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분(김자영)은 손녀의 흔적을 찾고 있다. 매일 낡은 금속 탐지기를 들고 나가 종일 강가를 뒤진다. 커다란 헤드폰에 작은 물안경을 쓰고 무아지경으로 몰두하는 모습은 어딘지 기이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외계의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 같다. 온종일 물길을 헤치며 고생해도 손에 쥐는 건 동전이나 열쇠처럼 자잘한 것들뿐.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분은 지금 손녀의 유해를 찾는 중이다. <물비늘>은 수정(설시연)이 래프팅 사고로 실종된 지 꼭 1년이 되는 날 출발한다. 그간 수색은 중단됐지만 예분은 멈추지 못했다. 운영하던 장례식장까지 닫고 강에 나간다. 곧 다리 공사가 시작되면 수정을 찾는 건 정말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예분은 절실하다. 그런 그에게 오랜 친구 옥임(정애화)이 어려운 이야기를 꺼낸다. 말기 암 환자인 자기가 죽고 나면 손녀 지윤(홍예서)을 대신 봐달라는 부탁이다. 본인을 돌볼 여력조차 없어 보이는 예분인데, 과연 괜찮을까?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수정과 둘도 없는 단짝이었던 지윤이 그날의 사고에 대해 여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지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도대체 무슨 비밀이 숨겨진 걸까. 그러고 보니 등에 비늘 같은 상처를 가진 예분도 무언가 감추고 있는 듯하다.
<물비늘>은 상실과 애도의 영화다. 갑작스레 마주한 이별 앞에 인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처한다. 예분이 하염없이 강바닥을 뒤지는 동안, 지윤은 수영 훈련에 매달린다. 지윤이 이유를 입 밖으로 분명히 꺼내진 않지만 정황을 추측할 만한 단서는 제시된다. 함께 수영부에서 활동한 수정의 마지막 목표는 도 대회 선발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거였다. 수정만큼 수영을 잘하지 못했던 지윤은 갑자기 선발전에 꼭 나가야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수영장 청소를 혼자 도맡으며 개인 훈련 시간도 늘린다. 어쩌면 지윤은 수정이 하지 못한 일에 대신 도전해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저만의 추모를 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지윤이 그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심지어 관객의 호감을 사려 들지도 않는다. 혼잣말로도 구실을 늘어놓지 않는 데다, 누가 질문이라도 하면 날 선 반응을 보이며 뒷걸음질 친다. 그런데 예분도 그렇다. 그토록 고생하면서도 그는 자기편 들어줄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예분은 자신을 “어머니”라 부르며 곤경에서 구해주는 동네 경찰 종철(장준휘)에게 죽은 네 애미한테나 잘했어야 한다고 쏘아붙이는 사람이다. 서로에게도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하는 예분과 지윤은 옥임이 세상을 떠나자 어색한 동거를 시작한다.


두 여자의 고집스러운 면모를 가까이서 보여주며, <물비늘>은 따뜻하고 다정한 치유의 드라마로부터 일찌감치 멀어진다. 영화는 아픔과 비밀을 간직한 두 인물이 그렇게 쉽게 가까워지고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보듬을 수는 없다고 믿는 듯하다. 너와 나 사이에 마찰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홀로 감당해야 할 잘못이 있다. 영화는 짧은 플래시백을 군데군데 심어두며 그들의 비밀을 찬찬히 밝힌다. 사고가 있던 날 예분은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시며 수정에게 심한 말을 했다. 화가 난 수정에게 래프팅을 하자고 말한 건 지윤이다. 그러니까 두 사람에게는 죽음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있다. <물비늘>은 그들에게 손쉬운 핑곗거리를 주는 대신 죄책감을 마주하고 견디는 무거운 시간을 겪게 한다. 그건 그들의 몸에 흔적을 남긴다. 지윤은 줄곧 공황장애 증상으로 힘겨워한다. 집에 있으면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물소리에 시달리고, 수영 연습을 하다가는 수정의 환영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예분은 밤마다 자기 등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다. 형벌이나 고행을 연상케 하는 행위는 쉽사리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를 만든다.
<물비늘>은 <홈리스>(2020)에서 주거 불안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장르적 화법으로 풀어낸 임승현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다. ‘입주 스릴러’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법한 <홈리스>와 비교하자면, 사람 놀라게 하는 대목이 없는 <물비늘>의 톤은 다분히 현실적이다. 다만 가끔 아무렇지 않게 화면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수정의 환영이 기묘한 분위기를 만든다. 실종자를 가족 구성원이 외롭게 찾아 헤맨다는 설정은 한편으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묻게 한다. 하지만 사회적 문제를 출발점으로 삼은 <홈리스>가 그랬듯 <물비늘> 또한 그러한 주제를 밀고 나가는 대신 인물의 내적 갈등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상대와 싸우기 전에 자기 마음속 문제와 먼저 부딪혀야 하는 이들은 손쉽게 해석될 만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처럼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배우들의 얼굴에 제법 오래 머문다. 통상적인 경우보다 조금 더 여유를 두는 편집은 특유의 리듬을 형성하며 고집스러운 인물에게 다가설 여지를 만든다. 인상을 남기는 배우는 단연 김자영이다. 그가 말이 아닌 울음과 신음으로만 짙은 슬픔을 드러낼 때, 영화에 더 깊고 아득한 곳이 있으리라는 예감을 하게 된다. 엷게 떨리는 목소리로 인물의 강한 면모를 표현하는 홍예서 또한 기억해 둘 만한 이름이다.


<물비늘>에는 고즈넉함 속에 날카로움을 간직한 강원도의 풍광이 듬뿍 담긴다. 특히 주요한 공간인 강은 잔잔한 표면 아래 정말 많은 비밀을 품은 듯한 모습이다. 예분이 빛나는 강, 한 가운데 서 있는 이미지는 잊기 어려운 잔상을 남긴다. 동네 사람들끼리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소도시가 배경이지만, 어떤 감정은 이웃과 나누기 힘들 수도 있다는 걸 영화는 보여준다. 예분의 직업이 염습사인 것도 특기할 만하다. 죽음과 그토록 가까웠던 할머니는 여전히 손녀의 마지막 길을 제대로 배웅하지 못했다. 슬픈 일이다. 다만 영화에 등장하는 두 번의 중요한 장례식은 다른 방향에서 찾아온 희망을 마주하게 한다. 정성스레 염을 하고 망자를 보내주는 과정을 함께 거치면서 예분과 지윤은 예상하지 못한 심리적 유대에 다가선다. 고통의 시간을 보낸 이들 앞에는 이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책임이 놓인다. 결함이 있는 보호자와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드디어 내일로 나아갈 아주 작은 힘을 얻는다. <물비늘>은 어둡고 차가운 강바닥을 더듬는 이들에게도 끝내 빛은 찾아오게 마련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물비늘 The Ripple 감독 임승현 출연 김자영, 홍예서, 정애화, 설시연 제작 플라시보 픽쳐스 배급 인디스토리 제작연도 2022년 상영시간 99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3년 12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