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화(김금순)는 영화의 시작부터 다친다. 조선소 용접공인 그는 일하다 손등에 심한 감전 화상을 입었다. 사정을 듣자 하니 큰 부상이 처음은 아닌 듯하다.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다. 팔꿈치에는 수술 자국이 짙게 남았고, 아픈 무릎 때문에 가끔은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오랜 세월 정말이지 온몸을 바쳐 일했다. 그런데 회사 사정이 어렵다고 이제 그만 나가달란다. 윤화는 붕대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런 말을 듣는다. 그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그는 해결책을 찾아 이리저리 헤맨다. 자리를 보전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해볼 작정이다. 그게 조선소 기장한테 돈봉투를 슬쩍 건네는 방법일지라도 말이다. 윤화가 고군분투하는 동안 세진(최우빈)은 친구들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용접이나 용역 일로는 만져볼 수도 없는 돈을 비트코인으로 쉽게 벌 수 있다며 열변을 토한다. 세진은 이미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돈을 코인에 쏟아부었다. 고등학생 경희(장민영)의 꿈은 메이크업 아티스트다. 그는 꿈을 이루려면 입시를 포기하고 하루빨리 서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도무지 가망이 없다. 이들이 한집에 사는 가족이라는 걸 영화는 한 발짝 늦게 알려준다.
<울산의 별>은 인물의 사연을 다발로 펼쳐놓는다. 해고 위기에 놓인 중년 여성과 불투명한 미래를 바라보는 두 청년. 이들은 당면한 현실을 각자의 방식으로 돌파해 보려고 갖은 애를 쓰지만 여러 방면으로 좌절한다. 병렬로 연결되던 세 사람을 간신히 하나로 묶는 건 역시 가족이라는 틀이다. 윤화는 일찍 죽은 남편 몫까지 책임지며 지금껏 홀로 두 아이를 키웠다. 그러나 자식들은 엄마처럼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들은 가파른 언덕 위 낡은 집에서 아슬아슬하게 동거한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세 사람은 살가운 이야기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대화도 제대로 못 한다. 간혹 오가는 말은 전부 분노로 점철돼 있다. “네가 뭘 알아?” “그러는 엄마는?” 이들은 세대 갈등을 겪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영화는 제조업을 기피하고 비트코인에서 기회를 보는 세진, 친구와 함께 탈출을 꿈꾸는 경희를 통해 울산이라는 중화학 공업도시의 현재도 보여준다. 윤화는 여전히 과거에 사는 인물이다. 그는 아들을 붙잡고 “울산은 조선소가 최고인기라. 대한민국은 조선소가 먹여 살렸어!”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세상은 정말 돌이킬 수 없이 변한 걸까? 그렇다 해도 윤화에게는 차분히 고민할 여유가 없다.
윤화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지만 다분히 주변적인 인물이다. 해고와 폐자재 도난을 둘러싼 여러 소문 속에서 그는 우왕좌왕할 뿐 사건의 핵심에 다가갈 기회는 얻지 못한다. 창문 밖에서 보고 들은 것들로 정황을 추측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게 최선이다. 심지어 윤화는 자신이 받은 도움에 대해서도 너무 늦게 알게 된다. 그는 사태의 중심에 서지 못한다. 정기혁 감독은 사람이 “도시의 소모품처럼” 느껴진 경험이 영화의 토대가 되었다고 말한 적 있는데, 이러한 언급은 윤화의 주변적 위치를 이해하게 한다. 현대 사회의 개인은 절대 그에게 영향을 주는 전체를 다 파악하고 제어할 수 없다. 그저 그 안에서 소모되고 희생될 뿐이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공장 분위기도 윤화를 주변부로 밀어낸다. 윤화는 남성 노동자들이 있는 곳에서 담배도 대놓고 피우지 못한다. 동료들은 윤화를 ‘형수님’이라고 부른다. 용접공으로 일하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윤화의 남편을 기억해서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지만, 윤화는 일터에서 여전히 그의 아내로 불린다. 그런데 김금순이 연기한 윤화에게는 그러한 장막을 뚫고 나오는 에너지가 있다. 거칠거칠한 얼굴, 부리부리한 눈, 괄괄한 목소리. 그는 영화와 캐릭터에 붙는 여러 수사를 거두고, 여기 숨 가쁘게 살아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아달라고 진하게 호소한다.
윤화 남편의 기일을 맞아 집에 남편의 작은아버지 식구들이 방문하면서, <울산의 별>은 3대에 걸친 세대의 변화와 각각의 차이를 아우르는 일종의 가족 드라마가 된다. 매일 부딪치며 사는 가족이 아니기에 이들 사이에는 오히려 속내를 털어놓고 고민을 곱씹을 느슨한 틈이 생긴다. 세진은 먼 친척인 인혁(도정환)에게 불안하고 위태로운 마음을 고백하며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윤화는 남편의 작은아버지 한섭(임형태)과 담배를 나눠 피우며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대고 함께 한숨을 쉰다. 물론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관습은 여전히 남아있다. 밥 먹을 때는 남자상, 여자상을 따로 차리고, 술에 잔뜩 취한 인혁은 윤화에게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라며 모진 소리를 한다. <울산의 별>은 분명한 입장을 취하며 무언가 주장하려 하는 대신, 여러 입장 속에서 얽히고설키는 가족의 모습을 한 발 뒤에서 조용히 바라본다. 그 너른 프레임 안에서 인물들은 다른 이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얻는다. 비록 자기 일은 해결하지 못하지만, 이들은 그렇게 절박하게 고민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타인의 사정을 헤아린다.
<울산의 별>에 눈을 질끈 감을만한 비극은 없다. 전반부의 위태로운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비교적 차분하게 끝을 향해 간다. 억지로 갈등을 증폭하거나 사태를 과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미덥지만, 끝에 남는 감정이 허무함이나 무기력에 가깝다는 것은 말해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구체적인 사안은 다 달라도 <울산의 별>의 인물들이 공유하는 커다란 문제는 과연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시스템이라는 단어는 대사로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 시스템이 정한 걸 우리가 어떻게 할 수는 없다는 게 요지다. 그런데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그 문제를 더 밀어붙여 보는 대신 갈등이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상황을 제시한다. 세상이 마음 같지 않아서 악에 받친 고함을 질러대던 인물들은 결국엔 별다른 수를 찾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세상을 쳐다본다. 그들은 무엇도 파괴하지 않는다. 술에 취해 넋두리를 하거나 낚싯대를 붙잡고 엉엉 우는 것만이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다. 이것은 희망 없는 현실의 반영일까. 인물들의 행로를 그렇게 정한다 해도 영화가 해볼 만한 시도는 더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영화는 오히려 그러한 질문을 남긴다.
울산의 별 Star of Ulsan 감독 정기혁 출연 김금순, 최우빈, 장민영, 도정환, 임형태, 변중희 제작 후앤유아츠 배급 영화로운 형제 제작연도 2022년 상영시간 117분 등급 15세이상관람가 개봉 2024년 1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