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재구성, 풍경의 재배치
BIFF 2018 <벌새> 김보라 감독
글 김보년 사진 소동성 / Festival / 2018-10-15

1994년, 대치동 방앗간 집 막내딸의 10대 시절을 그린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는 많은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이 영화를 보는 어떤 관객은 떠올리기도 부끄러운 유치했던 첫사랑을, 어떤 관객은 애증으로 얽힌 가족에 대한 묻어두었던 감정을, 어떤 관객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로 가득했던 90년대 한국 사회의 풍경을 다시 꺼낼 것이다. 이 모든 요소를 섬세한 손길로 한데 담아낸 감독의 사회와 삶에 대한 시선이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벌새>가 처음으로 관객들에게 공개된 다음 날, 김보라 감독과 만나 짧은 인터뷰를 진행했다.(10월 13일 폐막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벌새>는 KNN관객상을 차지했다)

 

 

<벌새>의 제작 크레딧에 선댄스영화제가 있다.

내가 아직 학생이었던 2011년에 만든 <리코더 시험>이라는 단편영화가 DGA(Directors Guild of America) 학생영화상을 받았다. 그때 내 영화를 좋게 보신 지도 교수님이 선댄스영화제 시나리오랩(Screenwriters Lab)에 <벌새> 프로젝트를 추천해주었는데, 두 번 떨어졌다(웃음). 그후 <벌새>가 IFP(The Independent Filmmaker Project) 후반 작업 지원작 10편 중 하나로 뽑혔고, IFP가 선댄스영화제에 다시 추천을 해주면서 결국 올해 편집과 후반 작업 제작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액수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영화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좀 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꽤 오랫동안 진행한 프로젝트 같다.

<리코더 시험>을 본 사람들이 주인공의 뒷이야기를 많이 궁금해 했다. 단편인데도 그런 반응을 보여줘서 나도 신기했고 그때부터 은희(박지후)를 주인공으로 시놉시스를 쓰기 시작했다. 2013년에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했고 그때부터 계속 작업을 해 작년 9월에 촬영을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 중간 중간 강의도 했고 우울의 늪에 빠져있기도 했는데 결국 완성했다. 지금은 잠시 쉬면서 편집을 조금 수정할까 좀 더 고민하고 있다.

<벌새>
<벌새>

<벌새>는 주인공의 성장과 연애, 가족 간의 갈등, 90년대 한국 사회의 풍경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다. 그 중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건 성수대교 붕괴다. ‘성수대교’라는 사건을 어떻게 영화에 넣기로 했는지 궁금하다.

어렸을 때 그 일이 일어나서, 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시기를 떠올릴 때 성수대교를 빼놓을 수 없다. 그때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고 언니가 실제로 무학여고를 다니고 있었다. 언니의 졸업앨범을 보면 그때 사망한 학생들의 사진에 마치 영정 같은 검은 띠가 그려져 있다. 어린 나이에도 그걸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 분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해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영화 속 은희처럼 나도 새벽에 날라리 오빠의 차를 타고 현장을 찾아 갔다. 완전히 무너진 폐허의 고요한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정말 두렵고 섬뜩하고 스산하고 처연했다. 당시 어른들이 삼풍백화점 피해자들을 보고 무심하게 던졌던 모욕적인 말들도 기억난다. 왜 저런 말을 할까, 당시에 그 말들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삼풍백화점 붕괴로 같은 반 친구 중 한 명은 친척을 잃었다. 그 친구가 책상에 엎드려 울던 모습을 스냅사진처럼 기억하고 있다. 이처럼 나에게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기억이 ‘배경’처럼 남아 있다.

 

성수대교 붕괴는 영화로 다루기에 조심스러운 소재다.

고민을 많이 했다. 이런 재난을 얄팍하게 다룰 수는 없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결론을 냈다. 내가 아는 만큼, 내가 느낀 만큼만 표현하려고 했다. 이렇게 큰 사건일수록 어른들과 피해 당사자만 관련된 사건이라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분들의 아픔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나도 내 삶 안에서 어떤 아픔을 경험했다. 이걸 어떻게 과장하지 않고 너무 억누르지도 않은 채 투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어린아이였던 은희도 자신의 그릇만큼 그 사건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일상 안에서 경험한 딱 그만큼을 정직하게 표현하자는 마음이었다. 처음에는 이 사건을 다루는 것 자체에 죄책감도 느꼈고 스스로 검열도 많이 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그 날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접근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벌새>가 성수대교를 그린 영화란 걸 알고 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등장인물 중 누군가는 사고로 죽을 거란 짐작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긴장과 서스펜스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서스펜스가 생겨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누가 이 영화를 보고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2003)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 영화 역시 누가 죽을지 모르는 긴장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2018년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한국 사회는 위태로운 시기였다. 특히 가부장제가 공고한 사회에서 여성은 안전하지 않았다. 성수대교 붕괴 같은 큰 사고가 아니라도 항상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위태로웠고, 언제라도 사회에서 도태될 것 같은 위기감이 있었다. 자칫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 이런 긴장이 영화 안에 드러나기를 바랐고, 그런 위태로운 이미지를 작게는 어머니의 구멍난 스타킹에서부터 크게는 성수대교까지 집어넣었다. 어린 여자아이의 성장영화라고 하면 사람들이 조금 얕잡아보는 시선이 있다. 물론 ‘귀염귀염’한 면도 있지만 나는 한국 사회에서 여자 중학생만큼 격렬하게 투쟁하는 집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위태로운 느낌이 <벌새>에 맞다고 생각했다.

 

성수대교는 필연적으로 성수동, 압구정동이라는 강북, 강남에 대한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영화에는 대치동, 행당동, 성남 등 구체적인 도시의 지명들이 여럿 등장한다. 감독님만의 방식으로 서울의 도시를 배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당시 90년대 서울을 어떤 풍경으로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명을 써넣으면서 나중에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웃음). 나는 영화 속 은희처럼 실제로 대치동에 살았고 부모님이 방앗간을 했다. 그때 많은 것들이 괴이하게 느껴졌다. <리코더 시험>에도 방앗간이 무대로 나오는데, 떡 자르고 돈 세는 풍경이나 커다란 기계 소리 때문에 생기는 이명 같은 건 나의 어린 시절을 구성하는 너무나 큰 이미지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점들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다. 다른 동네 친구들은 안 그러는데 대치동 친구들만 방앗간을 놀림거리로 삼더라. 어린 나이에 계급과 상대적 격차라는 걸 몸으로 배웠다. 내 기억 속 등교길 풍경에는 타워팰리스와 비닐하우스가 같이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닐하우스 촌이 점차 사라지더니 타워팰리스만이 들어섰다. 정말 끔찍했다. 개포동 육교 아래에 있던 넝마공동체는 피 같이 붉은 글씨로 쓴 현수막을 걸면서 끝까지 버텼는데, 결국 정부에 의해 겨울에 강제 철거됐다. 그 소식을 듣고 너무 화가 났고 눈물이 났다. 이 사람들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나중에는 타워팰리스에 사는 아이와 ‘일반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나누어졌고, 심지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도 몇 동에 사는 지를 두고 편을 나눴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데도 ‘저 오빠는 비닐하우스에 산다’고 수군대기도 했다. 정말 괴이한 동네였고 괴이한 풍경이었다. 이런 개인적 경험을 영화에 녹이다보니 서울의 서로 다른 동네들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들어간 것 같다. 직업이나 사는 곳에 대한 수치심이 어린 나이에도 어렴풋이 부당하다고 느꼈고 나중에 나이가 들면서 그런 요소들이 삶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사회운동이나 페미니즘 활동에 참여하며 어린 시절의 내 기억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벌새>가 만들어졌다.

<리코더 시험>
<벌새>

<벌새>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가족이다. 이 영화의 가족은 여러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들은 좋은 가족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쁜 가족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어떤 갈등을 겪더라도 항상 한 식탁에 모여 앉아 밥을 먹는다. 따뜻해 보이지만 동시에 소름이 돋는 풍경이기도 하다.

가족은 나에게 굉장히 깊은 감정을 선사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지금은 가족들과 사이가 좋은 편인데, 가족은 내 삶의 값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한 가지 성취한 게 있다면 가족이 아닐까? 예전에는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말한 것처럼 내다 버리고 싶기도 했고(웃음), 혈연이 아니라면 과연 이들과 친해질 수 있을까 묻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혈연이 아니라 그냥 만나도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살아갈 때 나에게 상처를 제일 많이 주는 건 나와 제일 깊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알게 해주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가족이 바로 그런 존재다. 나는 가족을 통해서 내가 누군지 알게 됐고 아픔, 기쁨, 환희, 삶의 신비함까지 모두 느꼈다. 영화를 만들 때도 가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좋은 말씀을 해주셨고 엄마는 촬영장에 오셔서 떡도 주고 그랬다. 언니와 오빠도 돈으로 서포트를 해주었다(웃음). 이제 너무 깊은 관계가 되어버려서 미워할 수도 없다. 사실 가족들이 부산에 영화를 보러 오기로 했는데, 내가 다음에 서울에서 보라고 했다가 또 삐지고 싸우고 그랬다(웃음). 물론 이건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이지만 영화를 만들 때는 가족에 대한 다양한 기억과 경험을 정직하게 녹여내려 했다. 그러다 보니 <벌새>에는 어린 시절의 내 관점과 가족과 화해한 후의 내 관점이 다 섞여 있는 것 같다. 우울과 밝음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이다. 단편적인 부분만 두고 좋음-싫음을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시각적인 부분을 보면 기본적으로 사실적인 묘사를 하고 있고 어두운 정서도 많이 깔려 있는데, 엽서로 만들어도 될 것 같은 ‘예쁜’ 장면들이 의외로 많이 등장한다.

강국현 촬영감독님이 너무 잘해주셨다. 감독님이 촬영한 <줄탁동시>(김경묵, 2011)를 너무 좋게 봤었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이인데도 요청을 드렸다. <줄탁동시>는 서울을 서울처럼 찍지 않은 독특한 영화였다. 마치 외국인이 서울을 바라보는 것처럼 낯설게 표현한 점이 좋았고 그런 느낌을 <벌새>에도 집어넣고 싶었다. 그리고 너무 좋아하는 영화인 <하나 그리고 둘>(에드워드 양, 2000)을 레퍼런스로 삼아 촬영 감독님과 많이 고민하며 만들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은마아파트를 섭외하는 등 로케이션도 잘 됐고 날씨까지 촬영을 도와주었다. 은희와 영지(김새벽)가 포옹을 할 때나 은희와 지숙이 옥상에서 얘기를 할 때는 때마침 바람이 뒤에서 불어와 머리카락을 움직여주었다. 정말 ‘매직’이라고 생각했다.

 

<리코더 시험>의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며 <벌새>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벌새>의 다음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궁금해진다. 지금 2018년의 은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 질문은 차기작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은희는 아마 잘 살고 있을 것 같다. 은희의 30대 이야기도 만들어보고 싶다. 특히 30대 여자 얘기는 정말 해보고 싶다. 의외로 한국영화에 30대 여성 이야기가 별로 없다. 있다고 해도 너무 ‘농익은’ 느낌으로 나온다(웃음). 나도 30대인데 공감하기가 어렵더라. 진짜 30대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은희를 주인공으로 할 수 있을지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지금 기획하고 있는 건 좀 생뚱맞지만, SF 영화다. 우주를 탐험하는 이야기이고 시각적 스펙터클보다는 정서적인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곧 시나리오를 쓸 예정이고 이렇게 소문을 많이 내서 스스로에게 책임을 안길 생각이다.

ⓒ소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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