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믿기 시작했다
<신세계로부터> 정하담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3-12-24

정하담이 20대를 통과하는 사이, 우리는 총 4번의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촬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들꽃>(박석영, 2015)으로 데뷔한 직후 <검은 사제들>(장재현, 2015)과 <스틸 플라워>(박석영, 2016)를 연달아 내놓으며 주목받았다. 때로는 배우와 기자로 만났지만 그보다는 동네를 산책하고 노래방과 술집에서 어울리는 친구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정하담은 말을 자주 바꿨다. 연기하기 싫다고 했다가 연기하고 싶어 미치겠다고 했고, 자신이 밉다며 글썽이더니 자신만큼 자랑스러운 존재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나쁜 녀석들: 악의 도시>(OCN)와 <위대한 유혹자>(MBC)로 드라마를 시작한 2018년에도, <항거: 유관순 이야기>(조민호, 2019)와 <젊은이의 양지>(신수원, 2020)를 차례대로 공개하고 나서도 정하담은 내내 두 마음과 싸웠다. 연기를 향한 사랑과 공포가 맞붙은 자리에서 그는 쉽게 결론을 짓지 못했다. <신세계로부터> 역시 그러한 진통 속에서 만났을 것이다. 진짜와 가짜, 믿음과 모욕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 명선은 정하담의 일부처럼 보인다. 벌벌 떠는 듯하지만 끝내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 올해가 가기 전에 정하담과 마주 앉고 싶었다. 그는 여전해서 연기 얘기하자고 하면 사는 얘기를 했고, 사는 얘기를 하다 보면 결국 연기 얘기로 돌아갔다. 인터뷰를 마치고 정하담에게 문자를 받았다. “항상 나의 어떤 시기마다 만나서 인터뷰하는 것 같아서 신기하고 재밌었어!” 그러니까 이것은 한 시기에 관한 기록이다. 정하담은 곧 서른이 되고, 드디어 사랑과 공포 중 하나를 좀 더 믿기로 했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 개봉하고 <젊은이의 양지> 촬영 마쳤을 무렵에 인터뷰한 것이 마지막이더라. 그간 어떻게 지냈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일이 많지는 않았다. <신세계로부터>도 그쯤 촬영했지만 바로 공개되지 못했고 다른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헤어질 결심>(박찬욱, 2022) 등을 통해 중간중간 모습을 비추긴 했는데 여러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2년 가까이 연기를 못 하고 지냈다.

 

연기를 안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한 1년은 그랬지. 마음 다잡고 나면 다시 예전처럼 연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연기하고 싶어지자 기회가 안 생기더라. 오디션도 잘 안 됐다. 별생각이 다 들었다. 20대 후반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는데 내가 역할들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나 싶기도 하고. 사람들이 “연기 안 하고 쉬는 2년 동안 뭐 했어?” 묻는다. 난 안 쉬고 열심히 살았다. 오디션 보고, 떨어지고, 또 보고. 그 기간이 길어졌을 뿐이다. 드라마 <피라미드 게임> 캐스팅됐다는 연락 받고서 울었다. 다시 배우로 살 수 있구나 싶어서.

 

선택받는 입장이란 걸 새삼 실감했나 보다. 연기를 대하는 자세가 좀 달라졌겠다. 

그 무렵엔 이대로 끝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거든. 주변에서 버텨야 한다고 얘기하더라. 워낙 버티기 힘든 직업이고, 그러니까 배우가 존중받는 거라고. 내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시기가 있구나. 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구나. 솔직히 처음으로 실감한 것 같다. 그전에는 ‘내가 잘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컸다. 어떻게 하면 모자란 부분을 들키지 않을지, 이상하게 보이지 않고 잘 해낼지 생각했다. 무섭고 두려운 일이 많았고 직면하기 싫은 순간도 분명히 있었다. 근데 연기를 못 하게 되자 다른 걱정이 오더라. ‘그럼 이제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하지?’ 과거를 돌이켜보며 인생을 반추하는, 꽤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억지로 힘을 내서 버티다가 한 3개월 지나면 힘이 툭툭 빠지고, 다시 에너지를 끌어 올리느라 고생하고. 징징대는 소리하는 것도 지겨워서 사람들을 자주 못 만났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그럴 수는 없으니까.

 

<피라미드 게임> 촬영을 얼마 전에 마쳤다. 현재 공개된 정보만으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상상하기 어렵다. “존재감 없는 전교 2등” 고은별 역을 맡았는데. 

여고 배경 학원물이다. 반전 있는 캐릭터이니 기대해 주면 좋겠다. 배역을 위해 10kg 정도 살을 찌웠고 아직 다 빼지 못한 상태다. 이전에 맡은 인물들과는 결이 좀 달라서 어렵긴 했는데 즐겁게 찍었다.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했다. 촬영 마치고 나서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결과가 어떻든 열심히 했다는 걸 스스로 부정할 수는 없겠다고. 

<젊은이의 양지>
<헤어질 결심>

방영 전이라 말을 아끼는 건가, 아니면 결과를 걱정하는 건가.

평가라는 것이 주관적이지 않나. 괜찮은 점도 있고 아쉬운 점도 있겠지. 같은 연기를 놓고도 보는 이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누군가는 매력을 느끼는가 하면 누군가는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배우의 길을 가기로 한 이상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드라마가 공개되면 또 어떨지 모르겠다. 이전 경험을 통해 알거든. 내가 평가에 휘둘리고 상처도 받는 성격이란 걸.

 

이전과는 다를 거다. 촬영장에선 어땠나.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고등학생 역할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처럼 또래 배우가 많은 현장은 처음이었다. <항거> 찍으면서 여고 시절을 체험하는 듯했는데 이번엔 진짜 여고로 갔다. 쉬는 시간에 재잘재잘 수다 떨고, 젤리 나눠 먹고. 재밌게 찍었다. 시간이 갈수록 현장이 더 좋아진다.

 

<헤어질 결심>도 잠깐 얘기하자. <아가씨>(2016) 이후 오랜만에 박찬욱 감독의 현장에서 연기했는데.

떨리고 설레는 시간이었다. 감독님 현장에선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계속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들과 작업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특별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 알기에 끝이 다가올수록 아쉽다. 감독님은 섬세하고 배우들을 많이 배려해 주시는 분이다. 적극적으로 소통한 건 아니지만, 내 존재를 알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긴 했다. 오가인이라는 인물 이름 대신에 “하담” 하며 실제 이름을 몇 번 불러주셨거든.

 

감독이 먼저 역할을 정해서 연락한 건가? 

아니, 오디션 봤다. 본래 오가인이 아니라, 김신영 배우가 연기한 형사 연수 역으로 지원했다. 부산말을 연습해서 대본을 연기했던 기억이 난다. 근데 오디션 보고 나서 가인 역을 제안받았다.

 

‘왜 나한테 하필 이 역을?’ 의아하게 생각하진 않았나.

처음에 그랬다. 잠깐 나오지만 멜로 서사에 속한 캐릭터 아닌가. 그런 역할을 제안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난 예쁘지도 않은데 왜?’ 좋고 기쁘면서도 의외라고 여겼다. 감독님께 정확한 이유를 묻지는 않았는데, 뒤풀이 자리에서 그러시더라. “너무 짧게 나와서 아쉬웠지?” 아니라고,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말씀드렸다. 영광이라는 단어를 일상에서 처음 써본 듯했는데 그 표현이 딱 맞게 느껴졌다. 그때 감독님이 “짧게 나와도 잊히지 않는 얼굴이라서 좋았다”고 하셨다. 아마 그런 이유로 캐스팅하지 않았나 싶다.

정하담 ⓒ이영진

올해 영화제에서 두 편의 장편영화를 선보였다. 둘 다 희소한 장르인데, 먼저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제작한 <모르는 이야기>는 꿈과 로드무비가 결합한 판타지다. 

단편 <왜냐고 묻지 마세요>(2019)를 함께한 양근영 감독님의 신작이다. <스틸 플라워>를 공개했을 무렵, 영화제에서 장률 감독님을 만났다. 얼마 후 장률 감독님이 “하담 씨랑 잘 맞을 것 같다”며 양근영 감독님을 소개해 주셨고, <왜냐고 묻지 마세요>를 재밌게 찍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감독님께 다시 연락이 온 거다. 옛날부터 바랐던 일이라 너무 기뻤다. 한 감독과 단편을 만든 후 장편까지 인연을 이어가는 배우들이 부러웠거든. <모르는 이야기>를 보고 감독님께 참 고마웠다. 내가 기존에 했던 작품이나 주로 보여줬던 이미지를 벗어나서 다양한 느낌을 영화 속에 담아 주셨다. 작업하면서 여러 번 감동했다. 이 영화는 어차피 꿈이니 뭘 해도 된다고 감독님이 늘 말씀하셨거든. “하담 씨, 이거 망해도 괜찮아요.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해보세요.”

 

<재꽃> <스틸플라워> 등을 함께한 김태희 배우의 연출작 <룩킹포>에도 출연했는데.

연기 못 해서 징징대는 시기에 만났던 사람 중 한 명이 태희 오빠다. 내 하소연을 듣더니 자신이 준비하는 작품에 출연할 의향이 있냐고 묻더라. 앙상블 영화라서 두드러지는 역할이 없는 데다, 당연히 내가 바쁠 거라고 예상해서 그간 말을 안 꺼냈다는 거다. 태희 오빠는 굉장히 오래 알고 지낸 배우이자 동료다. 항상 심각한 현장에서 만났는데 <룩킹포>처럼 가볍고 활기찬 작품으로 함께하니 새로웠다. 태희 오빠가 배우다 보니 스태프로 온 지인들 역시 대부분 배우였다. 현장 분위기가 좋았다. 평소보다 긴장과 부담이 적은 상태로 임했고, 연기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도 수월했다. 

 

감독이 배우 언어로 연기 디렉팅을 해서?

아무래도 소통하기가 좀 더 편안하더라. 태희 오빠가 찍는 영화이기에 응원하고 싶었고, 촬영하는 내내 ‘영화를 이런 방식으로도 찍을 수 있구나’ 하며 즐거웠다. 

 

둘 다 현장에서 좋은 에너지를 준 작품 같다. <룩킹포>는 뮤지컬 영화던데 노래랑 춤을 직접 소화했나.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기타까지 치면서 태희 오빠를 무리하게 설득했지. (웃음) 노래하는 장면을 한 번쯤 꼭 찍어보고 싶었다. 기타도 잘 치진 못하지만 오래 했고. 결국 영화에서 춤은 안 추는데 기타 치면서 잔잔한 노래를 부르긴 한다. 

 

요즘 노래방 가면 뭘 부르나. 예전에 잔나비의 ‘She’ 노래하던 모습이 생생한데. 

나도 궁금했던 거다. 우리가 한창 만나던 무렵, 기자가 스물아홉이라며 3호선 버터플라이의 ‘스물아홉, 문득’을 자주 불렀다. 속으로 ‘나도 스물아홉 되면 그 노래 불러야지!’ 했는데 그게 올해였다. 덕분에 많이 불렀다. 원래 잘 못 불렀는데 계속하다 보니 이제 잘 부른다. (웃음)

 

시간이 진짜 빠르다. 노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뮤직비디오에 관해서도 묻고 싶다. 재작년 도마의 ‘겨울 발라드’ 뮤직비디오에 출연했고 해당 앨범은 팀에서 보컬을 담당했던 김도마(김수아) 사후에 발매됐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로 아는데 이맘때면 생각나지 않을까 싶더라.  

수아가 앨범 작업을 이미 많이 해놓은 상태였다. 밴드의 또 다른 멤버인 거누(김건우)와도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어느 날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줄 수 있냐고 묻더라. 고마운 마음으로 참여했다. 수아랑 같이 찍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수아가 학교 다닐 때 연극반이었고 연기도 되게 잘했거든. 

정하담 ⓒ이영진

10대 시절에 만난 친구들과 여전히 친하게 지내나.

친한 친구도 있고, 멀어진 친구도 있다. 20대 초중반까지는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는데 조금씩 달라지더라. 아무래도 각자 일하고 자리 잡으려 애쓰다 보니 바쁠 수밖에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돈이 없어도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만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근데 20대 후반이 되자 사회적 기준과 시선을 무시할 수가 없더라. 난 계속 대학생으로 사는 것 같은데 친구들은 아닌 거다. 자연스레 씀씀이가 커지고 가치관도 바뀐다. 문득 사람이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전까진 그걸 몰라도 용인받을 수 있는 나이였지만, 더는 아닌 거다. 앞으로 살아가려면 사회에서 내 기반을 다져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뒤늦게 했다. 남들보다 느린 편이지.

 

지난해 가을에는 박홍열 촬영감독이 연출한 선과영의 ‘밤과낮’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 이 또한 원래 알고 지냈던 이들과 작업한 건가.

선과영 멤버 중 한군이 내 고등학교 선배다. 대학교를 한 학기도 안 다녔기에 대학 인연은 아예 없는데, 중고등학교 친구들과는 작업할 일이 드문드문 생긴다. 복태와 한군 결혼식도 갔고, 예전에도 뮤직비디오를 찍자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밤과낮’으로 드디어 실행에 옮겼던 셈이다. 박홍열 감독님은 4~5년 전에 수유너머에서 만났다. 감독님의 영화 강의를 들었는데, 처음에 수강생 목록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 ‘설마 내가 아는 그 배우인가?’ 하셨다더라. 이름만 알고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거든. 사는 동네가 가까워서 수업 마치고도 몇 번 뵀다. 감독님이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2023) 촬영할 때도 놀러 갔고. 어쨌든 작업으로 만난 건 뮤직비디오가 처음이었다. 기분 좋더라. 집 근처에서 같이 맥주 마시거나 영화제에서 마주치면 “우리 언젠가 현장에서 만나요”라는 말을 주고받았거든. 돌이켜보니 뮤직비디오 작업이 다 좋았다. 연기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부담도 적고.

 

그러면 어떤 생각을 갖고 현장에 가나. ‘밤과낮’ 뮤직비디오는 단순하다. 하담이 택시를 타고 쭉 가다가 노래가 끝날 무렵 택시에서 내린다. 특별한 상황도, 대사도 없는데 촬영장에서 무엇을 계획했나.

감독님이 너무 심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처음 몇 번은 현재 버전보다 가라앉은, 사연이 많아 보이는 느낌으로 나왔던 것 같다. 감독님이 더 가볍게 가자고 했고, 나도 테이크를 거듭할수록 차츰 편안해졌다. 창문을 내린다든지 일부 제스처는 현장에서 노래 들으며 타이밍을 맞췄다.

 

너무 슬프거나 외롭지 않은, 쓸쓸하지만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신세계로부터>의 명선과는 그야말로 정반대다. 맹신과 절망이라는 극단의 감정을 연기했는데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솔직히 말하면 촬영한 지 오래돼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 그 작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했다. <스위트홈>(넷플릭스, 2020)을 포함해 몇몇 작품에 출연하긴 했지만, 긴 호흡으로 연기할 기회는 많지 않은 시기였다. 뭔가 치열하게 파고드는 작업을 하고 싶었고, <신세계로부터>의 명선은 그럴 만한 여지가 충분했기에 마음에 들었다. 당시 소속사가 없기도 했지만 고생을 자처한 면도 있다. 한 달 정도 고성에 머물며 찍었는데 혼자 준비하고 운전해서 갔다. 잘하든 못하든 내 연기를 카메라 안에 많이 담고 싶었고, 오히려 감정을 더 몰아붙이며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고립된 상황이라든지 맹목성 등 기존에 연기했던 인물과 큰 차이가 두드러지지는 않는데, 서사나 캐릭터에 관해 매력을 느꼈던 지점이 있다면.

겹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길게 연기해 봤다는 점에서 다르다. 무당 역할도, 북한말을 구사하는 캐릭터도 전부 내 기준에서는 짧게 연기했다. 물론 모든 인물을 준비하는 과정은 당연히 길고,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강렬한 캐릭터를 맡은 것은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한 작품의 중심에서 인물을 오래 고민하고 구현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그걸 놓치고 싶지 않았다. 출연 결정했을 당시엔 몰랐는데, 나도 어느 순간 문득 ‘그전에 했던 역할들의 총집합인가?’ 싶긴 했다. 20대 초중반에 만났던 캐릭터들의 종합판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

 

어떤 인물이든 원 없이 연기하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보면 되나.

그럴 수도 있고… 실은  모르겠다. 그 역할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단단한 배우는 아닌 것 같다.

정하담 ⓒ이영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대범하지 못하다는 뜻인가?

내 이미지를 주도적으로 만들어 온 편은 아니다. 주어지는 대로 응했고, 연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실제 나와는 거리감이 있는 역할을 맡았다. 어떤 상을 그려 놓고 전진한다기보다는 그저 한 작품 한 작품 거치다 보면 자연스레 나라는 배우가 만들어질 거라고 여기는 쪽이다. 물론 바람이야 있다. 멜로도 했으면 좋겠고 판타지도 좋아한다. 그렇듯 내 취향과 선호는 있지만 그걸 중심으로 커리어를 만들 만큼 단단하진 않은 것 같다. 지금은 내게 작품이 주어지는 것만도 특별한 일이니까. 특히 주연작을 제안받는 일은 드물다. 연기할 기회가 생기면 뭐든 귀하다고 생각했지, 그중 뭔가를 선택하고 안 하고 그랬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내게 다가오는 작품의 폭이 계속 확장되길 바랄 뿐이다.

 

과거에 털어놓은 고민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연기를 즐겁게 할 수 있을까?”였다. 연기하는 일과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일이 때때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해답을 찾았는지 궁금하다.

한동안 연기가 즐겁지 않았다. 부담이 워낙 컸거든. 난 연기과에 가고 싶었던 학생이지, 영화를 한두 편 찍었다고 해서 배우라고 할 수는 없을 듯했다. 연기를 모른다, 사람들의 기대에 못 미칠 거다, 잘 해낼 리가 없다. 그런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연기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니 자꾸 꾸며내는 것만 같고, 내가 한 일을 과장할 수 없지만 축소할 수도 없었다. 마음속에서 온갖 생각이 충돌했던 것 같다. 현장에서도 항상 두려움에 급급했다. 근데 지금은 즐겁다. 지난 2년간 열심히 살았다고 말했잖나. 무서운 건 똑같은데 그래도 길이 좀 보인다고 해야 하나. 적어도 붙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에 마냥 짓눌리는 대신에 연습실을 빌려서 한 번 더 연습하고 현장에 가는 식이다. 덕분에 <피라미드 게임> 찍으면서 감독님께 먼저 다가갈 수 있었다. 예전엔 궁금한 점이 생겨도 묻지 못했다. 내가 탄로 날까 봐, ‘이것도 모른다고?’ 하며 날 내칠까 봐 불안했거든.

 

2년 사이에 배짱이 생겼네.

어린 마음에 막연히 사회라든지 외부를 무서워했던 것 같다. 십 대 시절과 달리 바깥이 더는 놀이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내 가치나 능력을 끊임없이 의심했고, 그러다 보니 일상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웠다. 그냥 나로서 살다가도 연기할 일만 생기면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거다. 어찌 됐든 약점을 숨기고 싶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도 아니고, 연기를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시간을 거치고 나니 감사함이 크다. 말하자면 현재에 충실하게 된 것 같다.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른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한편으로 연기를 독서에 비유하며 아주 산뜻하게 표현한 적도 있다. 남녀노소 누구든 하면 좋은 일이라고.

최근에 동료 배우들과 연기 스터디를 시작했다. 워크숍 하다 보면 ‘연기는 놀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껏 웃고, 타인을 따라하고,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고. 내겐 그 경험이 어린아이의 놀이처럼 다가온다. ‘맞아, 나 이런 거 좋아하는데!’ 어떤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로서 역할을 받으면 놀이라고 느끼기 어렵지만, 연기라는 행위 자체는 원초적이고 자유로운 놀이 같다. 마음이 도리어 편안해지는 행위.

 

부담을 느낀 요인에는 ‘연기를 전공하지 않았다’는 사실 외에 수상이라는 성과도 한몫을 했던 것 같다. <스틸 플라워>로 서울독립영화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들꽃영화상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수상했는데, 당시 “이게 내 전성기일까 봐, 여기서 끝날까 봐 불안하다”고 했다. 지금은 소화가 좀 됐나.

그런 마음이 있었지. 주변에서 얘기도 많았다. 특히 3~4년 전부터 “너 되게 잘 될 줄 알았는데”라며 나보다 아쉬워하더라. 상대는 날 깎아내리는 의도 없이 그냥 하는 말인데, 난 그걸 들으면서 마음이 쩡하는 거다. 괜히 처지고 우울하고. 지금은 다르다. 예전에는 특정한 이미지로만 나를 볼까 봐 걱정했다면, 이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겠다는 마음이다. 어떤 배우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연기를 더 잘하고 싶다. 

<신세계로부터>
<신세계로부터>

어떻게 잘하고 싶나.

작품이든 인물이든 다양하게 만나고 싶다. 현장에서도 좀 더 자유로운 상태로 연기하고 싶고. 도움이 된 방법 중 하나는 오해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기.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 앞에선 자유롭지 않나. 이렇게 해야 더 좋아하려나? 저렇게 해도 봐주려나? 그렇게 눈치를 보는 대신에 다들 날 사랑한다고 오해해 버리는 거다. 본래 난 스태프들이 잘해주는 것도 부담스럽게 여겼는데, 어느 날 이광국 감독님과 대화하다가 깨달았다. 다들 배우가 안전하다고 느꼈으면 해서 챙겨줬던 거구나. 그러면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최대한 안전하게 느끼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모르는 이야기>부터 그런 마음가짐을 연습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해졌다. ‘감독님이든 스태프든 촬영을 시작한 이상 날 평가하거나 밉다고 안 볼 수는 없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웃음) 

 

동료들을 좀 더 믿게 됐다는 말로 들린다. “특정한 이미지”에 관한 염려에서는 어떻게 벗어났나. 

계속 부딪치고 연기하면서 자연스레 그 불안을 해소한 것 같다. 막상 다른 현장에 가보니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더라. (웃음) 어떤 이미지에 갇혀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기존 이미지조차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데다, 그 위에 새로운 느낌을 칠하고 싶어 하는 창작자도 많다. 

 

<스틸 플라워> 이후 대표작을 갱신하지 못했다는 평가에 주눅 들면 어쩌나 했는데, 괜히 걱정했구나 싶다.

글쎄, 차라리 바닥을 치고 나니 한결 가벼워졌다고 해야 하나. 괴롭고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결국 눈앞에 놓인 작업에 집중하는 것이 유일한 답이었다. 과거에 했던 작업은 말 그대로 과거이고, 난 앞으로도 연기를 계속할 테니까. 지금 할 수 있는 연기는 이전과 또 다를 거다. 이제 곧 서른이기도 하고. 

 

그러게, 연기하면서 20대를 보낸 후 서른을 맞이하는 마음이 어떤지 듣고 싶었다.

사람답게 살았으면 좋겠다. 연기를 계속 일로, 직업으로 지속하기를 바란다. 물론 경제적 안정도 중요한 요소다. 돈 벌면서 일상도 잘 꾸리고 재미있게 살고 싶다. 하고 싶은 작품이야 많다. 디스토피아를 다룬 판타지 작품이 궁금하고, 장르물이 어울린다는 말을 듣지만 정작 장르물을 진하게 찍어본 적도 없다. 아직 안 해본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30대에는 일상의 나와 연기하는 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유지하며 가급적 다양한 도전을 하고 싶다. 단단해지면 좋겠다. 두려움 없이, 연기 때문에 지나치게 괴로워하지 않고. 

 

괴로우면 오래 못 하니까.

안 그래도 내가 연기를 관두면 뭐 할지 생각해봤거든? 근데 하고 싶은 일이 연기 외에 딱히 없더라. 다시 십 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여전히 연기가 선택지에 있다. 그나마 꼽아본 일도 대개 비슷하다. 밴드를 한다거나 소설가가 된다거나. 난 결국 나를 뽐내는 일을 원하는 거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랬고, 어찌 보면 연기하며 느끼는 불안까지도 내가 원했던 것인지 모른다. 다른 일을 선택한다고 해서 그 마음이 잦아들지는 않을 것 같다. 나를 이해하고 나니 그냥 연기를 열심히 하는 것이 낫겠더라. 어쩔 수 없지 않나.

 

스스로 어떤 배우라고 생각하나. 약점 말고 강점을 말해 본다면.

내 강점은 얼굴이지. 최근에 쌍꺼풀이 생겨서 좀 속상하다. (웃음) 처음엔 얼굴 좋다는 말이 싫기도 했다. 나름대로 연기도 열심히 했는데 자꾸 얼굴 얘기만 하니까. 근데 연기 면에서 강점은 하나씩 찾아가는 것 아닐까. 배움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예컨대 난 그간 말 없는 역할을 많이 했기에 말 없는 신에서 연기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 장면과 인물을 이해하는 나만의 방식이 생긴 것 같다. 그렇게 작품을 거치며 조금씩 뭔가 생기겠지. 뭐라도 쌓이겠지.

정하담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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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면, 하늘 보고
<힘을 낼 시간> 현우석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5-01-07
Interview
비겁하지 않게
<힘을 낼 시간> 남궁선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4-12-20
Interview
기이한 진동
<세입자> 김대건·윤은경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4-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