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들이 무너져 가는 재개발 지구엔 냉랭한 기운이 감돈다. 반면, 사회복지사 정미(임채영)는 차 안에서 에어컨도 켜지 않은 채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선배의 비위를 맞추려 애쓴다. 비좁고 뜨거운 실내를 메우는 정미의 땀 냄새와 선배의 담배 냄새가 코에 닿을 듯 느껴질 무렵, 영화는 망설임 없이 공간을 이동한다. 보호자 없이 방치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 남매가 튀어나오고, 그들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더니 정미를 구멍 앞으로 데려간다. 제1회 한국단편영화상 감독상 수상작인 <홀>은 논리를 따질 겨를 없이 세차게 몰아붙인다. 방바닥에 자리한 맨홀 뚜껑을 열면 등장하는 어두컴컴한 지하 세계. 아가리 벌린 괴물처럼 구멍은 끝없이 뭔가를 삼키려 하고, 정미와 아이들은 그곳에 붙들려 벗어날 방법을 모른다. 황혜인 감독은 어릴 적부터 공포 영화와 만화를 즐겨 봤다. 좋아하면서도 제 것으로 취한 적 없던 장르에 감독은 꼭 한 번 도전하고 싶었다. 만류하는 이가 적지 않았으나, 그는 의지를 굽히는 대신 한 가지에만 집중했다. 다음 장면을 예상할 수 없도록 관객을 꽉 붙드는 것. 첫 순간에 관객을 사로잡고 싶다는 황혜인 감독과 만나, 영화 밑에 감춰둔 이야기를 들었다.
(제1회 한국단편영화상 수상작은 12월 8일부터 14일까지 인디그라운드 온라인 상영관 indieground.kr/indie/selectOnlineList.do에서 볼 수 있다)
<홀>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올봄엔 칸영화제에도 다녀왔다고.
관객들이 적극적이고 반응도 커서 진심으로 축하받는 느낌이었다. 내가 정말 칸에 갔다 왔나 싶을 정도로 까마득하다. 올해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입학하고 부산에서 1년을 보낸 다음 올해 초에 졸업했다. 3월에 졸업영화제 치르고 서울로 돌아와 <홀> 후반작업을 마저 이어 갔다. 뭔가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느낌이다. 여전히 부산에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말하자면 다음 스텝으로 넘어온 건데 내가 아직 적응을 못했나 싶기도 하고. 큰 영화제를 다녀오고 큰 상을 받으며 주변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다. 축하와 칭찬을 많이 받았다. 지금처럼 영화에 관해 말할 자리도 생기고. 근데 내 생각엔 이거 다 금방 지나갈 것 같거든. 올해 반짝하고 나면 내년엔 전부 잊어버릴 게 분명하다.
들뜨지 않으려고 마음을 가다듬는 것 같다.
아직 장편 영화를 못 만든 지망생이니까. 난 감독을 꿈꾸는 사람인데, 주변에서는 마치 내가 뭔가를 이미 이룬 것처럼 말한다. “너는 칸에 갔다 왔잖아.” 그렇다고 내가 다음 스텝을 밟은 것은 아니지 않나. 왠지 방황하는 느낌도 들고 ‘이러다 다음 영화 못 찍으면 어떡하지?’ 걱정도 된다.
이렇게 조심성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다. <홀>은 제목 그대로 곳곳에 구멍이 많은 작품인데 분위기로 밀어붙이지 않나. 무엇을 버리고 취할지 콘셉트가 명확했는데.
근데 <홀>은 정말 내 성격과도, 이전에 만들었던 작품과도 다르게 밀어붙였다. 구멍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가보려고 했다. 항상 장르적인 면이 아쉬웠거든. 공포와 미스터리를 좋아하고 나도 해보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됐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무슨 얘기인지 몰라도 된다고 봤다. 그냥 영화를 보는 순간에 오롯이 집중하도록 긴장감을 주는 것만 원했다. ‘망해도 괜찮다. 그거 하나만 시도해 보자.’ 서사가 명확하지 않다는 흠이 있는데, 나름대로 각오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나서 어떤 피드백을 받았나. 타인의 의견을 듣는 과정에서 수정한 부분도 있나.
학교에서 말 안 듣는 애로 통했다. 선생님들은 “내 앞에선 말 듣는 척하면서 뒤에 가선 자기 멋대로 했다”고 하는데, 실은 나도 최대한 피드백을 따라가려고 애썼다. 그게 안 됐을 뿐이다. 교내 평가가 엇갈렸다. 연출과 선생님은 내가 더 고생하길 바랐고, 촬영이나 PD과 선생님은 그대로 해보라는 분위기였다. 한 선생님이 했던 말이 계속 걸렸다. “너의 스타일과 방향을 지지한다. 근데 고생할 게 보인다. 여기서 이걸 못 고치면, 관객에게 다가가려고 시도하지 않으면 너의 10년 뒤를 보장하기가 어렵다.” 정체성을 내려놓지 않고 성공하는 감독도 물론 있지만, 그렇게 성공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린다는 걸 알아서 걱정된다고 하시더라. 내겐 그 말이 약간 협박처럼 들렸다. 넌 10년 후에 사라질 거라는, 지금 고집부리면 다음 영화를 못 찍을 거라는 얘기로 다가왔거든. 모호함, 그것이 내 약점처럼 느껴져서 많이 고민했다.
모호함을 고수하는 면이 대차게 느껴졌는데 감독에게는 일종의 콤플렉스였다니 신기하네.
관객들이 그 모호함을 ‘노력 부족’처럼 받아들일까 봐 걱정했다. 괜히 겉멋 든 것처럼 보이려나 싶고. 나도 관객과 동떨어진 영화를 보면 힘이 빠진다. 답답해서 끝까지 못 보고. <홀>이 그럴까 봐 우려했던 것 같다.
여전히 모호함을 약점으로 느끼나.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작품 방향을 고칠 순 없을 것 같다. <홀>은 <홀>대로 최선을 다했다. 다만, 이후 찍을 작품을 생각하면 약점처럼 다가오는 면이 있다. 엊그제 엄태화 감독님의 강연을 듣고 왔다. <가려진 시간>(2016) <숲>(2012) 등을 무척 좋아하는데, 당시 감독님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를 내면서 되게 헤맸다고 하더라.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의 경우, 재미를 1순위로 놓고 메시지나 표현은 추후 고안한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내가 지금 고민하는 바와 맞닿는 이야기 같다. 사람들한테 소설이나 편지가 아니라 영화를 보여주려는 것 아닌가. 그러면 무엇보다 짧은 시간에 재미를 느끼게 해줘야 한다.


<홀>의 1순위는 뭐라고 생각했는데? <홀>도 재밌으려고 만든 영화 아닌가?
재밌으려고 만들었지. 근데 크리틱을 하면 ‘왜?’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이유를 하나씩 써 내려가다 보면 재미가 사라지더라. 그러니까 내가 오프닝에서 원하는 것은 당황과 긴장과 궁금증이었다. 난 무조건 오프닝에서 관객을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고 싶은데, 거기에 주인공의 전사라든지 이유를 붙이기 시작하니 헷갈리더라. 내가 기능에 초점을 맞춘 바람에 의미를 놓쳤나 싶기도 하고. 실은 정리하기가 어렵다. 내가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의미를 만들려다가 실패하고 이렇게 매듭을 지었는지도.
그러면 핵심이 되는 아이디어를 이야기해 보자. 가정집 방바닥에 거대한 구멍이 있다는 상상은 어디에서 출발했나.
나랑 비슷한 주인공을 만든 다음, 당황스러운 장면을 한 줄 한 줄 쓰는 식이었다. 낯선 공간, 그곳에 있으면 안 될 물체, 가장 어울리지 않는 상황. 정미를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뭔가가 필요했다. 그걸 찾다가 구멍이라고 정했다. 어린 남매와 구멍.
“나랑 비슷한 주인공”이라는 건 무슨 뜻인가.
또래의 사회초년생. ‘내가 모르는 애들 집에 가서 벌어지는 일’로 큰 줄기를 잡고 시작했다. 20대 초반에 아이들이 주인공인 단편영화를 찍었다. 당시엔 내 유년 시절을 아이들에게 투영했는데, 이제 아이들을 중심인물보다는 주변인으로 놓게 된다. 아이들은 옆에 있고 성인인 내가 화자 역할을 하는 듯하다.
세트를 따로 제작했나.
선생님들이 이 작품을 말렸던 이유 중 하나가 예산이었다. (웃음) 내가 원하는 대로 세트를 만들면 2천만 원 가까이 든다고 하더라. 세트 제작에 그만한 돈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 최대한 아끼려고 머리를 굴렸다. 로케이션과 세트장과 CG를 섞어서 완성했다. 기술 영역을 모르니 세트 제작뿐만 아니라 촬영하면서도 어려움이 많았다. 어느 각도로 찍어야 할지도 고민되고, CG도 조언을 구해 나름대로 계획하긴 했는데 구현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나, 촬영감독, PD까지 셋이 머리를 모아 최선의 대안을 강구했다. 미술감독도 여러모로 애써 줬다. 불가능을 염두에 두고 시작했는데 일단 원하는 질감과 레퍼런스 사진을 보냈다. 사람들이 이걸 진짜 구멍이라고 믿으려면 흙과 잔뿌리 같은 것이 보여야 했다. ‘입구와 지하 사이에 경계가 없어야만 받아들이지 않을까? 여기서 튕겨 나오면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은데?’ 다행히 미술감독도 내 생각을 이해했고 ‘홀’만이라도 제대로 구현해 주려 했다. 배우들은 초반에 초록색 화면 앞에서 연기하다가 중반부터 세트장에서 촬영했다. 아무래도 공간을 관찰하고 체험한 후에 좀 더 몰입하더라.
인물에 관해 설명을 아끼지만 전사를 암시하는 부분도 있다. 등장할 때부터 땀에 젖은 채 초조해 보였던 정미는 누가 옆에 있든 자꾸 딴생각에 잠긴다. 모종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인물로 보이는데.
난 오프닝에서 불편함이 온도로 느껴졌으면 했다. 영화는 정미를 설명하지 않지만, 관객은 화면을 통해 정미가 흘리는 땀과 불편한 표정, 눈치 없이 구는 이상한 행동을 마주하게 된다. 물론 단서가 적기에 이 여자의 전사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순 없다. 크리틱에서 정미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라도 넣으라는 조언을 듣기도 했는데, 난 그냥 관객들이 ‘저 여자 지금 되게 불편하구나’ 느끼면 충분하다고 봤다. 임채영 배우에게도 정미는 뭔가에 계속 시달리는 인물이라고 얘기했다.
임채영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 같다.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시나리오에 나온 대사와 행동, 1차원적 배경을 공유했다. 그러고 나서 또다른 레이어를 삽입하듯 우리만 아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시나리오 쓰는 과정도 좀 뒤죽박죽이고 전사도 다 합하면 열 개쯤 됐다. 내가 한 가지만 말하면 채영 배우에게 하나의 표정만 나올 듯해서 조심스러웠다. 예를 들면 오프닝은 전사A로 만들어졌고 엔딩은 전사B에 기반하는데, A와 B는 하나로 정리되는 이야기가 아니었거든. 배우에게 미안했지만 양해를 구하고 내 복잡한 생각을 다 쏟아냈다.
감독이 제공한 여러 이야기 가운데, 배우가 연기하며 무엇을 취사선택했을지는 또 모를 일이네.
특히 오프닝이 그랬다. 그때 정미 표정은 확실히 채영 배우의 해석이다. 대체로 장면마다 내가 보고 싶은 얼굴이 있고 그게 나올 때까지 테이크를 가는 식이었다. 근데 오프닝에선 배우에게 맡기는 쪽이 낫겠더라. 채영 배우가 생각지도 못한 표정을 보여줬다. 내 예상과 다른 얼굴인데도 마음에 들었다.


어린이 배우와 함께하는 현장이었다. 신경 쓸 부분이 적지 않았을 텐데 남매 역으로 출연한 곽수현, 손지유 배우와는 어떤 방식으로 소통했나.
아이들과 작업할 때마다 어렵고 죄짓는 느낌도 든다. 최대한 다각도로 대비하려고 한다. 보호자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서 가능한 현장에 계시지 않도록 부탁드렸다. 촬영 시간엔 아이들이 엄마보다 나와 스태프들을 의지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거든. 조심스럽게 요청했는데 다행히 허락해 주셨다. 아이들과 사전에 만나며 따로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아이들과의 소통은 매번 어렵다. 얘를 알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불쑥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든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거든. 두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지유는 체구도 작고, 여린 성격에 눈물도 많다. 불안한 마음에 결국 어머니를 현장에 모셨다. 근데 촬영 마쳤더니 오히려 수현이보다 지유가 덤덤하더라. 우리 사이를 돌며 능숙하게 선물 돌리고, 한 명씩 안아주고. 반면에 수현이가 펑펑 우는 거다. 극 중 역할처럼 평소 살짝 시니컬하고 종잡을 수 없는 친구인데, 헤어진다고 하니 서운했나 보더라. 우는 애를 겨우 달래서 보냈다. 아이들은 정말 미스터리한 존재들이다. (웃음)
미스터리, 공포, 스릴러 등엔 언제부터 관심이 생겼나.
오래전부터 좋아했지만 마니아라고 말하긴 어렵다. 장르 안 가리고 두루두루 보는 편이거든. 근데 곰곰이 생각하니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공포였다. 어릴 적에 공포 만화 『무서운 게 딱! 좋아!』를 즐겨 봤고 비디오 가게에서도 항상 공포 영화를 골랐다. 난 초등학생이라 빌릴 수 없으니 아빠를 쫓아갔지. ‘토요 미스테리 극장’ ‘서프라이즈’ 같은 TV 프로그램도 좋아했다. 어린 시절엔 취미이자 놀이였던 거다. 성인이 되고 글을 썼을 때, 잔상처럼 남은 것을 옮겨 적다 보니 분위기가 꽤 어두웠다. 제일 가까운 장르가 스릴러더라.
겁 많고 세상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오히려 공포물을 창작하는 데 적합하다고 본다. 감독은 어떤가.
나도 겁이 많다. 그래서 무서운 상황을 먼저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내가 선수를 쳐버리면 그런 일이 절대 안 일어날 것 같거든.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기도 하고. 사실 공포영화도 밤엔 잘 못 본다. 옆방에 오빠가 들어와야만 볼 수 있다. (웃음)
<홀>을 바탕으로 장편영화 시나리오를 쓸 생각도 있다고 했는데.
아직 실행에 옮기진 못했는데 사람들이 뒷얘기를 궁금해할 것 같기는 하다. <홀>과 비슷하지만 다른 걸 하고 싶다. 빨리 <홀>을 마무리하고 다음 작품을 해야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남몰래 질투하고 동경하는 감독이 있다면.
최근에 <잠>(유재선, 2023)을 재밌게 봤다. <잠>과 <어스>(조던 필, 2019)를 보며 ‘저런 첫 순간을 내 것으로 가져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감독에게 매력적인 오프닝이란?
영화를 보는 첫 순간에 까먹는 것. 이게 영화라는 걸 잊게 하는, 혹은 그런 생각조차 못 하게 하는 오프닝을 좋아한다. ‘시간 도둑’ 같은 오프닝을 만들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