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가 우는 이유
인디스페이스 기획전 '벽을 해킹하기' 최이다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3-12-13

최이다는 “머릿속에 별자리가 빨리 그려지는” 사람이다. 겉보기엔 동떨어진 소재가 그에겐 하나의 주제로 이어진다. 영화에 인공지능을 불러 와 소외와 차별에 관해 말하는가 하면,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미달한 자신을 부팅에 실패하는 컴퓨터로 재현한다. 최이다는 낯선 모양의 별자리를 더듬으며 긴 시간을 보낸다. 내 눈에만 보이는 반짝임인지, 아니면 남들도 비출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다. 쉼 없이 가지치기하는 상상력이 반가워 기원을 물었더니 기다렸다는 듯 답한다. “제가 너무 산만해서 그래요. 일단 관심이 생기면 다 파보거든요.” 최이다는 그 폭넓은 관심사를 바탕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주관하는 ‘벽을 해킹하기’(2023.12.16~12.17)의 기획을 맡았다. 산만한 사람치고 설명은 명료하다. 최이다는 스크린을 벽으로 설정하며 최대한 다양한 영상을 극장에 포섭할 예정이다. 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해킹한다는 작전. 게임 용어 중 하나인 월핵(Wallhack) 개념을 차용했다. 관객은 벽을 해킹한 플레이어가 되어 스크린 너머로 이동하거나 작품을 둘러싼 경계를 구경할 수 있다. 최이다가 선보이는 비유와 은유를 따라가면 어느새 ‘벽을 해킹하기’는 선한 의도와 주체적 태도, 유희의 가능성까지 동시에 강조하는 행위처럼 들린다. 그가 밤하늘 같은 극장을 찾아올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잘 놀다 가시라!”

 

 

기획전 준비에 서울독립영화제 상영까지 하느라 한동안 바빴겠다.

그러게,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연말 임박하자 모든 마감이 겹치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바빴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도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했다. 단편 <거품의 무게>를 상영했고, 현재 준비하는 장편영화 피칭도 했다. 영화제 개막 직전에 기획전 글 작업을 마무리해서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면 신기하다. 아무리 바빠도 숨 쉴 틈이 어떻게든 생기긴 하더라. 

 

원래 타이트하게 사는 편은 아니고?

원하지 않는데 자꾸 일을 벌이게 된다. 인디스페이스에서 처음 연락받았을 때 의아했다. ‘난 계속 창작을 해왔는데 갑자기 기획이라니?’ 근데 재밌는 제안이 들어오면 내 무덤 파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못 빠져나온다. 프리랜서가 으레 그러하듯 돈은 또 돈대로 벌어야 하고. 결국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돌릴 수밖에 없다. 출퇴근이 딱히 없는 생활이고 일과 사적 영역을 분리하기도 어렵다. 일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니까. 안 그래도 요즘 멘탈 관리를 잘해야겠다고 자주 생각한다.

 

인디스페이스와 이전에 교류한 적은 없었나. 

처음 기획전 이야기가 나온 건 올해 3월이다. 인디스페이스 안소현 국장님이 일찌감치 연락을 주셨고, 영화뿐만 아니라 시각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영상을 틀고 싶다고 하셨다. 기획자 풀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도 내가 시각예술 작가로 활동했고 과거에 전시 기획도 몇 차례 했다 보니 그쪽 작품을 두루두루 알 거라고 예상하셨던 것 같다. 따로 확인하진 않았는데, 작년 12월 인디스페이스와 인디포럼 작가회의가 공동 주관한 기획전 ‘독립영화하다’를 지켜본 분이 나를 추천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김신재 큐레이터가 진행을 맡은 대담에 박세영 감독과 함께 패널로 참여했다. 독립영화 만들기의 고충을 서로 나누다가 내가 무심코 “상업영화를 해킹하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 산업의 대규모 자본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써보고 싶다고. 돌이켜보면 그 말을 일부러 했던 면도 있다. 말엔 책임이 따르니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내가 고민했던 문제였거든. 무의식적으로 상업영화를 독립영화의 안티테제처럼 여겼는데 문득 이 대립 항에 의심이 들었다. 물론 그러한 프레임이 유용한 순간도 있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창작을 제한하는 것 같더라.

<거품의 무게>
<스위스 범죄>

기획글 서두에서 스크린을 벽으로 칭하며, 다양한 갈래의 “영상을 더 잘 즐길 방법”으로 해킹을 제안한다.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을까 궁금했는데 ‘해킹’ 자체는 꽤 오래 갖고 있던 개념으로 보인다. 

어릴 적에 10년 정도 게임 중독자로 살았다. 그때 경험에 영향을 받은 것 아닐까 싶다. 해킹은 보통 나쁜 뜻으로 쓰이지만, 화이트 해커라는 용어가 있듯 실제론 가치 판단이 들어가지 않은 개념이다. 해킹과 동시에 떠올렸던 것이 동충하초다. 겨울엔 벌레였다가 여름엔 풀로 변하는 버섯. 포자가 곤충을 숙주 삼아 기생하면서 나중엔 아예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존재지. 근데 동충하초는 숙주를 죽인다는 점에서 상업영화 신, 그리고 대자본과 동행하겠다는 내 아이디어엔 딱 들어맞지 않았다. ‘어느 한쪽을 죽이지 않고 경계 자체를 이용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벽을 해킹하기, 즉 월핵을 선택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상업과 비상업은 수많은 경계 중 하나일 뿐이다. 누군가는 “상업과 비상업이라는 구분 자체가 나빠”,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는 나눠지지 않아”라고 할 수도 있다. 난 그런 주장이 안일하고 편협하다고 본다. 경계를 지워버리는 순간, 오히려 이야깃거리가 더 없어지거든. 그래서 해킹이란 개념에 착안하게 됐다. 해킹을 하는데 선한 의도로 하면 재밌겠더라. 버그는 예상할 수 없는 오류라는 점에서 부정적 의미를 갖지만, 해킹은 일종의 게임 모드처럼 사용자가 시스템 구조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방법이 될 듯했다. 내 딴에는 치트 키를 쓴 거나 마찬가지다. 벽을 해킹한다고 하면 어느 영상이든 포함할 수 있으니까. 상업과 비상업, 영화와 시각예술, 혹은 국가나 언어 간의 경계까지 다루는 개념이기에 만능으로 다가왔다.

 

게임은 어떤 걸 즐겨 했나. RPG?

일단 아버지가 ‘스타크래프트’로 조기 교육을 해주셨다. 집에 케이블 방송이 안 나와서 늘 아쉬웠다. 어디 놀러 가면 숙소 TV로 게임 방송을 찾아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 ‘뿌요뿌요’ 하느라 밥을 굶기 일쑤였고 한동안 게임에 빠져서 부모님 속을 많이 썩였다. 한두 개를 고를 수 없을 정도로 웬만한 게임을 다 해봤다. 당연히 ‘메이플스토리’와 ‘서든어택’도 했고, 근데 카레이싱 게임은 순발력이 달려서 잘 못했다. 말했던 RPG 게임을 하면서 핵과 버그 개념, ‘현질’이라는 시스템을 인지했다.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나도 모르게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넘고 있더라. (웃음)

 

지금은 중독에서 벗어났나.

아직도 게임을 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거다. 다행히 창작이라는 행위를 발견했고, 게임 중독 상태로 창작을 병행하기란 불가능하거든. 근데 내가 조금 더 똑똑했더라면 영화 말고 게임을 택했을 것 같다. 게임을 종합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보다 어렵고 대단한, 그래서 난 도저히 못 할 것 같은 예술이다.

 

단지 높은 지능을 요해서?

지능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재능이 필요하다. 내가 그림을 그리다가 영화로 넘어온 이유는 캔버스가 답답해서다. 여전히 회화 작품과 작가를 좋아하지만, 창작자로서는 캔버스 앞에서 자꾸 욕심이 생기더라. 캔버스는 일종의 스틸 프레임인데 난 거기에 내러티브를 넣고 싶은 거다. 음악도 삽입하고 싶고, 캐릭터와 배경도 좀 움직였으면 좋겠고. 영화에선 이런 욕구를 채울 수 있었다. 근데 게임은 한 발 더 가서 유저들이 마음대로 탐험할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한다. 관객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인데 그 속에서도 본연의 세계를 유지한다니, 경이롭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수십 년 동안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는 게임 속 세계를 보고 있으면 신기하지.

개발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진짜 미친 사람들이구나 싶다. 그 정도로 대단하다는 뜻이다.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고자 경제학을 공부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생산하고, 게임과 질병 관련 논문도 꾸준히 발표하고. 여러 기술과 노력을 집약한 결과인데 게임을 너무 저평가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기획전 얘기하러 와서 게임 예찬을 펼쳤네. (웃음) 

최이다 ⓒ이영진

정리하면 게임과 미술 등 다양한 분야를 경유해서 영화를 택했고, 이것저것 하는 일도 많다. 자기 소개할 자리가 있으면 뭐라고 설명하나.

때마다 다른데 실은 지금도 “작가님”이라든지 “감독님”이라는 호칭엔 살짝 오그라든다. 그냥 이름을 말하거나 해당 자리에 어울릴 만한 작업을 소개하는 편이다. 간단히 영상 창작자 혹은 영상 노동자라고 칭하기도 한다. 노동자가 좀 더 폭넓고 알맞은 개념 같다. 창작도 노동이니까.

 

관심사도 수시로 바뀔 것 같은데 몇 가지 꼽아 본다면? 

내가 참 산만하다. 성격 탓에 관심사가 넓은데 그래도 첫 번째는 영화다. 작업과 취미를 분리하기 어렵다 보니 영화, 드라마 등 콘텐츠를 가장 눈여겨보는 것 같다. 미술도 놓지 않았다. 시간 나면 전시 보러 간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엔 천문학에 빠져서 망원경 들고 다녔고, 철학도 공부했다. 일단 관심이 생기면 다 파 보는 타입이다. 요새는 기타를 친다. 준비 중인 장편영화 속 주인공이 싱어송라이터거든. 그림을 창작하는 마인드는 알겠는데 작곡하는 사람들 마인드는 상상이 안 되더라. 어떤 생각을 하며 곡을 짓는지 궁금해서 직접 해보기로 했다. 싱어송라이터와 똑같이 체험할 수는 없지만, 기타를 연주해 보니 그림 그리는 과정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더라. 그 후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아무 생각 없이 기타를 잡는다. 산만해서 명상을 잘 못하는데 기타 치다 보면 마음이 좀 편안해진다.

 

<굿>에 출연한 김푸름 배우가 떠오른다. 실제 배우 겸 싱어송라이터인데 영화에 노래하는 장면이 없더라.

원래 푸름 배우가 음악에 더 집중하고 싶다며 출연을 한 차례 거절했다. 그러다 고맙게도 대본을 보고 나서 마음을 돌려줬던 거다.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친구다. 실은 푸름 배우가 노래뿐만 아니라 작곡도 잘하고, 영어마저 유창하다. 근데 내가 영화에서 그걸 다 못하게 했다. 영어도 어눌하고 노래도 못 하는 캐릭터로 설정했거든. 본래 영어 대사를 원문 그대로 줬는데 나중에 국어로 표기해서 다시 전달했다. 푸름 배우가 영어 대사를 너무 완벽하게 소화하는 바람에. (웃음)

 

AI와 인간 사이의 경계를 질문하는 <점선대로>(2018)부터 감독의 작업을 쭉 펼쳐놓고 보면, 경계 짓기를 싫어한다기보다는 경계가 발생하는 지점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경계에 비판적으로 접근하긴 하는데 단순히 ‘경계를 지우자!’는 주장보다는 ‘이 경계가 왜 발생했지?’라는 질문에 관심이 많다. 안 그래도 그저께 <점선대로>를 상영해서 오랜만에 다시 봤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 같더라. (웃음) 당시 문혜인 배우에게 주인공(두뇌 일부가 인공지능인 미술학도. AI도 인간도 아닌 존재 혹은 상대의 편의에 따라 AI와 인간 둘 중 하나로만 취급된다.)의 입장을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다가 다문화 가정이나 이주 노동자처럼 소외된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고 제안했다. “알파고가 우리 일자리를 빼앗을까?”라는 뉴스 헤드라인을 보고 구상했던 작품이다. 제목에선 알파고라고 명명했지만 난 기사에서 ‘우리’가 아닌 존재를 향한 공포를 읽었다. 당시엔 인지하지 못했으나 젠더 감수성과도 연결되는 주제 같다.

 

가장 최근에 연출한 <거품의 무게>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제작했더라. 학교를 다시 들어간 건가.

고등학교 마친 후, 대학에서 현대 미술과 철학을 전공했다. 졸업하고 인디포럼 등 독립영화 신에서 2년간 놀았다. 혼자 영화를 만들긴 했지만 아카데미는 어떻게 영화를 가르치는지 계속 궁금하더라. 아무 정보도 없이, 입시 준비조차 제대로 안 한 상태로 한예종 시험에 응시했다. 실은 입학하고 나서 후회했다. 중퇴를 고민하다가 휴학했는데 그 사이 코로나19가 터지면서 길게 쉬었다. 정주리 감독님이 그래도 졸업장은 따는 것이 좋다며 중퇴를 말려준 덕분에 학교로 돌아갔다. 휴학 기간에 장편영화 현장 스태프로 일했는데 <다음 소희> 촬영장에서 경고 문자를 받았거든. 내일까지 등록금 납부하지 않으면 제적이라고. 그 등록금을 내고 찍은 영화가 <거품의 무게>다. 드디어 졸업했다.

 

<다음 소희>에 스크립터로 참여했다. 장편영화 스태프로 일한 것은 현장 경험을 쌓기 위함이었나. 

스크립터로 일하고 나서 정주리 감독님의 제안으로 후반작업까지 같이 했다. 현장 경험도 쌓고, 돈도 벌고. 내가 경험이 적은데도 감독님이 많이 믿어 주셨다. 첫 번째 장편이 <너와 나>(조현철, 2023)고, 두 번째가 <다음 소희>였다. 운이 좋았다. <너와 나>에선 미술 담당 연출부였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현장에 갔다. 다행히 좋은 작품과 사람들을 만나서 즐겁게 촬영했다.

최이다 ⓒ이영진

이번 기획전에서 상영하는 <스위스 범죄>(2018)는 사회화를 컴퓨터 부팅에 빗댄 실험영화다. 내러티브에 충실한 <굿> <거품의 무게> 등과 대조적인데, 문득 “빈말을 안 해 이야기를 즐겨 지어요”라는 텍스트가 눈에 들어오더라. 감독의 한 줄짜리 자기소개서 같다고 해야 하나?

영화를 시작할 무렵에 만든 작품이고, 당시 현장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땐 주로 단편영화 현장에서 일했다. 미술이든 영화든 개인 작업에 익숙하다 보니 내가 사회생활이라는 걸 진짜 못 하더라. 일 센스가 뛰어나지도 않고. 그러니까 누가 뭘 시키면 그대로 하긴 하는데, 안 가르쳐도 알아서 하는 애들과는 비교가 될 수밖에 없는 거다. 게다가 영화 현장에 좋은 사람도 많지만, 나랑 안 맞는 사람들도 있지 않나. 영화 현장은 직장생활의 에센스나 마찬가지다. 상사 눈치 봐야지, 다음 업무 빨리빨리 준비해야지, 사람들한테 잘 보이도록 기분도 맞춰줘야지. 할 일이 끊이지 않고 생긴다. 그곳에서 일하다 보니 어느 순간 힘이 소진되더라. ‘내가 이런 사회성으로 진짜 영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고민할 만큼 당시엔 심각했다. 한편으로는 반발심도 생겼다. 시각예술에선 무슨 영상을 만들든 제한이 없는데 영화는 그렇지 않다 보니 갈증을 느꼈던 거다. 미친 영상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갈증이 좀 가셨는지.

영화를 하면서 점차 나아졌다. 친구들이 도와준 덕분인데 아부는 여전히 못 한다. 빈말을 절대 못 하지. 굳이 남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좋은 사람을 충분히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위스 범죄>를 만든 후에도 영화 일을 계속하는 걸 보면 내게 타인을 향한 신뢰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일하면서 인생 친구를 여럿 만났고, 지금처럼 그들이 곁에 있다면 난 괜찮다. 친구들을 통해 인류애를 느끼거든. (웃음) 

 

누구랑 친한가.

‘벽을 해킹하기’ 섹션 기획을 함께한 기획자 박유진, ‘개구리들’ 섹션에 패널로 참여하는 멜트미러, 김한주, HWI. ‘개구리들’은 개인적으로 기대하는 섹션이다. 내가 영화계에 신뢰를 잃지 않는, 여기서 계속 뭔가를 해볼 수 있다고 믿는 건 친구들 덕분이거든. 난 창작자인 동시에 관객이지 않나. 친구들이 다음 작업에서 뭘 할지 궁금하고, 그런 기대와 기다림을 약간 삶의 낙으로 여기는 것 같다.

 

말이 나온 김에 섹션 소개를 부탁해야겠다. 섹션을 먼저 만들고 상영작을 모은 듯한데. 

기획을 제대로 해본 적도, 배운 적도 없으니 익숙한 방식을 택했다. 창작과 비슷한 프로세스로 접근했다는 뜻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혹은 나누고 싶은 대화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장을 열어보려 했다. 배우를 캐스팅하듯 작품과 패널을 섭외했다. 특히 패널들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놀기를 바랐다. 주제를 한정하지 않되 방향은 분명하게 제시하겠다는 마음으로 기획 글을 썼다. ‘당신의 눈동자의 건배’ 섹션엔 번역가들이 패널로 참석한다. 번역은 극장에서도 얘기를 꺼냈던 주제다. 안소현 국장님이 번역 관련한 책도 읽으셨고, 나와 대화도 몇 번 주고 받았다. 이 섹션은 작품보다 패널을 먼저 정한 경우다. 달시파켓 번역가를 섭외한 후, 지금까지 참여한 작품 중 몇 편을 골라달라고 부탁드렸다. 세 작품을 알려주셨는데 그중 <너와 나>가 가장 적절해 보였다. 달시파켓 님 혼자 대화를 진행할 수 없으니 또 다른 번역가를 섭외했고, 번역이라는 일에 관해 두 분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실 거라 예상한다. ‘요즘 애들’은 ‘개구리들’과 마찬가지로 초기 단계부터 구상했던 섹션이다. 기획 글에 쓰진 않았지만 두 가지 마음에서 출발했다. 하나는 <나쁜 영화>(장선우, 1997)를 극장에서 보고 싶다는 거였다. 20대에 <나쁜 영화>를 처음 보고 ‘대체 이 에너지는 뭐지?’ 싶었거든. 다른 하나는 최근 유행하는 Y2K 감성에 대한 의문이었다. 뉴진스의 ‘Ditto’가 나오면서 캠코더 영상이 확 뜨지 않았나. 어느 플랫폼에든 뉴트로 감성의 카메라 필터가 등장할 정도인데, 난 그런 현상을 내심 비뚤게 보는 듯하다. ‘너희가 90년대에 관해 뭘 알아?’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경험한 과거의 카메라 질감은 근래 사람들이 환호하는 그 예쁜 감성과 거리가 멀거든. 오히려 내겐 어글리하게 보였고 그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런 차이가 흥미롭고 신기해서 <나쁜 영화>를 선보이고 싶었다. 세기말을 윤색하고 미화해서 즐기는 친구들이 실제 세기말에 살았던 청년들을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원래 패널로 <나쁜 영화> 촬영 팀이자 <만추>(김태용, 2010) <리틀 드러머 걸>(박찬욱, 2018) 등을 작업한 김우형 촬영 감독님을 섭외하려고 했다. ‘꼰대’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정말 훌륭한 어른이다. 촬영을 주제로 대화했을 때, 그분의 경험치 덕분에 이야기 스펙트럼이 확 넓어지는 걸 경험했다. 여러 시간대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대화를 풀어갈 분이라 초대하고 싶었는데 일정 문제로 무산됐다. 

 

결국 김남석 감독, 밴드 불싸조의 한상철 기타리스트, 함연선 마테리알 편집인 세 사람이 참석한다. 패널 섭외로 고민이 많았을 텐데 극장과는 어떤 논의를 거쳤나. 

극장에서도 <나쁜 영화>를 꼭 틀고 싶은데 패널 정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했다. 장선우 감독님을 초대할까 했다가 그것도 여차저차 어렵게 됐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되도록 나보다 어린 사람을 패널로 섭외하기로 했다. <나쁜 영화>를 실제로 개봉 당시에 봤던 세대가 패널로 나오면, 영화와 대화가 특정 시간에 갇힌 느낌이 들 것 같았거든. 마땅한 후보가 없어서 한참 헤매다가 김남석 감독에게 연락했다. 감독이 2019년 리버스 인터뷰에서 <나쁜 영화>를 언급했던 적이 있더라. <나쁜 영화2>를 자기 방식으로 만들고 싶다고. 실제로 만든다면 원작과 형식은 달라도 비슷한 태도를 지닌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영화에 본인만의 코멘트를 달아 줄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참여를 제안했다. 음악가이자 영화 칼럼니스트인 한상철 님은 중학생 시절에 <나쁜 영화>를 봤다고 한다. 나도 이번에 알았는데 <나쁜 영화>로 뮤직비디오도 한 편 만드셨다. 두 분의 대화를 통해 영화를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그리고 두 분 사이에서 사회를 맡을 분으로 함연선 님을 섭외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비천한 한국 영화에 관해 굉장히 솔직하게 얘기했던 자리가 있다. 재밌게 들었던 기억이 나서 연락드렸다. 아무래도 편집인이다 보니 자기 목소리를 기보다는 대화를 조율하는 데 집중해 주실 거라 짐작한다.

<릴릴>(아리킴, 2022)
<Mercurial>(멜트밀러·실리카겔, 2023)

개인적 바람과 기대로 마련했다는 섹션 ‘개구리들’에 관해서도 자세히 듣고 싶다. 감독 본인과 친구들을 개구리에 비유했는데.

1년 전 청개구리 설화의 유래를 찾다가 알았다. 개구리는 좋아서 우는 것이지, 어머니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 슬퍼서 우는 게 아니란걸. 개구리 호흡법은 피부 호흡법과 폐 호흡법 둘로 나뉘는데,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두 가지 방식으로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다. 그 얘기에 꽂혀서 친구들한테 “나는 개구리 같아. 난 일에서 의미를 찾아야만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돈 버는 만큼만 일하면 쉽겠지. 하지만 난 어떤 일을 하든 나만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아니면 내가 일하는 작품에 애정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걸 해내지 못하면 무기력에 쉽게 빠지고. 말하자면 단순히 돈 벌고 의식주를 마련하는 것 외에 다른 방식의 호흡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개구리처럼. 돈을 벌려고 영상을 찍는 동시에, 영상으로 호흡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비슷하거든. 돈만 벌려면 얼마든지 가능한데 자꾸 다른 걸 시도하려고 한다. 토크를 원활하게 진행하고 싶어서 패널은 여러 후보 중 네트워크가 겹치는 사람 위주로 초청했다. 김한주 님은 <굿>의 음악을 맡아줬는데, 사실 그분을 패널로 추천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멜트미러 님이다. 난 얼마 전까지 멜트미러 님이 실리카겔 뮤직비디오 감독인 줄은 몰랐다. 오히려 2019년 아르코미술관 전시에서 본 작업으로 기억했다. 그날 작품 보자마자 생각했거든. ‘이 사람 나랑 동족이다!’ 언젠가 만날 것 같다는 이상한 직감이 들었는데 이번 기회에 연결이 됐다. 만나고 보니 서로 겹치는 지인도 많더라. 본래 이 섹션에서 난 진행자로만 참여하려고 했다. 그러다 지난가을 <너와 나> 미술 감독님이었던 아리킴 작가님 전시를 보고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작가님이 “최이다도 개구리니까 함께 작품을 상영하는 게 맞다”며 밀어주셨다.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어서 가장 어울릴 만한 <스위스 범죄>를 끼워 넣었는데, 결국 이 선택이 섹션 구성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아리킴 작가님도 딱 개구리다. 미술 감독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본인 작업을 이어 나가거든. 이런 개구리들의 존재가 내겐 응원이다. 나도 힘내서 더 잘하고 싶어지거든. 우스갯소리로 “당신들이 영화계와 영상계의 카르텔을 형성하면 좋겠어”라고 한다. (웃음) 이런 사람들에게 돈이 더 많이 가기를, 이들이 원하는 만큼 작업하기를 바란다. 

 

기획전에 들어간 글을 대부분 직접 썼더라. 비유적인 제목, 기술과 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향한 관심이 눈에 띈다. 평소 뭘 보고 즐기나.

온갖 밈을 찾아본다. 밈엔 항상 어떤 통찰이 담긴다고 생각하거든. 대학 다닐 때 미술보다도 철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글을 어렵게 쓰려면 얼마든지 어렵게 쓸 수 있는데, 내가 보기엔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는 것이 훨씬 어렵다. 나름대로 찾은 방법이 비유 같은 우회로를 통해 접근하는 거다. 평소 궁금한 대상이 생기면 무조건 찾아보는 편이다. 하루는 미숫가루를 샀는데 물에 좀처럼 안 섞였다. 왜 이러나 싶어 검색해 보니 미숫가루가 물에 섞이는 것과 설탕이 물에 녹는 건 다른 원리더라. 섹션 중 ‘다들 브로콜리를 좋아하는데, 저는 싫어해요’ 기획 글을 쓸 당시, 처음엔 그 원리에 빗대어 풀까 했다. ‘왜 사람은 자기들끼리 뭉치지? 다른 것과 섞이지 않으려고 하지?’ 질문할 수 있으니까. 딱히 비유를 의도하진 않는다. <스위스 범죄>에서 확인할 수 있듯 난 겉보기에 관련 없는 것들도 빠르게 연결 짓는 편이다. 머릿속에 별자리가 빨리 그려진다고 해야 하나. 아이디어는 많은데, 아주 개인적이고 직관적인 연결이다 보니 검토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남들도 납득할 만한 비유인지 아닌지 판단해야 하니까.

 

이번 기획전에서는 어떤 접속을 기대하나.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잘 놀다 가시라. 굿판에서 들은 말이다. 영혼들을 달래서 보낼 때 그렇게 인사하거든. 상영작 중엔 익숙한 작품도 있지만 극장에서 접하기 어려운 작품도 많다. 낯설어서 긴장할 수도, 뭔가를 공부하고 알아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다 필요 없다. 영화 보다가 졸아도 괜찮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탐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냥 즐기면 좋겠다. ‘벽을 해킹하기’ 자체가 벽을 갖고 놀자는 뜻이다. 가볍게 놀러 가는 기분 정도면 충분하다. 무엇보다 제발 많이 와 주면 좋겠다.

 

장편영화는 어떻게 계획 중인가. 내년에 촬영하려나. 

목표는 항상 ‘내년에 찍겠다!’인데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전반적으로 상황이 어려우니 너무 조바심 내지 않으려고 한다. 시간을 재기보다는 퀄리티에 초점을 맞춰서 진행하는 중이다. 물론 기회가 오면 언제든 잡을 준비는 되어 있다.

 

계절 배경을 정했나.

다른 계절도 크게 상관없지만 여름이면 좋겠다. 꼭 찍고 싶은 장면이 있거든. <전설의 고향>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면 갑자기 천둥이 치면서 귀신이 등장하지 않나. 근데 천둥은 여름에만 친다. 이것도 과학적 원리가 있는데 양전하와 음전하가… 이 설명은 안 해야겠다. 멈춰야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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