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가족 같다.” 말수 적고 신중한 정회린 배우가 한 이야기니 빈말은 아니다. 런던과 밀라노의 땅을 부지런히 밟으며 함께 영화를 만든 동료들 칭찬을 부탁하자, 그는 조희영 감독과 공민정 배우가 정말 엄마와 친언니 같아 신기하다며 수줍게 웃었다. 이는 아마도 관계의 신비한 힘에 관한 언급일 테다. 리듬과 속도가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으면서도, 각자가 펼칠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놀라운 울타리. 세 사람은 그 유연한 틀 안에서 발맞춰 걷고 서로 의지하며 <이어지는 땅>이라는 세계를 완성했다. 뒷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세 사람 사이에 작용하는 관계의 힘이 고스란히 영화로 확장된 듯했다. <이어지는 땅>은 프레임 안에 응축된 여러 경우의 수를 생생하게 살려두려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처음과 끝을 잇는 발걸음만은 분명하고 씩씩하다. 연인과 헤어진 호림(정회린)과 이원(공민정)이 타지에서 우연히 조우하고, 각자의 걸음 속에서 인생의 잊지 못할 순간을 만나는 이야기가 우리가 발 딛고 선 땅에 대한 통찰과 연결된다. 오늘의 외로움은 내일의 설렘으로 흐르고, 그건 다시 일상을 유지하는 작고 단단한 힘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말하자면, 순리대로. 이런 영화를 함께 찍기 위해서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야 하는 걸까? 조금은 신기하고 조금은 부러운 마음으로 세 사람을 붙잡고 질문을 던졌다.
1일에는 뭘 했나. 새해를 어떻게 맞았는지.
정회린_ 고향에 다녀왔다. 부모님 댁에서 새해를 맞았다.
조희영_ 기억이 안 난다. (웃음)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 같은데? 감각은 아직 2023년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계속 유통기한을 헷갈리고 있다.
공민정_ 말일에 촬영해서 조금 정신없이 보냈다.
조희영_ 몇 년 전에 민정 배우랑 해돋이 보러 갔던 게 떠오른다. 도봉산에 올랐었지.
영화를 찍고 시간이 꽤 흘렀다. 작품을 보는 시선에 변화가 있던가.
조희영_ 이제 좀 거리두기가 된다. 영화제에서 한창 상영할 때는 촬영하고 얼마 안 된 시기라 그랬는지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많았다. 지금은 딱 영화로만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좀 두렵기도 하다.
공민정_ 우리가 작년에 찍었지?
조희영_ 재작년. 이제 그렇게 됐다. (웃음)
정회린_ 생각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우리가 언제 이런 걸 찍었나 싶고.
공민정_ 너무나 좋은 꿈을 꾼 느낌이다. 영화가 조금 다른 차원에 있는 듯하다. 영화 찍은 게 그냥 과거의 일이라기보다는 나한테 내재한 느낌이라고 할까. 배우와 스태프를 포함해 1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열심히 공들여 찍었다. 그게 온전히 전해질지, 다들 어떻게 봐주실지 정말 궁금하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간혹 감독의 의도나 장면의 의미에 관한 질문이 나오는데, 조희영 감독은 보는 이의 느낌을 존중하며 최대한 감상의 갈래를 열어두려고 하더라. 영화를 만들고 보여줄 때 분명한 건 무엇이고 열려있는 건 무엇인가.
조희영_ 내 안에서 얼마만큼 명확하게 상정하고 작업할 것인지, 관객이 어느 수위까지 느끼고 어느 방향으로 따라가길 바라는지 그 경계를 생각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다만 “이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가고 이 인물은 마지막에 이렇게 됩니다.”라고 너무 분명하게 말하는 영화는 삶과 비슷하지 않다고 느낀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최대한 다양한 갈래의 가능성을 심어두려고 한다. 연출자로서 좀 더 명확히 시도하고 싶은 건 그 다양한 갈래 안에 있는 듯한데, 막상 이야기하려니 참 어렵다.
<이어지는 땅>의 촬영 현장 역시 날씨나 현장 상황 등 우연에 열려있었다. 배우들은 그러한 방식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정회린_ 아무래도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카메라가 가까이 있지 않고 멀리 있어서 나한테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공민정_ 우리는 미루거나 기다리지 못하고 정해진 시간 안에서 찍어내야만 했다. 물러설 수가 없었지. 그런데 그 안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있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 수밖에 없는 현장이었다. 갑자기 비 왔을 때가 기억난다.
조희영_ 지금 속으로 똑같은 생각 하고 있었다. (웃음) 환경이 정말 열악했다. 모든 배우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계속 현장을 따라갔다. 환경이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순간의 변화를 다 같이 겪으면서 움직이는 게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됐으리라고 생각한다. 배우들한테 내가 느낀 걸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많다고 느꼈다. 늘 같이 있으니까.
공민정_ 촬영하다 보면 비가 오는데 비가 안 오는 것처럼 연기해야 하거나, 졸린데 안 졸린 척해야 하는 순간이 있잖나. 그런데 우리는 그 모든 상황을 그냥 받아들였다. “그래, 그러면 그거대로 하자.” 하면서.
조희영_ 런던에서 밀라노로 전환되는 분량 초반에 이원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있다. 그때의 모습을 너무 좋아한다. 진짜 피곤해 보이거든. 런던 촬영을 마치고 밀라노에서 엄청나게 걸었으니 당연하다. 그 장면에 너무나 필요하고 잘 맞는 모습이었다.
해외에서 참 많이 걸었다. 처음에 감독이 뭐 하러 가자고 했는지 기억하나.
정회린_ 감독님이 통화하다가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는데 혹시 런던에 가지 않겠냐고 했던 것 같다. 마냥 좋았다. 그래서 뭔지 모르겠지만 가고 싶다고 했지. (웃음) 현장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했는데 감독님이 뭔가 주문하기보다는 내가 가진 걸 믿어주신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
공민정_ 감독님은 정말 배우를 전적으로 믿어주는 사람이다. 배우가 잘 놀 수 있게 울타리를 잘 쳐준다. 다른 일로 통화하다가 희영이 뭔가 추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럼 나도 비행기 티켓을 끊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지. (웃음) 그때부터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을 거다. 감독님 곁에는 감독님을 믿어주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진근 촬영 감독님도 그렇고 이번에 함께 한 크루도 그렇고. 그러니까 뭔가 한다고 할 때 옆에서 다 좋다고 하지. 그럼 정말 해야 하잖나. 그래서 감독님도 온 힘을 다해서 좋은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을 거다.
“우리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땅을 가만히 발 딛고 서 있다.”는 문장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쌓아나갔다고 했다. 평소에도 땅, 정착, 떠도는 삶 같은 키워드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인가.
조희영_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20대 전반을 외국에서 보냈다. 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작은 감정이나 생각을 즉각적으로 편히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다. 모국어로 생활하는 게 아니니까. 그러다 보면 외로움과 상실감이 쌓인다. 런던 가는 김에 영화를 찍고자 하니, 그 정서를 모아 보고 싶더라. 한편으로는 그때 느낀 것들은 그곳에서 일어난 어떤 현상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데 거기에 되게 집착하는 시기가 있었던 거지. 그래서 우리가 계속 움직이는 땅 위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라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영화를 찍어보고 싶었다.
배우들은 움직이는 땅 위에 선 호림과 이원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정회린_ 호림은 외로운 사람이다. 관계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덜 성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원과 좀 다르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잖나. 그렇게 런던까지 간다.
공민정_ 이원과 호림이 굉장히 가깝게 엮여있다고 느꼈다. 호림이 이원이 될 수도 있는 접점이 많이 보였다고 할까. 처음에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부터 전체적인 그림이 먼저 들어왔다. 문학 작품을 읽는 느낌이었다.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 집중하기보다,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방법을 더 고민했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환경이나 상황에 더 몸을 담가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마법처럼 찍으면서 알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게 생기더라.
어떤?
공민정_ 터널에서 카메라가 팬 하면 호림이 안 보이는 장면. 내가 과거를 살다 왔네, 호림이 나였네 했다. 촬영하면서 서로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는데, 그 장면에서 몸으로 느꼈다.
호림과 이원을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로 보는 관객이 꽤 있더라.
정회린_ 호림에게 이원은 처음 보는데도 낯설지 않고 편안한 사람이다. 터널 장면 찍을 때는 잘 헤어지는 느낌이었다. 서로 시간이 겹쳐 있다가 떨어지는 거니까. 그냥, “안녕.” (웃음)


두 배우는 언제 처음 만났나. <주인들> 찍으면서?
조희영_ 우리 사이에 다른 친구가 있다. 그 언니 집에서 처음 봤을 텐데?
닮은 사람이 있다며 정회린 배우랑 조희영 감독을 서로 소개해 준 분?
정회린_ 맞다. 희영 감독님을 처음 만난 날, 민정 선배님도 처음 뵀다.
공민정_ 그날 같이 춤을 췄다.
정회린_ 배우로서는 언니를 원래 알고 있었으니까 좀 신기한 마음이었다. 근데 첫 만남에 뭔가가 확 풀렸다. 너무 털털하고 편안한 사람이더라. 근데 그때 춤을 췄나?
조희영_ 춤 잘 춘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보여줘! 보여줘!” 했지. (웃음) 춤 못 추는 언니들이 옆에서 흉내 내고 그랬다.
공민정_ 나는 잘 춘다.
셋이 있을 땐 주로 무슨 얘길 하나.
조희영_ 그냥 보통의 친구들 같다. 회린 배우랑 단편을 찍으려고 하던 차에 민정 배우가 다 도와주겠다며 스태프를 하겠다고 하더라. 진짜 고마웠다. 영화를 찍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거든.
공민정_ 오랜만에 작업한다고 하니까 내가 운전이라도 하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조희영_ 촬영을 강원도로 간다고 하니까 운전하겠다고. (웃음) 그러면 아예 연기를 해달라고 설득했다. 그렇게 찍은 게 <주인들>이다.
김서경, 감동환 배우와 작업한 건 어땠나. 전문 배우로 활동하는 분들이 아닌데, 어떤 현장이었는지 궁금하다.
정회린_ 동환 님이랑 연기할 때 신기한 에너지를 많이 느꼈다. 연기가 처음이라고 하셨는데 뭔가 바로 연결되는 느낌이더라. 너무 좋은 경험이었다. 서경 님과 동환 님이 실제로 연인 사이인데, 그래서인지 테라스 장면을 찍을 때 왠지 신경이 쓰였다. 서경 님이 옆에서 보고 계셨거든. 신기한 힘들이 계속 생기고 그걸 많이 느끼게 되는 현장이었다.
공민정_ 연기를 한 번도 하지 않은 분들이어서 정말 부담 없이 임하셨던 듯하다. 동환 님은 기본적으로 재능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 상황에 몰입을 잘하셨던 것 같다. 서경 님은 되게 순수한 사람이다. ‘대사만 실수하지 말자, 이 촬영을 잘 마치자’는 그 순수한 에너지가 캐릭터랑도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다. 그런 모습들이 그 자체로 순간을 믿게 만드는 큰 힘이 되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걷는 행위가 중요한 영화다. 자연스레 몸과 연기, 몸으로 하는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지더라.
공민정_ 사람은 일단 몸부터 반응하는 것 같다.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살아가며 겪는 모든 게 몸의 사건으로 온다. 삶이 그렇다면 연기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몸과 연기는 당연히 뗄 수 없다. 나는 삶이 연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몸의 반응을 관찰하려고 하는 편이다.
정회린_ 중학교 때부터 춤을 췄다. 춤을 오래 추면서 느낀 것들과 연기하면서 느끼는 것들이 어느 정도 닿아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수단은 다르지만 둘 다 표현하는 일이잖나. 언어 없이 몸으로만 할 수 있는 표현이 많다는 점이 연기할 때 재미를 준다.
현장에서 조희영 감독은 “여기에서 저기로 걸어가 주세요. 3초 정도 멈췄다가 가주세요.” 하는 식의 기술적인 디렉팅을 주로 했다고. 왜 그런 방식이 중요했나.
조희영_ 배우들과 이미 두터운 신뢰가 있기 때문에, 대사가 배우들 입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이 배우들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림을 만들어주고, 진짜 살아있는 사람을 표현해 준다. 그게 너무 행복하다. 모니터 앞에서 그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가 나한테 주어지다니. (웃음) 그러다 보니 현장에서는 얕은 수준의 호흡 정도만 디렉팅하게 되더라.

정회린 배우는 그런 방식이 주는 자유로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정회린_ 방식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감독님이 동선 외의 것들을 항상 열어두고 내게 맡겨주셨기 때문에 자유로움을 느꼈다. 예를 들면 테라스 장면. 처음에 시나리오 읽었을 때는 격정적인 느낌으로 해석했는데, 나중엔 다르게 해보고 싶더라. 그런 식으로 캐릭터를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어 재밌고 좋았다.
영화를 만들고 연기하는 과정에서 어떨 때 자유로움을 느끼나. 또 자유로운 건 얼마나 중요한가.
공민정_ 서로 안전하다는 믿음과 약속이 있을 때 자유롭다. 무턱대고 한다고 자유로운 게 아니다. 감독, 배우, 스태프 모두가 약속한 틀 안에서 해볼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보는 거, 그게 진짜 자유로운 거 아닐까. 약속이 하나라도 깨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태도나 생각이 달라지겠지.
중요한 이야기다. 자유, 즉흥, 돌발 등이 혼동되는 경우가 많잖나.
조희영_ 내 경우에는 배우, 스태프와 미리 이야기되지 않은 상황에서 즉흥에 기대는 상황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걸 활용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그런 일을 바라지도 않는다. 다행히 우리는 자유로움을 느끼는 방향이 다들 닮아있는 듯하다. 배우들이 작업하며 자유로움을 느꼈다면 나도 내게도 너무나 행복한 일이다.
이원과 화진이 밀라노의 밤거리를 걷는 장면이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영화에서 가장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묻어나는 대목인데, 앞모습과 뒷모습의 컷 전환이 많아서 찍을 때 꽤 고생했겠더라.
공민정_ 나랑 세일 배우 둘 다 낯을 가리는 편이라서, 서로 살갑게 이야기를 주고받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런 생경한 느낌이 더 드러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타지에서 상대를 처음 만난 인물들의 상황과 대사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손잡고 뽀뽀하는 장면 찍을 땐 상황 자체가 설렜다. 상대가 설렌 건 아니다. (웃음) 그렇게 유대가 쌓여서 그런지 촬영 끝나고 다시 만났을 때 세일 배우랑 대화를 많이 했다. 우리가 대화를 많이 하는 캐릭터였잖나. 그때 확 친해졌다. 지금 다시 찍으라고 하면 좀 더 친한 느낌이 날 거다.
조희영_ 두 사람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계속 교차해서 편집하고 싶었다. 촬영 감독님이 진짜 고생을 많이 하셨다. 편집할 때 튀지 않으려면 촬영할 때 계속 같은 레벨과 프레임 사이즈를 유지하면서 팔로잉해야 하니까. 이원과 화진이 나누는 대화나 설렘을 유발하는 지점에는 분명 긍정적인 에너지가 있다고 보는데, 그 상황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 움직임을 만들고 싶었다. 가까이서 둘을 바라보다가 순식간에 ‘지구 속의 작은 점 두 개가 잠시 스쳤네.’ 하는 시선을 만든다거나, 인물의 표정 하나하나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와 둘을 관조적으로 볼 수 있는 시야를 번갈아 주고 싶었다.
그러한 편집이 우리가 엄청나게 큰 세계의 일부라는 인상을 만들어내고, 쓸쓸함이나 외로움을 넘어서는 이상한 안도감을 준다. 후반부에 폭포로 향하는 발걸음에서도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여러분은 각자 <이어지는 땅>에서 어떤 정서를 느끼나.
조희영_ 반가운 이야기다. 딱 그런 태도로 영화를 만들었다. 쓸쓸하고 고독하고 서글프고 외로운 건 사실 각자의 인식과 관련된다. 같은 상황에서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 모든 마음이 어쨌든 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마침내 폭포에 이르렀을 때, 순리대로 땅으로 떨어지는 그 힘을 온전히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그 편안함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공민정_ 나한테는 영화의 어떤 장면들이 위안을 줬다. 사람들한테 각자의 상처나 해결하지 못한 과거의 자아가 있을 거다. 내게도 해결 못한 과거의 내가 있다. <이어지는 땅>은 그런 나를 계속 바라보게 하는 영화다. 그렇게 살다 보면 좀 나아지거나 편안해지기도 하겠지, 그러다 어쩌면 폭포를 보게 될지도 모르지, 하고 생각하게 한다. 호림이 검은 옷을 입고 창가에서 인사하는 장면을 봤을 때, 꼭 마주하고 싶었던 숙제 같은 게 해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도 우리는 계속 살아갈 거다. 이 영화에는 그런 순환을 생각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정회린_ 호림을 연기해서 그런지 내게는 그리움이 가장 크게 남는다. 하지만 어떤 인물에게 이입하느냐에 따라 감상이 정말 많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영화를 보고 나면 삶을 바라보는 거시적인 시야를 얻게 될 거라고 말하고 싶다.
새해맞이 덕담을 좀 해보면 어떨까. 옆 사람 칭찬 좀 해 달라.
조희영_ 이야기할 건 너무 많다. 최근에 또 두 분하고 같이 작업했다. 작년에 촬영하고 이제 편집 중이다. 그래서 여전히 생생한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민정 배우한테는 이렇게까지 의지해도 되나 싶을 정도다. 배우가 가진 특유의 태연함이 있는데, 그 안에서 되게 섬세하게 노력하고 있다는 게 종종 느껴진다. 여리지만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다. 회린 배우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배려심이 깊다. 정말 많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 인간적으로 늘 많이 배우고 있다. 현장에서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맡은 바를 해내 준다. 작업할 때 늘 같이 머리를 맞대어주고 함께 고민해 주는 두 배우에게 항상 고맙다.
영화 제목은 뭔가.
조희영_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올해 안에 볼 수 있을까?
조희영_ 열심히 편집해야지. (웃음)
공민정_ 얼마 전에 희영 감독한테 얘기했다. “왜 희영의 영화를 찍을 때는 마법 같은 순간이 자주 일어나지?” 나는 분명히 다른 촬영장에서도 똑같이 최선을 다하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희영 감독의 영화를 찍을 때는 유독 믿게 하는 힘이 더 생긴다. 뭔가가 나한테 들어온다. 몸의 사건이 자주 일어나게 만드는 현장인 거다. 그건 어떤 걸로도 대체할 수 없다. 매 순간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으니까. 이유를 계속 고민했지만 정확한 답은 못 찾았다. 믿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건 감독으로서 정말 큰 장점이다. 희영 감독은 일로나 인간적으로나 믿음을 주는 사람이다. 회린이는 언제 봐도 늘 편안한, 배려심 많고 귀여운 사람이다. 힘든 내색을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정회린_ 두 사람은 내게 친언니와 엄마 같다. 나는 원래 혼자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많은 사람인데, 민정 언니랑 있으면 “뭐 어때?”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냥 까르르 웃게 된다. 나를 엄청나게 웃게 해준다. 정말 친언니 같다. 감독님은 엄마다. 밥도 해준다. (웃음)
공민정_ 요리 너무 잘한다.
정회린_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신기하다. 같이 있으면 마냥 편하다. 힘든 얘기를 잘 못하는 편인데 감독님한테는 하게 된다. 감독으로서도 친구로서도 너무나도 신뢰하는 소중한 사람이다.
목표나 계획도 세웠나. 두루뭉술해도 좋다.
조희영_ 일단 편집을 얼른 마무리해서 영화를 완성하고 싶다. 장기적인 플랜은 없지만 감독으로서 영화를 계속 찍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정말 많이 애쓰고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정회린_ 인간 정회린으로서 건강하게 살기가 가장 큰 목표다. 지금 그 이상은 없다.
공민정_ 작년까지만 해도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하고 다음 해에 어떻게 살지 계획도 세우고 그랬는데, 이번엔 그런 게 없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냥 흘러갔다. 그런데 막연하게 잘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온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 지금처럼 살면 좋겠다. 아, 배꼽 잡고 웃는 날이 많길 바란다. 그냥 배꼽이 찢어졌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