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끝인가
<빅슬립>
차한비 / Choice / 2023-11-24

기영(김영성)은 제가 몰고 다니는 자동차와 닮은 사내다. 기름칠한 흔적 하나 없이 녹슬고 낡아빠진 인생. 짐인지 쓰레기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운 것들을 잔뜩 실은 구형 승합차처럼 갑갑한 속내. 차 뒷바퀴를 발로 툭툭 치며 길호(최준우)가 묻는다. “아저씨, 이 차 굴러는 가요?” 맹랑한 소년에게 기영은 귀찮다는 투로 응수한다. “굴러가지, 새끼야” 둘은 만난 지 하루쯤 됐다. 어젯밤 기영이 오갈 데 없이 떠도는 길호를 집에 데려와 재웠고 아침이 밝자마자 내보내는 참이다. 다신 오지 말라는 기영의 말이 서운할 법도 한데 길호는 그저 웃어 보인다. 웃지 말라는 타박이 날아들자 고개를 들고 더 크게 웃는다. 아직은 별 사이가 아니지만 사내와 소년은 서로 비슷한 구석이 있음을 알아차린 것 같다. <빅슬립>은 두 사람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굴러가는 여정을 담는다. 한쪽은 오래된 똥차를 끌고 다른 한쪽은 며칠째 씻지 않아 똥냄새가 난다. 상대의 약점을 후벼 윽박지르고 비난하다가 그들은 결국 자신의 얼굴과 마주한다. 기영은 과거를 그대로 남겨두기 싫고 길호는 정해진 미래에서 달아나고 싶다. 어른과 아이는 서로 돌보며 육중한 현재를 함께 굴려야 할 인연이다.

어머니를 잃고 나서 둘은 심정적 고아가 됐다. 아버지가 휘두르는 폭력을 막아주고 사람 구실해야 한다며 타이르던 유일한 존재가 곁을 떠난 후 삶의 마지노선이 무너진 상태다. 두 사람에게 어머니는 곧 집이었다. 그래서 기영은 어머니가 살던 곳에 돌아왔고 길호는 어머니와 살던 곳에서 도망쳤다. 기영이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이, 길호는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이 더는 없다는 사실에 원망을 부풀린다. 영화는 상실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을 기록한다. 실패도 좌절도 만성이라는 듯 기영은 매사 심드렁하다. 타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으며 누군가 다가올라치면 선을 긋고 물러난다. 한편, 그만한 요령조차 익히지 못한 길호는 타인을 수단으로 여긴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 철딱서니처럼 응석을 부리는가 하면, 단맛 쓴맛 다 봤다는 식으로 애늙은이처럼 위악을 떤다. 모습은 달라도 방향은 같다. 둘 다 피하는 중이다. 기영은 어른이 될 시기를 놓쳤고 길호는 아이로 머무를 수 없어서 상실을 부정한다.

<빅슬립>
<빅슬립>

요약하면 평범한 이야기다. 결핍을 지닌 두 인물이 우연히 만나서 상처를 대면하고 회복을 결심한다. 다만, 영화는 성장과 자립 같은 거대한 변화가 단번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기영과 길호는 누군가를 구원할 처지가 못 된다.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용기가 아닌 아픔이다. 길호에게 제 유년 시절을 비춰 보는 기영은 화가 치민다. 저렇게 가출해서 친구들과 거리를 헤매고,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은 척하며 세상을 비웃도록 내버려 두면 길호는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지난 시간을 돌려세울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쯤엔 자기만큼이나 꼬일 대로 꼬인 인생을 감수해야 할 테니까. 짜증 나긴 길호도 마찬가지다. 가정과 학교는 제게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고 그나마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라곤 비슷한 형편에 놓인 친구들뿐이다. 보호자에게 폭행당하고 생존을 고민하는 상황에서 예의나 도덕을 지키라는 훈계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기영과 길호는 한동안 거리를 좁히지 않고 경계심을 유지한다.

<빅슬립>은 대책 없는 희망에 매몰되지 않으려 애쓴다. 인물에게 서둘러 길을 일러주는 대신에, 그들을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영역에 밀어 넣고 불화를 지켜보는 쪽을 택한다. 여기서 불화는 둘의 갈등을 뜻하는 동시에, 그들 각자의 혐오와 불신을 가리킨다. 나를 미워하고 믿지 않기에 너를 응원하거나 의지할 수 없는 관계. 영화는 진중한 어조로 묻는다.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고 여기는 이는 타인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둘은 걸음마 하듯 인사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길호는 출근하는 기영을 배웅하고, 기영은 길호의 끼니를 챙긴다. 두 사람이 한집에 사는 날이 늘어날수록 영화엔 햇빛이 번진다. 인물들은 투박한 농담을 던지며 그 속에 상대를 향한 애정과 염려를 싣기도 한다. 물론 생기를 되찾는 시간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여간해선 풀리지 않는 인생답게 기영과 길호는 또 다른 위기와 맞닥뜨린다. 기영은 일터에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범죄에 가담하고 길호는 친구들에게 휩쓸려 남의 집에 몰래 침입한다.

그제야 둘은 최악의 방식으로 거리를 좁힌다. 인사도 없이 고함부터 지르면서, 농담 아닌 욕설을 내뱉으며 속마음을 전한다. 상대를 몰아세우는 모든 말은 되돌아 꽂힌다. “정신 좀 차리라고!” 너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외침은 난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호소다. 아슬아슬한 여정을 뒤따른 영화는 끝내 제목대로 잠을 마련한다. 기영과 길호가 앞으로 뭘 주고받을지, 관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은 채 그저 실패자와 약자를 몇 발짝 떨어진 곳에 나란히 눕힌다. 고단한 이들이 경계를 풀고 눈 감는 순간, 멀리서 빛나는 해가 두 사람을 다시 환하게 비춘다. 그것은 크고 복된 잠이다.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삶을 여기까지 끌고 오느라 고생했다고, 오늘 하루는 마음 편히 쉬라고 주는 선물이다.

<빅슬립>
<빅슬립>

<빅슬립>은 단편 <물수제비>(2006), <졸업유감>(2009), <명희>(2014) 등을 만든 김태훈 감독의 데뷔작이다. 연출자의 책임을 고민하는 성숙한 태도가 엿보이는 작품으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김영성), 한국영화감독조합상 등을 차지했다. 과장 없이 감정의 파고를 전달하며 뛰어난 연기를 펼친 배우들에게 주목할 만하다. 길호 역은 <흩어진 밤>(이지형, 김솔, 2021)에서 해체 직전의 가정과 부모를 지켜보는 어린 아들을 연기해 호평받은 배우 최준우가 맡는다. 부쩍 성장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능란하게 강약을 조절하며 인물의 절박함과 어리숙함을 고루 표현한다. 기영 역의 배우 김영성은 <범죄도시2>(이상용, 2022)를 포함해 그간 다수 상업영화에서 조·단역으로 얼굴을 알렸다. 주연을 맡은 첫 번째 장편영화 <빅슬립>에서 그는 기존의 강인한 이미지를 고수하는 대신에, 생의 의지를 잃어버린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을 선보이며 극을 흡인력 있게 이끈다.

 

빅슬립 Big Sleep 감독 김태훈 출연 김영성, 최준우 외 제작 CINEBUS 배급 찬란 제작연도 2022년 상영시간 113분 등급 15세이상관람가 개봉 2023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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