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여기 있다
<홈그라운드>
차한비 / Choice / 2023-12-15

“무너지지 말자. 두꺼운 관계망과 넓은 커뮤니티를 쌓자. 행복과 불행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해보고 싶은 것, 하면 즐거운 것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자.” 성소수자 여성의 인터뷰집 『키스하는 언니들』(김보미, 2023) 에 실린 윤김명우 씨의 말이다. 기실 언니며 이모라는 호칭을 거부하는 그는 평소 본인을 ‘명우 형’이라고 칭한다.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이고 생애 절반을 국내 최초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를 가꾸고 지켜내는 데 썼다. 명우 형이 ‘후배’ 퀴어에게 당부하는 일은, 명우 형이 제 삶에서 지속한 일이다. “우리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아서” 운영을 도맡은 레스보스가 곧 퀴어의 관계망과 커뮤니티를 의미한다. 전작 단편 <퀴어의 방>(2018)에서 성소수자의 주거 공간을 들여다봤던 권아람 감독이 레스보스를 찾아간 것은 “주저하지 말자”는 명우 형의 당부를 따른 것처럼 보인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다양한 삶의 형태를 소망하고 실천하는 퀴어의 방을 넘어, 이제 감독은 퀴어들이 모이고 교류하는 장으로 입장한다.

<홈그라운드>는 레스보스를 비롯한 서울 내 퀴어들의 공간을 경유하여 약 50년을 아우른다.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명동의 샤넬다방이 퇴폐 업소로 낙인찍힌 과정을 돌아보는가 하면,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이어진 신촌공원의 기이한 문화를 기록하기도 한다. 사라진 공간의 자취를 더듬을 뿐만 아니라, 현재 망원동에서 댄스 클래스이자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루땐’ 스태프의 고민도 담는다. “두꺼운 관계망과 넓은 커뮤니티”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명우 형과 레스보스는 일종의 증인 역할을 맡는다. 길에서 우연히 ‘바지씨’ 선배를 만났던 순간부터 친구와 동료들로 북적였던 자리에 ‘우리 애들’을 들이기까지, 명우 형이 몸과 마음에 긴 시간을 저장해두고 있어서다. 증언에 힘입어 영화는 재연을 결정한다. 더는 남아 있지 않아 구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공간을 픽션으로 되살리는 것이다. 창고에서 찾아낸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하듯 영화는 배우들을 기용해 샤넬다방을 방문한 여성들이 얼마나 떠들썩하게 어울렸는지, 신촌공원을 메운 수백 명의 청소년들은 대체 뭘 하며 놀았는지 보여준다.

<홈그라운드>
<홈그라운드>

요약하면 ‘우리가 사료가 없지, 역사가 없냐?’라는 반문이다. 존재가 노출되면 위험에 처하는 상황에서 퀴어들은 과거를 입증할 만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신문 기사에선 샤넬다방을 음침한 곳으로 묘사했고 신촌공원은 이전의 생기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무미건조한 곳이 돼버렸다. 영화는 빈칸을 메우려 한다. 해당 공간에 넘쳐흘렀던 풍요를 복원하고, 그곳에 왕래했던 이들이 퇴폐 업소에 드나드는 여자나 일탈 행위를 일삼는 청소년으로 남지 않도록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간다. 세대가 다른 인터뷰이들 또한 용기를 내 카메라 앞에 앉는다. 공간은 단지 고정된 장소를 뜻하지 않는다. 구성원들이 옷차림과 호칭, 관계 규범 등 새로운 문화를 익히고, 일상을 보내며 집단의 기억을 쌓는 터전이다. 출연자들은 각자 양복을 맞춰 입고 다방에 들어간 경험과 ‘흑역사’로 여겼던 십 대 시절을 웃으며 회고한다. 동시에 그러한 기억이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쪽 친구”를 만나야만 숨통이 트였던 이유가 무엇인지 제 언어로 정리한다.

“가필드, 파닥이, 토요, 미라, 제니…” 의자에 앉은 명우 형이 레스보스를 자주 방문했던 아이들 이름을 하나씩 부른다. 다음 장면에서 그는 부엌으로 이동해 파르페를 만든다. 시럽에 젖은 체리가 생크림 위에서 미끄러지길 반복하고,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체리를 다시 올린다. 맨 위에 무지개 빛깔 스프링클을 뿌리면 완성이다. 길쭉한 유리컵에 재료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디저트는 꼭 레스보스 같다. 레스보스는 인연과 사연의 집합소다. 레즈비언 인권운동 모임 ‘끼리끼리’의 프로젝트로 1997년에 문을 연 후, 수많은 사람이 다녀갔고 위기도 여러 번 맞닥뜨렸다. 다만, 운영에 어려움을 겪거나 위치를 옮기면서도 문을 닫진 않았다. 그곳을 기억하는, 그곳에서 여전히 기쁨과 안전을 누리는 이들 덕분이다. 카메라는 손때 묻은 공간을 둘러보며 명우 형과 레스보스를 얼마간 동일시한다. 어떤 공간은 생물과도 같아서 탄생과 성장, 노화를 순리대로 겪는다. 명우 형이 나이 들듯 레스보스도 나이를 먹고, 레스보스가 변화하듯 명우 형도 달라진다.

<홈그라운드>에서 명우 형은 그저 씩씩하고 강인한 인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철없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유쾌하고, 모두를 품에 안는 넉넉한 사람이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 명우 형도 때때로 앓는다. 영화의 또 다른 줄기는 노동이다. 레스보스 안팎에서 명우 형은 쉴 새 없이 일한다. “내가 손을 놓으면 나는 굶어 죽어. 이날 이때까지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야.” 그 말은 자신에 대한 연민과 긍지를 동시에 드러낸다. 그저 산전수전을 겪은 이의 넋두리가 아니라, 노인·여성·성소수자·1인 가구 등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이가 감당하는 삶의 조건으로 해석해야 한다. 코로나19와 이태원 게이 클럽 확진자 보도로 레스보스는 타격을 입는다. 모두를 위한 공간이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이 되자, 명우 형도 버티기 힘들어진다. 그는 텅 빈 레스보스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아르바이트하는 식당에서 ‘이모’ 소리를 들으며 쓴웃음을 짓기도 한다. 다만, 그는 여태 그래 왔듯 자신이 있을 곳과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정한다.

<홈그라운드>
<홈그라운드>

이 영화와 제작진을 향한 인물의 신뢰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은, 의외로 카메라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장면에 나타난다. 새벽에 접어들어서야 귀가하는 명우 형. 카메라는 그를 따라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입구에 머무르며 그가 반지하로 내려가는 모습을 비춘다. “간다. 미안하다.” 짧은 말과 함께 문이 닫히고 나면, 우는 고양이를 “맘마 먹자, 맘마” 하며 달래는 명우 형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상처를 고백하지만 영화에 짐을 얹을까 봐 염려한다. 영화는 그를 파헤치지 않으며 그와 동행하려고 한다. 외롭고 고단한 속내를 그의 것으로 남겨 둔 채, 한 발짝 물러서서 마중과 배웅을 반복하는 식이다. 그렇게 몇 개의 장면을 쌓으면서 영화는 에둘러 일러준다. 명우 형에게 출근이란, 매일 문턱을 넘고 계단을 올라서 지상으로 나가는 일이다. 혼자 남는 시간과 통증에 무너지지 않으려는 노력이고, 슬프면 슬픈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계속 ‘후배’들을 환영할 거라는 다짐이다. 여러 공간을 통과한 후, 영화는 광장 한복판에서 처음처럼 인사를 건넨다. “어서 와, 레스보스 명우 형 여기 있다!”

 

홈그라운드 Home Ground 감독 권아람 출연 윤김명우, 최옥진, 윤수, 전해성, 루시아, 이드 제작 강현아·권아람 배급 씨네소파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84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3년 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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