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도 한 발 더
인디그라운드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장건재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4-01-29

만나기 전까지는 헤르미온느의 시계라도 손에 쥔 줄 알았다. 작년 한 해 장건재 감독은 세 편의 영화를 선보였다. 10월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이 싫어서>를 개막작으로 상영했고, 11월에는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를 개봉했고, 12월에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최초의 기억>을 공개했다. 시간을 몇 번이고 되돌려서 여러 개의 수업을 동시에 듣던 마법사처럼 장건재도 두 눈 부릅뜨고 영화에 매달렸겠거니 넘겨짚었다. 정작 그의 품에서 나온 것은 영험한 시계가 아니라, 두툼한 달력 뭉치다. 홀로 촌각을 다투는 대신에 동행들과 느릿느릿 사계절을 보냈다. 앞길이 막히면 잠시 경로에서 벗어나 다른 동네를 산책하기도 했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장건재의 부지런한 한눈팔기가 재미와 의미를 고루 남긴 예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주희(김주령)와 그의 남편이자 연극 연출가인 호진(문호진)이 각자의 공간에서 오후를 보낸다. 우연한 만남과 작은 소란을 거듭하며 인물들은 삶과 예술에 관해 때로는 온화하게, 때로는 치열하게 묻고 답한다. 한 갈래로 묶이지 않는 목소리들은 어쩌면 장건재의 새로운 여정을 알리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고만고만한 이름으로 고만고만한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전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반응하고자 그는 나름대로 초석을 놓고 있다. 장건재가 마련한 2024년 달력은 어떤 모양인지 듣고 싶어 대화를 청했다. 

 

 

한국독립영화협회가 ‘2023 올해의 독립영화’로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를 선정했다. 협회 회원 투표를 거친 결과이니 동료들이 인정했다는 뜻이다. 작년을 꽉 채워 보냈는데 돌이켜보면 어떤가.

작년에 영화를 세 편이나 공개한 바람에 표를 합산해서 받은 건가 싶다. 지난 몇 년간 내 화두는 <한국이 싫어서>를 만들기였다. 근데 작업이 오래 걸리다 보니 원래 작업하던 대로, 말하자면 독립영화의 방식으로 다시 영화를 찍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다른 작업을 병행하는 과정에서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안선경 감독과 공동연출한 <최초의 기억>이 나왔다. 서울극장 폐관 시점부터 극장 중심으로 촬영을 시작한 영화도 있다. <극장의 시간>이라고 작년 인디스토리 25주년 행사에서 짧은 버전으로 상영했는데, 그 작업도 기간을 좀 길게 보고 있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신동민, 2021)처럼 학교에서 만난 제자 영화를 프로듀싱하기도 했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책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도 출간했다. 2022년도에 공개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괴이>도 그중 하나다. <한국이 싫어서> 작업이 정체되면서 하나둘 벌인 일들인데, 어쩌다 보니 결과가 한꺼번에 나왔다. 결국 재작년에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제작지원을 받으면서 <한국이 싫어서>도 찍을 수 있게 됐고. 

 

최근 작업을 살펴보면 제작 조건과 형태가 각기 다르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서너 명의 스태프와 3년에 걸쳐 촬영했다고.

결과를 떠나서 작업이 주는 기쁨을 만끽했다. 배우들과 많이 소통하면서, 시간과 예산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미니멀하게 작업했다. 참여한 모든 이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이랄까.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최초의 기억>, <극장의 시간>의 공통점은 협업이다. 김종관 감독과 옴니버스 형태로 <달이 지는 밤>(2022)을 만들긴 했지만, <최초의 기억>은 실로 오랜만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동 연출을 한 작업이다.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면서 공부가 많이 됐다. 책을 만들기로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달이 지는 밤> 마치고 여러 작업의 가능성을 살펴보다가 영화를 좀 몰아서 봤는데, 그중 하나가 하마구치 류스케의 <해피 아워>였다. 탁월한 작업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내가 시도하고자 하는 결이라 더 관심이 갔다. 관련 자료를 찾던 중에 우연히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워낙 작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 어렵게 구했는데, 내용이 궁금해도 읽을 방법이 없더라. 고민 끝에 판권 구입과 출간을 결심했다.

 

책 작업은 얼마나 걸렸나.

4년에 걸쳐서 작업했다. 판권 문제를 해결하고, 좋은 번역자를 찾아 번역 작업을 맡기고, 출판사 사업자 등록하고, 편집자와 디자이너를 구하고. 정말 할 일이 많더라. 우리가 책을 만드는 동안 하마구치 류스케는 영화를 두 편 더 찍었다. 먼저 <아사코>(2019)가 개봉됐고, 이후 <드라이브 마이 카>(2021)와 <우연과 상상>(2022)이 소개되면서 말 그대로 국제적 스타가 됐다. 책이 2022년에 출간됐는데 그 어려운 출판 시장에서 3쇄를 찍었다. 곧 4쇄를 앞두고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이 싫어서>로 가는 길이 막혀 우회한 덕분에, 훨씬 풍성한 현재를 맞이한 셈이다.

내 궁금증과 답답함으로 시작된 프로젝트들인데, 어쨌든 결과물로 나왔다는 점이 유의미한 것 같다. 책도 그렇고, 영화도 마찬가지다. 워크숍 형태로 끝낼 수도 있지만 극장 개봉까지 끌고 나갔다. 내 신작이라서가 아니라 함께한 사람들의 시간이라고 생각해서다. 서로 잔여의 시간을 모아서 틈틈이 만들었다. 우리끼리 봐도 의미 있지만 조금 더 노력하면 영화제든 개봉이든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그런 결실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들더라. 물론 쉽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좋았는데 에너지를 정말 많이 썼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왜 답답했는지는 알겠는데 궁금증에 관해선 좀 더 들어봐야겠다. 당시 어떤 작업들을 주목했나. 

<일과 나날(시오타니 계곡의 시오지리 다요코의)>(C.W. 윈터, 안더스 에드스트롬, 2020)이라는 일본에서 프로덕션 한 영화가 있다. 러닝타임이 8시간이고 한 여자가 농사짓는 과정을 담는다. 이처럼 인물과 관계를 긴 시간 지속하며 촬영하는 다큐멘터리스트들, 예를 들면 페드로 코스타와 왕빙의 작업이 내게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시간과 예산을 합리적으로 배분해 며칠간 밀도 있게 촬영하는 것이 보통의 인디영화 프로세스라고 한다면, 다른 쪽에는 인물과 함께 시절을 통과하는 작업도 있잖나. 산업 기준으로 보면 효율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정말 오랜 시간을 두고 관계를 이어나가면서 작업하면 어떨지 궁금했다. 이번에 그걸 처음으로 경험했던 거다. 앞으로 이 아이디어를 작품에서 조금 더 깊게 혹은 더 넓게 확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시간을 정직하게 감각하고 표현하는 일에 관심을 쏟게 된 것 같다. 어디서 기인한 변화일까. 

시간에 대한 감각은 중요하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제목부터 한정된 시간을 명시하기도 하고. 솔직히 말하면 이전까지는 시간을 보낸다는 것, 시간을 켜켜이 쌓아 올리면서 관계를 만든다는 것의 의미를 잘 몰랐다. 시간을 담는 일에 관해 개념적으로 접근했던 것 같다. 근래는 시간과 관계에 구체적으로 채워야 할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고 보는 쪽에 가깝다. 깨달았다는 건 거창한 표현이고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됐다고 해야 하나. 그러한 인식을 영화에 반영하거나 혹은 한 번씩 사용해 보는 과정이다. 이전의 시간성은 내게 효율과 합리를 뜻했다면 요즘은 좀 다르게 느끼면서 살고 있다.

 

계기가 있나.

여러 계기가 있지. 있는데 그것들이 하나로 모이는지는 모르겠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물든 것 아닐까. 나를 둘러싼 관계, 40대 후반에 접어들며 느끼는 것들, 삶에 찾아온 변화, 아이와 보낸 시간, 주변의 죽음 등이 크고 작은 영향을 주면서. 

 

최근작들 보면서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구나’ 했다. 삶과 죽음이 한 공간에서 연결되는, 죽음을 비장하게 묘사하기보다는 일상적 이별로 받아들이는 점이 눈에 들어오더라.

죽음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잘 몰라서 질문하는 거다. 너무 아프고 두려워서 회피하거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주제다. 아직은 죽음 앞에 대범할 자신이 없지만, 그렇기에 ‘영화는 어떤 감각으로 죽음을 다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품고서 계속 마주해보려고 한다.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이 영화의 테마는 죽음이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근데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레 죽음을 떠올린다. 전에 없던 감각인데, 인물을 세팅하는 과정에서 ‘누가 죽을까? 어떻게 죽을까?’ 생각하는 거다. 이 인물은 이렇게 죽을 것 같다든지 이렇게 죽어야만 완성되는 이야기 같다는 얘기도 많이 하고.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한다. 영화는 죽음을 다루기에 좋은 매체구나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몹시 어렵다고 느낀다. 영화를 찍는 순간, 그 장면은 박제되어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 되지 않나. 영화는 그런 면에서 영정사진 같은 기능을 한다. 찍히고 찍은 사람들은 모두 죽지만 영화는 오래 살아남으니까. 

 

그러면 주로 생각하는 것은 나의 죽음인가, 아니면 타인의 죽음인가. 

나의 죽음.

 

좋네. 시간과 관계에 좀 더 적극적인 태도로 변할 수밖에 없겠다.

우주적 시간으로 보면 우리가 만나서 헤어지는 과정 모두 찰나 아닌가. 참 귀하구나 싶다. 요즘엔 허튼 만남이 없다. 고통스럽고 피곤한 관계도 있는데 그마저 귀하게 다가온다.

<한국이 싫어서>
<최초의 기억>

너무 철드는 것 아닌가.

진짜 그렇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이 절로 난다. 최근에 아내인 김우리 피디와도 얘기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예전에는 아니었거든. 피곤한 사람에게 굳이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고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너무나 당연한 거지. 근데 지금은 아니다. 나랑 안 맞나 싶은 사람을 보면서도 자연스레 ‘다 사정이 있겠지’ 한다. 그런 날 발견하면서 문득 ‘철드는 건가?’ 싶더라. 근데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갖고 작업했던 것이 아니라, 작업하다 보니 최근에 변화가 생긴 거다. 차차 작품에서 여러 방식으로 풀어보고 싶다. 

 

<한국이 싫어서>는 상반기 개봉이 목표라고 들었는데 현재 진행 상황은 어떤가. 

얼마 전에 배급, 홍보마케팅 킥오프를 했다. 개봉은 4월 예정이고, 2월 지나면 프로모션을 시작할 것 같다. 

 

원작 소설 판권을 구매한 후, 실제 촬영에 돌입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는데 어떤 부분이 제일 힘들었나.

작업이 늦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투자. 제작비를 못 구해서 시나리오를 고치며 보낸 시간이 길었다. 결국 영진위 제작 지원금이 가장 큰 시드머니가 됐고, 그만큼 큰 몫을 해준 것이 고아성 배우의 참여였다. 일찌감치 캐스팅했는데 계속 기다려줬다. 예산 규모를 낮추는 상황에서도 같이 가겠다고 해줬고. 기쁘고 고마웠다.

 

<최초의 기억>도 개봉 준비하고 있나.

올해 개봉하고 싶다. 일단 영진위 지원사업에 낼 계획인데, 알다시피 올해 예산이 너무 많이 줄었기에 쉽지 않을 것 같다. 

 

안 그래도 묻고 싶었다. 영진위가 창작·제작 예산을 대폭 삭감하면서 독립영화부터 위기를 맞는 상황이 벌어졌다. 감독도 창작자로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자 선배로서 여러 고민이 드는 시기일 텐데.

총체적 난국이지. 본격적으로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10년 전에는 내가 배웠던 방식을 적용할 수 있었다. 커리큘럼 자체가 독립영화인을 양성하는 데 초점을 맞췄고, 감사하게도 졸업생 중에 훌륭한 모델이 여럿 나왔다. 상급학교, 그러니까 한국영화아카데미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단국대 영화콘텐츠 전문대학원 등에 진학하지 않고 자신의 제작 시스템을 구축해 데뷔한 감독들. <이장>(2020)의 정승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2021)의 신동민, <경아의 딸>(2022)의 김정은 등이 내가 바라던 모델이었고, 그들도 날 선배로 여기며 내 작업을 지지해 줬다. 근데 지금은 판세가 바뀌었다. 조심스럽게 말하면, 내가 학생들에게 더는 모델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크다. 난 독립영화와 작가영화가 중심인 세계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당연히 그런 비전을 제시하는 선생이자 창작자였고. 근데 근래는 자신이 없달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내가 가르칠 수 있는가. 가르칠 것이 있는가. 팬데믹을 넘어오면서 환경이 크게 달라졌다는 생각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은 때다. 근데 공교롭게도 이번 인디그라운드 인터뷰이가 장건재, 김정은, 신동민 감독이다.

정말? 김정은 감독은 <한국이 싫어서>의 각색 작가로 이름이 올라가 있다. 라이브러리 상영작 중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를 연출한 박송열 감독도 후배다. <회오리바람>(2009)의 제작부로 시작해서 <달이 지는 밤>(2020)의 동시녹음까지 나와 10년 이상 함께 일했다. 

장건재  ⓒ이영진

박송열 감독이 데뷔작 <가끔 구름>(2019)을 선보였을 때, 인터뷰에서 장 감독 얘기를 했다. <잠 못 드는 밤>(2013) 조연출로 참여했던 경험이 제작 시스템과 이야기를 선택하는 과정에 도움을 줬다고. 

나의 스승들이었던, 학부시절에 만난 청년필름의 이상인 감독님과 영화아카데미에서 배웠던 박기용 감독님께 많은 영향을 받았다. 두 감독에게 영화를 배우다 보니 접근법 자체가 비슷할 수밖에 없다. 애초 문화학교 서울에서 내 영화 인생을 시작했고. 

 

들을수록 ‘고인 물’이네. (웃음) 

완전히 고인 물이지. DNA가 그렇다 보니 박송열, 신동민 감독 등을 보면 당연히 기쁘다. 굳이 말하자면 나도 그러한 계보에 있는 연출자라 생각한다.

 

이번 인디그라운드 라이브러리 상영작 감독 중 가장 경력이 길고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 창작자에 속한다.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도 극장, 영화제, TV 방송, 온라인 플랫폼 등을 두루 경험했다. 생태계 변화를 몸소 겪은 셈인데 어떻게 적응해 왔나.

과연 적응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 흐름에 올라타서 이것저것 경험해 봤고, 지금도 그렇다. 난 내가 독립영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라고 하면 어떤 이는 할리우드 영화를, 다른 이는 유럽의 작가영화를 떠올리듯 내게 영화는 기본적으로 한국 독립영화를 뜻한다. 사람마다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다르지 않나. 쇼핑도 하고 드라마도 보고. 난 시간 나면 가장 먼저 인디스페이스 시간표를 보거든. 좀 더 시간이 나면 서울아트시네마 시간표 보고. (웃음) 예나 지금이나 독립영화 감독이라는 정체성으로 플레이하고 있다. 다만, 최근엔 더 유연하게 다양한 영역을 탐구하고 싶다는, 각각의 경험을 자산 삼아 작업을 펼치고 싶다는 생각은 들더라. 구스 반 산트나 스티븐 소더버그 같은 감독이 그랬던 것 같다. 존 카사베츠가 독립영화 연출과 배우 활동을 병행한 것처럼 나도 독립영화를 본진으로 두고 여러 작업을 잘해 나가면 좋겠다. 

 

상영 지원의 축소 또한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특히 신진 창작자에게 디딤돌 역할을 했던 영화제가 문을 닫고 온라인 플랫폼이 휘청거리면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현재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나.

영화제는 내게도 중요한 장이다. 한국 영화제는 코로나19 이전까지, 혹은 <다이빙벨>(2014) 사태 이전까지, 아니면 각각의 영화제가 부침을 겪기 전까지 좋은 시절을 보냈다. 여러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기에 어려움을 맞닥뜨린 면도 있다고 본다. 변화가 필요하다. 영진위 예산 축소는 올해 영화제를 굉장히 어렵게 만들 거다. 제작 쪽도 규모가 반으로 줄었기에 올해부터 내후년까지 여파가 이어지지 않을까. 어떻게 아젠다를 만들고 돌파해 나갈지가 중요하다. 말했듯 영화제는 신인에게 발판이 되는 중요한 곳이고 영화제도 그런 역할을 성실하게 해왔다. 근데 정책적으로 보면 독립영화 안에서 플레이어를 보호하는 장치는 별로 없었기에 창작자들은 꾸준히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큰 이슈는 ‘첫 번째 영화에서 두 번째 영화로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였는데, 지금은 두 번째 영화를 만든 이후에 작업을 지속하기가 더 어렵다. 창작자에 대한 보호가 빈약하다 보니 대다수는 운신의 폭이 좁다. 거의 벼랑 끝에 몰린 형편이다.  

 

신인에게든 중견에게든 영화 만들기의 문턱은 더 높아진다는 말이다. 동료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해 봤나. 

코로나19 시기에 독립영화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에 패널로 불려 간 적이 몇 번 있다. 나와 같은 이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위치여서 주변의 또래 감독들에게 물어봤다. 의견을 취합해보면 비슷한 불만이 많다. 보통 지원 제도는 신인 중심으로 재편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장으로 나가야 하나. 그럴 수 있거나 그러고 싶은 감독도 있지만, 욕망이 거기에 없는 감독도 많다. 그들이 작업을 지속하려면 어떤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나도 플레이어로서 길을 내보려고 노력하지만, 한편으로는 창작자 중심의 시선을 벗어나 다른 측면을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극장도 그렇고, 다들 임계점에 다다른 느낌이거든. 지난주 토요일에 홍대 앞, 그 사람 많은 곳에 있는 인디스페이스에서 혼자 <이어지는 땅>(조희영, 2023)을 봤다. 영화 속 인물들도 맴돌고 있는데 나도 맴맴 돌고 있구나 싶더라. (웃음)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길을 내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온 작품이라고 본다. 이를 통해 어떤 욕구를 해소하길 원했고 또 실제로 해소했는지도 궁금하다.

욕구 해소라기보다는 환기가 필요했다. <한국이 싫어서>에서 눈을 좀 돌리길 원했고, 김주령 배우와의 오랜 교류를 작업으로 연장하고 싶었다. 토요일 오후에 차 한 잔 마시듯 서로 잉여의 시간, 자투리 시간을 모아서 편안하게 만났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김우리 피디가 녹음하고, 윤희영 피디가 슬레이트를 치고, 신동민 감독이 스크립터를 맡고. 그렇게 네뎃 명이 모여 영화를 찍었다. 멀리서 보면 동네 문화센터에서 유튜브 촬영 실습하는 현장 같다. 웬만한 학생 단편영화보다 훨씬 작은 현장이었는데 즐거웠다. 물론 몸은 고됐다. 짐을 이고 지고 해야 하니까. 참여했던 사람들 모두 이런 영화가 될 줄 몰랐다고 했다. 주령 배우도 그러더라. 장건재 감독 영화는 찍을 땐 ‘이게 맞나?’ 싶은데 본인 예상보다 영화가 근사하게 나오는 편이라고.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결과물이 의도를 뛰어넘는다”고 했지.

사실 난 성과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말했던 것처럼 이걸 매듭지어서 결과물을 내고 싶었다. 우리만의 취미생활로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영화를 상영하는 것에도 아주 큰 의미를 두려고 하진 않았다. 그냥 우리가 개봉까지의 시간을 오롯이 함께하길 바랐다.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너무 잘 알면서 그 시기를 보냈으니까. GV 하면서 또 만나고. 솔직히 너무 좋더라. 난 더 길게 해봤으면 싶다. 한 6~7년 정도 이렇게 작업하면 좋겠다.

 

성과에 관심이 없었다면 관객을 상상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근데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특정한 수신인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린 관객은 있었다. 함께한 배우들. 이 영화의 한 축은 워크숍이기에 내부 품평을 넘어서 퍼블릭하게 공개되는 것이 취지에 맞다고 봤다. 다른 사람은 우리 작업을 어떻게 느끼는가. 메타적 인지를 경험하는 것이 교육으로써 필요하다는 마음이었다. 그런 경험을 해본 적 없는 배우들에게 경험을 선사하고, 관객과 만나는 데까지 가야 진짜 영화가 완성되지 않을까 했던 거다. 한편, 요즘 들어 관객에 대한 고민을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감각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어떤 톤 앤 매너로 관객을 끌어당길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관객이 선호하는 영화라는 것이 존재하잖나. 지금까지는 그렇게 바라보지 못했다. 관객을 생각하는 것이 영화 만들기에 좋은 영향을 주는지 여전히 잘은 모르겠다. 근데 난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쪽도 아니거든. 쿠엔틴 타란티노는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가 없어서 직접 만든다고 하는데, 난 아니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들은 극장에 충분히 많다. 

 

그러면 어떤 영화를 만드나.

과거엔 일기장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면, 최근 들어서는 영화마다 목표가 있었다. 당시 고민과 아이디어를 갖고 작업했다. 하지만 뚜렷한 맥락을 기대하고 작업했다거나 내 창작을 관통하는 어떤 철학을 실현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징검다리를 건너듯 작업을 이어 갔고, 시간이 지나고 보니 여정을 설명하게 된 거다.

 

보통은 남들이 원하는 걸 만들거나 자기가 잘하는 걸 더 잘하려고 하는데, 감독은 둘 다 아닌 듯하다. 장건재 영화를 찾는 관객은 ‘이번엔 또 어디로 갔을까?’ 기대할 거라 본다. 

나 곤란한 사람이네. 처치 곤란. 둘 중 하나는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웃음)

 

해야 하면 할걸? 남들이 뭘 원하는지, 내가 뭘 잘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잖나. 

모른다. 당연히 모르지. 초기 작업은 시네필의 감수성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영향받은 영화들을 토대로 자기 참조적 작업을 시도했다. 특히 <회오리바람>(2010)과 <잠 못 드는 밤>(2013)이 그랬다. 근데 지금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법을 가장 많이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 그 도움이 가치 있게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심지어 그 도움이 자본이라고 해도. 자본이 어떤 욕망을 갖는지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구성원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 또한 내게는 중요하다. 어떤 영화를 만드는가. 지금은 계획과 약속을 지키며 내 역할을 끝까지 완수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답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 속에서 숨통을 틔워 주는 혹은 다른 방식의 시도를 허용하는 영역이 독립영화 작업 같다. 현재 상황과 커리어에서 독립영화 작업을 흥미진진하게 펼치려면, 정체 구간을 돌파하려면 뭘 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일본의 경우, 한국보다 상황이 열악한데 내 또래인 미야케 쇼, 하마구치 류스케, 후카다 코지 등은 어쨌든 다음 단계로 갔다. 선배들과 다른 방식으로 저마다 길을 내고 있다. 어떻게 하면 고만고만한 이름으로 고만고만한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전진할 수 있을까. 내게 중요한 목표이고 정말 잘해보고 싶다.

<회오리바람>
<잠 못 드는 밤>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위치라고 인식한다는 점에서 의무감도 느껴진다. 어깨가 무겁지는 않나.

올해의 독립영화상을 받는 한국독립영화협회 신년회 자리에서 얘기하려다가 삼켰던 말인데, 이전과 달리 요즘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조금씩 해보자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내 작업을 수행하면서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난 행정가도 아니고 정책 연구자도 아니지만, 창작자 입장에서 방법을 모색해보고 싶다.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는 동료들과 함께 길을 내면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근 흥미롭게 지켜보는 감독이 있다면.

<보물섬>(2018) <다함께 여름!>(2021)등을 연출한 기욤 브락. 단편부터 최신작까지 그의 영화를 열심히 보고 있다. 근래 가장 큰 위로를 받은 영화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다. 관객 반응을 보며 깜짝 놀랐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한 번도 새로운 영화를 찍은 적이 없다. 늘 똑같은 동네에서 같은 배우, 같은 스태프와 작업한다. 근데 갑자기 다들 그의 영화를 이렇게나 좋아한다고? 나만 알던 맛집에 어느 날 손님이 길게 줄 서는 풍경을 보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영화를 보기 전부터 ‘올해의 가장 좋은 영화일 거야’ 생각했는데 역시나 너무너무 좋더라.

 

길티 플레저라고 할 만한 건 없나.

길티 플레저까지는 아닌데 전에 없던 기쁨이라면 드라마. 내 드라마 역사는 <사랑이 뭐길래> <모래시계> <전원일기> 쯤에서 멈췄거든. (웃음) 동료들과 회의하면 “드라마 안 보시죠?”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공부가 필요해서 입문했는데 두꺼운 장편소설 읽는 듯한 재미를 느낀다. 드라마가 도달할 수 있는 깊이와 그만의 미학이 따로 있더라. <웰컴 투 삼달리>, <마이 데몬>, <사랑한다고 말해줘>, <내 남편과 결혼해줘>, <밤에 피는 꽃> 등 최근 방영작을 살펴보는 중이고, <나의 아저씨>와 <나의 해방일지>도 이제야 봤다. 말하자면 취향을 확장했다고 해야 할까. <우리들의 블루스>도 며칠 전에 보기 시작했는데 놀랐다. 드라마가 여기까지 가는구나. 

 

몇몇 드라마는 공통점이 보인다. 감독도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있나. 

공동체보다 사람을 믿는다. 근데 그 믿음은 결국 나에게 달린 것 같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상대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인가. 그에 따라서 관계가 형성될 테니까. 최근 몇 년 사이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는데, 한 발 내딛기가 어려웠다. 나이 들수록 관계를 새로 맺기가 쉽지 않거든. 근데 내딛고 나니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돌이켜보니 내가 지닌 방향성, 내가 인간으로서 가고자 하는 길이 관계에 중요하게 작용했구나 싶더라. 결국 그 길목에서 타인을 만나거든. 어떤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지 않았다면 만나기 어려웠을, 그전에는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던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고 있다. 

장건재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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