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에서 60년을 버틴 아카데미극장이 강제 철거 압박에 시달리던 10월 20일, 광주극장 앞은 생일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1935년 개관한 광주극장의 88번째 생일, 잔치의 백미는 상판식이었다. ‘영화간판 시민학교’ 학생들의 수료작이 먼저 머리 위로 올라갔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일반화되면서 손으로 그린 간판은 점차 자취를 감췄지만, 광주극장은 국내 마지막 간판장이라고 불리는 박태규 작가와 협력해 여전히 손 간판을 걸고 있다. 뒤이어 박 작가가 완성한 <버텨내고 존재하기> 그림 간판이 상판 됐다. 뮤지션이자 영화를 기획한 최고은도 그 자리에 있었다. 자신이 지은 제목처럼 버텨내고 존재하는 공간과 사람들 속에서 최고은은 무얼 생각했을까. 장수를 기원하는 박수 소리가 잦아든 후, 광주극장에 모인 이들은 원주시의 극장 철거에 반대하며 “아카데미극장을 함께 지켜주세요”라고 외쳤다.
많은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속수무책으로 사라지는 시대, 최고은은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으로 간다. 혼자는 아니다. 김일두, 김사월, 아마도이자람밴드 등 매력 넘치는 인디 뮤지션 여덟 팀을 초대한 참이다. 음악가들은 극장 복도와 계단에 서서 조곤조곤 속사정을 털어 놓는가 하면, 상영관 객석과 직원 사무실을 점거하고서 쩌렁쩌렁 고함치며 속엣말을 내뱉기도 한다. 손때 묻은 공간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정답 없는 질문으로 엮인다. 영화는 버텨내고 존재하는 모두를 애정과 호기심, 그리고 사명감까지 두루 섞인 눈으로 바라보더니 마지막에 최고은의 입을 빌려 이렇게 노래한다. “오늘의 축제가 끝나가도 인생의 무대는 계속되고 남겨진 날은 숨바꼭질처럼 남아있네.”
관객과 밀착한 상태로 진행하는 공연 프로젝트 ‘이얼스업’을 최근 5년 만에 재개했다. 시즌 2의 첫 번째 공연을 드랙아티스트 모어와 함께했더라.
우리에게도 무척 특별했던 공연이다. 당시 공연을 준비하면서 음악 외 방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작가와 함께 자리를 꾸렸으면 했다. 모어 님을 이미 영화 <모어>(이일하, 2022)와 책 《털 난 물고기 모어》(모지민, 2022)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분이 들려주는 이야기, 삶의 경로 자체가 우리 공연 주제와 맞닿아 있더라. 그렇게 공연에 모어 님이 들어왔다. 애써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 냈다기보다는 공연에 모어 님이 들어오면서 특별한 순간이 이뤄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음악과 춤, 그야말로 난리법석이었다. 실은 내가 관객과의 거리를 고려하지 못하는 바람에, 모어 님이 춤추다가 관객과 부딪치기도 했다. 근데 그런 충돌마저도 자연스럽게 공연에 녹아들었다. 물론 공연을 마친 후, 황현우 연출에게 많이 혼났다. (웃음) <버텨내고 존재하기>를 시작 단계부터 함께 진행했던 황현우 프로듀서가 ‘이얼스업’도 연출하거든.
오래 손발을 맞춰 온 크루처럼 보인다.
영화를 함께 만든 스태프들 모두 그렇다. 언제 무슨 이유로 만났는지, 왜 그에게 작업을 제안했는지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서로 뜻이 맞는 친구들이라 관계가 쭉 이어지는 듯하다. 평소에는 각자 밥벌이하며 살다가 뭔가 재밌는 일이 생기면 모인다. “이거 같이 하면 좋겠는데 시간 돼?” 음향 쪽 수장이 황현우 연출이고, 영상을 권철 감독이 책임진다. 프로젝트 규모나 성격에 맞춰 그 둘이 스태프를 꾸린다. 시간이 쌓이다 보니 촬영감독, 음향 엔지니어 등 대부분과 아는 사이가 되더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은데, 이렇게 오래된 관계가 주는 즐거움도 분명하다. 같이 늙어가는 느낌도 있고.
느슨하면서도 끈끈한 특공대다. 팀명은 없나.
팀명은 없고 최근에 우리가 공간 하나를 만들었다. 그곳 이름이 ‘고라니 특공대’다. (웃음) 아지트처럼 사용하는 공간이자 ‘이얼스업’을 진행하는 공연장이기도 하다. 월세 내기가 만만치 않지만 열심히 해야지.
얼마 전 광주극장 개관 88주년 행사도 다녀왔더라.
평소에도 자주 왕래하긴 하는데 진짜 인연은 인연이구나 싶었다. 사실 행사가 있는 줄 모르고 갔거든. (웃음) 다른 미팅이 있어서 근처에 갔다가 ‘잠깐 광주극장에 들러서 인사나 하고 올까?’ 했다. 도착했더니 극장 식구들이 영화제 보러 왔냐면서 반겨주더라. 그제야 알아차렸다. 오늘이구나. 타이밍도 신기한 게 그날 저녁이 개막식이었다. 상판식도 예정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잘됐다 싶더라. 영화에 출연하신 박태규 화백님이 매년 시민 대상으로 영화간판학교를 여신다. 화백님 지도 하에 학생들 각자 본인의 인생 영화 포스터를 그리고, 나중에 그림을 이어 붙여서 완성본을 만든다. 근데 올해는 상판을 양쪽에 했다. 손간판이 두 개였거든. 한쪽엔 영화간판학교 그림을, 다른 쪽엔 화백님이 직접 그리신 <버텨내고 존재하기> 그림 간판을 올렸다. 상판하는 과정을 지켜보는데 기분이 묘하더라. 우리 영화가 진짜 끝까지 버텨내고 존재하는구나 싶고.
노래도 제목 따라간다는 말이 있잖나.
마냥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웃음) 아무튼 영화는 처음이라 모든 과정이 낯설기만 하다. 음악은 뮤지션마다 방식이나 순서가 다르긴 해도 작업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대강 아는데 영화는 너무 모르니까. 사실 2021년에 촬영했을 때만 해도 개봉을 상상하진 못했다. 그저 어떻게든 기록이 남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바랐을 뿐이다.
배급사에서 최고은 피디라고 부르더라.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호칭이다. 같은 직함이라고 해도 분야마다 역할에 차이가 있더라. 음악 쪽에선 날 편하게 조연출 정도로 칭할 텐데, 영상 감독님이 조연출은 그런 역할이 아니라며 피디라고 정정해 줬다. 여전히 낯설다. 왠지 피디는 좀 딱딱하게 들리기도 하고 실력자여야 할 것 같은데 난 아니거든.
<버텨내고 존재하기>를 기획하고 여기까지 끌어오지 않았나. 애초 황현우 프로듀서와 권철 감독에게 프로젝트를 제안한 사람이기도 하고.
사실 영화 작업 이전에 ‘커밍 홈’ 시리즈라는 큰 프로젝트가 있다. 고향인 광주를 알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기획한 프로젝트인데 작업 전체를 나 혼자 진행할 수는 없었다. 공연해야 하니 우선 황현우 연출에게 연락했다. 현우 씨가 대표를 맡고 있는 레이블 ‘씨티알 사운드’ 식구들까지 함께 ‘커밍 홈’ 프로젝트를 두 차례 진행했다. 세 번째 공연 ‘버텨내고 존재하기’를 준비할 무렵, 코로나19 상황이 악화했다. 2회 때도 사회적 거리 두기 방침을 실시하긴 했지만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라면 대면 만남이 어느 정도 허용됐거든. 근데 3회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예 비대면으로, 온라인 생중계 공연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공연을 영상으로 담아줄 사람이 필요해서 바로 권철 감독에게 연락했다. 처음부터 ‘영상은 무조건 철이 오빠’라고 생각했으니까.
별명이 광주의 딸이던데.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최고은에게 고향은 어떤 곳인가.
이제 광주의 딸이 아니라 이모쯤 되려나? 아니, 이모는 나이 들어 보이니까 누나나 언니라고 해야겠다. (웃음) 시작은 단순했다. 난 ‘광주 부심’이 있거든. 광주는 의외로 상식이 통한다고 해야 하나. 적어도 성평등 이슈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서는 사회적 담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도시라고 본다. 어릴 적엔 몰랐는데 나이 들수록 눈에 보이는 것이 있다.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나도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현재 모습이 됐을 텐데, 어느 순간 ‘광주 되게 멋진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고향이 참 자랑스러워졌다. 내가 본래 정정당당한 승부를 좋아한다. 광주 사람이라서 페어플레이를 중요하게 여기나 싶기도 하다. 동시에 광주는 정이 많은 도시다. 서울살이를 20년 넘게 하다 보니 한 번씩 광주에 가면 정서 차이가 확 느껴진다. 남의 일에도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주는 사람들. 누군가는 오지랖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난 싫지 않더라. 잔소리처럼 들리는 말도 어느 때는 되게 따뜻하게 다가오고. 근데 ‘정’은 무형 아닌가. 광주를 모르는 사람, 예를 들면 공연하러 온 뮤지션 친구에게 소개하기가 어렵다. 나도 지역에 공연 가면 그렇거든. 공연장에서 리허설하고, 근처 식당에서 밥 먹고, 다시 공연장에서 공연하면 끝이다. 뭔가를 느낄 겨를 없이 그대로 서울로 떠나는 거다. 친구들이 광주를 그런 방식으로만 경험한다는 것이 안타까워서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됐다.
광주 여행의 호스트를 자처했구나.
순진한 마음이었다. 광주로 놀러 온 김에 공연하기, 혹은 공연을 핑계 삼아 놀러 오기를 제안했다. 반나절 구경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최소 1박 2일 이상 머물렀으면 했다. 내가 광주에서 만나는 사람과 좋아하는 공간을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 친구들 각자 광주에 추억이 생기지 않을까 싶더라. 말한 대로 호스트를 자처했는데 지속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일단 코로나19 때문에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여차저차 <버텨내고 존재하기>까지 왔다.
그러면 영화 촬영 기간도 1박 2일인가?
3일 촬영했다. 연속 3일. 말이 안 되는 스케줄이라는 걸 나도 안다.
광주극장에서 뮤지션 엠티가 열렸다고 봐야겠다.
비슷하다. 광주극장은 20대부터 다녔던 곳이다. 당시엔 극장 분들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나도 그분들이 누군지 몰랐다. 그저 표 끊고 들어가서 영화만 보고 나왔다. 음악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알아봐 주시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프로젝트를 기획한 후, 뮤지션보다 극장을 먼저 섭외했다. 음악으로 광주극장을 기록하고 싶다고 극장 이사님께 말씀드렸더니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인터넷에 광주극장을 검색하면 각종 인터뷰와 영상이 나온다. 근데 음악을 매개로 그 공간을 기록하는 시도는 여태 없었다고 하더라. 이사님과 극장 분들이 반가워하시면서 3일이라는 시간을 내어 주셨다. 광주극장은 사실상 문화재 아닌가. 사물 위치도 함부로 바꿀 수 없고 스크린이 설치된 단상에도 멋대로 올라가면 안 된다. 공연하면서 매 순간 극장 분들과 논의하고 허락을 구했다.
매표소와 복도, 상영관처럼 익숙한 공간뿐만 아니라, 직원 사무실과 영사실 등 관객이 들어갈 수 없는 곳까지 구석구석 비춘다.
거기는 나도 처음 들어가 봤다. 사무실에서 찍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이사님이 놀라시더라. 처음엔 사무실이 낡고 어수선하다며 거절하셨는데 극장에서 일하는 분들의 공간도 영화에 담기면 좋지 않겠냐고 설득했다. 그곳에서 아마도이자람밴드가 ‘산다’를 시원하게 불러줬다.
뮤지션, 노래, 공간 세 가지를 어떤 기준으로 엮었는지 궁금하다. 일단 아티스트 섭외 과정부터 들어보자.
먼저 주제를 정했다. 뮤지션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내 의견만 내세우면 안 될 것 같아서 가급적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주제를 찾으려 했다. 당시 팬데믹이기도 했고, 내가 마침 음악 한지 10년쯤 됐을 무렵이었다. ‘버텨 냄’이라는 키워드가 자연스레 떠올랐는데 주변에서도 공감하더라. ‘버텨 냄’과 어울릴 공간을 생각하다가 광주극장에 눈길이 갔다. 진짜 고생하면서 긴 시간 제자리를 버텨 낸 공간이지 않나. 광주극장을 섭외한 후, 내가 알고 지내는 뮤지션을 중심으로 참여자를 찾아 나섰다. ‘버텨 냄’이라는 주제를 이해해 줄 사람, ‘버텨 냄’에 관해 이야기하는 노래를 가진 사람.
곡 선정에도 참여했나. 뮤지션들에게 힌트를 주거나 요청 사항을 전달한 적이 있다면.
곡 선정은 뮤지션에게 전적으로 맡겼고, 소통 과정에서 황현우 프로듀서가 늘 함께했다. 우리는 ‘버텨내고 존재하기’라는 주제를 잡았는데 당신의 음악과도 어울리는 주제 같다. 당신 언어로 ‘버텨내고 존재하기’에 관해 이야기해달라. 그 정도만 전달했다. 노래하는 공간의 경우, 권철 감독이 사전에 현장을 직접 둘러보며 하나씩 찾았다. 그러니까 난 냉장고와 재료만 준비했던 거다. 내가 냉장고를 채워 놓으면 나머지는 황현우, 권철 두 사람의 몫이었다. 재료를 적절하게 섞어서 영상이든 음향이든 모든 작업을 알아서 완성해 줬다.


요리사는 따로 있었구나.
최고은 버전 ‘냉장고를 부탁해’랄까. (웃음) 어떤 뮤지션은 ‘버텨내고 존재하기’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흔히 말하는 ‘존버’의 뉘앙스가 그렇지 않나. 자신은 그저 열심히 살면서 즐겁게 음악 하는 사람이지, 굳이 가난이나 힘듦을 말하고 싶진 않다고 하더라.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고 싶은 음악을 꿋꿋하게 해내고 있는 모습이 좋아서 제안한 거라고 다시 설명했다. 물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면 좋겠지. 하지만 내게 ‘버텨내고 존재하기’란 음악을 좋아해서 계속하는 자세 그 자체다. 어떤 뮤지션은 대화 끝에 마음을 돌려 합류하기도 했다.
인디 음악을 즐기는 리스너들이 반색할 라인업이다. 201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세대별로 뮤지션을 총망라하는 느낌도 있고.
내가 딱 그때부터 활동했으니까. 서로 작업과 행보를 지켜보며 함께해 온 사이다. 선배님들께 부탁하기가 좀 어려웠다. 사실 몇 번 시도했다가 거절당한 적도 있고. 아무래도 제작비 등 현실을 고려하면 좋은 뜻으로 진행하기엔 힘든 지점이 있더라.
영화를 보면서 이상하게도 최고은이 10년 전쯤 불렀던 <Eric’s song>이 생각나더라. 이런 가사가 있다. “When you gonna realise, it's always in and around you.” 네가 어딜 가든 너와 함께할 거라고 노래하던 이의 마음, 그게 지금도 여전하구나 싶다.
<Eric’s song> 가사에도 광주가 나온다. “Put the 광주 inside your world.” 나도 참 놀란다. 지금까지 만든 노래 중 많은 곡이 친구에게 선물한 것들이기도 하다.
환대의 노래들, 마중과 배웅의 노래들이 많다.
앞으로도 그런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데 영화에서 부른 ‘축제’에 그와 같은 마음을 담았다. 하루하루 효율을 따지면서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그 속에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다. 여럿이 어우러져서 살자는 이야기를 노래에도, 영화에도 녹이게 됐다.
최고은의 정체성일까? 자신만큼 타인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
근데 끝내는 법을 몰라서 어떨 때는 너무 힘들다. 관계에 좀 더 신중해야 하는구나 싶다.
일단 정을 주면 관계를 끊어 내기 어려워하나 보다.
그래도 음악 하면서 사람 되는 것 같다. 많은 뮤지션도 비슷하게 느낄 텐데 음악은 거울이거든. 실제 일어난 일을 묘사하든 가상의 상황을 상상하든, 노래엔 어쩔 수 없이 뮤지션의 취향과 색깔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나는 가사에 나를 기록하다 보니 ‘나중에 돌이켜봤을 때 이 가사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지’라는 마음이 생긴다. 정말 음악이 사람 만들지. 처음에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혼자 좌충우돌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의 많은 조력자와 동료를 인지하게 됐다. 작업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를 조율해 주는 관계이고 그들과 나눈 이야기들 덕분에 음악을 계속하는 것 같다.


본인의 예전 노래를 찾아 듣나?
찾아 듣지 않고 찾아 부른다. 못 듣겠다. 노래를 너무 못해서. (웃음)
그런 부정기가 한 차례 지나가면 마냥 귀여워 보이는 시기가 온다고 하더라. 어릴 적 사진을 보듯 ‘이런 날도 있었지!’ 하면서.
실은 몇 달 전에 음원 사이트에 들어가서 노래들을 쭉 들었다. 많이 반성했다. 보통 뮤지션은 그 노래를 충분히 연습하고 가창이 완숙된 상태에서 녹음한다. 반대로 녹음 들어가기 직전까지 가사를 계속 수정하는 뮤지션도 있다. 나는 후자다. 멜로디도 이렇게 할까, 저렇게 부를까, 끝까지 고민한다. 그 와중에 녹음을 또 원테이크로 진행하고. 제일 못 부르는 상태에서 녹음하는 거다. 공연을 거듭할수록 실력이 나아지니 다들 “넌 라이브를 훨씬 잘하네. 생동감이 느껴져서 그런가?”라며 갸우뚱하더라. (웃음)
공연 당시의 주변 환경이라든지 분위기에 영향을 받기도 할 테니까. 영화에서도 인물과 노래마다 촬영 콘셉트가 달라진다. 뮤지션들이 겹치거나 스쳐 지나가면서 자연스레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촬영 관련해서 감독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대부분을 감독에게 맡겼지만 처음부터 요청했던 사항이 있다. “광주극장을 모르는 사람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한 번 와서 둘러본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 좋겠어.” 영화 관람이 곧 극장에 관한 간접 경험으로 남기를 원했고, 아마 권철 감독도 그걸 염두에 두고 촬영을 진행했던 것 같다. 다른 누구보다 이 작품을 누려야 할 사람은 관객이라고 여겼다. 혼자서 막연하게 생각하기론 영화에 한 인물이 등장해서 진짜 관객의 시선으로 돌아다니면 어떨까 싶었다. 근데 철이 오빠는 챕터 사이, 노래와 노래 사이를 뮤지션끼리의 교차로처럼 연출했더라.
다들 연기 잘하더라. 청춘 로맨스를 연상케 하는 곽푸른하늘의 에피소드도 인상적이다.
어색해하면서도 열심히 해줬다. 캔 음료 마시는 거 그냥 평소처럼 하면 되는데, 카메라가 앞에 있으니 괜히 낯설어하고. 그래도 예쁘게 담겨서 만족했다. 다 찍고 나서 우리끼리 “곽푸의 인생 연상” 나왔다고 했지.
제1장부터 7장, 그리고 에필로그까지 순서와 배치를 결정하는 데도 고민이 필요했을 텐데.
내가 호스트여서 어쩔 수 없이 마지막을 맡은 것 같다. 우선 (김)일두 오빠 인터뷰가 핵심적이기도 하고 재밌어서 맨 앞에 넣었다. 강렬하게 시작한 다음, 클래식 기타를 사용하는 아티스트들이 등장하며 잔잔하게 흐름을 이어간다. 그러다 중간에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이 나오면서 한 번 분위기를 전환하고. 사실 촬영 기간이 사흘뿐이라 소스를 고민할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찍지는 못했다. 다만, 관객이 영화를 지나치게 평이하게 느끼거나 지루하지 않도록 철이 오빠가 나름대로 애를 많이 썼다. 영화에 곡선을 만들려고 했구나 싶더라.
이제 생각을 줄이고 행동하면서 살겠다는 김일두의 담담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인터뷰 질문지를 직접 작성했나.
나쁜 일 아니면 일단 다 해보겠다고 했지. 나도 들으면서 참 좋은 자세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일두 오빠랑 통화하면 대화가 막힘없이 흘러간다. “좋습니다. 합시다. 고은 씨 그거 좋네요.” 인터뷰 질문지를 쓰긴 했는데 철이 오빠한테 까였다. (웃음) 오빠가 준비한 질문도 있고 현장에서 자유롭게 튀어나온 내용도 있다. 고상지를 촬영하던 날, 오빠가 나보고 인터뷰를 직접 해보라고 하더라. 내가 주어, 목적어, 서술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자꾸 두루뭉술하게 말하니까 촬영팀 모두 깜짝 놀랐다. 다들 ‘쟤 어떡하지?’라는 눈빛으로 뒤에 가서 수군수군하더니 결국 안 되겠다고 하더라. 현장에서 잘렸다. (웃음) 아마 극장이라는 공간에 개개인의 추억이 있을 테니 철이 오빠가 그 주제를 알뜰하게 챙기려고 했던 것 같다.
같은 질문을 돌려주고 싶다.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 기억하나.
처음은 아닌데 <쉰들러 리스트>(스티븐 스필버그, 1993)가 떠오른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무등극장에서 가족들이랑 함께 봤다. 아마도 처음 본 영화는 <우뢰매> 시리즈 같은 어린이 영화였을 거다.
평소 영화를 자주 보나. 좋아하는 감독과 작품은?
최근에 2년 가까이 라디오 방송 디제이로 일했다. 수요일마다 영화 소개 코너를 진행해서 라이너 님의 추천작을 봐야 했다. 영화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영화를 핑계 삼아 시간을 때웠던 것 같다. 휴식하고 싶을 때 영화만큼 좋은 핑계도 없으니까. 그러다 라디오 진행하면서 영화를 좀 더 공부하고 체계적으로 들여다보게 됐다. 최근에 본 작품 중 좋았던 것은 <애프터 양>(코고나다, 2022).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쿠엔틴 타란티노, 2019)도 좋아한다. 사실 되게 지루하다가 마지막에서야 빵 터지는 영화인데 뭔가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새롭게 각색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더라. 할리우드에 헌정하는 목적으로 만든 영화이지 않나. 이토록 아름다운 헌정도 있구나 싶었다. 어릴 적부터 몇 번씩 반복해서 보고 명작이라고 생각했던 영화는 <사랑의 블랙홀>(해롤드 래미스, 1993)이다. 타임 루프라는 장치를 이용해서 담아낸 메시지가 좋다. 남자 주인공 필 코너(빌 머레이)가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
세 작품에 공통점이 보인다.
뭐지? 신파라고 해야 하나? 신파까지는 아닌데 내 식으로 표현하면 좀 ‘냄새 나는’ 영화들이다.
인간애가 부서져도 인류애는 지켜내려는 느낌이다.
지금 딱 그 생각으로 버텨내고 있다. (웃음) 사실 난 무엇보다 블록버스터를 좋아한다. 그런 영화를 가볍게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힘들다. 수백 수천 명의 스태프, 각 분야에서 최고라고 하는 전문가들이 한 가지 목표를 갖고 만들어 낸 결과 아닌가. 그만한 퀄리티로 작품을 내놓기란 절대 쉽지 않다. 예전이라면 천 년쯤 걸렸을 일이다. 애정이 식은 지 좀 됐지만 마블 영화를 특히 좋아했다.
영화 취향도 궁금했지만 사실 뮤지션 최고은에게 영화 만들기는 무슨 의미였는지 알고 싶어서 물어봤다. 당시 이 작업은 도피였는지 아니면 도전이었는지.
답을 얻고 싶었던 것 같다. 되게 막막했거든. 완성형은 아니어도 나만의 색깔을 만들어 나가며 음악 세계를 구축해 왔고, 어느덧 경력 10년 차 뮤지션이 됐다. 그 시점에 팬데믹이 오면서 거짓말처럼 모든 무대가 사라졌다. 난 공연을 통해 “나 아직 살아있고 계속 음악 한다”고 알려야 하는 사람인데 갑자기 경력 단절을 맞이한 거다.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 음악 얼마만큼 더 할 수 있을까? 10년이라는 세월이 자연스럽게 날 돌아보게 했고, 다른 뮤지션들은 어떻게 이 상황을 마주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근데 개인적으로 만나면 다들 진지한 얘기는 잘 안 하거든. 핑계가 있어야 모이고, 그래야 대화도 본격적으로 시작될 듯했다. 80년 넘게 그 자리에서 버틴 광주극장을 보며 좀 더 확신을 얻었다. 광주에 사는 분들조차 “광주극장이 아직도 있어?”라며 놀란다. 계속 버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버텨내고 존재하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런 질문에 답을 찾고자 했다. 정확한 답을 구하진 못했고 그저 ‘사니까 살아지더라’ 같은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마쳤다.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공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면 최고은에게 공간은 남다른 의미를 갖지 않나. <버텨내고 존재하기>를 촬영한 광주극장, <이얼스업>을 진행하는 고라니 스튜디오는 최고은을 만나서 콘서트홀로 재탄생했다. 공간이 지닌 기능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상상력을 더하는 방식이 눈에 들어온다. 공간을 통해 새로운 경험과 기억을 촉발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같은 공간이어도 누가 그곳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공간의 에너지가 확 달라지거든. 광주극장이 본래 모습을 잃지 않고 그토록 오랜 세월 유지한 것은 공간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들 덕분이다. 광주극장 이사님은 의자 하나 바꾸는 데도 몇 년을 고민하는 분이다. 의자가 낡아서 몇 개는 고장도 나고 사람들도 불편하다고 하는데, 이사님은 선뜻 바꾸겠다고 결정 못하시더라. 만약 결이 전혀 다른 분이 이사였다면 광주극장은 지금 이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외관은 그대로 남겨둘지언정 내부는 현대화하겠다며 전부 해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지켜내는가?’라는 질문을 품은 공간이기에 마음에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광주다움’과도 연결된다.

음악 친구들을 고향의 극장으로 초대해서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한 최고은이 대차고 따뜻해 보이는 동시에, 왠지 모르게 절박해 보이기도 했다. 응원하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었나.
에필로그에서 읽는 글이 당시 내 마음이었다. 그래도 흔쾌히 버텨내고 존재하자는 말로 글이 끝난다. 방금 이야기한 마음들 모두 있었다. 절박함, 호기심, 응원과 위로. 영화에 참여한 뮤지션들 각자 개성이 뚜렷하다. 다들 노래 색깔이 다른데 그것도 참 고맙더라. AI가 노래를 만드는 시대에 자기 힘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갖고 음악 하는 사람들이니까.
정규 1집 앨범을 발표한 후로 딱 10년이 되는 해다. 오늘도 몇 차례 언급했는데 돌이켜보면 어떤가. 혹시 시간을 너무 무겁게 느끼고 있는 걸까?
그간 너무 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았나, 그런 생각이 든다. 하고 싶은 건 어떻게든 하려고 달려들었다. 근데 돌이켜보니 혼자라면 그렇게 못 했겠더라. ‘최고은이 하고 싶어 하니까, 꽤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같이 해볼까?’ 그렇게 옆에서 도와준 사람들 덕분에 했던 거다.
싱글과 EP 앨범을 꾸준히 발표했지만 알다시피 2집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앨범이 늦어지는 이유는 뭔가. 생각이 많아서?
성장하는 단계에선 속도가 빠른 편인데, 일정 수준에 도달하고 나면 더 많은 에너지와 고민이 필요해지는 것 같다. 라디오 방송 진행하면서 거의 다른 일을 못 할 정도로 바쁘기도 했고. 그래도 내년에는 꼭 2집을 내려고 한다. <버텨내고 존재하기>와 비슷한 주제를 담은 노래들로 채울 듯하고, 작년에 모어 님과 협업했던 공연 <이번 생은 주관식입니다>의 주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내가 살면서 답을 얻고 싶어 하는 문제를 프로젝트에서 풀어내는 것 같다. ‘버텨내고 존재하기’ 이전에는 ‘우정의 정원으로’였고 그전에는 ‘고향’이었다. 개인적 욕심으로 작업이 더뎌지긴 했지만, 지금까지 거쳐 온 여정 모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본다.
주기적으로 삶의 화두가 바뀌고, 그에 따라 작업 주제가 결정되는 것 같다. 그래서 최고은에게 ‘버텨내고 존재하기’란?
일단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의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되더라. 그다음엔 생각하고 용기를 내야 한다. 어마어마한 용기가 아니라, 조금 시도해 보는 정도여도 좋다. ‘안 될 것 같은데’ 싶어도 한 번 해보기.
2년 동안 진행한 국악방송 <최고은의 밤은 음악이야>를 얼마 전 종영했다. 청취자들과 목소리로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일은 어떤 경험으로 남았나. 음악에도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다면.
경청하는 귀가 생겼다. 매주 새로운 게스트를 만나는 일이 처음엔 무척이나 긴장됐다. 사전에 준비하고 공부할 것도 많더라. 그분 인터뷰를 찾아보고, 노래를 듣고, 책을 읽었다. 대화 중엔 그분이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하려고 계속 귀를 기울였다. 쉽진 않았지만 덕분에 경청의 즐거움을 알게 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여유도 찾았다. 생방송이라서 초반엔 정말 정신없었거든. 방송 끝나면 속옷이 축축해질 정도로 땀을 흘렸다. 근데 나중엔 ‘한 시간을 어떻게 채우지?’가 아니라, ‘게스트를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려면, 좀 더 재밌는 대화를 나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게 되더라. 드디어 익숙해졌다 싶을 무렵, 개편을 맞이했다. (웃음) 아쉽지만 어쨌든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배움의 시간이었지. 반대로 음악은 안 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음악 할 시간이 정말 없더라. 대신에 이전까지 음악만 듣던 뮤지션들과 직접 얼굴 보며 대화할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라디오로 연이 닿은 뮤지션들을 영화 시사회에 초대할 예정이다.


개봉 앞두고 바쁠 텐데 스트레스는 어떻게 달래나.
난 생명을 좋아한다. 동물과 놀 때 가장 즐겁다. 식물 키우고 관찰하는 것도 참 재밌고. 집주인이 개를 키우는데 그 친구랑 자주 논다. 어떤 상태인지 체크하면서 교감하는 과정이 좋다. 개와 언어로 소통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신뢰가 쌓인다. 이제 표정을 보면 무슨 생각하는지 예전보다 좀 더 알 것 같고. 식물도 새잎이 돋아나거나 혹은 이파리가 시들해지는 등 계속 변화한다. 그때마다 내가 뭘 하면 좋을까,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즐거운 고민에 빠진다. 근데 말했다시피 최근엔 워낙 바빠서 그런 시간을 갖지 못했다.
개봉 소식을 전해 들은 주변 반응은 어떤가.
대부분 내가 기획한 영화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냥 출연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이렇다 저렇다 구체적으로 얘기 안 하니까.
손 간판에 얼굴이 그렇게나 크게 그려져 있는데?
그러니까 내가 뭔가를 했겠거니 생각하긴 해도 자세하게 알진 못한다는 뜻이다. 몇 해 전부터 ‘버텨내고 존재하기’ 프로젝트를 지속했는데 이제야 “그걸 네가 기획한 거였어?” 하며 놀라는 사람도 있고. 간판 콘셉트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안소니 루소, 조 루소, 2018)다. 내가 ‘어벤져스’ 시리즈를 좋아해서 화백님께 말씀드렸더니 근사하게 재해석해 주셨다. 거기서 일두 오빠가 타노스다. 좋은 타노스. (웃음)
끝으로 버텨내고 존재하는 모든 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싶긴 한데, 누구나 좋아하는 일을 지속할 만큼은 자기 감수성을 잘 지켜내면 좋겠다다. 나도 내 감수성을 잊거나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거든. 자칫 쉬운 길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나. 옳고 그름을 딱 잘라 말하기엔 어려운 상황도 많고. 그래도 자기 감수성 정도는 지켜내는 삶이라면 우리 모두 무사히 버텨내고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감수성을 지키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나.
생명을 귀하게 대한다. 그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난 생명을 소중하지 않게 여기는 사람에게 매번 놀라는데, 요즘엔 그런 사람이 더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죽음에 민감하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생명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누구에게도, 무슨 일도 함부로 안 하게 되더라. 좀 더 배려할 수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