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은 위태롭게 시작한다. 양손에 가방과 커피, 핸드폰까지 쥐고 휘청대는 규호(노재원)에게 인선(김해나)이 다가와서 카디건을 건넨다. “작가님이 살 보이는 거 싫어하셔서요.” 규호가 엉겁결에 옷을 입고 나면 영현(최희진)의 작업실 문이 열린다. 그때부터 영화는 숨 막히는 대화를 이어 간다. 유명 작가 영현은 규호에게 인터뷰를 제안하고 사례비로 150만 원을 건넨 참이다. 조건은 두 가지다. 규호의 말은 뭐든 영현이 소재로 쓸 수 있고, 규호는 무조건 답변만 해야 한다는 것. 영현은 곧장 규호의 오랜 친구 민주를 언급한다. “인생에서 제일 증오하는 사람이 규호 씨라고 하던데요?” 인터뷰 형식을 빌린 대화는 조화로운 티키타카가 아니라 추격과 도망으로 치닫는다. 영현은 답을 재촉하고, 규호는 결국 옴짝달싹 못 한 채 돌고 도는 말 속에 갇힌다. 제1회 한국단편영화상 작품상 <타인의 삶>은 노도현 감독의 두 번째 단편. 구성을 최소화하되 시시각각 변화하는 기류를 포착하며 지루할 틈 없이 몰아붙이는 매력이 돋보인다.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감독과 마주 앉아 말 속에 갇히지 않는 길을 궁리했다.
(제1회 한국단편영화상 수상작은 12월 8일부터 14일까지 인디그라운드 온라인 상영관 indieground.kr/indie/selectOnlineList.do에서 볼 수 있다)
동명의 유명 작품이 있기에 제목 짓기가 망설여졌을 텐데.
처음 가제를 지을 때부터 이 제목이었다. 다른 제목을 찾아보긴 했는데 마땅한 것이 없더라. 팀원들도 다 별로라고 하고. ‘에이, 모르겠다’ 하며 원제를 유지했다. 떠오르는 대로 지은 제목이고, 내가 무지한 탓에 <타인의 삶>(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의 존재를 몰랐다. 실은 아직도 그 영화를 안 봤다. 비교되면 슬퍼질까 봐 일부러 멀리하고 있다. (웃음)
인터뷰라는 대화 구조를 가져와 질문자와 답변자를 권력 구도로 해석한 점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관계에 주목했던 이유는 뭔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당시 코로나19가 피크였기에 한 장소에서 해결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만들고 싶었다. 둘째, 새로운 형식에 도전하고 싶었다. 중앙대학교 영화과에 재학 중인데 국내 커리큘럼에선 이야기의 구조나 문법을 상당히 강조한다. 그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면 애초 영화과에 입학하는 일 자체가 어려울 정도다. 의도적으로 구조를 파괴하면서도 좋은 이야기를 만들 길은 없을까. 이러한 의문을 기획 방향으로 삼았다. 세 번째 이유는 개인적 경험과 연결된다.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는데 언젠가부터 이 일이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체스 두는 기분으로 글을 쓴다. 내가 말 하나를 두면 캐릭터가 다음 말을 두는 식이다. 그 느낌을 이야기로 만들자는 생각과 동시에, 작가를 굉장히 권위적이고 잔인한 인물로 설정했다. 타인을 그저 캐릭터로 대하는, 어떻게 하면 이야기가 더 재밌게 흘러갈까만 생각하는 사람.
글을 쓰면서 작가라는 위치에 관해 계속 고민했던 건가.
고민이라기보다는 깨닫게 됐던 것 같다. 정말 예쁘게 캐릭터 빌드업을 쭉 했다가 ‘이제 죽자!’라는 식으로 단번에 부숴버리는 일이 많으니까. 잔인하게 느껴지는데 직업 만족도는 아주 높다. 글을 쓴 지 오래됐다. 아직 졸업을 못한 상태이지만 집필 의뢰가 들어와서 상업 장편이나 OTT 시리즈 각본 등을 쓰고 있다.
졸업은 안 할 생각인가.
실은 안 하려고 했다. 장편 시나리오를 쓰면 졸업 작품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게 사라졌거든. 무조건 연출작을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다. 좋은 상을 받고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얘기하긴 좀 그렇지만, 난 감독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영화 더 안 찍을래’ 하며 졸업을 계속 미뤘다. 근데 최근에 상업 시나리오를 쓰면서 마음이 좀 바뀌었다. 업계에서 시나리오 작가의 입지는 매우 낮다. 거의 하청업체처럼 일하다 보니 마지막으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써서 연출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타인의 삶>은 3학년 때 만든 작품이고, 바쁜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차기작을 준비하려고 한다.


2인의 대화라는 단출한 구성이지만 긴장감이 끝까지 이어진다. 최희진, 노재원 배우의 완급 조절이 탁월하더라. 어떻게든 두 배우와 작업하고 싶었을 듯한데 캐스팅 과정은 순조로웠나.
원래 오디션을 안 보고 마음에 드는 배우에게 직접 연락하는 타입이다. 솔직히 최희진 배우는 거절할 거라 예상했는데 일단 던졌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말하자면, 실은 <타인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15개쯤 썼다. 희진 배우에게 보냈던 시나리오는 그중에서도 무척 따뜻한 버전이었다. (웃음) 희진 배우는 그걸 읽고 수락했는데 실제로 찍게 된 작품은 현재 버전이었던 거다. 많이 당황했을 텐데 그냥 봐주고 넘어간 듯하다. 첫 만남에서 내가 “이건 이렇게 찍고, 저건 저렇게 찍을 거고” 신나서 떠들었거든. ‘애가 참 맑고 젊구나…’ 하며 긍정적으로 결정해 줬던 것 같다. (웃음) 노재원 배우는 같은 학교를 다닌다. 워크샵하며 한두 번 봤던 사이인데, 내 전작 <스타렉스>(2019)를 재밌게 봤다면서 흔쾌히 합류해줬다. 캐스팅 마치고 리딩을 열심히 했다. <타인의 삶>은 거의 실험 영화라서 나도 좀 무서웠거든. 배우들을 많이 풀어주는 편인데 이번에는 리딩을 열세 번쯤 했다. 대사 호흡과 톤, 마가 뜨는 구간 등 음절마다 약속하고 들어갔다. 그러한 요구를 전부 소화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진짜 행복했다.
평소와 다른 작업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찍고 나서 만족했나.
촬영을 마친 직후, 이 영화 망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좋아했던 <스타렉스>랑 분위기도, 스타일도 너무 다르니까. 반년 가까이 영화를 안 건드렸다. 2021년 4월에 촬영했는데 가을에야 편집을 시작했다.
작가 역할에 본인의 경험을 투영하는 것 외에 참고했던 사례나 다른 모델이 있나.
<타인의 삶>은 인터뷰 스릴러로 기획한 작품이다. 앞서 말했던 15개 버전 중엔 휴먼드라마나 로맨스도 있다. 각각 내용이 다르기에 딱히 모델을 놓고 출발했던 이야기는 없다. 다만, 내가 보조작가로 일하면서 만났던 작가님이 한 분 계신다. 그분이 인터뷰를 정말 많이 해서 하루는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정보는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데 사람 리액션은 검색해도 못 찾아”라고 하더라. 그 사람을 관찰하면서 리액션 따려고 인터뷰한다는 거다. 그게 내겐 추악하고 경멸스러운 기억으로 남았다.
규호는 인터뷰하며 당황, 실망, 분노 등 다양한 감정에 휩싸인다. 제한된 공간에서 동선을 만들어 내거나 클로즈업을 활용하여 이를 효과적으로 포착했더라. 촬영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실은 촬영감독이 이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겐 대선배이자 고마운 분이다. 촬영할 사람을 찾지 못해서 울고 있을 때 도와주셨거든. 첫 번째 단편의 경우, 내 또래 여자 촬영감독과 손발을 맞췄다. 나보다 내 영화를 더 좋아하고 아끼는 친구였다. 경험치가 없는 내 입장에선 그 친구를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모든 스태프가 그런 상태일 거라고 천진난만하게 믿었던 거다. 이번 작품을 통해 알게 됐다. ‘내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싫어하는 상태로 현장에 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구나.’ 엄청난 실수라고 할 것까진 아니고 배우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래도 촬영감독이 지금은 이 작품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 선배 포트폴리오 첫 장에 <타인의 삶>이 적혀 있다. (웃음)
영현은 규호를 독 안에 든 쥐처럼 다룬다. 권력과 폭력의 경계에서 제 위치를 이용하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인데 미세하게 변화하는 표정이 인상적이다. 배우에게 강조했던 부분은 뭐였나.
그런 미세한 변화가 어디서 기인하는지 생각하니 정보 차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규호는 모르는 내용을 영현은 알아야 했다. 시나리오에 나오지 않는 정보, 예컨대 민주와 영현의 대화록이라든지 관련 사건 등을 최희진 배우에게만 공유했다. 그래서 최희진 배우는 ‘이미 다 안다’는 자세를 대화 내내 유지했다. 한편, 노재원 배우는 규호라는 캐릭터를 굉장히 불쾌하고 불편하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이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친구들 사이를 오가다니 정말 나쁜 사람 아니냐고. 배우로서 괴로운 경험이었다고 하더라. 노재원 배우는 본인의 판단과 해석에 관해 끝까지 혼란스러운 상태로 촬영에 들어갔고, 연기하면서도 규호를 포장하려고 들지 않았다. 본래 재원 배우는 자신이 맡은 인물을 변호하는 쪽이라고 했다. 캐릭터마다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배경과 논리를 찾으려 애쓴다고. 근데 규호의 논리는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너무 힘들었다고 하더라. 사실 규호의 전사를 미리 써두었는데 고민하다가 재원 배우에게 물어봤다. 이거 줄까, 말까. 그랬더니 재원 배우가 안 보는 게 낫겠다면서 거절했다.
영현의 문하생 혹은 비서처럼 보이는 인선도 베일에 싸여 있긴 마찬가지다.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듯한 김해나 배우의 파리한 인상이 기억이 남는데.
<스타렉스>를 같이 찍고 나서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언니가 가끔 술 먹고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간다. (웃음) 처음에 캐스팅하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연출부 친구들은 만류했다. 단역에다 대사도 서너 줄뿐인데 김해나 배우에게 부탁하긴 민망하다고. 근데 내 생각은 달랐다. 인선은 극에서 공간을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다. 이 공간이 완전히 작가 편인 것처럼 보여야 했다. 그래야 그 속에서 규호만 붕 뜰 테니까. 해나 언니가 다행히 이해해 줬다. 대사가 몇 줄 없는데 열세 번의 리딩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구석에 의자를 놓고 앉더니 영현과 규호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혼자 리액션을 계속하더라. 규호가 발끈하면 언니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그런 모습을 관찰하며 포인트를 다듬을 수 있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재상 특별언급, 왓챠단편상을 차지한 뒤 여러 차례 수상했다. 감독에게 상은 어떤 의미인가.
인생 모토가 “또다시 실수하고 운 좋게 기쁘자”다. 의심이 사그라지지는 않지만, 운 좋게 상을 받으니 “너 계속해도 돼”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인터뷰 초반에 감독 될 마음이 없다고 굳이 말한 이유는 아쉬워서다. 업계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여러 영화제를 방문하고 다른 영화인과 만날 때마다 생각한다. ‘왜 모든 이의 목표가 당연히 감독일 거라고 여기지? 어째서 영화 창작의 정점에 감독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 감독이 싫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길만 최고라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안타깝다. 감독이 못 돼서가 아니라 작가가 되고 싶어서 이 길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30대 초반에 접어든 내 현재 목표이기도 하다. 물론 수상 자체는 기분 좋다. 나는 남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싶거든.
어떤 작가가 되고 싶나.
산파 같은 작가를 꿈꾼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른데 난 인생의 걸작을 남기겠다는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 머릿속에 저장된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태어나게 해주고 싶다. 다행히 글을 빨리 쓰는 편이다. 다들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만 그걸 밖으로 꺼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나. 머릿속에 묻어둔 채로 사라지는 아이디어가 많은 거다. 난 비교적 속도가 빠르니 아이디어를 이야기로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이야기란?
필요한 이야기. 60억 인구가 사는 세상 아닌가. 사람 수가 많은 만큼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을 테고, 난 그게 곧 필요한 이야기라고 본다. 좋은 이야기의 원형은 모르겠지만 영화나 책을 다양하게 접하다 보면 어렴풋하게 그려지는 상은 있다. 다만, 보편적으로 좋은 이야기란 없으니 많은 아티스트가 필요한 것 아닐까. 개인적으로 <쓰리 빌보드>(마틴 맥도나, 2018) 같은 구원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한국단편영화상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타인의 삶>으로 토론토릴아시안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아서 다녀왔다. 통화 연결로 수상 소감을 전하려 했는데, 내가 시차를 이기지 못하고 잠드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시상식 열렸던 시각에 캐나다는 새벽 1시였거든. 눈을 떴는데 부재중 전화가 50통쯤 와 있더라. 민망하고 죄송해서 어찌나 울었는지 모른다.
직접 소감을 전하지 못했는데 이 기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할 때마다 사람들이 웃어서 당황하는데, 사실 <타인의 삶>은 인류애에 기반한 이야기다. 인간이 자신 혹은 타인을 정의하려면 결국 관계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갈수록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나는 내면을 건드리고 부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상을 받음으로써 그 마음에 동의를 얻은 것처럼 느껴진다. 감사하고 좋은 자리에서 또 만나길 바란다. 영화는 항상 외롭고 괴롭지만, 동시에 언제나 새로워서 계속하게 될 것 같다.
다음 작품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어디서 영감을 얻는 편인지도 궁금하다.
원래 내 얘기하길 싫어한다. 이것도 일종의 가스라이팅 결과인데, 보조작가로 일할 당시 작가님이 “소재 다 떨어진 사람이나 자기 얘기하는 거야”라고 했던 적이 있다. 그 말에 세뇌됐는지 아직도 내 얘기를 꺼내려고 하면 좀 기겁한다. 글을 쓸 때마다 외부에서 아이디어를 갖고 왔던 편이다. 근데 이번엔 다르게 하고 싶다. 내 얘기를 해볼 마음이 들어서 장편 기획을 완료한 상태다. 내년 여름에 촬영하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