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량(本良)에 관하여
<어른 김장하>
손시내 / Choice / 2023-11-16

하마터면 주인공 없는 인물 다큐멘터리가 될 뻔했다. MBC경남 제작 PD인 김현지 감독은 몇 해 전 한약사 김장하 선생을 차기 프로젝트의 중심인물로 점찍었다. 자칫하면 허풍으로 의심할 만큼 어마어마한 선행을 베풀며 살아온 독지가의 이야기가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한약방을 운영해 번 돈으로 지금껏 1,000명 웃도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는 전설 같은 일화를 듣고 있자면 감독의 선택을 단번에 이해하게 된다. 그는 정말 대단하고 궁금한 인물이다. 문제는 김장하 선생이 여태 단 한 번의 인터뷰도 수락한 적이 없다는 데 있었다. “총 몇 명에게 장학금을 주셨습니까?” “명신 학교 선생님들한테 보약을 지어주신 적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리 물어도 묵묵부답. 카메라 보기를 돌같이 하고, 답하면 자랑이 될 법한 질문에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는 고집스러운 인물을 어떻게 다큐멘터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주인공 촬영을 과감히 포기하는 방안도 고려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중심 줄기는 필요했다. 다행히 김장하 선생 근처에 감독보다 앞서 취재를 시작한 기자가 있었다. 물론 그 역시 정식 허락은 구하지 못한 채였다.

<어른 김장하>는 두 언론인이 의기투합해 만든 취재기 형식의 다큐멘터리다. 김현지 감독이 카메라 뒤를 책임지고 김주완 기자가 카메라 앞에 나섰다. 김장하 선생은 여전히 마이크 달고 하는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았지만, 어물쩍 나타나 이것저것 물어보는 이들을 내치지도 않았다. 영화는 종종걸음으로 걷는 김장하 선생을 가만히 따라가는 한편, 그에게 도움 받은 이들을 차례로 만나며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두루 살핀다. 범위를 넓혀가는 취재는 자연스레 굴곡진 한국의 근현대사와 조우한다. 해방 직전에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김장하는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다 열아홉에 한약업사 시험에 합격하고 한약방을 차렸다. ‘보일 듯 말 듯 하면서도 역할을 다하는 별처럼, 앞에 나서지 말고 항상 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라고’ 할아버지가 지어준 아호 남성(南星)을 한약방 이름으로 썼다. 싸고 좋은 약을 짓는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약방 앞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렇게 벌린 엄청난 돈은 가난한 학생의 장학금이 되고, 지역 언론의 주춧돌이 되고, 각종 사회운동 단체의 기초 자금이 됐다.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부터 ‘가정폭력 피해 여성 보호시설’에 이르기까지 김장하 선생은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지원을 지속했다. 그는 40대에 학교를 세운 젊은 부자였으며, 전 재산을 기꺼이 이웃과 나눈 자선가였고, 호주제 폐지 운동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투쟁을 지지한 숨은 운동가였다.

<어른 김장하>
<어른 김장하>

한 사람이 이 모든 걸 해냈다는 게 과연 말이나 되는 일일까. 게다가 평생 옷 한 벌 허투루 사지 않고 검소하게 살았다니, 놀라움은 끝이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영화는 마냥 감탄하기를 멈추고 ‘김장하’라는 사건, 혹은 그 정신이라 할 만한 것을 찬찬히 가늠해 보려 한다.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범위가 넓긴 하나, 선생 활동의 중심을 이루는 건 형평운동이다. 평등과 사랑의 가치를 맨 앞에 두었던 백정들의 신분 해방운동. 김장하 선생이 말하는 ‘진주 정신’의 뿌리도 여기에 있다. 형평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여전히 공고한 사회의 차별을 안타까워하는 그의 모습은 내내 따스한 영화에 옅은 그늘을 만든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선생의 단호한 말은 영웅 혼자서는 절대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김장하는 국가와 사회가 제 기능을 했다면 뚫리지 않았을 구멍을 홀로 메웠다. 내레이션을 쓰지 않는 영화는 주장을 슬쩍 숨기는 대신 자그마한 노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의 쓸쓸함을 어루만지려 한다. 벗들의 입을 빌어 그 얼마나 고독한 삶이었겠느냐고 넌지시 말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80년을 한결같이 꼿꼿하게 살아온 남자에게 지친 기색이란 없다. 산을 오를 때처럼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앞으로도 그저 그렇게 걸어가면 된다고 말할 뿐이다.

<어른 김장하>의 중요한 다른 축은 경남도민일보에서 편집국장을 지내다 은퇴한 김주완 기자의 존재다. 아직 “얼굴에 여드름이 있던” 젊은 시절의 기자는 돈이 그렇게 많은데도 승용차를 사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어느새 30년이 지나 흰머리가 성성해진 장년의 기자는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취재기를 완성해 간다. 지하철, 버스, 택시를 옮겨가며 그만의 지도를 그리는 김주완 기자의 여정은 다정한 이웃들이 들려주는 김장하 선생의 옛 모습과 어렴풋이 겹쳐 보인다. 그는 선한 기운이 가득한 영화에 예상치 못한 유머와 비판의 시선을 흘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지치지 않고 묻는 기자와 대답하지 않는 선생 사이의 미묘한 침묵은 영화의 독특한 리듬감을 만들어 낸다. 서먹하게 느껴지던 둘 사이가 부쩍 가까워진 걸 눈치채게 될 때는 뭉클한 감흥이 찾아온다. 카메라 뒤에 선 김현지 감독이 툭툭 던지는 살가운 질문 덕에 영화엔 김장하 선생의 미소는 물론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라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도 조금씩 쌓여간다.

<어른 김장하>
<어른 김장하>

<어른 김장하>는 제목이 명시하듯 “좋은 어른”의 존재를 발굴해 알리는 공익적 성격의 다큐멘터리다. 지역 지상파 방송 작품 최초로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교양 작품상을 받았다는 이력은 해당 주제에 대한 대중적 요구와 공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증명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선한 영향력을 생각하게 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 숙고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돈과 자본주의 사회에 관한 풀리지 않는 고민이 달라붙어 있다. 1990년에 창간해 김장하 선생의 지원과 함께 성장한 진주신문의 폐간을 두고 김주완 기자가 던지는 비판적 질문은 상당히 뼈아픈 것이다. 전폭적 지원이 어쩌면 자립에 해가 됐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 의문의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지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도록 또렷한 점 하나를 찍어둔다. 돈의 모순적 성격을 누구보다 경계했던 건 다름 아닌 김장하 선생이다. 아프고 괴로운 사람을 상대로 번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어 사회에 환원하기 시작했다는 그의 말은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것이다. 그 말속에서 김장하는 대체 불가능한 영웅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이들을 수용하는 시대의 거점이 된다. <어른 김장하>는 그 문제의식을 세상과 나누려는 영화다.

 

 

어른 김장하 A Man Who Heals the CIty 감독 김현지 출연 김장하, 김주완 제작·제공 MBC 경남 배급 시네마달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105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3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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