을 했다. <경아의 딸>은 지난번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선정작인데, 감사하게도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꾸준히 찾아주셨다. 그래서 나도 계속 영화의 바운더리에 있는 느낌이었다. 개봉은 2022년이었지만, 디지털 성범죄 문제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작년에 이 영화를 새로 알게 되어 찾아주시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관객분들과 소통하는 일은 작년에 더 왕성했던 것 같다. 영화제나 개봉 GV 다닐 때는 출장 가는 느낌도 좀 있었는데, 작년엔 여행 다니는 편안한 마음이었다.


<경아의 딸>은 2023년 ‘인디그라운드 공동체 상영 감독 초청 지원’ 최다 지원작이다. 찾아보니 구미, 부산, 영월 등 다양한 지역을 다녔더라. 기획이나 장소에 따라 영화가 놓이는 맥락도 달라지게 마련인데, 어떤 경험을 했나.
페미니즘 이슈, 젠더 이슈에 관한 영화를 같이 보는 활동을 꾸준히 하는 단체에서 불러주시는 경우가 꽤 있었다. 구미참여연대가 그중 한 곳이다. 과천에서는 대안학교 학부모님들이 운영하는 단체에서 상영을 추진하셨다. 평소에도 페미니즘 도서 읽기를 진행하시는 것 같더라. 그런 상영에서는 영화가 다루는 이슈에 대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정책 방향은 어떤지, 대안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질문을 주시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되게 분노하면서 영화를 봐주시기도 하고. 곡성의 섬진강마을영화제를 여는 분들이 주최하는 상영회에 초대된 적도 있다. 오래된 폐교를 개조해 식당이나 카페를 운영하는 분들, 발아현미 연구소를 차린 분들, 김탁환 소설가처럼 문학을 하는 분들이 계시는 곳이다. 비가 오는 밤에 곡성에 도착해서 영화 <곡성>이 생각나기도 했는데, 아침이 되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더라. 정감 가는 마을 공동체의 느낌이 강했다. 독립영화를 함께 본다는 것 자체를 좋아해 주시고, 그걸 본인들의 문화예술 활동의 일환으로 여겨주신다고 할까. 영월의 작은 극장에서 상영했을 때도 비슷했다. 좋은 영화를 보여주어 감사하다며 따뜻한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공동체를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을 듯하다.
코로나가 잦아들면서 공동체가 좀 더 활기를 찾은 것 같았다. “올해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다들 그런 상황을 뿌듯해하고 다행스러워하시는 느낌이었다.
질문도 정말 다양했겠다.
평소에 영화감독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잖나. 영화를 만든 사람이 직접 찾아가니까 정말 순수하게 궁금한 걸 물어보시는 경우가 꽤 있었다. 돈은 어디서 마련하는가 하는. (웃음) 한창 하윤경 배우의 인지도가 쌓이던 때라 캐스팅에 대한 관심도 많이 보이셨다. 마지막에 연수가 뛰쳐나오는 사이다 같은 결말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가해자와 비슷한 또래 아들을 키우는 중년 관객분은 가해자 부모의 입장에 이입하시기도 한다. 저 부모는 이제 어떻게 사냐고. 아무래도 영화를 보고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을 편히 던질 수 있는 분위기라서 그랬을 거다.
유독 기억에 남는 감상이나 질문이 있나.
영월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초청해 주신 공동체에 귀농한 젊은 분들이 많았다. 상영회에도 자기 공방을 하거나 카페를 하며 소소하게 글을 쓰고 예술 활동을 하는 분들이 많이 오셨다. 그중 한 분이 본인의 삶에 빗대어 감상을 말씀해 주셨다. 서울살이하며 여기저기 치이고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았다고, 그런 부분에 질려서 영월에 오게 됐다고 하시더라. 연수가 겪은 일을 똑같이 겪은 건 아니지만, 마치 본인이 연수인 것처럼 영화를 보셨다고. 마지막에 연수가 일상을 회복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셨다.

작년엔 영화를 상영한다는 것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겠다. 상영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상영은 항상 긴장된다. 관객은 항상 미지의 대상이고, 관객을 만나는 매 순간이 늘 새롭다. 근데 상영하고 나서 대화를 시작하면 그런 긴장이 눈 녹듯 사라진다. 그럴 때면 영화를 보는 다양한 시각을 만날 수 있고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럽게 좋다. 사실 상영 기회를 얻는 것 자체도 쉽지 않기 때문에 모든 순간이 귀중하고 감사하다. 영화가 다루는 이슈 때문에 더 이런 생각이 드나 싶은데, GV가 끝날 즈음에는 관객분들과 뭔가 끈끈해진 느낌이다. 서로 더 좋은 방안은 없을지, 각자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지 막 나누게 되거든. 그냥 대화한 것뿐인데 함께 연대하는 것 같고 마음 한쪽이 든든해진다.
원활한 소통에는 상영 공간의 특성도 영향을 미칠 듯하다.
카페나 학교, 작은 극장, 훨씬 더 오픈된 공간 등 더 많은 사람이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서든 영화가 상영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요새는 티켓값이 많이 올라서 진입 장벽이 더 높아진 느낌이 든다. 작년 부산에서는 대형 쇼핑몰 한가운데서 <경아의 딸>을 튼 적도 있다. ‘동네방네 비프’라고 정말 동네방네에서 영화를 트는 프로그램이었다. 물론 환경이 좋지는 않았지만, 지나다니다가 자리를 잡고 집중해서 보는 분들도 있었고 여러모로 특별한 경험이었다.
상영할 때 영화를 보는 편인가. 새롭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영화 끝나기 2~30분 전에 현장에 도착할 때가 많다. (웃음) 그래도 경아가 새 보금자리로 떠나고 연수가 학교로 향하는 몽타주는 항상 본다. 시나리오 쓸 때부터 엔딩은 바뀌지 않았다. 스태프들의 다른 의견이 있기도 했지만 결국 그대로 촬영해서 완성했다. 영화에 아쉬운 부분도 있고, 내 의도가 잘 전해졌을까 싶은 지점도 있지만 그래도 마지막 장면을 볼 때는 마침표를 잘 찍은 것 같다고 느낀다.
엔딩에 대한 다른 의견은 어떤 거였나.
마지막에 연수가 횡단보도에서 학생들과 교차하잖나. 촬영 감독님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걸 제시했다. 연수가 학교에 가는 건지 어디 가는 건지 모르겠다고. (웃음) 학교 쪽으로 같이 가야 의미가 더 명확하게 전달될 것 같다고 하시더라. 연수가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는 뜻이니까. 난 그들이 교차하는 걸 고집했다. 연수가 프레임 밖으로 나가고 동시에 다음 세대 학생들이 들어온다. 연수의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끝나지만, 다음 세대의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걸 말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경아의 딸>은 감독의 개인적 공감에서 출발했지만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만든 영화가 맞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나. 사소한 순간에 그런 걸 느끼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가 택한 이 별>(2015)이라고 노량진 영화가 있는데, 임용고시생이 나간 방에 새로운 재수생이 들어오면서 끝난다. 그렇게 처음과 끝이 이어지는 부분이 영화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야간근무>(2017)도 그런 출퇴근 장면으로 끝나고. <경아의 딸>도 그런 점에서 비슷하게 느껴진다. 또 영화에 넣는 특정 시간대의 장면이 있다. 매직 아워의 풍경들.


인천 앞바다의 넓게 트인 풍경도 떠오른다.
인천은 특히 주요 공간으로 활용하는 편이다.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지표는 그런 것들 같네. “내가 만든 영화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거 말이다. 스태프나 배우들은 영화가 조심스럽고 차분하다는 점에서 내가 만든 것 같다고 말씀해 주신다.
만든 사람이랑 닮았다는 뜻일까?
아마 그런 것 같다. 그렇게 차분한 사람은 아닌데. (웃음)
마음이 좀 편해졌다고 했는데, 재작년에 봤을 때보다 확실히 더 밝아 보인다.
그때는 후반 작업을 막 마쳤을 때잖나. 영화가 진짜 완성된 게 맞나 우왕좌왕하고 있었을 거다.
영화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어렵거나 외로울 때는 언제인가. 지난번엔 편집 과정이 좀 힘들다고 했는데.
주변에서는 시나리오 쓰는 거 보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다고 얘기해주는데, 난 별로 고통스럽지 않다. 새로운 이야기를 마음껏 써 내려가는 게 되게 재밌다. 무던히 잘 소화하는 편인 듯하다. 아무래도 제작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힘들지 않을까. 독립영화는 제작사가 뚜렷하게 있지 않은 이상 투자나 제작 지원처럼 돈 마련하는 일을 감독 개인이 다 해야 한다. 난 계속 그랬다. 돈이 없으면 글은 계속 하드 속에만 있는 거다. 그걸 쓰기까지도 되게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그래도 난 공모 운이 좋았던 편인데 요새는 너무 흉흉하다. 창작자에게 힘든 시간이다. 물론 촬영도 힘들지. 근데 지금 돌이켜보면 하나도 안 힘들다. 영화 찍고 싶다. 2년 전에는 아마 후반 작업 때문에 편집이 힘들다고 말했겠지. (웃음)
첫 장편을 완성하고서 작업자로서 달라진 점이 있나.
<경아의 딸> 시나리오 쓸 때, 내가 그리고 싶은 걸 마음껏 써 내려갔다. 그런데 프리 프로덕션 들어가면서 현실을 마주하고 계속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차기작 쓸 때는 실질적인 요건들을 감안할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게 안 되더라. 그러면 처음부터 제약이 너무 많이 생기니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집중하고 몰입하며 쓰자고 생각하게 된다. 근데 요새 제작 실장 역할을 하고 있잖나. (웃음) 재단하는 입장이 돼보니까 또 배우는 게 있다. 감독은 혼자 시나리오를 쓰니까 아무래도 객관화가 안 되는 지점이 생긴다. 그럴 때 동료들이 제시하는 좋은 대안 수용하면 영화가 더 좋아지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나도 열어두고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감독은 뭘 하는 사람일까? 역할이나 책임에 관해 생각해 본 적 있나.
자기가 그리는 그림을 그려 나가면서 전체를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전체를 그리는 과정에서 각 파트에서 여러 가지 안을 제시하는데, 그럴 때 결단을 잘해야겠지. 그리고 그렇게 결정지은 바에 대해 잘 책임져야 한다. 난 <경아의 딸> 찍으며 많이 헤맸다. 이게 좋은 것 같다가도 또 저게 좋은 것 같아서 우왕좌왕했고, 결정을 번복해서 스태프를 힘들게 하는 일도 있었다. 어쨌든 결정하면 그걸 믿고 가는 것, 그리고 책임지는 것이 감독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본다. 시야가 넓어야겠지. 그러려면 좋은 걸 많이 보고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한다. (웃음)


영화도 많이 보는 편인가.
좋아하는 영화는 몇 번이고 다시 본다. 내게 영화는 휴식이고, 삶의 지혜를 얻는 통로이기도 하다. 원래 인간 본성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영화과 다니면서 인간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는 영화를 다양하게 만나게 됐다. 그게 나랑 잘 맞았다. 사람의 삶을 친절하고 다정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영화인 듯하다.
최근에 다시 본 영화는?
<토니 에드만>(마렌 아데, 2017). 정승오 감독이 이야기해서 다시 봤는데 역시 좋더라.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 나가고 싶은지 묻고 싶다. 규모나 태도에 관한 질문이다.
큰 영화, 작은 영화 다 하고 싶지. 다만 동료들과 함께 꾸린 제작사 ‘주마등필름’에서 규모에 상관없이 꾸준히 해나가고 싶다는 게 가장 큰 바람이다. 지금까지 한 번씩 돌아가며 연출했다. 이제 <경아의 딸> 조감독이자 정승오 감독 영화의 PD를 맡은 김은성 감독한테 빨리 차기작 쓰라고 말하는 상황이다. (웃음) 제작사에 우리 셋 말고 다른 친구들도 있다. 우리끼리 만들 수 있는 걸 계속 만들어보자, 그래야 롱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얘기를 최근에 했다.
재충전을 위해서는 뭘 하는 편인가.
작년부터 체력을 기르기 위해 러닝 크루에 들어갔다. 마라톤도 나가봤다. 활력이 생기더라.
풀코스?
아니다. 약소하게 뛰었다. (웃음)
등록하고 나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나가서 자극을 많이 받고 왔다. 나이가 많으신데도 몸이 딱 다부진 분들이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셨을까?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체력 관리는 정말 필요하다. 옛날에는 어떻게든 정신력으로 버텼는데 요새는 그렇게 안 되더라.
올해도 열심히 달려 나갈 것 같다.
작년에는 수업과 <경아의 딸> 상영회를 핑계로 좀 쉬어간 느낌이 있었다. 차기작을 쓰긴 했지만 어느 순간 디벨롭이 멈추기도 했고. 예전부터 붙잡고 있던 거랑 작년에 구상한 거, 두 가지를 완성하는 걸 올해 완성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하나는 로맨스, 다른 하나는 코미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