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주고 싶은
<세기말의 사랑> 임선우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4-01-20

유진(임선우)의 별명은 ‘지랄 1급’이다. 따뜻한 도움을 건네는 이에게 싸늘한 훈계를 일삼으니 평판이 좋을 리 없다. 유진에게도 이유는 있다. 차별도 배신도 겪을 만큼 겪은바, 유진은 사람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가만히 있다간 물려 죽기 십상이라 발톱 세운 맹수처럼 일단 으르렁대고 본다. 제 남편 도영(노재원)에게 반해서 옥살이까지 치른 영미(이유영)에게도 마찬가지다. 유진은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영미를 훑어본 뒤, 서슴없이 불륜녀로 몰아세우곤 촌스럽다고 평한다. 한데 영미의 태도는 유진의 예상을 빗나간다. 움츠러든 어깨를 펴지 못하면서도 꼬박꼬박 “유진 씨” 하며 얼굴을 비추는데, 언젠가부터 눈동자 속엔 동정이 아닌 동경이 일렁인다. 결국 속셈을 당최 알 수 없는 영미 앞에서 유진은 조금씩 무장 해제된다. 두 여자가 치러낸 ‘세기말의 사랑’은 임선우에게 “진흙탕에서 구르는 심정으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진기한 시간으로 남았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수시로 닥쳤지만, 유진이 되는 일은 꽤 근사했다. 몸 안에 뜨거운 피가 넘실대는 유진을 만나며 임선우는 무엇보다 사랑을 곱씹었다. 덕분에 아픈 부위를 헤집어 상처를 덧내는 대신, 뾰족한 마음을 어루만지며 고백할 수 있게 됐다. 난생처음 사랑을 털어놓는 유진의 표정은 무뚝뚝하면서도 애틋하다. 약한 모습을 감추려 애쓰느라 차마 전하지 못한 말은 없는지 궁금해 임선우에게 대화를 청했다. 유진처럼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나지막이 들려준 사랑의 속삭임을 옮긴다. 
 

 

촬영을 재작년에 했으니 기억이 아주 선명하지는 않겠다.

그렇기는 하지. 최선을 다해 기억을 되짚지만 실은 인터뷰나 GV에서 늘 어렴풋한 기분으로 얘기한다. (웃음) 일기를 쓰지 않으니 따로 찾아볼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노트를 꾸준히 쓴다고 들었는데.

그때그때 고민거리를 적는 용도다. 인상적인 문구라든지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을 써 놓는다. 안 그러면 금세 까먹더라. 일기는 거의 안 쓴다. 어쩌다 한 번?

 

며칠 전 생일이었다. 그날도 별다른 기록이나 기념 없이 넘어갔나.

가족들과 식사하고 조용히 보냈다. 이제 생일 같은 건 별로 의미 없다. 다 똑같은 하루지 뭐. 생일이라며 지인들 초대해서 성대하게 파티 여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난 새해맞이에도 무감한 편이거든. 12월 20일쯤 되면 그냥 새해가 왔거니 한다. 물론 의미야 있지만 날짜는 그저 사람이 그어 놓은 눈금 아닌가. 1월 1일을 새날이라고 부르면 마치 그 이전까지는 헌 날로 여기는 것 같아서 싫더라.

 

신년 계획이나 목표를 정하는 것도 싫어하고? 

계획을 짜던 때도 있다. 근데 이것저것 거창하게 써놓기만 하고 다시 찾아보진 않더라. 이럴 거면 뭐 하러 계획하나 싶어서 관뒀다. 다만, 올해 무엇에 좀 더 집중해야 할지 생각한다. 2024년엔 학습이다.

<세기말의 사랑>
<세기말의 사랑>

인풋이 필요하다는 뜻인가.

지난 몇 해를 되돌아보니 인풋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더라. 인풋이 줄어들면서 삶의 질도 떨어진 느낌이고. 작년 12월 20일부터 학습하기 좋은 환경을 고민하며 방 구조를 바꿨다. 책상 배치도 새로 하고 나름대로 새출발하는 기분을 냈다. 누가 옆에서 푸시해주는 직업이 아니잖나. 어렵지만 일과 생활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작품 들어가면 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쁘고 촬영에만 집중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기간에는 사실 막막하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시키는 사람도 없고 꼭 해야 하는 일도 없다. 결국 그 시간을 스스로 채워야 하는데, 학습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배우가 너무 무식하면 안 되니 책도 좀 읽어야 하고, 몸을 쓰는 직업이다 보니 운동도 계속해야 한다. 

 

한동안 요가를 했다고. 그 외에 새로 시작한 것이 있나.

열심히 다니던 요가원이 아쉽게도 코로나19 시기에 폐업했다. 고민하다가 체육관에 갔는데 마스크를 쓴 채 운동하려니 너무 답답했다. 그 핑계로 운동을 미루다 보니 몸이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더라. 뭔가를 하긴 해야겠다 싶어서 집 근처 수영장에 갔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수영장 소독물에서는 살 수 없다고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마스크 벗고 수영한다는 말에 신나서 등록했지. 근데 6개월 만에 관뒀다. 여름에 홍수가 나서 수영장이 물에 잠겼고 결국 폐관했거든. 이렇게 돌고 돌다가 최근에 크라브마가라는 특공무술을 시작했다. 코치님이 잘할 수 있다고 격려해 줘서 즐겁게 배우고 있다.

 

새해를 기운차게 시작한 느낌이다. <세기말의 사랑>은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시기를 담는데 관련한 기억이 남아 있나. 오래전이지만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면. 

TV에서 카운트다운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새천년이 밝는다고 했지. 당시 난 거실에서 미술 숙제를 했고 옆에는 아빠가 앉아 있었다. 수채화를 그려야 해서 팔레트에 물감을 여러 개 짜놓고 무슨 색이 어울릴지 고민했다. 그때 아빠가 물감을 섞더니 완전히 똥색을 만들어 놓는 거다. 도화지에 그걸 칠한 순간 TV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진청색에 어두운 갈색이 섞인, 그 이상한 색깔. (웃음) 그밖에 별다른 기억은 없다. 새천년이라고 해서 어떤 감정을 느끼진 않았던 것 같다.

 

예전에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이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더라. “평소 일과대로 시나리오 보고, 가족들과 저녁 먹고, 요가하고, 깨끗하게 씻고, 잠들겠다.” 덤덤한 성격이 엿보이는 답변인데 혹시 영화를 찍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을까.

내가 그런 말을 했구나.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근데 뭐 다를 것이 있겠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 보내고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러겠지. 난 라면 먹을 것 같다. 대신에 시나리오 읽기는 빼야겠다. 지구가 멸망하는데 시나리오라니! (웃음)

 

<세기말의 사랑> 시나리오는 어떻게 읽었나.

일단 인물에게 마음이 갔다. 단선적이지 않다고 해야 하나. 생생함을 지닌 인물로 유진을 구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려움도 예상됐지만 너무 쉽기만 한 것도 재미없으니까. 도전 의식과 욕구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시나리오를 만나면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임선우 ⓒ이영진

이번 작품은 마음도 마음인데 몸이 힘들었을 것 같더라. 신체를 제어하며 전신 마비 상태를 유지하는 동시에 휠체어를 사용해야 했으니.  

어려움을 예상하지 못한 채 촬영을 시작했는데 중반쯤 다다르자 목이 안 돌아가더라. 유진은 근육병으로 인해 목 아래를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다. 연기하면서 신체의 움직임을 막으려고 나도 모르게 억지로 힘을 주다 보니 몸에 문제가 생겼다. 결국 촬영한 기간만큼 재활하는 데 시간을 썼다. 

 

외모 콘셉트도 명확했다. 스카프로 묶은 두 다리, 커다란 선글라스와 고운 머릿결,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 등에서 품위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외모는 성격과 동시에 상황을 반영한다고 봤다. 영화에서 유진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곧 유진과 영미가 처음 대면하는 장면이다. 남편의 내연녀라고 해야 할까, 말하자면 라이벌인 여자를 찾아간 상황이지. 유진은 본래 흐트러짐 없는 성격이긴 하지만 특히 그 순간엔 영미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을 거다. 그러니까 풀메이크업에 고급 정장을 차려입고 선글라스까지 장착하고 나타난다. 내겐 한껏 꾸민 차림만큼이나 집 안과 밖의 격차가 중요하게 다가왔다. 

 

격차라면?

집에선 유진도 편하게 입고 밥을 먹다가 좀 흘리거나 묻혀도 그러려니 한다. 애초에 누군가가 떠먹여 주면 그걸 먹는 사람이니까. 누구나 집에선 편한 모습으로 지내지만, 어떻게 보면 유진은 그때 남들보다 더 초라하게 비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상으로 관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유진과 영미가 같은 카디건을 몇 차례 번갈아 입는데 둘이 어느새 옷을 공유할 만큼 가까워졌구나 싶더라. 

임선애 감독님은 확실히 미술 감각이 탁월하다. 색과 디자인에 많이 신경 쓴다는 느낌을 받았다. 의상뿐만 아니라 카메라 앵글도 마찬가지다. 사실 정답이 없잖나. 미세한 각도 차이로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때마다 감독님은 가장 좋은 것을 찾아내려고 했다. 시각적 요소에 관해 지향점이 명확한 분이다.

 

임선애 감독의 전작 <69세>를 함께했던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이 이번에도 촬영을 맡았다. 현장에서 촬영감독과 호흡은 어땠나.

촬영감독님은 젠틀맨이다. 내적으로는 치열하게 고민할 텐데 그걸 겉으로 드러내는 분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이 배우를 최대한 매력적으로 담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늘 염두에 두고 찍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유진은 어떤 장면에서 굉장히 예뻐 보여야 했는데 촬영감독님과 감독님이 다각도로 고민하고 노력해 줬다. 배우로서 감사했고 무엇보다 새로운 시도에 열려 있는 현장이라서 촬영 내내 즐거웠다. 전형적으로만 찍는 건 재미 없지 않나. 초반부 흑백 장면을 포함해 영화 곳곳에 독특한 샷들이 나온다. 요즘 작품에서 보기 드문 샷인데 잘 어울리더라.

임선우 ⓒ이영진

과거 인터뷰를 살펴보니 감독과의 만남에 큰 의미를 두는 것 같더라. 임선애와 임선우, 이름도 비슷한 두 사람의 작업 과정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감독님도 그 얘기를 했다. “우리 이름 초성이 똑같아요. ㅇㅅㅇ!” (웃음) 난 영화를 감독의 예술로 보는 편이다. 내가 시나리오를 읽고 상상했던 것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감독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이 큰 지분을 차지하거든. 새로운 감독과 영화를 찍을 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느낌이 든다. 감독마다 연출 방식도, 연기에 요구하는 바도 다르다. 정해진 원칙이 없다는 뜻인데, 난 새로운 과제를 받으면 오히려 더 희열을 느낀다. 매번 뭔가를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 좋다. 결과물을 보며 ‘감독의 이런 면이 반영됐구나’ 알아차리는 순간도 재미있고. <세기말의 사랑>의 경우, 사전에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이유영 배우가 먼저 캐스팅된 다음, 난 촬영을 한 달 정도 남겨 놓고 합류했거든.

 

준비할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혼자 고민하면서 재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모르는 건 빨리 물어봐야 했다. 감독님과 시나리오에 관해 긴 시간 대화했고 통화도 여러 번 했다. 덕분에 유진이라는 인물을 함께 찾아갈 수 있었다. 

 

<선우와 익준>(양익준, 2021) <우리는 서로에게>(김다솜, 2018) 등 작품에서 감독 역을 맡은 적도 더러 있다. 연기하며 감독을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을 듯한데, 임선애 감독을 지켜보며 눈에 들어온 부분이 있나.

감독님은 온·오프가 확실한 타입이다. 현장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고 나면 딱 일상으로 돌아간다. 감독님이 퇴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재밌었다. (웃음) 돌이켜보면 다들 감독님에게 좋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본인이 원하는 바를 끝까지 밀고 가는 태도가 인상적으로 다가왔거든. 고집을 부렸다는 뜻이 아니라, 방향이 확고했다.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절실하게 찾는 것이 뭘까. 나도 같이 찾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더라. 여느 현장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다들 제 것을 쏟아부으며 촬영에 임했다. 거기엔 감독님의 절실함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유진은 실제 임선애 감독의 이모를 모티브 삼은 인물이다. 촬영 전에 직접 만나기도 했다고.

내가 보고 싶다고 했다. 유튜브나 책을 통해 배경지식을 얻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 삶을 사는 분을 만나는 게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감독님과 이모님이 동의해 주셔서 만남이 성사됐다. 이모님을 뵙기 전에는 혹시나 내가 실례한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했는데, 뵙고 나서 깜짝 놀랐다. 굉장히 밝고 생명력 넘치는 분이다. 이모님과 만나면서 비로소 갈피를 잡았다. 유진을 연기하며 무엇을 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장애라는 부분이 크게 다가왔는데 이모님과 대화하다 보니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내가 진짜 표현해야 할 것이 장애인가? 아니면 장애를 가졌지만 나랑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됐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더라. 장애라는 요소를 간과해서도 안 되지만, 남은 기간에 마음을 더 쏟아서 준비할 것은 따로 있구나 싶었다. 내 편견을 마주하는 경험이기도 했다. 누구도 타인의 삶을 멋대로 판단할 수 없고, 이모님의 삶은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다. 장애인은 마냥 어둡고 우울하게 살 거라고 여기는 건 편견에 불과하다. 누군가는 ‘살 수 있는 데까지 살겠다’라는 자세로 살아간다. 그건 장애 여부와 상관없는, 삶을 대하는 태도다.

 

이유영 배우와의 작업은 어땠나. 워낙 섬세하고 세밀한 연기를 하는 배우인데 호흡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면.

유영이랑 잘 맞는다고 느꼈다. 처음엔 서로 거리감이 있었다. 유영이는 내 이미지를 좀 차갑게 봤을 거고, 유영이도 특유의 이미지가 있으니까. 근데 어떻게 친해졌는지 모를 정도로 금세 가까워졌다. 촬영 전에, 전체 리딩하고 밥 먹을 무렵부터 이미 친해진 상태였다. 이번에 연기하면서 낯선 경험을 했다. 사실상 내가 유영이 눈을 보고 연기한 적이 많지 않다. 유영이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가 없으니까. 상대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공중에 대사를 하기는 처음이었고, 내가 가장 예상치 못한 난관이기도 했다. 혼잣말이 아닌 이상 말엔 도착지가 있기 마련인데, 난 신체 여건으로 인해 말이 도착해야 할 지점으로 시선을 줄 수 없는 거다. 나는 앞을 보지만 유영이는 뒤에서 내 휠체어를 밀고 있다든지 아니면 옆에서 나를 보는 식이었다. 대부분 장면에서 눈높이를 맞추기 어렵다 보니 상대의 목소리에 더 집중하게 됐다. 

<세기말의 사랑>
<세기말의 사랑>

그러고 보니 둘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도 높낮이가 다르다. 유진은 차에 앉아 있고 영미는 밖에 서 있다. 

영미가 유진 집에 처음으로 찾아오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유진은 거실 침대에 반쯤 누운 상태고 영미는 그 뒤쪽 현관에서 등장하기에 서로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채 대화한다. 우리가 긴 대사를 주고받은, 호흡을 제대로 맞춰본 거의 첫 번째 장면으로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유영이나 나나 아낌없이 주면서 연기했던 것 같다. 자기 분량을 찍을 때만 열심히 하는 배우들도 있잖나. 우리 둘 다 그러지 않았다. 유영이도 내 앞에서 자신을 아끼지 않았고, 나도 유영에게 가능한 한 좋은 걸 주려고 했다. 자기 분량 찍을 때보다 상대 찍을 때 연기가 더 좋아서 매번 웃겼다니까. “왜 카메라에 안 담길 때 연기가 더 좋지?” (웃음) 아마 많은 배우가 그럴 거다. 상대가 나를 비출 때보다 내가 상대를 비추려고 할 때, 더 주려고 할수록 느낌이 좋다. 

 

시선을 교환하기 어려운 장면에서 목소리에 집중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 마비라는 신체 상황이 생각보다 연기 자체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유진을 연기하려면 잘 들어야 했고, 듣기만큼 말하기가 중요했다. 평소보다 명확한 말하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연 결정한 시점부터 보이스 훈련을 시작해서 촬영 기간에도 틈틈이 지속했다. 유진에게 음성은 의사를 전달하는 주된 도구다. 상대에게 갈 수 없으니 상대를 자기 쪽으로 불러야 한다. 심지어 여러 사람이 오가는 곳에서 상대와 눈도 마주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문 앞에 서 있는 까만색 재킷 입은 아가씨, 나한테 좀 와줄래요?”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해야 하고. 한편, 앉은 자세로 몸을 고정한 채 말하면 소리에 제약이 생기는 면이 있다 보니 보이스 훈련에 더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다. 촬영하면서 새삼 몸을 돌아보게 됐다. 배우가 인물을 만나는 과정에서 신체가 중요하긴 하구나 싶더라. 인물과 신체적 조건을 동일하게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춰 배역에 접근하는 배우도 있고. 신체라는 건 확실히 구체적이라 그것이 발휘하는 힘과 무게감을 상상만으로 전부 파악하긴 어려운 것 같다. 유진의 경우, 신체적으로 내가 완전히 제압당하고 가야 하는 부분이 컸다. 솔직히 많이 힘들었다.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롭더라. 그래서 인물을 더 깊이 느꼈을 수도 있다. 당사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겪어서.

 

인물을 깊이 느꼈다는 건 무슨 뜻인가.

나의 많은 것을 줬다는 느낌이다. 연기하다 보면 인물에 내가 자연스레 반영되는데, 유진은 그중에서도 나의 내면과 좀 더 깊이 만난 인물 같다. 다른 배우가 유진을 연기했어도 비슷한 감상을 이야기할 거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손발이 잘린 상태로 연기하는 듯했다. 배우는 움직임을 통해 짧은 시간에 다양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 제스처로 내 의도를 대신 전달하기도 하고, 말의 뉘앙스를 바꾸기도 한다. 연기하면서 꽤 많은 부분을 신체에 의지하는데, 이번엔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다. 

 

그러면 유진이라는 인물과 어떻게 친해졌나. 

잘 모르겠다. 인물과 친해진다는 것이 내겐 낯선 개념이다. 언젠가부터 ‘인물을 이해하려고 드는 것이 맞나?’라는 의문이 든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인물이 놓여 있는 상황, 그 속에서 나온 말과 행동을 본다. 인물의 마음과 생각, 감정을 유추할 수야 있지만 어느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거나 유진의 방점은 ‘위악’에 찍혀 있다고 봤다. 진짜 못되고 센 사람이 아니라 그런 척하는 사람. 제 딴에는 신경질을 부린다고 하는데 사실 옆에서 보면 ‘쟤가 또 위악을 떠는구나’ 티가 나는 거다. 욕을 잘해서 한다기보다는 살기 위해 욕하는 사람처럼 보이길 바랐다. 동시에 유진은 주변 관계를 명확한 기준으로 대한다고 봤다. 당장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도움을 받지만, 그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는 존재다. 위험을 제어하기 어려운 약자이기에 관계를 예민하게 살필 수밖에 없다. 오래되고 안전한 관계, 예를 들면 ‘호구 1번’인 기훈(김기리) 앞에서 유진은 무척 편하고 자연스러운 말투를 쓴다. 하지만 자원봉사자라든지 어차피 며칠 보고 말 사람에게는 자신의 약함을 노출하지 않는다. 굳이 그들에게 진심을 보여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 차이를 염두에 두되,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유진의 민낯을 드러내려 했다.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이 적을 뿐이지, 누구나 그렇듯 유진도 맨얼굴을 지녔거든. 유진은 영미에게 서서히 맨얼굴을 보여준다. 도영과 화상 접견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유진의 가장 순수한 마음이 표현된 것 같고.

 

맨얼굴이 드러나는 장면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먼저 영미와 유진이 욕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장면. 두 인물이 서로 상처를 어루만지며 말없이 소통하는 순간인데, 촬영장 분위기가 어땠는지 궁금하다. 

본래 그 장면에서 유진이 병에 관해 좀 더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고, 현장에서는 그걸 찍었다. 나중에 보니 편집됐더라. 내가 느끼기엔 지금처럼 대화를 생략한 버전이 훨씬 나은 것 같다. 직전 장면에서 유진은 조카를 찾으러 갔다가 길에서 소변을 본다. 자존심 강한 사람에게 견디기 힘든 상황이지. 그러고 나서 욕실 신이 이어지는데 그때를 기점으로 영미와 유진의 관계가 전환점을 도는 듯했다. 이제 볼꼴 못 볼꼴 다 본 사이가 됐으니 유진이 영미를 한결 편하게 느끼지 않을까 싶더라. 개구쟁이 같은 모습도 툭 나오고. 사실 현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알 수 없다. 낯선 장소인 데다 날마다 컨디션도 다르니까. 근데 그날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집중했던 기억이 난다. 

임선우 ⓒ이영진

다른 하나는 앞서 말한 화상 접견 장면이다. 지금껏 그 장면을 바라보며 영화가 감정을 쌓아왔구나 싶더라. 유진과 도영뿐만 아니라,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영미 또한 그 장면에서 한 명의 인물로 완성되는 듯했다.

시나리오 보며 나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유진은 이 장면을 향해 가는 것 아닐까. 위악과 나약함, 자존심 등 유진의 모든 특성이 하나로 연결되는 장면처럼 보였다. 너무나 중요한 감정 신이기에 부담을 많이 느꼈는데, 다행히 감독님이 그 장면을 촬영 중후반에 배치해 줬다. 난 시간에 쫓기는 감각을 되새기며 연기했다. 예컨대 남자 친구와 전화로 헤어지는 상황을 가정하자. 난 헤어지기 싫은데 남자 친구는 이별을 고하는 거다. 그러면 통화 시간이 5분이든 10분이든 짧게만 느껴지지 않겠나.

 

떠나고 싶은 사람에게는 길고, 붙잡고 싶은 사람에게는 찰나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말을 잘하고는 싶고, 별말도 안 한 듯한데 시간은 금세 지나가 버린다. 그러니까 화상 접견이 허용된 15분이 유진에게는 말 그대로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그 생각을 품고 촬영에 들어갔다. 작품을 시작할 때부터 줄곧 고민했던 장면인데 막상 현장에서는 한 테이크 만에 촬영을 끝냈다. 컴퓨터 속 영상을 보는 것처럼 연기했지만, 실제로는 프레임 밖에서 재원 배우가 대사를 읽어줬다. 덕분에 수월하게 몰입했던 것 같다.

 

“네가 말한 이상한 여자를 만났었어. 처음으로 네가 안심이 되더라.” 그 대사는 유진이 입 밖에 낸 최초의 사랑 고백처럼 들렸다. 사랑에 관해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인데, 연기하며 어떤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관계에서 남는 건 사랑뿐이구나 싶더라. 사랑의 형태도, 방식도 참 각양각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결국 제 것을 상대에게 주는, 어떻게든 주고 싶어 하는 마음 같다. 내가 이렇게 말했더니 어떤 분은 묻더라. “요즘에도 그런 사랑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세요?” 난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사회가 각박해도, 사람들이 점점 계산적으로 변한다고 해도 ‘주는 사랑’은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누가 어떤 사랑을 하고 있을지 겉으로 봐선 모르는 일 아닌가. <세기말의 사랑>은 사랑을 말로 정의하는 영화가 아니라, 자연스레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영화다. 보고 나면 누구나 비슷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관객과 만나는 일이 기다려지겠다. 

그러게. 결국 많은 사람과 만나려고 다들 합심해서 영화를 만든다. 촬영 마쳤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칭찬받고 욕도 먹고 그래야 작품에 의미가 생기는 것 같다. 

 

힘이 됐던 칭찬 있나.

내가 칭찬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칭찬보다는 욕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편이다. (웃음)

 

칭찬을 못 믿는 쪽인가?

그건 아닌데 칭찬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물론 감사한 일이지만, 욕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인다고 해야 하나. 가급적 자신을 냉정하게 보려 하고, 욕을 들어도 그다지 억울하지는 않다. 어릴 적엔 나를 미워하며 상처받기도 했는데, 그 과정을 지나자 좀 치유가 됐다. 지금은 어떤 면이 좋았고 또 어떤 면이 아쉬웠는지 차분히 정리하는 편이다.

 

<세기말의 사랑>에서 보여준 연기를 스스로 평가한다면. 

잘했다고 해주고 싶다. 당시 내 수준으로 할 수 있는 연기를 했고, 배우로서 정말 감사한 작품을 만났다는 생각도 든다. 앞뒤 안 재고 뛰어들 수 있는, 그렇게 연기하고 싶은 세계와 인물을 만난다는 건 모든 배우의 소망이거든. 좋은 타이밍에 딱 내게 와줘서 고마운 작품이다. 아쉬운 부분은 앞으로 또 채워 나가야지.

<세기말의 사랑>
<세기말의 사랑>

남들이 칭찬하든, 스스로 북돋든 아쉬움은 남을 수밖에 없나 보다. 

예전에 어떤 배우가 그러더라. 죽어야 끝난다고. 배우뿐만 아니라 모든 직업인이 그렇지 않겠나. 다들 마음 한편에 아쉬움을 남겨 놓은 채 다음 일을 하러 가는 거다. 

 

하지만 배우에게는 작품이 남지 않나.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누구나 볼 수 있는 상태로.

흑역사가 되느냐, 꽃역사가 되느냐. (웃음) 기록이 남는다는 점에서 만만치 않은 일이긴 하다. 결국 성공은 물론이고 실패마저 만천하에 공개해야 하는 것이 배우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은근히 쫄깃쫄깃한 재미가 있다.

 

강심장이 필요한 직업이네.

강심장이면 도움이 된다. 그게 지나치면 연기하기에 별로 안 좋을 것 같은데, 배우로서 삶을 지속하는 데는 꽤 중요한 요소다. 내가 힘내지 않으면 나를 지킬 수가 없거든.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매일 다른 사람에게 징징대야 하고, 자신의 그런 모습을 계속 보는 것도 고통이다. 결국 냉정하게 본다는 말은 객관적 시선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나를 막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강점과 약점을 두루 파악하는 거다. 그 과정에서 계획도 자연스레 생긴다. 이건 좋았지만 저건 아쉽네. 다음에 저 부분을 개선할 수 있는 역할이 들어오면 무조건 선택하자. 나도 사람이기에 욕을 먹으면 충격받는다. 조바심을 느낄 때도 있고. 근데 어쩔 수 없다. 겪어야 할 감정은 겪으면서 가야 한다.

 

싫다고 건너뛸 수는 없으니까. 이야기를 들을수록 배짱 좋은 사람이구나 싶다.

소심한 면도 많다. 이따금 우울한 감정이나 생각이 불쑥불쑥 덮치기도 하고. 근데 딱히 피할 방법이 없으니 ‘그렇구나’ 하며 겪는 거다. 안 그런 배우가 있을까. 다들 숨기고 관리하면서 산다고 본다. 그렇게 견디면 어느새 나아지더라. 도무지 알 수가 없다니까. 괜히 울적하다가 조금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 좋게 일어나고. (웃음) 난 산에 종종 간다. 나무 많은 곳에 가서 몸을 움직이다 보면 환기가 좀 된다. 어차피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하루하루 버티면서 가보는 거다. 

 

배우로서 가장 설레고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 

좋은 작품과 인물이 눈앞에 딱 나타났을 때. <세기말의 사랑>처럼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촉이 오는 순간이 있다. 그때 속으로 외친다. (말마디마다 손가락을 튕기며) “가자! 일단 가자! 못 먹어도 고다!” 그런 순간이 가장 좋고, 두 번째는 역시 촬영장에 있을 때다. 체력적으로 힘들긴 해도 많은 에너지를 얻는다.

 

좋은 작품과 인물을 선별하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나. 아니면 때마다 특정 역할이나 장르를 기다리는지. 

장르나 역할을 정해 놓고 기다리진 않는다. 그냥 대본을 읽다 보면 느낌이 온다. ‘이게 바로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거야!’ 특정 요소에 끌린다기보다는 총체적인 느낌을 보는 쪽에 가깝다. 내 고민과 갈증, 취향 등 여러 요소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기다림도 배우의 일’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 않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이 맞는구나 싶다. 어떻게 매번 느낌이 오겠나. 다만, 기다리다가 느낌이 오면 재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그 느낌을 받는 배우로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올해도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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