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나는 목소리>는 강제 징용 피해자, 원폭 피해자, 위안부’ 피해자 등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 속에 죽고 다쳤던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줄곧 영화에 담아온 박수남 감독의 신작이다. 1935년에 태어나 신문기자와 작가로 활동했던 감독은 글에 담기지 않는 침묵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다. 처음 만든 다큐멘터리는 <또 하나의 히로시마>(1985). 이후 일본과 한국을 누비며 생존자들의 목소리와 침묵을 고루 수집했다. <되살아나는 목소리>에서는 그 오랜 세월 창고 한쪽에 쌓여갔던 10만 피트 분량의 16mm 필름이 말 그대로 되살아난다. 영화는 디지털 복원된 필름 사이를 가로지르며 동아시아의 피맺힌 역사와 그 역사를 기록한 박수남 감독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어머니 영화의 제작과 편집을 해왔던 딸 박마의 감독이 전 과정을 함께 했다. 눈의 질병을 앓던 박수남 감독이 점점 더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에는 강인하고도 다정한 모녀의 이야기 역시 쌓인다. 일본에 거주하는 두 감독이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을 계기로 한국을 찾았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들려줄 이야기가 궁금해 만남을 청했다. 박수남 감독은 “이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하고 끊임없이 보따리를 풀다가, “왜요?” 하는 질문에 희미한 미소를 보여주며 비밀을 남기고 떠나갔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부터 계속 관객을 만나고 계십니다. 어떤 경험인가요?
박수남_ 젊은 사람들이 많이 감상해 주고 있어요. 너무 반가워요. 정말 감격했습니다.
박마의_ 상영 끝나고도 관객분들이 떠나지 않고 줄을 서서 소감을 전달해 주었어요. 역사를 다룬 영화라서 젊은 분들한테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했는데, 뜻밖의 반응을 접하고 있는 거죠. 부산에서는 영사 기사님이 일부러 저희를 찾아와 이야기를 전해주기도 했어요. 본인 할아버지가 일본에 강제 징용 됐고, 6.25 전쟁을 겪기도 했다고요. 평생 술과 담배에 빠져 사셔서 무서웠대요. 그런데 이 영화를 통해 할아버지가 고생한 걸 알게 됐다고 했어요. 이틀 연속으로 편지를 써서 가져와 주신 관객분도 있었어요. 러브레터 같았어요. 복원된 영상을 더 많이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복원 및 공개 계획이 더 있으세요?
박마의_ 박수남 아카이브 시리즈를 만들려고 해요. 위안부, 원폭, 오키나와 등 주제별로, 한 편에 1시간 정도요.
예전에도 10만 피트의 필름을 언젠가는 디지털로 복원해야겠다고 생각하셨어요?
박마의_ 꼭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복원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이 많이 들죠. 일본에서는 크라우드 펀딩을 했어요. 10만 피트면 50시간 정도 되는데 지금 10시간만 복원한 거예요. 40시간 분량이 아직 필름으로 있어요.
박수남_ 역사의 보고가 그대로 남아있어요. 아직 창고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전쟁도, 왜정 때도 잘 모르잖아요. 한국의 젊은 세대가 우리나라의 그 피어린 역사를 모르는 게 제 한이었어요. 역사를 알아야 우리나라를 사랑할 수 있고 운동도 할 수 있지요.
박수남 감독님께서는 수십 년간 피해자들의 일상과 증언을 찍어오셨어요. 어떤 마음으로 하셨어요?
박수남_ 유족들에게 차마 전할 수 없는 증언이 많았어요. 듣고 나면 너무 한이 맺혀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말들이었죠. 그걸 어떻게 전하겠어요? 도저히 못 하죠. 하지만 그것을 말하고 기록하는 게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어요. 다음 세대에 역사를 전달해야 하는 거예요. 역사의 책임을 맡은 거죠.
초반에 두 분이 의견 차이를 보이는 장면이 나와요. 줄곧 언쟁하셨나 봐요.
박마의_ 아무래도 세대가 달라서 그런가 봐요. 저는 역사를 좀 더 알기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요. 그래서 항상 어머니한테 조금만 더 쉽게 만들면 안 되냐고 하죠. 아직도 편집할 때 그런 싸움을 하고 있어요. (웃음) 하지만 그 증언을 직접 찍고 들었던 건 제가 아니라 어머니니까요. 최종적인 판단은 어머니가 하시겠지만, 제 고민도 있는 것이죠. 어머니는 굳이 설명하지 않고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게 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물론 저도 그 지점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런데 상황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잖아요. 한국 사람들은 오키나와 전쟁에 대해 잘 모르고, 일본 사람들은 제암리 교회 학살에 대해 잘 몰라요. 그 배경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는 게 제 의견이에요.
박마의 감독님은 <되살아나는 목소리>의 공동 연출자로서 함께 영화를 완성하셨어요. 어머니한테 질문도 많이 하시고, 감독님의 경험을 더하기도 하면서 영화의 결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신 듯해요.
박마의_ 저는 재일조선인 3세잖아요. 3세는 1세를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지막 세대예요. 그 아래 세대는 재일조선인 1세를 더는 볼 수 없죠. 어머니의 필름에는 1세들의 역사가 담겨 있어요. 식민지 시대의 교육을 받고 일본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이야기, 차별받으며 가난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증언이 필름 속에 있어요. 저는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그 사람들의 역사를 더욱 제대로 알 수 있었어요.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됐죠. 조선인 원폭 피해자들은 이중의 차별을 겪었어요. 민족 차별과 함께 원폭 피해자라는 차별도 겪으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그들을 찍고 30년이 지났어요.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 조사하기 위해 어머니하고 같이 피해자들을 지원했던 일본 시민 활동가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찾아갔어요. 그렇게 현대에 남아있는 과제가 무엇인지 알고자 했어요. 필름을 복원하고 영화를 만드는 건 계속 그런 과정이었습니다.
박마의 감독님이 중간에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하신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도 볼 수 있네요. 박수남 감독님이 박마의 감독님과 역사를 연결해 주시는 거예요.
박마의_ 맞아요. 그렇게 미래에 어떤 문제가 남을지도 같이 찾아 나가는 거죠.
박수남_ 마의, 아리메 씨 이야기를 하면 어때?
박마의_ 수백 명의 증언을 기록하는 게 어머니 일이었잖아요. 굉장히 피가 끓어오르는 증언 중 하나가 아리메 씨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박수남_ 2차 대전 후기에 태평양 사이판의 일본 기지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거기엔 우리나라의 젊은 청년들도 많이 끌려갔어요. 강제 징용되어 오키나와에 갔던 청년들이죠. 그들은 정말 많은 희생을 당했어요. 그중에서도 제 마음속에 가장 크게 한이 된 게 아리메 씨가 들려준 이야기예요. 아리메 씨는 오키나와 농민이었어요. 그도 사이판으로 강제 징용 됐죠. 미군이 상륙하자 폭격이 매일 이어졌대요. 다들 꼼짝도 못 하고 굶주릴 수밖에 없었고요. 그걸 가슴 아프게 생각한 조선인 징용군들이 일본군 몰래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어요. 그들이 오키나와에 끌려가 일본군에게 차별받으며 시달렸을 때, 주민들이 몰래 물과 고구마를 가져다주었거든요. 살아남은 조선인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한 거예요. 그런데 사이판에서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도운 조선인 징용군 청년 둘을 색출했어요. 몰래 음식을 가져다주었다며 간첩이라고, 총살해야 한다고 했죠. 하지만 그들은 어릴 때부터 천황 폐하를 위해 죽는 게 명예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 청년들이에요. 그들은 일본군 장교에게 “우리는 간첩이 아니라 일본 시민”이라고 말했어요. 일본군은 총살을 강행하려 했죠. 청년들은 “천황폐하 만세”를 하게 해달라고 했어요. 이 말이 어떻게 들려요? 저는 너무나 피어립니다. 그때는 “너희는 어느 쪽이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했어요.
박마의_ 아리메 씨는 그걸 목격한 분이에요.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순간 청년들이 총살당하는 걸 봤다고, 어머니의 카메라 앞에서 증언하셨죠. 어머니가 30년 전에 오키나와에서 직접 살며 그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어요. 그때 만든 게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1991)이에요. 오키나와 사람들도 그 말을 쉽게 할 수는 없었는데, 같은 시대를 살았던 어머니가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그분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어요.
그러고 보면 90년대에 한국에 오셔서 TV 방송에 출연하셨을 때, 망명자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망명자 혹은 경계인으로서 역사를 대하는 마음이 어떤 건지 궁금했어요.
박수남_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물었던 사람들이 저를 망명시킨 거죠. 저는 망명자가 아니에요. 이북도 이남도 다 제 나라입니다. 누구도 나를 분단하지 못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망명하면 독립운동도 못하고 혁명도 못하는데 어떻게 망명을 할 수 있겠어요. 우리나라를 버리지 않고 지켜야 해요. 제가 평생 만들어 온 기록 영화를 저는 혁명 영화라고 생각해요. 우리 혁명가들은 자기 멋대로 편을 가르는 권력자들의 논리를 인정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어요.
영화엔 박수남 감독님이 지금껏 촬영한 필름들과 함께 홈비디오처럼 찍힌 감독님 가족들의 사적 기록도 들어있습니다. 34세의 ‘마의 짱’이 캠코더를 든 장면이 인상적이기도 한데요. 기록자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카메라를 드는 게 자연스러웠던 걸까요?
박마의_ 어릴 때부터 했던 건 아니고요. 제가 25살 때 한국에서 위안부 할머니들 스무 분이 정부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에 오셨어요. 저는 그때 직장 휴가를 내고 3년간 그분들을 기록했어요. 기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지금 젊은 세대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할머니들의 투쟁은 고립되어 있었어요. TV 방송을 비롯한 어떤 미디어도 그 투쟁을 다루거나 지지하지 않았어요. 저는 직장에 있던 카메라를 겨우 빌려서 찍기 시작했어요. 화면이 엄청나게 흔들리죠. (웃음) 그런데 그때 저한테 어머니를 찍으라고 하신 분이 계셨어요. 한 다큐멘터리 감독님이었는데요, 이제 어머니가 나이 들어가니까 어머니 역사가 중요할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할머니들 찍으면서 어머니도 찍었어요. 기록해야 한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러다 가족들이랑 노는 걸 찍기도 하고 그랬던 거죠. 조카 모습도 담고요.
영화가 명랑하고 밝게 마무리됩니다. 뭉클하기도 하고요. 시력을 잃어가는 박수남 감독님이 “저는 발군의 기억력을 가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면 박마의 감독님이 “좋아!”라고 하시죠.
박마의_ 계속해서 작업해 나가겠다는 뜻이죠. 이제 시작인걸요.
박수남_ 끝은 없어요. (웃음) 눈이 안 보여도 만들 수 있습니다. 만들어왔고요. 앞으로도 만들어 나가겠어요. 그게 역사에 대한 제 책임입니다.
작가로 활동하시다가, 글로는 쓸 수 없는 침묵과 떨리는 몸을 담기 위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셨죠.
박수남_ 완전히 안 보이게 되면 글을 쓰겠습니다. 쓸 수 있게 됐어요. 하느님이 저를 보살펴주셨다고 생각해요. 기적 같아요.
박마의_ 앞이 안 보이는데 글씨를 엄청나게 잘 쓰시거든요. 옛날에는 펜으로 글을 썼잖아요. 손의 감각이 남아있는 거예요. 남들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쓰세요. 지금은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이 바탕이 되는데, 어머니가 태어나고 영화를 만들게 된 이야기가 쭉 담길 거예요. 저널리스트로 살며 썼던 기사 중에서도 글을 뽑고 있고요.
내년에는 볼 수 있을까요?
박마의_ 내년에 일본에서 개봉할 때 출간할 예정이에요.
영화를 완성한 소감이 궁금합니다.
박수남_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돼요.
여전히 갈 길이 먼 것일까요?
박수남_ 멀죠. (웃음) 하지만 갈 데가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죠. 없다면 만들어 나가겠어요. 그것이 혁명 영화니까요.
박마의_ 복원을 시작한 지 8년이 됐어요. 그중 일부라도 하나의 영화로 만들어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 있어 감개무량합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복원을 해나갈 거예요. 한국 분들의 많은 응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