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으로 가는 열차 안, 나란히 앉은 세 남녀가 있다. 청년 지현(우지현)은 서울에서 면접을 마치고 고향인 춘천으로 가는 중이다. 지긋지긋한 춘천을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지만 달리 방도가 없어 보인다. 중년의 묘한 커플 세랑(이세랑)과 흥주(양흥주)는 일상을 등진 채 춘천으로 잠행한다. 세 사람은 그렇게 나란히 앉아 딱 한 번 마주치더니 이내 따로따로의 춘천기행에 오른다. 장우진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춘천, 춘천>(2016)은 제목이 말하듯, 두 편의 춘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의 절반은 지현의 춘천이고 나머지 절반은 세랑과 흥주의 춘천이다. 그 두 이야기는 나란히 붙어 있거나 마주 보고 서 있는 모양새다. 영화는 춘천 소양강댐 인근과 청평사라는 공간을 이야기의 입구이자 출구로 삼으며 춘천의 가을을 극적으로 끌어안은 채 인물 저마다의 춘천에 대한 기억을 불러온다. 장우진 감독은 영화의 형식을 통해 같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다른 경험을 보여주며 처연하고 쓸쓸한 정조를 만들어낸다. 그 시도가 꽤 성공적이다. 제15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대상을 받은 데뷔작 <새출발>(2014)보다 먼저 개봉해 관객과 만나게 된 <춘천, 춘천>으로 장우진 감독을 만났다. <춘천, 춘천>을 중심으로 감독에게 영화의 구조, 공간, 연기 연출법에 관해 물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세 번째 장편 <겨울밤에>(2018)까지 함께 본다면 작품을 거듭할수록 과감해지는 그의 구조적 시도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는 기이한 영화적 체험을 경험할 것이다.
<춘천, 춘천>이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9월 26일 단독 개봉해 장기 상영에 들어갔다. 순회 상영의 형태로 지방 관객들과도 만나는 이례적인 개봉 형태다.
멀티플렉스의 경우 독립영화는 개봉하고 1~2주 후부터 스크린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들인 노력에 비해 효과는 분산되는 것 같다. 프로듀서로 참여한 <초행>(2017, 감독 김대환)을 개봉하며 배운 것도 있다. <춘천, 춘천>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등 영화제에서 긍정적인 평가(<춘천, 춘천>은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비전 부문 감독상을 받았다.)를 받았지만, 어차피 이 영화로 돈을 벌 수는 없을 것 같더라.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홍보, 배급사인 무브먼트에 먼저 지금과 같은 개봉을 제안했다. 올해 첫 눈 올 때까지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한다. 한파가 일찍 온다고 들었는데 조금씩 말을 바꿔가며 물타기 중이다. (웃음)
<춘천, 춘천>과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시네마 프로젝트로 제작한 세 번째 장편 <겨울밤에>(2018) 모두 춘천이라는 공간 특성을 십분 활용해 서로 다른 두 시간(경험)이 구조적으로 서로에게 작용하게끔 뒀다.
<춘천, 춘천>을 만들 당시 영화의 내용보다는 제작 시스템과 연기 연출 방식에 천착했다. 우연을 받아들이고 즉흥적인 연출이 많았지만 이야기하고자 한 바는 크게 틀지 않았던 <겨울밤에>에 비해 <춘천, 춘천>의 변화는 더 크다. 형식과 구조를 생각하다가 내용이 바뀌었고 영화를 만들어가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발견됐다.
원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무엇이고 어떻게 바뀌었나.
처음에는 춘천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청년의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러다가 2014년 추석쯤 고향인 춘천으로 가기 위해 ITX 청춘열차를 탔는데 옆자리에 앉은 중년의 커플이 서로 조심스레 대화를 나누더라.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춘천을 벗어나려 하는 청년과 춘천으로 일탈하려는 중년 커플의 이야기를 각각 1, 2부로 하는 데칼코마니 형식을 떠올렸다. 그 안에 차이를 둬 틀린 그림 찾기를 하듯 풀어보면 어떨까 싶더라. 이러한 형식으로 갈 생각은 처음부터 확고했다. 근데 1, 2부는 완벽히 똑같지 않다. 데칼코마니처럼 복사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 안에 변주와 미묘한 차이가 있다. 2부를 볼 때 1부를 소환하는 게 분명 있다. 한 장을 넘겼는데 자꾸만 앞 장을 들춰보게 만드는 거다. 그때 쓴 트리트먼트는 중년 커플이 막걸리를 마시며 첫사랑 이야기를 하고 청년도 춘천을 떠난 첫사랑과 통화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근데 지현(우지현)이 서울에서 면접을 보고 춘천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내 친구가 그 장면에 등장했는데 그걸 찍으면서 친구에 대한 잊었던 내 실제의 기억이 떠오르더라. 친구의 어머니 장례식 때도 못 갔고 당시 내가 겪던 어려움 같은 거다. 지현이 첫사랑과 통화하는 대신 이 친구와의 그것으로 바꾸면 어떨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흥주(양흥주)와 세랑(이세랑)의 2부를 다 찍을 때까지도 고민은 계속됐다. (영화는 지현이 청평사로 가기 전까지가 먼저 촬영됐고 이어 세랑과 흥주 커플의 이야기를 찍은 뒤 마지막으로 청평사를 배경으로 한 지현의 이야기를 촬영했다.) 최대한 현장의 것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열고 가자고 마음먹었는데도 이야기의 핵심까지 바꾸려니 불안했다. 근데 중년 커플의 이야기를 찍으면서 확신이 들었다. 지현 배우에게 실제 나와 내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줬고 본인도 어떤 지점에서 유사한 점이 있다고 말해줬다. 나를 포함해 세 명의 스태프가 긴밀히 이야기하며 움직인 현장이었기에 가능했다. 제작 규모가 컸다면 아이디어가 떠올랐어도 스스로 통제했을 거다.
<춘천, 춘천>은 월세 보증금을 빼 제작했다고 들었다.
1천 5백만 원으로 만들었다. 시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데뷔작 <새출발>(2014) 이후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다음 작품 빨리 찍어라”였다. <새출발>의 개봉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무의미했고 지쳤다. 자칫 거기에 함몰되면 다음 작업의 기회가 없겠더라. 우리끼리라도 재밌게 영화를 만들자 싶어 시작했고 결과적으로는 <춘천, 춘천> 덕분에 <겨울밤에>는 좀 더 나은 조건에서 제작했고 <새출발>도 곧 관객들과 만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영화의 구조적 실험은 배우와의 긴밀한 협업이 있었기에 가능해 보인다. 우지현, 양흥주, 이상희, 김민중 등의 배우들이 계속 출연하며 연기 연출의 방법을 시험하는 듯 보인다.
로베르 브레송 감독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언어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나와 배우들 사이에 텔레파시가 통한달까. 결국 그런 게 통하는 사람들끼리 친구가 되지 않나. 같이 작업한 배우들과 친구가 됐다.
배우의 사적 경험 등을 영화에서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맞게 된 상황으로 옮기기도 하는 거로 안다. <춘천, 춘천>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해줄 수 있나.
(이)세랑 선배와는 이번에 처음 같이 작업했는데 첫 미팅 때 6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눴다. 세랑 선배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굵직굵직한 이야기를 말씀해주셨다. 내게 자신의 것을 내주신 거다. 그럴 때 선배가 보여주는 표정, 눈빛, 목소리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세랑 선배가 영화에서 남(영화의 세랑)의 이야기를 할 때 세랑 선배가 처음 내게 보여준 표정이 나올 때까지 나는 그저 기다릴 뿐이다. 다만 나는 배우가 그런 표정과 상태가 되도록 비슷한 영화적 상황을 만든다. 이런 방식에 덧붙여 내가 조사하고 경험한 것을 종합한다. 상황 연출은 내 몫이고 그런 상황을 듣고 해석하는 건 배우의 몫이다. 또 당시 내가 미국의 유명한 데이트 사이트를 많이 살피며 인상적인 한 집단을 발견했다. 굉장히 서정적으로 자기소개를 하고 육체적 관계보다는 정신적인 교감과 여행 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ITX에서 만났던 수상한 커플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걸 (양)흥주 선배께 보여드렸더니 되게 재밌어하시며 영화 속 흥주 캐릭터를 만드는 데 집중하셨다.
그럼 대사나 지문이 있는 시나리오는 따로 없다는 건가.
그렇다. 대사는 없고 대화의 내용과 어떤 내용을 먼저 말할지 등의 순서만 있다. 이를테면 세랑과 흥주가 춘천에 도착한 후 막국수를 먹으며 막국수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하고, 나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분위기가 바뀌면, 흥주가 세랑에게 앞 장면에서 세랑이 소스라치게 놀란 이유를 묻는다는 식의 순서를 배우들께 말로 전달 드린다. 종이에 써서 드리는 건 아니다.
그런 정황이나 순서 등은 언제 준비해 배우들에게 전달하는 건가.
촬영 전날 밥이나 술을 먹으며 내일 어떤 장면을 찍을 거라고 얘기 나눈다. 현장에서 바뀌는 부분도 물론 있다. 바꿀 땐 또 확 바꿔버리니 그럴 땐 나도 배우들도 고민에 빠진다.
예를 들자면 어떤 장면인가.
지현이 청평사에 가서 김장하는 장면. 원래 아예 없던 신이다. ‘지현이 청평사에 있는 친구의 어머니 가게에 놀러 갔다가 밥 한 끼를 얻어먹고 친구 어머니께 위로를 받는다’는 내용은 있었다. (실제로 청평사의 그 식당은 감독의 친구 어머니가 운영하는 곳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어머니도 실제 감독의 친구의 어머니다.) 근데 전날 촬영을 마치고 식사를 하는데 어머니께서 ‘내일 김장하는데 찍을래?’라고 하시더라. 근데 상황만 바뀌었을 뿐 들여다보면 하고자 한 내용은 같다.
이 장면에 등장하는 이들 모두 현지 주민들이다. 우지현 배우만 유일하게 지현으로 등장해 현지의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 장면을 1시간 30분 가까이 찍었다. 영화엔 안 나오지만 나도 같이 김장하기도 했고. 현장에 계신 분들 모두 카메라가 돌아가니 영화를 찍는다는 건 알고 계셨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다들 신경조차 안 쓰시더라. 촬영 전에 내가 슬쩍 친구 어머니께 “지현과 내가 친구인데요, 얘가 요즘 취업이 안 돼서 힘들어해요”라고 흘렸다. 이런 상황을 연출하는 거다. 어머니는 그렇게 아시고 반응하며 움직이신 거다.
‘연출은 어차피 뻥’이라는 말한 적 있다.
픽션이지 않나. 원하는 영화적 효과가 나오려면 이야기의 순서나 장면 배치가 잘 돼야 한다. 모든 게 연출이다. 다이렉트 시네마면 또 다를 수도 있겠으나 또 어찌 보면 편집으로 감독의 논조가 들어가기도 할 테니. <춘천, 춘천>은 중간쯤에 있는 영화, 열려 있는 것 같지만 내가 정해놓은 장소와 규칙이 있는 영화다. 지현과 종성의 전화 통화처럼 감독인 나의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내가 종성(모성민. 그는 장우진 감독의 친구로 종성 역으로 에스컬레이터 장면에 출연했고 전화 통화 장면에 목소리로 출연했다. <춘천, 춘천>의 영화음악을 만들기도 했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지현 캐릭터를 통해 한 거다. 내 친구는 영화 속 지현이 나라고 생각하며 반응해줬다. 이야기의 내용은 사실이지만 그 장면은 픽션인 셈이다.


<새출발> 때도 눈에 띄던 롱 테이크는 <춘천, 춘천>, <겨울밤에>로 갈수록 배우 연기 연출 방식과 형식적 실험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됐다.
프레임이 대체로 정적이다. 고정 숏이 많고 인물이 이동하지 않고는 카메라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외부의 소리나 동기로 카메라가 움직인 적은 없다. 인물이 프레임 밖을 자유롭게 오가기보다는 내가 정한 프레임 안에 갇혀 있고 고여 있는 상태처럼 보이길 원했다. 풍경과 인물의 정서가 거의 동일하게 보였음 했다. 빛, 풍경, 현장의 소리, 바람 등이 곧 인물의 내면이길 바랐다. 모네의 그림 같은 내면의 풍경화처럼.
<춘천, 춘천>과 <겨울밤에> 모두 중년 주인공이 등장한다. 10대부터 청년 세대의 암울한 현실을 그리고 있는 여태의 독립영화와는 소재적 차별이 두드러진다.
나부터도 한국독립영화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주제에 피로감을 느낀다. 벗어나고 싶었다. <새출발>에서 이미 지긋지긋하리만치 우울한 청춘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잘 알지 못하지만 알고 싶은 대상을 찍는 게 맞는 것 같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함정에 빠진다. 영화를 만드는 건 관찰과 고민 끝에 통찰에 이르는 과정이 아닐까. 또 중년은 머지않아 내가 맞닥뜨릴 시간이기도 하니 궁금했다.
중년 중에서도 유독 관계가 소원해진 부부나 부부 생활에서 벗어나 잠시 다른 관계를 기대하지만 어떤 결단을 내리지는 못하는 인물들이다.
내가 자주 보는 사람들이 주로 그런 유사한 상황에 있더라. 무엇보다도 그런 사람들이 나한테 털어놓을 말이 많다. (웃음) 오즈 야스지로 감독도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누구보다도 가족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지 않았나. 흥미롭고 또 알 것도 같다. 주말마다 시나리오 작가이자 오랜 동료인 노다 고고(<만춘>(1949)부터 오즈의 유작인 <꽁치의 맛>(1962)까지 함께 작업한 시나리오 작가다.)와 함께 여관에서 만난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들었던 게 엄청난 작업의 자료가 되지 않았겠나.
장우진 감독도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길 즐기는 거로 아는데 그럼 다 이유가…. (웃음)
다 있다. (웃음)
관찰력이 좋은 편이겠다.
관찰력이 좋다기보다는 관찰에 관심이 많다. 혼자 오는 손님이 많은 단골 바가 있었다. 거기서 내 별명이 ‘NPC’(Non Player Character)였다. 게임 용어인데 모든 플레이어가 다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들어주는 사람인 거지. 희한하게도 다들 나한테 자기 얘기를 많이 해 바텐더도 놀랄 정도였다. 많이 듣고 이야기를 수집하길 좋아한다. 재밌다.
몇몇 장면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가장 먼저 홍주와 세랑이 청평사의 한 음식점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이다. 평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의 긴 대화 장면으로 자연광이 만드는 빛과 그림자가 쉼 없이 오가며 신비로운 순간을 만들었다.
가을이고 노을이 좋은 곳이라 오후 3시부터 준비해 촬영하면 되겠다 싶었다. 근데 막상 촬영을 시작하니 노을보다 바람으로 식당 천막이 흔들리며 생기는 그림이 정말 놀라웠다. 그래서 실외에서 실내 장면으로 확 바꿨다. 마침 두 사람이 과거 얘기를 하는 장면이라 빛과 그림자가 되게 마법 같은 그림이 돼줬다. 게다가 운이 좋게도 사마귀까지 갑자기 나타났다. 세랑, 흥주가 사마귀를 핑계로 어린 시절 얘기를 하다가 결국에는 우리가 애초에 계획했던 첫사랑 얘기까지 갈 수 있었다. 사마귀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점화의 불씨가 돼줬다. 극 중 흥주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세랑 옆자리에 앉는 것도 찍으면서 배우들과 찾아간 지점이다. 그런 우연들이 정말 잘 맞아떨어져 한 번에 오케이가 됐다. 촬영을 직접 했는데 찍으면서 ‘포커스 나가면 안 된다, 실수하면 큰일이다’ 싶어 벌벌 떨었다. 소름이 돋더라.

청평사로 간 지현도 사마귀를 보는 장면이 있다.
그때 사마귀가 또 보이는 거다. 2부를 다 찍은 뒤라 보자마자 이건 꼭 찍어야 한다며 지현 배우에게 세랑, 흥주 선배의 촬영 소스를 보여줬다. 곧바로 이해하더라.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모든 상황을 열어두고 받아들였기에 찾아온 순간이다.
세랑이 춘천을 떠나기 위해 춘천역 에스컬레이터를 오를 때 뭔가를 잃어버린 듯 보였고 찾으러 가려 시도하다 그만두는 장면이 있다. <겨울밤에>는 은주(서영화)가 잃어버린 휴대폰을 찾기 위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며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절묘하게 이어진다.
세랑에게 휴대폰을 어디에 뒀더라 하며 찾는 듯한 느낌, 자신한테 있는데 없는 듯한 그런 느낌으로 가면 좋겠다고 했다. 좀 더 의도한 건 세랑에게 춘천이라는 곳이 그런 곳이길 바랐다. 첫사랑과 함께 온 적이 있고, 중년이 돼 다시 왔지만 뭔가를 찾지 못하고 또다시 뭔가를 두고 가는 느낌 같기를. 하지만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고,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 누군가의 아내, 엄마로 돌아가야 한다. 이 부분과 영화의 엔딩은 트리트먼트 때부터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겨울밤에>는 <춘천, 춘천>을 소환해 뭔가를 다시 찾으러 가는 여정이다.
<춘천, 춘천>에서 춘천은 “예쁘다”, “묘한 곳이다”라는 말로 설명된다. 춘천이라는 공간의 특징에서 영화가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간이 영화의 방향과 구조를 결정한다.
딱 1부처럼 대학 진학 전까지 내게 고향 춘천은 지루하고 벗어나고 싶은 지긋지긋한 곳이었다. 아름다움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 후 타지 생활을 오래 했고 <새출발>을 찍고 나자 사람들이 춘천에 관해 물으니 다시 그곳을 생각하게 됐다. 그때 누군가 ‘춘천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곳’, ‘왠지 첫사랑을 만날 것 같은 곳’이라는 얘길 하더라. 그런 말이 인상적이었다. <춘천, 춘천>을 기획하며 정말로 오랜만에 청평사 등지를 가봤다. 그곳이 달리 보였다.
<춘천, 춘천>으로 춘천의 가을을, <겨울밤에>로 춘천의 겨울을 담았다. 춘천의 봄과 여름에 관한 영화도 찍고 싶다고 했다.
며칠 전 <폭력의 씨앗>(2017, 감독 임태규) 팀과 이야기를 하다가 김유정역에 불시착한 여인의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했다. 가제가 <봄봄>이다. 전혀 다른 톤의 사계절 시리즈를 해보고 싶다. 이르면 내년 봄에 하나 만들려나? 돈이 문제다. (웃음)
어린 시절부터 동네 비디오방을 드나들며 영화를 엄청나게 봐온 영화광으로 안다. 지금까지의 영화 작업에 영향을 준 작품들이 있다면.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는 압도하는 연출력과 영화적 설계가 놀랍다. 시각적으로도 강렬해 미술을 전공한 나로서는 한때 미술감독을 꿈꾸게도 했다. 대학 입학 이후 20대 초반에는 에릭 로메르, 다르덴 형제, 홍상수 감독과 지아장커를 비롯한 아시아의 작가 감독들을 한꺼번에 만났다. 스탠리 큐브릭이 철저한 제작 조건과 시스템하에서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들은 그것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깨우쳐준 경우다. 카사베츠의 연기 연출도 놀랍다. 도대체 배우랑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길래 스크린에서 미쳐 날뛰는 하지만 절대 산만하지 않은 배우 연기를 보게 하는가. 다르덴 형제는 뛰어난 형식 못지않게 3막 구조를 잘 지켜가는 뛰어난 이야기꾼이더라. 그 플롯의 정교함을 알게 됐다. 홍상수 감독의 롱 테이크 속 정교한 리듬과 그만의 독특함이 좋다. 지아장커는 공간에서 뽑아낼 수 있는 거의 모든 걸 기막히게 끄집어내더라. 브레송이나 데이빗 린치도 좋아하는 감독이다. 어찌 보면 나는 큐브릭과 로메르라는 극단 사이에서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구조를 통한 스토리텔링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다들 나더러 스토리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나. (웃음)
그럼 <춘천, 춘천>을 찍을 땐 어떤 영화들을 떠올리거나 참고했나.
춘천과 청평사가 나오는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2002)은 당연히 생각했다. 로메르의 특정 영화라기보다는 그의 영화적 정서를 염두에 뒀다. 사실 영화보다 그림을 더 많이 봤다. 특히 모네의 그림들. 색 보정을 할 땐 아예 모네 그림을 옆에 띄워두고 참고했다. 특정 시간대의 빛을 찾으려고 했다. 촬영 때부터 이미 빛을 되게 많이 계산했다.
중고교에 이어 대학 동창인 김대환 감독과 제작사 봄내필름을 차렸다. 연출과 프로듀서의 자리를 서로 왔다 갔다 하며 <춘천, 춘천>, <초행>을 제작했다. 봄내필름의 이후 계획이 궁금하다.
당분간은 투 트랙으로 움직인다. 나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에에 <마지막 사진>(가제)으로 참여한다. 베를린에서 만난 남한 여성과 북한 커플의 이야기로 미스터리 멜로물이다. 생존을 위해 자본주의를 터득한 북한의 장마당 세대와 IMF를 겪은 남한의 80년대생 간에 뭔가 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 국제 공동제작으로 베를린 올 로케이션을 계획한다. 김대환 감독은 집필 중인 시나리오로 국내 제작사와 공동제작을 준비한다. 각자 전문 프로듀서와 일해보고 다시 만났을 땐 즐겁게 가벼운 작품을 해보고 싶다.
미술 전공자인 만큼 그림에서 영화 작업의 영감을 얻는 것 같다. 요즘 많이 보는 그림이나 다음 작업의 썸네일이라고 할 만한 그림이 있다면 말해달라.
피카소를 비롯한 큐비즘의 그림들. 그리고 에른스트 키르히너의 작품들. 키르히너의 그림은 독일의 밤과 그곳의 그라피티를 연상하게 한다. 다음 작품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이미 <겨울밤에>를 함께했던 양정훈 촬영 감독님께 관련 자료를 몽땅 보내드렸다. 이번엔 전작과 다르게 숏을 나누고 큐비즘의 그림처럼 숏들의 충돌을 시도한다. 규모나 연출 방식이 기존과 매우 다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