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트라다무스의 불길한 예언으로 거리가 술렁이고, 9시 뉴스 앵커는 밀레니엄 버그의 위험을 경고한다. 1999년 겨울, 영미(이유영)는 남들처럼 지구 종말을 걱정하며 라면과 통조림을 쌓아 둘 겨를이 없다. 낮엔 공장에서 경리로 근무하고 밤엔 졸음을 쫓아가며 재봉틀을 돌린다. 형편이 빠듯해 몸을 축내는 모양새지만 영미가 요즘 퀭한 눈으로 억척을 떨어대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 남자, 도영(노재원)을 구해야 해서다. 몇 달 전 공장에 배송 기사로 입사한 도영은 다정하다. 그에겐 영미의 뻐드렁니와 헝클어진 머리가 거슬리지 않는 듯하다. 영미가 지나가면 “세기말 떴다!”라며 낄낄대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도영은 항상 “과장님”하고 부르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다. 사랑에 빠진 영미는 급기야 도영이 빼돌린 미수금을 대신 갚으며 공금횡령의 공범이 되기를 자처한다. 어설픈 짝사랑의 대가는 가혹하다. 영미는 감옥에 끌려가고 도영도 구하지 못한다. 출소하고 보니 세상은 언제 멸망을 운운했냐는 듯 변함 없는 모습이다. 김빠지는 오후에 교도소 앞으로 새빨간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선다. 조수석에 탄 유진(임선우)은 대뜸 영미를 불러 세우더니 짧고 굵게 자신을 소개한다. “나? 구도영이 마누라.”
임선애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세기말의 사랑>은 한 남자를 사랑하는 두 여자의 기막힌 동행을 다룬다. 데뷔작 <69세>에서 감독은 노인 세대가 겪는 소외와 차별을 관찰하며, 성폭행을 당한 60대 여성이 사회를 향해 목소리 내는 과정에 동참했다. 사회 고발 드라마의 외피를 둘렀으나 사건 해결보다는 인물 내면에서 일렁이는 변화를 포착하는 데 집중한 작품으로, 당시 <69세>는 약자를 타자화하지 않으며 목표와 욕망이 뚜렷한 삶의 주체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기말의 사랑>에서 감독의 관심사는 각자 취약성을 지닌 채 세상과 불화하는 약자들의 관계 맺기로 확장한다. 영화는 다채로운 색감이 돋보이는 의상과 미술, 90년대 팝을 연상시키는 음악 등을 앞세워 시대극 설정을 소화하는데, 무엇보다 ‘못생긴 비장애인 여성’과 ‘예쁜 장애인 여성’이라는 만화적 대비를 통해 전작의 진중한 분위기를 뻔뻔하게 벗어난다. 외모와 장애에 관해 말하기를 꺼리는 기색은 전혀 없다. 인물을 함부로 묘사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물의 특성과 주변의 시선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는 것이다. 호방한 필치로 그려낸 인물들은 저만의 개성을 선보이며 영화 속에 단단히 뿌리 내린다.
새천년의 초입에서 만난 유진과 영미는 서로에게 새 세계를 열어젖히는 존재다. 지구가 멸망하기를 은근히 기대했던 자신 앞에 나타난 예상치 못한 변수. 도영이 옥살이하는 사이, 영미와 유진은 동거를 결정한다. “세기말” 영미는 잠적한 큰오빠 때문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됐고, “지랄 1급” 유진은 남편을 대신해 빚을 갚겠노라 장담한 참이다. 겉보기엔 돈이 매개인 듯하지만, 알고 보면 둘에겐 시련이라는 공통 테마가 있다. 영미는 부지런히 제 길을 찾아 나서는 와중에도 주눅 든 모습을 지우지 못하고, 유진은 누구 앞에서든 거침없이 구는데 화장실조차 혼자 갈 수 없는 상태다. 하지만 영화는 둘 중에 누가 더 불행한지 겨루는 게임에 빠지지 않는다. 보살펴 줄 식구 하나 없이 혈혈단신이 된 영미도, 핸드폰 통화 버튼 한 번 누르면 달려올 ‘호구’가 여럿인 유진도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두 여자는 상대의 방어 기술을 알아차릴 만큼 영악하다. 유진은 영미의 눈치 보는 습관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짐작하고, 영미는 유진의 괴팍한 성격과 고급스러운 옷차림이 갑옷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잘나고 강한 사람이 수두룩한 세상에서 자신만큼 약하고 못난 타인을 마주했을 때, 약자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세기말의 사랑>은 이상한 멜로 영화다. 순애보에는 얼마 못 가서 불륜 딱지가 붙고, 삼각관계의 중심인 대상은 정작 현실에 부재한다. 영화는 사랑을 놓고 다퉈야 할 영미와 유진을 짓궂은 방식으로 엮는다. 둘은 같은 남자를 사랑한다. 영미가 도영을 구하고 싶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진도 도영을 구하려 했다. 그가 마음속에 처음 들어왔던 순간, 모기 물려 부풀어 오른 제 손등에 십자가 자국을 내주던 손길을 떠올리다가 유진은 속사정을 밝힌다. 자신은 보호자가, 도영은 돈이 필요해서 결혼을 위장했을 뿐이라고. “난 왜 도영이를 구하고 싶었을까. 나도 날 못 구하는 주제에.” 유진의 말투는 담담하지만, 영미는 그 속에 담긴 애정과 체념에 귀를 기울인다. 한편, 영미는 유진을 씻기다가 어릴 적에 생긴 화상 흉터를 보여준다. 유진 눈에 비친 상처는 맨드라미를 닮았다. 유진은 맨드라미의 꽃말이 치정이라며 장난스럽게 웃는데, 나중에 영미가 알게 된 꽃말이 하나 더 있다. 시들지 않는 사랑. 그렇게 농담과 진담을 주고받으면서, 가장 약한 곳을 내보이면서 사랑의 경쟁자였던 둘은 동반자로 거듭난다.
그러니까 한 남자를 사랑하지만 구원하지 못했던 두 여자가 자신을 구원하는 이야기. 구질구질한 치정과 시들지 않는 사랑을 오가며 영미와 유진은 있는 힘껏 다음 장을 펼친다. 둘에게 세상이 유독 고약하다 보니 영락없이 기구한 인생을 살 줄 알았는데, 약점투성이의 두 여자는 합심해서 핸들을 기어코 좋은 길로 돌려놓고야 만다. 그래서 이 사랑은 세기말에도 끝장나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는다.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두 인물이 자아내는 시너지다.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 보이던 영미와 유진은 연민과 동경, 멸시와 질투를 반복하며 점차 거리를 좁혀 간다. 용기 내어 우정에 가 닿는 과정에서 둘 사이엔 활기와 감동이 고루 깃든다. 이유영은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인물을 연기하면서도 특유의 세밀한 표현으로 서정적인 순간을 빚어내고, 임선우는 인물의 속내를 짐작할 만한 여지를 영리하게 열어 놓는 동시에 강단 있는 연기로 작품에 힘을 싣는다. 오프닝과 엔딩, 중간중간 삽입된 플래시백 장면에 등장하는 노재원은 호흡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매력을 발휘하며 한 인물을 충실히 뒷받침한다.
세기말의 사랑 Ms. Apocalypse 감독 임선애 출연 이유영, 임선우, 노재원 제공·배급 엔케이컨텐츠 공동배급 디스테이션 제작 기린제작사 공동제작 위드에이스튜디오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116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4년 1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