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나라 가려면
<너를 줍다> 김재경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3-11-11

김재경은 시원시원했다. “여름에 번아웃이 세게 왔거든요”라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하더니 이내 가을을 얼마나 분주히 보내는지 들려줬고, 재작년에 촬영한 영화 이야기까지 거침없이 풀어냈다. 그는 한고비를 넘은 사람처럼 보였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간쯤이야 와하하 웃으면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눈을 찡긋하며 “제가 생각이 많이 없어요” 농담할 만큼 자신감이 넘친다. 그건 우리가 익히 아는 모습이다. 밝고, 당당하고, 건강한 김재경. 본연의 빛을 그대로 간직한 채 지수가 된 것이 신기했다. <너를 줍다>의 지수는 타인을 두려워한다. 우재(현우)에 관해 알고 싶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마음을 줄까 봐 불안해서 그의 쓰레기를 줍는다. 김재경은 이전과 달리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로 기묘한 집착을 설득하고야 만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마주 앉아 얘기를 들어보니 실마리가 금세 보였다. 적어도 지수의 단정함은 김재경을 빼닮았다. 김재경은 헝클어진 마음을 주변에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동력을 끌어 올려 돌파구를 찾아낼 줄 안다. 몸과 마음이 지쳤던 계절에 그는 지역 문화센터를 방문해 전통주 양조를 배우고 피겨스케이팅 자격증을 땄다. 일기장처럼 만든 유튜브 브이로그엔 이렇게 적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경험이 제게 소중한 비상계단이 되어준 것 같아요.” 출구를 발견한 후엔 다시 작품에 뛰어들어 매 순간 “처음처럼” 겪고자 했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김재경에게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여 가장 달라진 것은 뭐냐고 물었다. 그는 더 많이, 계속 다르게 느낄 수 있다고 답했다. 아무래도 김재경을 수식하는 단어를 늘려야겠다. 밝고, 당당하고, 건강한 김재경은 바로 그렇기에 어둡고, 초라하고, 아픈 사람도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이번 작업에 기대하는 바는 뭐였나. 

그간 활동하면서 예능 프로그램이라든지 다양한 자리를 통해 내 성격을 드러낼 기회가 많았다. 자연스레 배역도 비슷하게 들어 오더라. 감정을 필터링하지 않고 거침없이 표현하거나 외적으로 화려한 캐릭터가 대부분이었다. 지수는 전혀 달랐다. 나와도, 내가 맡았던 캐릭터들과도 달라서 흥미가 생겼다. 재작년 리딩했을 무렵, MBTI라는 개념이 막 유행하기 시작했다. 우리 팀에 MBTI를 빠삭하게 아는 친구가 있어서 설명을 들었는데 재밌더라. 인물 구상하는 과정에서 지수 MBTI를 만들었다. 내 거랑 정반대로.

 

뭐였나?

난 ENTP이고 지수는 ISFJ. 일단 F라서 상처를 더 깊이 받고 마음의 문을 닫았다고 생각했다. N과 S 중엔 S가 어울렸다. “만약 네가 바퀴벌레로 태어난다면?” 같은 엉뚱한 질문을 던졌을 때, N은 상상에 돌입하는데 S는 “그럴 일은 없어”라며 튕겨내지 않나. 그렇게 현실을 직시하는 쪽이 지수라고 봤다. <너를 줍다> 촬영 이후, 캐릭터 분석 과정에서 MBTI를 조금씩 적용해 본다.

 

말한 대로 지수는 김재경이 평소 보여줬던 이미지와 대척점에 선 인물이다. 지수의 외양도 정성을 들여 구현했더라.

지수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감독님이 많은 자유를 줬다. 의상과 스타일링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입은 옷 90%가 실제 내 옷이다. 대학에서 의상 디자인을 전공했다. 아무래도 배운 게 옷이다 보니 눈길이 가고 욕심나더라. 장면 분위기라든지 인물의 기분에 맞춰 의상 색감을 달리하면, 내 감정이 좀 더 살아 보일 듯했다. 그래서 같은 무채색을 사용해도 톤을 계속 바꿨다. 처음엔 블랙이 많은데 마음이 점점 열리면서 그레이가 섞이고, 그러다 네이비와 채도 낮은 블루가 들어오고, 다시 마음을 닫으면 블랙으로 돌아가고, 막판에는 핑크로 마무리하는 식이다. 하나하나 고민하면서 만드는 과정이 재밌었다. 감독님도 미술을 하셔서 그런지 내가 어떤 아이디어를 내든 오픈 마인드로 받아들여 주셨고.

 

비상식적 행위를 반복하는 인물이기에 자칫 잘못하면 비호감이라든지 위험하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관객이 공감할 만한 요소를 지닌 인물로 설득해야 했는데 어떻게 접근했나.

처음 글을 읽었을 때부터 걱정했던 지점이다. 표현을 잘못하면 관객들이 다른 감정을 먼저 느낄 수도 있겠다 싶더라. 감독님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이해하기도 전에. 나는 장면 배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수가 타인의 쓰레기를 가져가서 분석하는 장면을 어느 타이밍에 배치하느냐. 감독님과 그 부분에 관해 오래 대화했다. 지수가 시도 때도 없이 쓰레기를 수집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지수에게 그 행위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방편이다. 평소엔 그럭저럭 지내는데 불안감이 확 올라오면 쓰레기를 찾는 거다. 엄마(조윤희)가 방문한 다음, 우재의 전 애인 세라(김률하)가 나타난 다음. 영화를 보면 그렇게 지수가 스트레스받는 상황이 벌어진 후에 쓰레기 줍는 장면이 나온다.

<너를 줍다>
<너를 줍다>

특정 대사나 행위가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을 고민했네. 

우재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흐름이기도 하다. 우재가 마음을 여는 걸 느낀 순간, 지수도 ‘이런 악취미는 관둬야지’ 하며 하나씩 정리한다. 지수 마음의 열림과 닫힘이 쓰레기를 둘러싼 행위와 연결되어 보이도록 했다. 감독님과 세밀한 부분까지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현장이어서 가능했던 작업이다. “엄마한테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기에 지수가 이럴까요?” 묻기도 하고, “지금 지수는 우재도 다른 남자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불안할 것 같아요”라고 내 느낌을 말하기도 했다. 

 

감독도 든든했겠다. 재경 씨가 연출팀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들린다. 

예산이 크지 않다 보니 촬영 기간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감독님이 대화를 놓지 않았다. 예컨대 감정 표현이 중요한 신이라고 판단하면 나를 포함한 배우들뿐만 아니라, 막내 스태프에게까지 의견을 물어봐 주셨다. ‘우리 모두 함께하는 현장이야. 다 같이 영화를 만들고 있어.’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촬영 전에도 감독과 시간을 충분히 보냈나.

본격적으로 친해진 것은 촬영 이후인데 프리 프로덕션도 탄탄했다. 감독님과 작품 외에 그냥 사는 얘기도 많이 나눴고. 리딩도 그룹을 다양하게 나눠서 했다. 나랑 우재 둘이서 하고, 엄마와 따로 만나서도 하고.

 

조윤희 배우와 호흡이 잘 맞더라. 속 긁는 엄마와 진저리를 내는 딸.

평소에 엄마한테 진짜로 듣던 말이 대본에 있어서 더 와닿았다. “너 지금 짐 안 풀면 다음에 이사 갈 때 그대로 들고 간다!” 우리 엄마가 맨날 하는 말이거든. (웃음) 

 

지수는 타인의 쓰레기를 조사하며 정보를 모으는데 그중엔 불륜이나 건강 상태처럼 내밀한 개인 정보도 섞인다.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그들의 속사정을 떠올리는 상황에서 지수는 어땠을 거라고 상상했나.

지수는 타인에게 상처를 안 받으려면 그의 정보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쓰레기에 접근한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까지 생기고. 피곤하다기보다는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안전하다는 느낌이었을 거다.

 

강도 높은 불안과 두려움은 어디서 기인한다고 봤나. 

여러 가지가 쌓였겠지만 영화에 회상 신으로 등장했던 트라우마가 가장 크다. 사랑했던 남자가 내 상사와 바람을 피우다니. 날 온전히 보여줄 만큼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면 충격이 어마어마하지 않겠나. 그 사건이 시발점이라면 이후 부녀회장에게 쓰레기를 잘못 버렸다고 추궁당한 사건이 지수에게 확신을 준다. 애인의 바람을 알아차린 과정에서도 하필이면 쓰레기가 증거 역할을 했다 보니 ‘그래, 쓰레기가 그 사람을 보여주지’라고 수긍했던 것 같다.

김재경 ⓒ이영진

처음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부터 그렇게 곧장 인물에게 공감했나.

지수는 나랑 완전히 반대인 인물이다. 이입했다기보다는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상대였지.

 

나랑 반대인 인물을 연기하는 경험은 어땠나.

달라서 오히려 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반대로 해보자고 생각하면 되니까. 아예 새로운 영역, 낯선 이면에 진입한다고 해야 하나? 달에 첫 발자국을 찍는 느낌이었다. 애초 도전 과제를 분명히 정해 놓고 시작했다. 실제 나도, 그동안 맡은 배역들도 즉각 반응하는 성격을 가졌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그걸 빠르게 표현하는 편이고 표현의 정도도 크다. 기쁘면 자지러질 정도로 웃고, 화나면 불같이 싸우고. 근데 지수는 본인을 틀 안에 가둬 놓은 애다. 이전에 연기했던 인물과 달리, 감정을 제한된 틀에서 표현해야 했다. ‘이 정도로 전달이 될까?’ 싶어서 불안했다. 감정을 밖으로 쏟아내지 않으면서도 잘 전달하기, 그게 목표였다.

 

어떻게 달성했나.

감독님께 계속 물어봤다. “과한가요? 이 정도로 전달이 될까요?” 내가 뭘 불안해하는지 아셨던 것 같다. 지금은 너무 신나 보인다든지 갑자기 말이 빨라진 것 같다든지 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피드백을 주셨다. 장면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동시에 전체를 보실 테니, 감독님을 믿었다.

 

극이 진행될수록 지수 내면에 자리한 동기가 읽히더라. 남의 뒤를 캐고 싶어서가 아니라, 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쓰레기를 뒤지는구나.

지수가 쓰레기를 펼쳐 놓고 정리하는 장면이 판타지처럼 보였으면 했다. 은유가 담긴 행위 아닌가. 감독님, 촬영 감독님과 대화하며 결을 맞췄다. 지수를 평소 모습과 다르게, 마치 매뉴얼에 따라 실험하는 박사처럼 보이도록 했다. 촬영 감독님도 만화적인 화면 구도를 사용해서 공간 자체를 실험실처럼 담으셨다.

 

수사에 집중하는 프로파일러처럼 보였다. 재경 씨 얼굴이 스릴러의 한 장면처럼 클로즈업된 순간도 있고.

감독님도 우리 영화의 핵심은 서스펜스라고 했다. (웃음)

 

동시에 <너를 줍다>는 이상한 멜로다. 나와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질문하는 작품인데, 지수에게 사랑은 뭐라고 생각하나. MBTI에 근거하면 재경 씨는 N 성향이니 많은 상상을 했을 텐데. 

작품을 맡으면 매번 인물의 인과를 그려보곤 한다. 지수는 왜 쓰레기에 집착할까? 이전 연애에서 얼마나 상처받았던 걸까? 그와는 어떻게 사랑했고 어떤 미래를 꿈꿨을까? 이런 식으로 질문이 쭉 이어지더라. 지수는 사랑을 경험해 봤고, 그렇기에 사랑을 향한 열망도 있다. 다만, 사랑을 알고 또 원하는 만큼 사랑으로 인해 다친 상태다. 따뜻하고 여린 속내를 꽁꽁 눌러서 감춘다고 봤다. 그걸 서서히 열어젖히는 사람이 우재인데, 지수는 사랑에 따라올 상처를 짐작하기에 우재가 보내는 신호를 단번에 못 받아들인다. 지수는 사랑으로 직진하지 못하며 머뭇거리는 사람이다. 상처 따위 없던 원래 제 모습대로 마음을 열었다가도 불쑥 멈춰서 다시 생각하길 반복한다. 지수는 우재에게 고마움과 안전함을 동시에 느꼈을 거다. 이 사람은 나를 믿고 받아들일 준비가 됐구나 싶으니까.

김재경 ⓒ이영진

우재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관계 변화를 표현하고자 어떤 노력을 했나.

감독님이 중심 잡고 디렉션을 주신 덕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실 현우 오빠와 친해지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매일 같이 밤을 지새우며 어울리는데 데면데면한 것이 이상하지. 게다가 현우 오빠는 이전부터 알던 사이라서 편했다. 감독님이 “지금 둘이 너무 친해 보이는데?”라며 수위 조절을 해야 할 만큼. (웃음) 배우도 각자 스타일이 다른데 현우 오빠는 기본적으로 열려 있다. 상대를 기다려 주는 배우라고 느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게 뭐든 내가 다 받아볼게.”라고 말하는 듯해서 정말 편안하게 연기했다.

 

재경 씨는 어떤 스타일인가.

난 목적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이 신에서 이걸 전달해야 해’라는 목적이 생기면 어떻게든 달성하려 한다.

 

원래 기질인가, 아니면 만들어진 성격?

기질이 그렇다. 내 커다란 자랑거리 중 하나가 기동성이거든. 뭔가에 꽂히면 실행해야 한다. 근데 이번에 현우 오빠와 호흡을 맞추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목표 지점만 보고 혼자 달려가면 밸런스가 안 맞을 것 같더라. 오빠와 텐션을 맞추는 과정이 즐거웠다. 이전에 안 보였던 부분도 눈에 들어오고. 덕분에 요새 좀 바뀌었다. 신의 목적은 파악하되 그걸 향해 막 달려가려는 태도는 많이 버린 상태랄까.

 

지수는 대체로 단정하고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우재를 만나면서 조금씩 변화하고, 결국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감정을 폭발하는 장면에 힘을 싣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예민하게 배분해야 했는데 어렵지 않았나.

유일하게 지수의 감정이 확 터져 나오는 장면이다. 그런데도 지수는 지수다. 울어도 세라처럼 엉엉 울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이 엄청나게 쌓였을 텐데 대사는 딱 한 마디에 그친다. 지수가 아닌 김재경이라면 우재가 집안에 들어와서 문제의 방을 열어 보려고 할 때, 온몸을 써서 막거나 밖으로 끌어냈을 거다. 근데 지수는 그러지 못한다. 답답한 마음을 일순 표출한다는, 하지만 지수는 여전히 지수라는 사실에 집중했다. 

 

후시 녹음해야 할 분량이 많았는데 균일한 톤으로 능숙하게 소화하더라. 인생의 한 챕터를 지나서 온 사람처럼 차분하면서도 체념적인 어조가 돋보인다.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감독님이 “AI처럼 말하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버튼 누르면 로봇처럼 나오는 느낌. 다양한 버전으로 녹음했고 그중엔 이런저런 감정을 넣은 것도 있다. 근데 결국 쓰레기로 파악한 타인의 정보를 언급하는 부분은 최대한 톤의 변화 없이 녹음하게 됐다. 

 

재경 씨가 낭독한 오디오북을 듣고 싶더라. 라디오 방송 디제이를 했던 적이 있던가?

특별 출연만 몇 번 해봤다. 안 그래도 회사에 늘 말한다. 밤 12시부터 새벽 2시까지 심야 방송 디제이 하고 싶다고.

<너를 줍다>
<너를 줍다>

“느닷없이 버려진 사랑은 분리수거가 되지 못한 채 불시에 되돌아온다”라든지 “지난 사랑은 더 이상 수취인을 찾을 수 없다” 등 문학적 문장이 많은데 녹음하면서 어색하진 않았나.

음… 내가 생각이 많지 않다. 그냥 하면 하는 거다. (웃음) 감독님이 영화 장면을 보여주면서 “재경 씨가 원하는 타이밍에 말하면 돼요”라고 하더라. 중간중간 감독님 의견을 확인하며 편하게 녹음했다. 감독님과 호흡이 잘 맞았다. 작업하는 과정 내내 좋았다.

 

어떤 점이?

많이 배려해 주셨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내 생각을 영화에 녹일 수 있도록 열어줬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식으로 방치했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방향을 혼동하지 않도록 감독님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셨다. 길은 딱 잡아주면서 자율성을 최대한 확보해 주신 거다.

 

재경 씨가 아이디어를 내서 조율된 장면도 꽤 많겠다.

시나리오 리딩할 때부터 현장 들어가서까지 계속 의견을 나눴으니까. 세세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대사도 몇 군데 바꿨다. 인간 김재경이 읽었을 때 어색한 부분이 생기면 말씀드리는 거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무섭게만 보이지 않을까요?”라든지 “저라면 여기서 이런 기분일 것 같아요”라는 식으로. 스스럼없이 소통하되, 감독님이 내 말을 전부 들어준 것이 아니라서 더 좋았다. 감독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 그러나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끝까지 날 설득하셨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연출 의도를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셨던 거다. 시야가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장면을 바라볼 수도 있구나.’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신이 풍성하게 와 닿더라. 기회가 되면 감독님과 한 번 더 작업하고 싶다. 감독님이 원하는 바를 완벽히 충족시키면서 훨씬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뭐가 아쉬운가. 특정 장면을 다시 찍고 싶나?

어쩔 수 없이 내 눈엔 연기를 잘 못한 부분만 보인다. 3년 전에 찍은 작품을 다시 보니 ‘더 자유롭게 할걸’ 싶더라. 전반적으로 아쉽다. 당시엔 나와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한다는, 틀에 갇힌 사람으로서 감정 표현을 오롯이 해보자는 목적이 있었다. 그래도 색다르게 표현해 볼 지점이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든다.

 

촬영하기 전에 영화의 원작인 하성란 작가의 소설 <곰팡이꽃>을 읽었나. 

감독님과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 여쭤봤는데 읽지 말라고 하시더라. 원작을 참고하지 않고, 그저 나 스스로 시나리오를 해석한 대로 연기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연기하면서 도움을 받은 다른 작품은 없나. 그때 본 영화라든지 자주 들은 음악이라든지.

선우정아의 노래 ‘그러려니’를 계속 들었다. 현장에서 대기하거나 혼자 쉴 때도. 지수가 바에서 신청곡을 듣는 장면이 있는데 감독님한테 ‘그러려니’를 추천하기도 했다. 멜로디, 가사 모두 지수와 어울리더라. 

김재경 ⓒ이영진

지수 표현대로 “최대한 행복하게 연출하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해 주길 바라는 시대”다. 아이돌로 데뷔해서 배우로 활동해 온 지난 13년, 재경 씨는 타인의 시선과 관심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지수처럼 흔들리거나 지칠 때는 없나.

신경을 안 쓴다. ‘다들 자기 할 일 하기에 바쁘겠지’라고 생각하거든. 배우로서 단점이 될 수 있는 말이지만, 실은 내가 남한테 관심이 별로 없다. 관심 있는 소수의 대상은 엄청나게 파고드는데 그 외엔 아니다. 

 

꾸준히 활동하는 비결처럼 들린다.

물론 번아웃이 왔던 시기엔 도처에 넘쳐나는 정보가 피로하게 느껴졌다. 본래 아날로그적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영화에서 지수와 우재는 ‘내 인생의 모토’에 관해 이야기한다. 재경 씨 인생의 모토는?

무위자연. 요즘 부쩍 무위하는 삶을 살자 싶다. 

 

속 끓일 일을 줄이고 싶어서?

아니, 그렇게 좀 생각 없이 살아야 내 그릇이 커지는 것 같다. 그릇이 커져야 다양한 캐릭터를 내 안에 담을 수 있을 테고.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인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무위해야 하지 않을까. 연기할 때도 생각 없이, 마음 비우고 임해야 바로바로 몰입할 수 있더라.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들리기도 하고.

근데 나 상당히 일희일비하는 사람이다. (웃음) 

 

그래서 유튜브에 올린 브이로그가 참 재밌다. 즉흥적으로 돌아가는 현장에서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 성격은 아닐 것 같다.

변수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는데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힘들다. 이것도 MBTI와 연결되는 이야기 같네. (웃음) 논리적이지 않거나 논리 없는 뭔가를 강요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이 또한 요즘엔 벗어나려고 한다. ‘생각하지 말자. 이대로 받아들이자. 정답은 없다.’

 

어떤 작품과 인물을 만나든 늘 머릿속에 ‘왜?’라는 질문을 품고 다니겠다.

매번, 모든 것에 관해 그렇다. 인물이라면 심리나 행동뿐만 아니라 외모도 많이 연구한다. 왜 이런 헤어 스타일을 택했어? 왜 오늘은 입술에 이 색깔을 발랐어? 왜, 왜, 왜. 핀터레스트에 나만의 포트폴리오를 저장해 뒀다. 참여했던 작품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오디션을 봤던 작품까지 전부 배역별로 나눠서 폴더를 정리했다. 캐릭터 빌드업 과정에서 인물의 성격과 취향을 상상하며 헤어, 메이크업, 의상, 심지어 네일까지 레퍼런스를 찾는다. 그걸 만드는 과정이 너무 재밌다.

김재경 ⓒ이영진

오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언젠가 영화 찍겠다 싶은데. 연출하고 싶은 마음은 없나?

감독님을 지켜보니까 연출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사이즈의 일이 아니더라. 감독님은 초인이다. (웃음) 근데 요즘 회사에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그룹을 만들어서 연기 수업을 받는다. 각자 미팅하러 가기 전에 얘기했던 적이 있다. “우리 새 작품 캐스팅 안 되면 그냥 우리끼리 뭐라도 만들어 볼까?” 왜냐면 그중엔 진짜 번듯한 전공자도 있고, 또 다들 성향과 특기가 다르거든. 

 

재경 씨는 워낙 손재주 좋고 취미도 알찬 것으로 유명하지 않나. 뜨개질과 수공예 장기를 살려 개인 브랜드 ‘OOPS, I MADE IT AGAIN’을 냈고, 승마와 피겨스케이팅은 급수 자격증도 취득했다. 하나를 시작하면 끝을 보는 느낌이다.

재밌는 것만 끝을 본 거다. 시작했다가 중간에 관둔 것이 훨씬 많다. 다양한 분야를 건드리는데 재미없으면 과감하게 멈추고, 재밌으면 질릴 때까지 한다. 어릴 적부터 혼자 사부작사부작하고 놀기 좋아했다. 근데 뭔가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던 계기는 데뷔 후에 생겼다. 노력에 비해 성취가 없는 시기였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배우자 싶더라. 성취감에 목말라서, 나를 존중하지 못하게 될까 봐 이것저것 배우기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워라밸’을 챙기는 느낌도 들었다. 게다가 배우가 새로운 것을 익히고 경험해서 나쁠 것도 없다. 나한테 마이너스 될 게 하나도 없더라. 재밌어서 시작했고 재밌게 살려고 계속 배우는 것이지만, 좋게 말하면 배우로서 자신에게 투자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재밌게 놀고 있다.

 

손으로 하는 일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가 있나.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는 맥시멀리스트다. 이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짐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과 자주 맞닥뜨렸다. 해를 거듭할수록 처리 대상의 공통 분모가 보이더라. 충동적으로 구매했거나 고민 없이 선택한 물건. 한편, 내 손길이 닿은 물건은 잘 버릴 수가 없다.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한 다음부터 적어도 내 공간은 내 손길이 닿은 물건으로 채우자고 결심했다. 더는 물건을 늘리지도 버리지도 말자는 생각이다. 직접 만들 수 있는 물건은 사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소비에 치우친 삶이 피곤하게 다가와서 노력하는 중이다. 대신에 핀잔을 자주 듣는다. 니트 한 벌 뜨면 친구들이 그런다. “실값 얼마 줬어? 몇 시간이나 걸렸어?” 거기 들어가는 재료비에 시간과 정성까지 따지면 차라리 돈 주고 사는 것이 낫다고. (웃음)

 

요즘 꽂혀 있는 것은?

뜨개질. 생각 비우는 데 최고다. 뜨개질하다가 나도 모르게 잡생각이 끼어들면 곧장 코가… 사실 옛날엔 코가 틀렸는데 이젠 코 모양이 안 예뻐지는 것이 눈에 다 보인다.

 

전문가의 영역에 들어섰구나. 

현장에서도 틈틈이 한다. 촬영하다 보면 6시간씩 대기하고 그럴 때가 있잖나. 대본 붙잡고 계속 매달려 봤자 내 머리로 새로운 것을 찾기 어렵다. 결국 생각하던 범위 내에서 생각이 돌고 도니까. 대본을 잠시 내려놓고 10분이라도 뜨개질하는 것이 내겐 차라리 도움이 된다. 머리를 텅 비울 수 있거든. 그러고 나서 대본을 다시 보면 ‘아까 이걸 못 발견했네?’ 하면서 놓쳤던 지점이 보인다.

<너를 줍다>
<너를 줍다>

스스로 돌파구를 마련할 줄 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본래 독립적인 성향인가? 

어릴 적부터 그랬다. 부모님 손을 별로 안 타는 아이? 공부하라는 소리를 한 번도 안 듣고 컸다. 엄마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내 친구는 성적 오르면 엄마가 핸드폰 사준다고 했다는데 엄마는 왜 아무 말 안 하냐고. 엄마가 그러더라. “너 엄마 좋으라고 공부하니?” (웃음) 하루는 god 앨범 사야 한다고 졸랐더니 “용돈이 더 필요하면 네가 벌어서 써”라고 하시더라. 그러네, 말하다 보니 내 자급자족 성향이 집안 분위기에서 왔구나 싶다.

 

인터뷰 중간중간 번아웃에 관해 말했다. 이 또한 스스로 ‘왜?’라고 물어봤을 텐데 원인을 찾았나. 

나를 탐구하기 좋아하니까 당연히 물어봤지. 내가 분석한 바로는 일단 바빠서였다. 번아웃이 오기 직전에 작품 두 편을 찍으면서 동시에 집까지 지었다. 모든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니 시간과 여유가 확 생겼다. 예전이라면 신나서 이것저것 했을 텐데 이번엔 아니었다. 다른 걸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고 몸도 무겁기만 했다. 일은 해야 하는데, 아니, 일을 하고 싶은데 안 되더라. 이 일이 그렇지 않나. 내가 연기하고 싶다고 해서 당장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결국 배우는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인데 그게 몇 차례 어그러졌고, 그러다 보니 생각이 많아지더라. 내가 과연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 이제 30대 중반인데 계속할 수 있을까? 겁을 좀 먹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자꾸 주저하면서 생각만 하게 되고. 막상 행동에 옮기면 별것도 아닌데. 그때 피겨스케이팅 자격증을 땄는데 비슷했다. 진짜 움직이기 싫지만 일단 갔다. 돈을 냈으니까. 막상 갔더니 또 행복하더라.

 

번아웃에서는 어떻게 빠져나왔나.

사실 빠져나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다. 앞서 말한 그룹 레슨이 계기가 됐다. 비슷한 경험과 고민을 지닌 친구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큰 힘을 얻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하며 서로 위로도 주고받고. 같은 회사 소속이라고 해도 다들 낯선 사이였는데 신기하게 속 얘기를 편하게 했다. 어쩌면 낯선 사이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오히려 속내를 툭 털어놓는 일이 있지 않나.

 

타이밍 좋게 만난 인연이다. 연기 선생을 초빙해서 배우는 건가?

때마다 다른데 선생님을 모시고 진행하는 수업에서 많이 배웠다. 연극,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셨고 학생을 가르친 경력도 많은 분이었다. 덕분에 사고의 폭이 한 뼘 넓어진 듯하다.

 

가족이나 지인 외에 <너를 줍다>를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생각보다 많은 이가 자신을 보호하려고 방어벽을 치며 살아가지 않나. 그런 사람이라면 누구든 봤으면 좋겠다. 관계를 고민하는, 인간이 제일 어렵다고 느끼는 분들이라면 추천하고 싶다.

 

재경 씨의 방어벽은 무엇인가. 어떤 생존 기술을 터득했는지 궁금하다.

외모가 화려한 편이라서 어릴 적엔 말과 행동을 일부러 더 털털하게 했다. 안 그러면 깍쟁이처럼 보일까 봐. “나 편한 사람이야! 다가와도 돼!”라는 애티튜드, 그게 과거의 나를 지키기 위한 기술이라면 기술이다. 지금은 어떤 슬픔이나 상처에 좀 무뎌진 것 같다. 예를 들어 처음 누군가를 사랑했을 때와 비교하면 이제 다를 수밖에 없지 않나. 많이 단단해졌다고 표현하지만 동시에 난 무뎌졌다고 느낀다. 그게 좀 아쉽다. 감정에 무뎌지지 않으려고, 처음처럼 느끼려고 노력한다. 사랑뿐만 아니라 우정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엔 짝꿍이라는 이유만으로 친해지고 다 같이 어울려 논다. 하지만 사회에 나오면 그렇게 마음 열고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러지 말자고, 초등학생 김재경처럼 친구를 만나 보자고 계속 다짐한다.

김재경 ⓒ이영진

항상 뭔가를 배우는 태도와 이어지는 말 같다. 나이 먹을수록 ‘아직도 처음인 일이 많구나’ 느끼는 순간이 중요해지기도 하고.

세상을 사는 큰 재미 아닌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누구에게든 또 무슨 일에서든 배울 점이 하나씩은 있으니까.

 

재미라는 단어가 대화에서 여러 차례 나왔다. 무엇을 할 때 가장 즐겁다고 느끼나.

그래도 연기. 번아웃 지나고 나서 더 그렇다. 예전엔 부담도 있고 고민거리가 많다고 여겼는데, 요즘엔 신기하게도 마냥 재밌다.

 

애초에 연기하면서 느끼는 부담이나 긴장도 별로 싫어할 것 같진 않은데.

긴장을 많이 안 하기도 하고. 미팅하거나 미팅에서 대본 리딩하는 건 떨린다. 상대가 그냥 딱딱하게 대사를 읽어주고 나는 그에 반응해야 하는 상황. 오히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면 마음이 편안하다. 다행히 점점 더 그런 것 같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어떤 부분이 가장 크게 변화했다고 생각하나.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열 가지라면 10년 전에는 다섯 가지 감정에만 집중하고 살았던 듯하다. 긍정적 감정, 예를 들면 즐거움이나 행복 같은 것? 그 시절엔 화를 내거나 울거나 우울한 인물을 맡으면 막막했다. 이걸 내가 어떻게 표현하나 싶어서. 강박이 있었거든. 난 항상 밝아야 해, 늘 웃고 기뻐야 해. 아무리 화가 나도 분노를 드러내서는 안 돼. 그건 당시 내가 설정한 직업의식이기도 했다. 그래서 슬퍼도 참았다. ‘울면 뭐 해?’ 내가 여기서 울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아이돌 활동하면서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다.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 실망하게 하면 안 돼. 난 장녀고 누나니까 동생에게 모범이 돼야 해.’ 내가 울면 동생이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지금은 다 표현한다. 화도 내고.

 

좋은 변화다. 이제 붙잡고 울 만한 사람도 생겼나.

울 일은 딱히 없긴 했지만 최근엔 그룹 레슨하는 친구들이 내 눈물을 가장 많이 본 것 같다. 특히 즉흥으로 연기하다 보면 자연인 김재경을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거든. 그 친구들 외엔 우리 집 멍멍이? 사실 걔랑 말을 제일 많이 하지. 귀찮아할 정도로 붙잡고서 이러쿵저러쿵. 대본도 걔랑 본다. (웃음)

 

몇 살인가.

벌써 열 살.

 

시간 가는 게 무섭겠다. 연말 계획은?

계획 세우는 타입이 아니다. 얼마 전 드라마 촬영을 마쳤고, 이제 영화 개봉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관객과 열심히 만나려고 한다. 근데 또 모르지. 난 P 성향이니까 이러다 갑자기 강아지 데리고 어딘가로 훌쩍 떠날지도. 예를 들면 아이슬란드?

김재경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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