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 사람들
<사랑은 낙엽을 타고>
손시내 / Choice / 2023-12-22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가을은 푸른빛이다. 낭만이 깃든 온화함이 아니라 현실의 차가움이 이 세계를 채우고 있다. 무표정한 사람들은 힘없이 거리를 걷고 무심한 세상은 가난한 자들을 배척하며 점점 더 나빠진다.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고 굶주리며 누군가는 머물던 곳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다. 도무지 좋은 일이라곤 벌어질 것 같지 않은 이곳에도 희망이 스며들 수 있을까?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희망의 건너편>(2017)을 만들고 은퇴를 선언했던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으로, 여러 전작처럼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를 배경으로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안사(알마 포이스티)는 작은 집에서 라디오를 벗 삼아 고독하게 지낸다. 건설 현장 인부인 홀라파(주시 바타넨)는 컨테이너 숙소를 동료들과 나누어 쓴다. 이들은 가진 게 별로 없다. 안사는 유통기한 지난 음식을 집에 가져와 끼니를 해결하려 하고, 홀라파는 축 늘어진 짐 한 보따리만을 가졌다. 표정조차 다양하지 않은 두 사람은 각자 동료의 손에 이끌려 가라오케 바를 찾았다가 서로를 발견한다. 그렇게 멋쩍은 시선 교환과 함께 그들의 푸른 로맨스가 시작된다.

안사와 홀라파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들의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지 못한다. 그들은 상대와 마주보기 전에 흔들리는 자기 몸부터 부여잡아야 한다. 안사는 슈퍼마켓에서 돌연 해고당한다. 폐기해야 할 식품을 노숙인에게 주고 자기 가방에도 넣었기 때문이다. 겨우 주방보조 일을 구하지만 사장이 대마초 거래 혐의로 잡혀가면서 또 다시 무직자 신세가 된다. 그래도 안사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그저 다음 일을 찾고 묵묵히 출퇴근하며 일상을 지속할 뿐이다. 그러는 동안 홀라파도 여러 일자리를 전전한다. 그는 노후화된 장비 때문에 부상당했으나 계속 술을 마시고 있던 탓에 해고를 면치 못한다. 우울해서 술을 마시고 술을 마셔서 우울해진다고 홀라파는 말한다. 뚜렷한 원인 없이 우울과 술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양새지만, 영화는 나쁜 시스템을 대변하는 얼굴들을 통해 광범위한 이유를 제시한다. 고용주는 더 나은 노동환경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돈을 아까워하고, 관리자는 현실과 맞지 않는 원칙만을 읊어댄다. 한편 라디오를 통해 온종일 들려오는 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이다. 의료기관이 폭격 당했다는 사실을 전하는 목소리는 침울하다. 세상은 점점 더 제대로 살기 어려운 곳이 되어간다. 우울은 당연한 감정처럼 느껴진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사랑은 낙엽을 타고>

인물들이 겪는 고난은 참으로 가혹하다. 그런데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항상 날카로운 사회 비판 드라마보다 능청스러운 우화에 더 가까웠다. 이건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이해하는 중요한 이정표다. 안사와 홀라파의 사랑을 방해하는 건 현실만이 아니다. 여기엔 빤한 운명의 장난도 관여한다. 우연히 만나 극장에서 첫 데이트를 한 두 사람. 다음을 기약하며 안사가 건넨 번호 적힌 쪽지는 홀라파의 주머니에 들어갔다가 길바닥에 낙엽처럼 굴러떨어진다. 서로의 이름과 연락처를 모르는 이들은 언젠가 마주치길 기대하며 번갈아 극장을 찾는다. 발걸음은 엇갈리고 애타는 마음은 커진다.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던 두 사람이 우여곡절을 거쳐 만난다는 플롯은 너무나 익숙하다. 이들이 마침내 제대로 서로를 마주하고 경쾌하게 함께 걷는 순간은 정말이지 동화 같다. “날 사랑할 용기가 없나요?”, “내가 기다렸던 그녀는 돌아오지 않으리” 등 결정적인 대목마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는 거의 해설을 대신하며 영화의 여백을 채운다. 어찌나 적절한지 웃음이 절로 터질 때도 있다. 게다가 인물들은 그보다 더 나빠질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우중충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유머를 구사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동화 같은 로맨틱 코미디다.

우화적 진행과 유머의 난입은 카우리스마키가 전작에서도 꾸준히 사용했던 전략이다. 이러한 구성은 현실과 인물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는다. 돌이켜보면 그의 인물들은 세상과 늘 다양한 방식으로 불화했다. <과거가 없는 남자>(2002)의 남자는 기억을 잃어버린 탓에 어느 빈민촌에서 이름도 없이 생활한다. 기억상실이라는 상태는 남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를 세상으로부터 분리한다. 그가 원래 속해있던 세상은 통장, 세금, 신용 같은 단어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곳이다. 그곳에서 어떤 이는 사업 실패의 여파로 범죄자가 되기도 했다. 이름이 없는 곳, 현실과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편안하다. 그들은 서로를 돌봐주고 함께 일한다. 안사와 홀라파가 서로에게 이름을 늦게 알려주는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 <황혼의 빛>(2006)의 코이스티넨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입을 꾹 다문 채 세상에 아무것도 호소하지 않는다. 그의 불화는 어느 정도 자발적으로 보인다. 그가 등지려는 세상은 직업학교 졸업장밖에 없는 이의 기회를 단숨에 빼앗는 곳이다. 카우리스마키의 인물들은 현실과의 불화를 감당하기에 묵직한 고독과 함께 살아간다. 카우리스마키는 이토록 나쁜 세상에서 그토록 외로운 두 사람이 과연 서로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사랑은 낙엽을 타고>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마주침과 사랑의 장소로 영화관을 제시한다는 사실은 제법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감독은 전쟁을 목도하면서 사랑에 대한 갈망, 연대, 희망, 타인에 대한 존중 같은 주제에 대해 말할 필요를 느껴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그런데 2024년 달력을 걸고 스마트폰은 물론 인터넷도 없는 듯 생활하는 인물들을 보고 있자면, 팬데믹이 불러온 영화 상영 환경의 변화도 제작에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짐작해 보게 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온라인 공간 대신 오프라인 영화관의 가능성을 여전히 믿는 사람이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 물론 영화관뿐인 건 아니다. 여기엔 로베르 브레송, 장 뤽 고다르, 오즈 야스지로, 찰리 채플린 같은 영화사의 거장들에 대한 헌사가 가득하다. 안사와 홀라파가 눈짓을 주고받으며 다음을 약속하는 극장 담벼락은 20세기 영화들의 포스터로 빼곡하게 덮여있다. 어쩌면 영화가 무기력한 우리의 사랑을 가능하게 만들고 희망 없는 세상을 환하게 밝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깊은 곳에는 여전히 그러한 믿음이 일렁이고 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Kuolleet lehdet (Fallen Leaves)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출연 알마 포이스티, 주시 바타넨 수입·배급 찬란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81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3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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