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원리
<나의 올드 오크>
차한비 / Choice / 2024-01-13

서로 만나기를 원한 적도 상상한 적도 없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삶의 공간을 공유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영국 북부에 위치한 작은 폐광촌, 조용하다 못해 음울한 기운마저 감도는 동네에 버스 한 대가 예고 없이 도착한다. 지역 주민의 생계를 책임지던 광산이 문을 닫은 후, 지난 40년간 좋은 소식이라곤 들려올 줄 모르던 동네다. 건물은 허물어져 가고 집값은 폭락했다. 정부가 두 손 놓고 나 몰라라 하는 사이, 떠날 길이 막힌 주민들만 주저앉듯 그곳에 남았다. 버스 문이 열리며 불청객의 정체가 드러나자, 사방에서 날 선 말이 쏟아진다. 경계심으로 얼어붙은 이방인들이 전쟁을 피해 온 시리아 난민이라는 사실은 연민이 아닌 분노를 유발한다. 이 집단 이주에 관해 누구 하나 사전에 의견을 구한 적도 없거니와,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거나 계획을 일러주지도 않아서다. 그렇게 상대의 사정을 헤아리기엔 너무 지쳐버린 이들이 아무런 완충 지대 없이 한곳에 내몰리면서 두 그룹은 최악의 첫 만남을 치른다.

<나의 올드 오크>는 사회 제도의 모순과 계급 불평등을 꾸준히 이야기한 감독 켄 로치의 신작으로,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미안해요, 리키>(2019)를 잇는 ‘영국 북동부 시리즈’의 최종편이다. 은퇴를 암시하며 60여 년의 창작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 영화로 언급한 이번 작품에서 감독은 미처 못다 한 말을 마쳐야겠다는 듯 2016년으로 돌아간다. 디지털 취약계층, 플랫폼 노동자, 싱글맘, 홈리스 등 동시대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표현했던 그의 시선은 시리아 내전 과정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난민과 그들을 마주한 선주민에게로 향한다. “나눌 만한 것이라곤 슬픔과 두려움뿐인 이들 사이에 우정이 피어날 수 있을까?” 켄 로치는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또 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힌다. <나의 올드 오크>는 좀처럼 거리를 좁히기 어려운 두 그룹 사이에 접점을 그려내는 일에 집중한다. 감독이 우려한 대로 트라우마를 간직한 인물들의 만남은 긴 시간 누적된 울분이 터져 나오는 계기로 작용하지만, 영화는 혐오와 적개심을 딛고 새로운 공동체를 일구는 이들에게 더 깊은 신뢰를 표한다.

<나의 올드 오크>
<나의 올드 오크>

영화는 각 그룹의 대표자로 TJ(데이브 터너)와 야라(에블라 마리)를 제시한다. 나이 든 영국 남성과 젊은 시리아 여성, 여러 전작과 마찬가지로 켄 로치는 가능하면 차이가 분명해 보이는 인물들을 나란히 놓는다. 권력 구도를 쉽게 의심할 법한 관계이고,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의 의심과 편견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둘은 성별, 나이, 국적 같은 사회적 조건과 위치가 관계를 결정짓는 절대 요소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친다. 그들은 서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며 우정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TJ가 마을에 유일하게 남은 오래된 펍 ‘올드 오크’의 운영자라는 사실과 야라가 어릴 적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카메라로 줄곧 이웃을 담은 기록자라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TJ가 가꾼 공간에서 야라는 낯선 동네가 겪은 풍파를 가늠하고, 야라의 사진을 통해 TJ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들과 접속한다. 공간과 사람 곁에 머무르는 그들의 정체성은 결국 두 그룹이 소통할 여지를 만들어 낸다.

TJ와 야라의 협력으로 ‘올드 오크’의 먼지 쌓인 백룸이 수십 년 만에 열린다. 교회와 학교, 광부 복지관 등이 사라진 후 공공장소가 부재했던 지역사회에 모처럼 들려온 좋은 소식이다. 한 끼 식사가 필요한 이들 누구나 환영한다는 말에 백룸은 날이 갈수록 북적인다. 외로움과 불안에 시달리던 이주민은 고향 음식을 만들어 나누고, 집안에 고립되어 있던 동네 청소년과 청년들은 밖으로 나와 어울린다. 개인은 약하지만 선한 마음으로 엮인 공동체는 강하다. 오래전 광부 노동조합 운동을 이끌던 표어 “우리는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가 다시 한번 생생하게 울려 퍼진다. 다만, 영화는 희망의 손을 덥석 잡지 않는다. “희망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이들이 존재해서다. “평생 잘 되려고 애썼지만 그 근처에도 못 갔다”는 절망이 뿌리 깊고, 결국 어떤 이들은 점점 나쁜 쪽으로만 치닫는 세상을 어떻게 감당할지 몰라 우왕좌왕한다. 영화는 그들을 외면하거나 그들이 맞닥뜨린 위기를 과소평가하진 않지만, 동시에 단호한 어조로 반성을 촉구한다. 진정으로 비판해야 할 대상에는 눈 감은 채 약자를 모욕하는 건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 꼴사나운 태도라고.

<나의 올드 오크>
<나의 올드 오크>

<나의 올드 오크>는 ‘올드 오크’의 백룸을 비추며 공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웃과 친구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대화하는 공공의 장은 수시로 흔들리는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그러나 영화는 공간의 존재 유무나 기능이 아니라 기억에 더 큰 가치를 두려 한다. 연대의 장소로 성장하던 백룸은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끝내 파괴되고 마는데, 그전에 모두가 잊지 못할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한다. 나이, 성별, 국적이 서로 다른 이들이 둘러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한쪽 벽을 스크린 삼아 야라가 찍은 흑백사진이 영사되고 누군가는 시리아 전통 악기를 연주한다. 사진 속엔 볼품없게 여겼던 동네 곳곳이 정성스레 담겨 있다. 골목에서 뛰어노는 아이들과 미용실에서 포즈를 취하는 여성들, 늘 벼랑 끝에 내몰린 기분으로 살아가던 이들이 프레임 중앙에 자리를 잡는다. 이미지 사이로 흐르는 수많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올드 오크’ 백룸은 작은 극장처럼 보인다.

본래 영화 오프닝에서 야라의 사진은 현실을 고발하는 르포르타주로 사용됐다. 인물들의 경직된 표정 너머를 채우던 것은 환대와 우정이 아닌 적대와 갈등의 언어였다. 야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제 사진을 선보일 기회를 얻는다. 부드러운 웃음과 눈맞춤이 오가는 그 장면은 문득 극장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사진을 통해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이 몰랐던 세계를 들여다보고 타인의 고유성에 주목한다. 만남을 원한 적도 상상한 적도 없던 이들이 그렇게 모여서 공동의 기억을 쌓는 행위야말로 뭔가를 함께 관람한다는 뜻 아니겠냐는 감독의 호소로 와 닿는다.

 

나의 올드 오크 The Old Oak 감독 켄 로치 출연 데이브 터너, 에블라 마리 수입·배급·제공 영화사 진진 공동제공 KNN미디어플러스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113분 등급 15세이상관람가 개봉 2024년 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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