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하기만 하면 내가 대신 하지!” 부부는 지금 난임 때문에 고민 중이다. 시험관 시술은 또 실패했다. 정환은 일어나지 않을 일을 가정하며 괜히 으스댄다. 유진은 한숨 쉬며 TV를 보다가 믿지 못할 뉴스를 접한다. 이제 남성도 임신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은 ‘남성 임신’이라는 기상천외한 소재를 택해 많은 여성이 임출육(임신, 출산, 육아)의 굴레 속에서 힘들어하는 현실을 뒤집어본다. 물론 웃음으로 무장한 채로 말이다. “최 씨가 최 씨를 낳으면 적통 중의 적통!”이라는 할아버지의 외침은 그야말로 명대사. 출생률을 높이려면 임신할 수 있는 사람을 늘리면 된다는 무지막지한 주장을 펼치는 삼신 박사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너도 한번 겪어봐라’ 하며 시작한 여정은 병원과 집, 지옥도와 무릉도원을 지나며 임출육의 조건을 찬찬히 곱씹어보는 길로 연결된다. 누군가 간절히 열망하는 임신이 왜 누군가를 그토록 힘들게 만드는가. 노경무 감독은 야심 차게 뽑은 칼로 무를 썬 것인지도 모른다고 속삭였지만, 우리가 딛고 선 땅의 모순을 헤아리는 것이야말로 어렵고도 필수적인 일일 테다. 아팠던 경험을 토대로 한 그림책 『불에서 나온 사람』을 시작으로 에세이 창작과 만화 제작을 한 노경무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졸업 영화로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을 만들었다. 할 이야기가 아직도 많아 보인다. 그가 또 어디로 걸어가게 될까 궁금해 잠시 멈춰 세워봤다.
(제1회 한국단편영화상 수상작은 12월 8일부터 14일까지 인디그라운드 온라인 상영관 indieground.kr/indie/selectOnlineList.do에서 볼 수 있다)
최근 멕시코 몬테레이 국제영화제에서 단편 경쟁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국내외 영화제에서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데 화제작이라는 걸 실감하는지.
세상에 내보이기 전에는 걱정이 많았는데 의외로 좋아해 주셔서 다행이다. 감사하고 신기한 날을 보내고 있다. 정동진독립영화제 관객 반응이 트위터에 올라가면서 입소문이 나던 때가 기억난다. 남자가 임신하는 영화 트니까 여자들이 박수치고 소리 지른다고. (웃음) 그때 이게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라는 걸 느꼈다.
아카데미 졸업 작품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파란 거인>(2021)이 졸업 작품이더라.
<파란 거인>은 정규 과정 졸업 작품이고,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은 장편 과정 졸업 작품이다. 애니메이션은 실사와 비교하면 길이 대비 제작비가 많이 드니까, 학생들끼리 30분씩 나누어서 옴니버스로 1시간 반짜리 장편을 만드는 거로 기획됐다.
남성 임신, 어떻게 시작됐나.
<파란 거인>을 마무리할 무렵, 교수님이 30분짜리 시놉시스 쓰는 수업을 만들고 세 가지 아이템을 구상해 오라고 하셨다.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과제를 내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새벽에 뭐라도 쓰자는 마음으로 앉아 있다가 지금 내가 가장 할 말이 많은 걸 하기로 했다. 그게 임신이었다. 당시 친구들과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주제가 임출육이었거든. 가장 화가 많이 나는 주제이기도 했다. 할 말이 많았다. 거기다 경상도 집안에서 자라며 보고 겪은 은은한 여성 혐오를 떠올리니, 자연스레 남자를 임신하게 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당시 시놉시스에 담고 싶고, 영화를 통해 해보고 싶었던 건 뭘까. 화를 잘 내기?
처음엔 정말 화풀이였다. 그런데 나중에 시놉시스를 다시 보니 못 봐주겠더라. 화만 잔뜩 나 있는 완전히 삐죽삐죽한 글이었다. 그러다 할아버지 캐릭터를 생각하고 나서는 코미디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면 웃으면서 찌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웃자고 하는 얘기잖아~” 하면서 푹. (웃음)
캐릭터 디자인이 흥미롭다. 유진의 다부진 체격과 정환의 가느다란 몸이 대비되는가 하면, 그림체를 억지로 통일하지 않았다는 점도 눈에 띈다.
반항 혹은 허영일 수 있겠지만, 처음에는 흔한 스타일을 답습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뭔가 다른 걸 하고 싶었던 거지. 전체 스타일은 ‘무조건 다르게’ 하기. 그리고 평소 좋아하던 작가님께 캐릭터 디자인을 의뢰했다.


만화책 작업을 함께 한 소희 작가다. 어떤 점이 특히 좋았나.
여자를 반짝이는 눈, 긴 속눈썹, 가느다란 몸 선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 작가님 단편 중에 <네 산소에 퉤>라는 만화가 있다. 가부장제를 비꼬는 내용인데 거기 나오는 캐릭터들이 하나 같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작가님 세계관에 있는 인물들, 그 스타일을 그려주시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색깔 사용도 놀랍다. 각자 피부색이 다르고 원색을 과감하게 써서 굉장히 컬러풀한 세계로 느껴진다.
뭔가 다른 걸 하고 싶은 마음에 일단 피부에 상아색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시선을 확 끄는 색깔 대비를 쓰는 작가님을 미술 감독님으로 찾았다. 일단 원하시는 대로 작업해 보시라고 했더니 성격별로 피부색이 다르게 나오고, 공간과 인물이 대비되면서 캐릭터가 돋보이게 됐다. 지도 교수님은 이렇게 요란하면 사람들이 공감을 잘 못할 거라고 하시더라. (웃음) 더 좋았다. 공감하라고 만드는 게 아니라 풍자하려고 만드는 영화였으니까. 비웃으면 훨씬 좋을 것 같았다. 우리가 호머 심슨한테 막 이입하면서 <심슨 가족>을 보는 게 아니잖나. 그런 느낌으로 정환을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파란 거인>의 음악이 인상적이라는 평이 꽤 많았는데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의 음악도 세계를 풍부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장영규 음악감독과 함께 작업했고 제작기에 과정을 상세히 적기도 했는데.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넷플릭스)을 좋아하는데,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게 음악이다. 그래서 장영규 음악감독님이랑 꼭 같이 작업하고 싶었다. 음악 미팅을 세 네 번 정도 했는데 할 때마다 너무 행복했다. 나중에는 말을 다 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적합한 작업자를 찾아내고 협업 과정을 조율하는 게 감독의 역할이라는 걸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없는 걸 창조한 게 아니고, 내가 쓴 이야기에 어울리는 재능을 갖고 계신 분들한테 같이 하자고 제안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이 어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작업에 오래 머물러 있고 싶지는 않았다. 미러링이라는 주제도 철이 지나려 한다고 생각했고. (웃음) 그렇다고 적당히 타협한 건 아니다. 항상 그분들이 처음 내놓은 작업이 제일 좋더라. 그들을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가기보다, 작업하기 좋은 쪽으로 리드해야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됐다.
연출자로서의 자질을 발견한 거 아닌가.
지나고 나니 즐거운 기억밖에 안 남았다. 대단한 사람들이 내 말을 경청해주고, 해달라고 하는 걸 만들어 주다니, 정말 도파민 잔치였다. (웃음)
풍자가 주된 목적이라고 했지만, 인물들의 선택과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임신이 다루기 까다로운 주제라는 걸 깨닫게 된다.
임신한 여성들이 겪는 일을 정환이 전부 경험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다. 그렇게 유진뿐만 아니라 엄마의 입장까지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런데 정환이가 우습게 보이면, 출산과 육아를 선택한 여성들이 보기에 불편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길 바랐다. 그 사이에서 줄을 타는 게 좀 어려웠다. 어쩌면 칼을 뽑아서 조용히 무를 썬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웃음)
연두색 얼굴의 삼신 박사는 어떻게 만든 건가. 영험한 삼신 할매의 면모와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느낌을 동시에 갖췄다.
원래는 그냥 조연이었다. 삼신이라는 이름도 없었다. 시놉시스를 쓰다 보니 정환을 임신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카리스마 있는 절대 권력자여야겠더라. 그렇게 점차 특별하고 특이한 캐릭터가 되어갔다. 지도 교수님이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에 이상한 사람이 많이 나오니까 한번 보라고 하셨다. 거기 전쟁광이 많은데, 그중에 전쟁을 억제하려면 무기가 더 많아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는 사람이 있다. 출생률에 미쳐있는 박사라면 그 정도의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펼칠 것 같아서 삼신처럼 남자도 임신시키려고 하는 캐릭터가 나왔다.


상영 때마다 챙겨 보는 거로 알고 있다. 웃음이 터지거나, 질문이 많이 나올 때 쾌감이 있을 듯하다.
웃음이 일파만파 퍼질 때 기분 좋고 행복하다. 의외로 조용히 보시면 괜히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웃음) 관객과의 대화 하고 나면 너무 벅차올라서 잠을 잘 못 잔다. 다음에는 더 좋은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하게 된다.
코미디 장르에 대한 관심은 이어지고 있나.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일로 시나리오를 쓴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에는 항상 경험을 가지고 작업을 했다. 아마추어 ‘수영러’의 좌충우돌을 소재로 ‘수영 일기’를 가끔 만들었는데,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나오고 하니까 사람들이 웃고 좋아하더라. 나한테 이런 재능도 있나 싶었다. 평소에 코미디를 더 추구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에 30분 길이로 코미디 작업을 해보니 재밌었다. 도파민 잔치. (웃음) 앞으로 코미디를 좀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소희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안 할 이유 없는 임신』 만화책도 만들었다.
캐릭터 디자인이 너무 잘 나와서 애니메이션으로만 끝내기엔 아까웠다. 소희 작가님이 원래 웃기는 걸 되게 잘하기도 하셔서 책을 기획하게 됐다. 사실 만화는 소희 작가님의 새로운 창작물이라고 봐도 된다. 나는 오리지널 작가와 편집인 정도의 역할만 했을 뿐이다. 애니메이션이 30분 분량으로 만들어지면서 넣을 수 없었던 인물의 전사 같은 것들이 책에 많이 들어가게 됐다. 작가님 나름의 해석에 따라 새로 생긴 에피소드도 있고.
기념품을 만들었다. 남성 임신 센터 창립 기념 수건.
독립 출판을 하면서 팔리지 않고 남아있는 배지나 지류 굿즈들을 많이 봤다. 그걸 보며 지구에도, 나에게도 좋지 않다고 생각하곤 했다. 최대한 실용적인 굿즈를 만들고 싶었다.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무역회사에 다니다가 그림책 만드는 일을 하게 됐다고. 자신을 돌보기 위한 방법으로 그림을 선택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지만 미대 갈 생각은 못했다. 옷을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에서 일하며 취미로 화실에 다녔다. 그때도 내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그러다 몸이 안 좋아지면서 회사도 그만두고 치료에만 집중해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정말 아팠는데, 당시의 마음과 변화를 그림책으로 그리게 됐다. 화실 선생님이 내가 블로그에 썼던 글을 보고 권하신 게 계기였다. 그러면서 사람이 좀 바뀌었다. 내가 느낀 걸 직접 표현해 보니까, 다른 사람의 작업도 조금 더 이해하게 되더라. 하다 보니 계속하고 싶어져서 한국영화아카데미까지 가게 됐다.
애니메이션은 또 다른 영역인데.
그때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같다고 생각했다. (웃음) 가서 시나리오 쓰는 걸 배울 수 있겠거니 했는데, 들어가서 보니 정말 다르더라. 영상의 재미를 새롭게 알게 됐다. 골치가 덜 아프다고 할까. 만화를 그릴 때는 칸 연출이 너무 어려웠다. 선택지가 너무 많거든. 초짜의 입장으로서는 프레임이 한정된 영화가 조금 더 편한 점이 있었다.
작업자로 사는 건 어떤 즐거움을 주나.
사람들이 그림책이나 애니메이션을 보고 피드백을 줄 때,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게 이걸 계속하게 만드는 힘인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