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였으면 어려웠을 거다. <어른 김장하>를 시작하고 끝맺는 데는 꼭 두 사람이 필요했다. 오래도록 기자 생활을 하며 비판적 태도를 지켜 온 김주완 기자와 타고난 호기심으로 주변을 구석구석 사려 깊게 관찰하는 김현지 감독. 베일에 싸인 미지의 남자를 제대로 보기 위해 두 사람은 서로의 등 뒤를 살피며 부지런히 걸었다. 그들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사람은 경남 진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김장하. 선생의 행보는 종잡을 수 없다. 고등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다가 국가에 헌납하는가 하면, 셀 수 없이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고, 지역의 사회운동단체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기반을 다졌으며,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한 시설을 짓는데 자금을 댔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일을 했으면서 인터뷰에 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도대체 이 사람에 관해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김주완 기자와 MBC경남의 김현지 PD, 두 선후배 언론인은 김장하 선생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다. ‘허락받지 못한 취재기’, <어른 김장하>는 그렇게 다채롭고 입체적인 우리들의 이야기가 됐다. 쉽지만은 않았을 그들의 여정은 김주완 기자의 책 『줬으면 그만이지』에도 담겨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어 김현지 감독과 김주완 기자에게 만남을 청했다. 김장하 선생이 평생의 과업이던 한약방 문을 닫고 “불백”의 길로 접어들던 날을 회상하며 김현지 감독이 들려준 말처럼, 그들도 멋진 인생을 사는 듯했다.
김장하 선생은 종종 뵙고 있나.
김현지_ 한 달에 한 번씩 같이 산행을 갔다.
김주완_ “불백산행”, 불러줘야 나가는 백수라는 뜻이다. 선생님 농담이다. 얼마 전에 혼자 등산하시다가 미끄러지셔서 좀 다치셨다. 요즘은 등산보다는 남강 둔치의 파크 골프장을 찾으시는 편이다.
김현지_ 전에는 같이 야구장에 갔는데 9회까지 꼼짝도 안 하고 보시더라. 야구를 정말 좋아하신다.
김주완 기자는 1991년에 취재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고. 당시 선생을 만나 뵙기도 했는지.
김주완_ 그땐 못 뵀다. 접촉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거절당했지. 직접 찾아가서 처음 뵌 건 1998년이다. 당시 경남에서 한겨레처럼 시민 주주를 모아서 지역 일간지를 창간했다. 그 과정에서 선생님께 주주로 참여해달라고 부탁하러 남성당한약방으로 찾아갔다. 그때도 거절당했다. 선생님이 진주신문을 매달 천만 원씩 후원하시던 시기였거든. “진주신문 하나만으로도 좀 버겁습니다.” 하시더라. 더 매달리지 않고 진주신문 잘 부탁드린다고 하고 그냥 일어섰다. 그때 창간한 신문이 지금의 경남도민일보다.
직접 만나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김주완_ 선생님을 항상 염두에 두고 기자 생활을 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들려오는 선생님 이야기를 잘 담아두고 있었다. 또 나와 선생님 사이에 겹치는 지인이 많다. 당시 진주신문에 있던 오마이뉴스의 윤성효 기자, 진주신문 사장이었던 박노정 시인, 진주문고 여태훈 사장 같은 분들이다. 98년까지 김장하 선생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어도 그런 분들을 통해 선생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염두에 두고 기자 생활했다는 건 무슨 뜻인가.
김주완_ 1991년에 인터뷰를 거절당하고 이듬해 3월에 주간신문에서 일간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 촌지 문화를 처음 접했다. 경찰서 출입 기자가 됐는데 추석 명절에 두툼한 봉투를 받은 거다. 당시 월급이 50만 원이었는데 봉투 안에 150만 원이 들어있었다. 사회부 선배한테 가서 “이런 걸 받았는데 어떻게 해야 됩니까?” 했더니 “그냥 써라” 하면서 10만 원을 더 보태 주는 거다. 그게 시청, 법원, 검찰청, 교육청 같은 큰 출입처의 촌지 규모는 일선 경찰서보다 훨씬 크다는 뜻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명절이 아닐 때도 늘 촌지가 들어온다고 하더라. 당시 외근 취재 기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자가용이 있었다. 선배들이 나보고도 빨리 면허 따서 차를 사라고 했다. 월급으로는 차를 살 수 없지만 촌지를 그만큼 받는다면 가능한 얘기였다. 그래서 잠깐 고민했는데 김장하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렇게 돈이 많은 데도 자가용 없이 검소하게 살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전 재산을 거의 다 털어서 학교를 설립했잖나. 나도 차를 안 사기로 결심하고 촌지를 효과적으로 거절할 방법을 연구했다. 선생님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기자 생활 중에 언젠가는 선생님 삶을 쭉 취재해서 책으로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김현지 감독은 어떤가. 김장하 선생의 많은 일화 중 유난히 감독을 쿡 찌른 게 있다면.
김현지_ 선생님이 공부 잘하는 남학생들만 지원하신 게 아니라는 점. 촬영을 허락해 주지 않으셔서 찍지 못했지만, 장학생들을 정리해 둔 자료를 보면 여중, 여상, 공고에 다니던 학생들을 많이 지원하신 걸 알 수 있다. 대학에 가지 않은 분들도 지원하셨다. 특히 여학생들이 많았다.
장학생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으신 거로 안다.
김현지_ 맞다. 정확한 장학생 수를 공개하지 않으려 하신다. 장학생들이 홈커밍데이 같은 걸 하고 싶다고 명단을 요청한 적도 있는데, 선생님께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하더라. 혹시라도 장학생들 중에 본인이 잘 안 풀렸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마음이 상할 수도 있으니까. 또 본인은 형평운동을 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무리 짓는 건 좀 경계하고 싶다고 하셨다고.
첫 기획안을 썼던 2019년에는 어디까지 갔던 건가.
김현지_ 나도 직접 찾아가서 뵙지는 못했다. 진주에 계시는 다른 선배들한테 많이 여쭤봤는데, 절대 방송 같은 걸 하실 분이 아니라더라. 나는 그간의 사정을 잘 모르니 못할 건 없지 않겠나 싶었다. (웃음) 그래서 자료실부터 뒤졌다.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하나 발견했다. 선생님이 유일하게 언론 앞에 자신을 드러내셨던 게 형평운동 70주년을 기념하며 기념사업회를 발족했을 때다. 형평운동이 진주에서 발원했다는 걸 알리며 시민들 참여를 독려하는 자리였다. 그걸 발견하고 너무 기뻤다. 그걸 남겨놓은 선배들이 자랑스럽더라.
영상으로 선생을 처음 본 건데, 첫인상은 어땠나.
김현지_ 깐깐하고 차갑고 무서운 느낌이었다. 인터뷰 못 하겠구나 싶었지. 게다가 회사에 사정이 생겨 기획안을 2년 정도 묵혔다. 그러다 기회가 생겼을 때 남성당에 전화를 했다. 선생님이 직접 받으시더라. ‘어버버’하다가 끊었다. (웃음) 그리고 2021년 11월에 처음 찾아뵀다. 직접 뵈니까 그냥 작고 고운 할아버지였다. 차나 한잔하고 가라고 차도 따라주시고. 근데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고 했더니 대답을 안 하시더라. 그때부터 식은땀이 났다.
김주완_ 처음부터 선생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했던가?
김현지_ 아니다. 형평운동 100주년 앞두고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했다.
김주완 기자는 언제 섭외했나.
김현지_ 2021년에 회사에서 재가가 떨어지자마자 섭외했다. 유일하게 김장하 선생님에 대한 텍스트를 쓴 게 김주완 기자였다.
취재는 2015년부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김주완_ 당시 『풍운아 채현국』이라는 책을 쓰고, 포털 다음의 ‘뉴스펀딩’이라는 섹션에 ‘풍운아 채현국과 시대의 어른들’이라는 글을 7회에 걸쳐 연재했다. 마지막 회에 김장하 선생님을 쓰고 싶었는데 인터뷰를 안 하시니까 난감했다. 다른 분들은 전부 인터뷰해서 썼거든. 그래서 그동안 나름대로 수집하고 취재한 걸 바탕으로 그냥 써버렸다. 근데 굉장히 반향이 컸다. 허락도 없이 썼으니 걱정이 돼서 진주에 찾아가서 선생님과 가깝게 지내는 세 분을 만났다. 박노정 시인, 여태훈 사장, 홍창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다행히 세 분 반응이 다 괜찮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 본격적으로 취재해서 책을 써보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선생님 허락 없이 쓴 건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했더니, 오후 4시에 가면 한약방에 손님이 제일 뜸하다면서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하라고 하시더라. 찾아가서 이런 글을 썼다고 말씀드렸더니 가만히 침묵을 지키시다가 “그래 막 휘갈겨 놨대” 하시는 거다. (웃음) 그러다 차나 한잔하자고 하셔서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20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게 본격적인 취재의 시작이다. 2015년 3월 31일로 기억한다.
김현지 감독도 참 막막했겠다.
김현지_ 직접 인터뷰는 절대 안 될 것 같아서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인물 다큐를 만들려고 했다. 주변인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듣고, 수혜자들이 현재 어떻게 지내는지를 통해 김장하를 간접적으로 보여주자는 기획이었다. 그런데 김장하 선생님이 은퇴를 계획하시면서 계속 신변을 정리하는 자리가 생겼다. 진주 가을문예 마지막 시상식이나 남성문화재단 해산과 수증증서 전달식 같은 행사가 있었던 거다. 공식적인 자리니까 카메라를 들고 가서 선생님을 촬영할 수 있었고, 계속 마주치다 보니 자료가 쌓였다. 보면 알겠지만 정식으로 마이크 달고 인터뷰한 건 단 하나도 없다.
김주완_ 대화하다가 갑자기 전화 받고 그러시잖나. (웃음) 옆에서는 계속 한약방 직원이 카드 긁고 계산서 끊는 소리가 나고.
김현지_ 한편으론 스토리 라인이 너무 산만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키맨이 필요했다. 그래서 떠올린 게 김주완 기자다. 워낙 완고하고 허튼 말 안 하는 캐릭터인데 그게 좋았다. 선생님을 우상화하는 걸 피하고 싶었는데, 김주완 기자는 선생님 업적에 대해서도 의심해 보고 질문해 볼 수 있는 사람이라 믿음이 갔다. 선생님의 지원을 받은 진주신문의 행로를 추궁하는 장면 되게 좋아한다. 그런 얘기는 김주완 기자 아니면 못한다.
협업하기로 하고서 정한 원칙이 있다면.
김현지_ 공동 취재하고 모든 자료를 다 공유하는 것, 나는 영화를 만들고 기자님은 책을 써서 동시에 오픈하는 것이 우리 원칙이었다. 기자님이 내건 조건은 본인을 연출하려고 하지 말라는 거였다. 당연히 오케이했지. 그런데 간과한 게 있었다. “다시 한번 걸어주세요. 인서트 찍게 잠시만 더 대화를 나눠주세요.” 하는 걸 우리는 연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방송하는 입장에서 그건 당연한 거니까. 자연스럽게 대화를 더 나눠달라고 했더니 되게 황당해하시고 납득을 못하시더라. 근데 기자님이 호기심이 많다. 계속 직접 뭘 찍고 편집하고 포스팅하시잖나. 인서트의 개념을 인지하시고 필요성을 이해하시고 나서는 되게 협조적으로 바뀌셨다. (웃음)
김주완_ 처음엔 살짝 짜증 났다. (웃음) 준비해 간 질문을 하고 팩트 확인하고 다 끝났는데 뭘 더 찍으라고 하니까 어색하더라. 근데 하다 보니까 보완이 되는 게 느껴졌다. 내 질문이 끝나고 나면 감독님이 감성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이런 걸 물어보는 거다. 난 그런 질문 할 생각을 못 하는 편인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 협업을 해보니 서로 보완되는 점이 많더라.
김현지_ 난 팩트가 너무 완벽하게 체크 돼 있으니 편집할 때 엄청 편했다.
두 사람 질문 내용과 말투 다른 게 관객한테도 느껴진다. 김현지 감독 질문에 김장하 선생이 살갑게 답해주는 대목도 참 좋고.
김현지_ 회식 시켜주셨다고 하면 돼지갈비인지 소갈비인지 물어보잖나. 참을 수가 없다. (웃음) 방송에서 절대 안 하는 게 “네”, “아니요” 로만 답할 질문을 던지는 거다.
김주완 기자는 ‘키맨’이라는 표현처럼 영화를 이끌고 가는 역할을 했다. 초반에는 기자로서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본인 이야기하는 게 어색하진 않았나.
김주완_ 원래 그런 콘셉트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에 김현지 감독이 자꾸 나에 관해 물어보거나 나를 촬영하는 이유를 잘 이해를 못했다. 좀 부담스럽고 어색했다. 왜 이런 것까지 물어보나 싶고. 그런데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서 이해했다.
김현지_ 기자님이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지 고민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김장하 선생님의 업적을 이야기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고민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또 불안해하는 어른들한테도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김주완 기자님이 필요했다.
앞서 진주신문 이야기도 잠깐 했는데, 취재를 진행하며 품었던 의문이 더 있었을 것 같다.
김주완_ 선생님이 명신고등학교 운영할 때 세운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친인척을 채용하지 않고, 돈을 받고 채용하지 않으며, 권력에 굽히지 않겠다는 것. 그런데 서무과장에 친동생을 채용했다. 그래서 그걸 선생님께 질문했다. 원칙 하나가 깨진 거잖나. 그랬더니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답하시더라. 당시에는 실제로 학교 내 비리가 굉장히 흔할 때다. 책걸상이나 비품을 구입할 때 업체와 커미션이 있는 거지. 명신고등학교에는 그런 비리가 없었다. 기존의 학교 세무 행정을 해보지 않은 동생이 서무과장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김현지_ 나중에 학교를 국가에 헌납했을 때, 선생님께서 경상남도교육청에 전 교사와 직원의 고용 승계를 약속받았다. 거기서 딱 한 명, 동생분만 빠져있었다.
김주완_ 또 하나 의심했던 게 있다. 선생님이 아무리 진보적이라고 해도 그 연세의 경상도 어른이라면 가부장적이고 여성 문제에 관해서는 보수적일 거라고 봤다. 당장 내 동기들, 후배들도 밖에서는 진보를 외치고 집에서는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좀 했다. 그 정도는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선생님은 예상을 뛰어넘으시더라.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평등한 관점을 가진 데다가, 가정폭력 피해 여성 보호시설을 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셨고, 호주제 폐지에도 목소리를 내셨다.
김현지_ 난 딱히 의심한 건 없고, 뭔가 단점이라도 나와야 하지 않나 싶어서 주변을 캤는데 하나도 없더라. 선생님은 참 외롭고 쓸쓸했겠다, 이 사람은 누가 달래주나 싶었다.
결함 없는 인물이 주인공이면 구성적으로도 꽤 고민됐을 텐데.
김현지_ 콘텐츠의 위기가 없었다고 할까. (웃음) 동창이신 최관경 선생님 인터뷰에서 그걸 극복할 힌트를 얻었다. 김장하의 삶이 부럽지 않냐고 질문했는데 단번에 하나도 안 부럽다, 그렇게 신과 같이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냐고 하시잖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씀을 대신 해주신 셈이다. 그런 말들로 극복하고 우회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역정 내실까 봐 조마조마했다는 말을 꽤 들었는데, 영화에서 본 바로는 화내는 기색조차 없으시더라.
김현지_ 화내시진 않는데, 화가 났다는 게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침묵이 있다. 보통 사람들의 대화에선 있을 수 없는 긴 침묵이다. 처음엔 참기 어려웠다. 특히 방송하는 사람들은 오디오 비는 거 못 참잖나. 하지만 참으면 반응이 나오고 대답이 들려오더라. 영화를 통해 선생님이 사실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분이라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다. 선생님은 항상 유머를 준비하시고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하는 분이다. 그 자체가 존경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주완_ 혹시 빌 게이츠가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지 아시나?
전혀 모르겠다.
김주완_ 마이크로, 소프트하게 부른다.
김현지_ 이런 농담을 하신다. (웃음) 선생님은 되게 낙관적인 분이다. 지금 다투고 싸우지 않아도, 언젠가는 다들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거다. 나처럼 속 시끄럽고 성격 급한 사람한테는 그게 되게 큰 가르침이 됐다.
김장하 선생께서 하신 일이 워낙 많다 보니, 감탄하면서도 여러 고민을 하게 된다. 실은 개인의 선의가 아니라 사회안전망이 필요한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김현지_ 미디어는 영웅 만들어 내는 걸 좋아한다. 난 그게 되게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 영웅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영웅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고 찬사를 보내면서 다 끝나버리잖나. 나중에는 변했다고 비난하고. 김장하 선생님이 하신 일은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하는 거였다. 그 빈틈을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서 메운 거다. 또 그런 사람이 나오길 바라기보다, 우리가 그 몫을 다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선생님이 “이 사회를 지탱하는 건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해주셔서 내 고민도 어느 정도 해소됐다.


김주완 기자는 생애사 취재를 바탕으로 인물에 관한 기사와 책을 꾸준히 쓰고 있다. 인물에게 집중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
김주완_ 보통 기사는 기관명이나 단체명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기사는 대개 딱딱하고 건조하다. 사람에게 집중하는 기사는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공감을 얻어낸다. 2006년즈음에 퇴근길 교통사고로 죽은 26살 여성의 이야기를 기사로 쓴 적 있다. 취재해서 인생 스토리를 쓴 거다. 기사를 블로그에 올렸더니 매우 많은 분이 반응했다.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때부터 사람에 대한 기사를 주로 쓰려고 노력했다. 김장하 선생님 이야기도 그 연장선에 있다.
김현지_ 내 경우엔 제일 흥미로운 콘텐츠가 사람이라는 걸 몸으로 익혔던 것 같다. 특히 지역 방송을 하면 무슨 기획을 하든 연예인을 기용하기 어렵고, 자연스럽게 지역에 있는 인물들과 지역의 역사를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기획이 나올 수 있는 거라는 생각도 든다.
거의 100명을 취재했다고.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김현지_ 선생님이 처음 한약방 열었던 사천에서 당시 이장님이랑 같이 골목을 돌아다니며 촬영하고 있을 때였다. 어떤 할머니가 갑자기 뭐 하냐며 다가오시더라. 김장하 선생님 취재한다고 하니까 그분이 “아, 장하?” 그러시는 거다. 전기 통하는 것처럼 너무 좋았다. 다들 대단하신 분이라고 그러는데 그분은 너무 친근하게 “장하”라고 하니까. (웃음) 강남선 선생님, 그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 외에도 장학생분들이 다들 사회에 뭔가 돌려주고 싶어 하시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김주완_ 나도 강남선 할매가 생각난다. 그리고 남성당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한약사 시험에 합격해서 독립해 나간 분이 있다. 그분 한약방을 찾아갔는데 한약사는 안 계시고 그분 부인만 계셨다. 처음엔 굉장히 퉁명스러우셨다. 왜 찍냐고 막 항의하시고. 그런데 김장하 선생님 관련 취재를 하고 있다니까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셔서 그런 사람은 기록을 해야 한다는 거다. 짜릿했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니까. (웃음)
주인공의 구술사를 진득하게 기록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통해 주인공에 대해 알아가는 방법으로 취재를 진행했다. 이 방식을 통해 얻은 게 있는지 궁금하다.
김주완_ 우리나라 언론의 문제 중 하나가 취재원 수가 너무 빈약하다. 한두 사람 이야기 듣고 쓰는 게 대부분이다. 예전에 어떤 언론학자가 진행한 조사가 있다. 우리나라 언론의 기사에 등장하는 취재원 수와 미국 언론의 기사에 등장하는 취재원 수를 비교한 거다. 우리나라가 절대적으로 적었다. 취재원이 많을수록 이야기가 풍부해지고 근거가 확실해진다. 처음엔 김장하 선생님이 워낙 인터뷰를 안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식이었지만, 많은 사람을 만나고 교차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내용이 훨씬 풍부해졌다고 본다.
김현지_ 나는 인터뷰를 좀 길게 하는 편인데, 이번에 만난 모든 분의 이야기가 다 좋았다. 진주환경운동연합 대표를 지냈던 김석봉 선생님은 영화엔 짧게 나왔지만 개인 스토리가 되게 재밌다. 교도관이신데 그 일을 하시게 된 계기가 정말 놀랍다. 원래 시 쓰시던 분이라 ‘교정직’ 채용 공고를 보고 교정 교열 일을 할 줄 알고 지원하셨다는 거다. 그런데 또 일하다가 문익환 목사님을 만나셨단다. 그래서 본인 시를 보여드리기도 했다고. 각자의 우주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야말로 발로 뛰는 취재라 갈 곳이 많았을 텐데, 촬영하면서 염두에 둔 게 있었다면.
김현지_ 일단 김장하 선생님을 너무 가까이서 찍을 수 없으니 촬영 감독님이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셨다. 또 진주를 아름답게 찍고 싶었다. 선생님이 평생을 바쳐서 돌본 도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고 싶었다. 김주완 기자가 원래 대중교통을 이용하니까, 계속 어딘가로 이동하는 모습을 잘 드러내고 싶기도 했다.
김주완_ 강호진 촬영 감독은 촬영하면서 점점 선생님께 빠져들었던 것 같다. (웃음)
김현지_ 그래서 바닥에 엎드려서 찍기도 했잖나. (웃음) 남성당한약방이 문 닫는 날, 실은 가까이서 찍고 싶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문 닫고 가족들끼리 가서 저녁 식사하기로 했다고, 거기에는 안 부를 거라고 하시더라. 그걸 되게 지켜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가까이 가지 않고 건물 건너편에서 찍고 도로 건너편에서 찍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마지막에 차에 타시면서 우리 카메라를 보고 경례를 해주시더라. 벼락 맞은 것 같은 감동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너무 멋진 인생이다.”라는 말이 나왔다.
왜 언론인의 길을 택했나.
김현지_ 말하고 싶은 게 많아서 그랬을까. 고등학교 때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내게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재주는 없다고 느꼈다. 그보다는 말할 수 없는 사람들 이야기를 대신 전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걸 알게 돼서 PD가 되려고 했다. 그런데 입사해서도 언론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별로 없었다. 파업을 거치면서부터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김주완_ 어릴 때부터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 원래 꿈은 소설가나 만화가였다. 그래서 국문학과에 갔고, 공부하면서 소설이나 희곡을 몇 편 써봤다. 그런데 창작에 재능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김현지_ 나랑 되게 비슷하시네.
김주완_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소질이 없다는 걸 스스로 확인한 거다. 그럼 뭘 써야 할까 하다가 자연스럽게 기자가 됐다.
<어른 김장하> 작업은 한편으로 김현지 감독이 김주완 기자라는 선배를 발견하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김현지_ 맞다. 김주완 기자는 되게 오래 전부터 지역에서 유명한 언론인 선배였다. 나 혼자 내적 친밀감이 있었다. 지역사 강의하시면 찾아가서 듣기도 했다. 그러다 이번에 섭외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처음 만났다. 성덕 같은 거다. (웃음)
또 비슷한 종류의 협업을 구상하나. 앞으로의 계획도 들려달라.
김현지_ ‘김주완 기자가 찾아가는 인물’ 콘셉트로 더 해보고 싶다는 욕심은 있다. 그게 어떤 인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재밌을 거다. 난 이제 MBC경남의 레귤러 프로그램 ‘뉴스파다’로 돌아가서 지역민의 매일 저녁을 책임질 예정이다.
김주완_ 지금 대학에서 강의 하나를 맡고 있는데 이번 학기만 하고 그만두려고. 특별한 목표나 계획 없이 지내다가 좋은 걸 발견하면 뛰어들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