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 죄로
<붉은 장미의 추억> 김영민·유다온·이인석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3-10-31

스물한 살에 <안창남 비행사>(1949)로 데뷔한 감독 노필은 1966년 목을 매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는 서른여덟, 때이른 죽음을 정녕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의 곁엔 아내와 세 아이가 있었고 석 달 전 개봉한 <밤하늘의 부르스>(1966)는 약 십만 관객을 동원한 참이었다. 생전 남긴 연출작은 총 열여섯 편으로, 196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해마다 두 편 이상을 꼬박꼬박 선보였다. 다복한 집안의 가장이자 성실한 창작자였던 노필을 사지로 내몬 것은 빚더미. 기업형 영화사를 육성하겠다며 정부가 일부 회사에만 영화 제작을 허가한 탓에, 군소영화사들은 제작 명의를 빌리느라 매번 큰 빚을 졌고 감독은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노필은 생활고에 못 이겨 생을 마감한 당대 여러 감독 중 한 명이었다.

60년이 지난 후, 한 무리가 노필의 빛바랜 대본을 꺼내어 든다. 필름은 진작 유실됐고 영화 <붉은 장미의 추억>(1962)을 기억하는 이도 대부분 사라진 상황. 남아 있는 것이라곤 시나리오뿐인데 이들은 겁도 없이 두 번째 <붉은 장미의 추억>을 찍겠다고 나섰다. 영화는 한밤중 폭포 앞에 설치된 무대에서 시작한다. 낭독극을 준비하는 배우들은 코로나19로 공연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상연 대신 기록 영상을 찍게 되자 낙심한 연출가는 연습에 나타나지 않는다. 조연출과 배우들만 남은 리허설 현장에 불만이 차오를 무렵, 한 남자(김영민)가 무대 건너편에서 홀연히 등장한다. 천진난만하면서도 정념에 가득 찬 그는 급기야 무대로 뛰어 들어가 “레디, 액션!”을 외치고, 그의 조언과 격려 덕분에 배우들은 점차 제자리를 찾는다.

유다온과 이인석은 영화에서 1인 2역을 맡는다. 이인석은 형을 살해한 범죄자로 몰려 억울하게 수감된 카바레 악사 김성철을 연기하는 동시에 60년대 대본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젊은 배우가 된다. 카바레에서 일하는 가수이자 성철을 믿고 아끼는 연인 송현주는 유다온의 몫. 그는 공연 연습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주춤하다가 이내 사랑과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에 푹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배우가 동료들과 함께 붉은 장미를 피워내는 동안, 영화 안에서나 밖에서나 김영민은 그들에게 의지할 언덕이 되어줬다. 노필 감독의 무덤이 자리한 곳에서 잊지 못할 밤을 보낸 세 배우를 한자리에 초대했다.

 

 

한국연극인복지재단 기금 마련을 위한 프로젝트로 출발한 작품이고, 배우 전원은 출연료를 기부했다. 애초 낭독극을 준비하다가 급히 영화화를 결정한 듯한데 당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나.

김영민_ 한국연극인복지재단 부이사장인데 그간 한 일이 딱히 없다. 길해연 이사장님 혼자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어떻게든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한국연극인복지재단과 중랑문화재단의 협업 프로젝트로 문삼화 연출이 낭독극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삼화 누나와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됐는데 정작 작품을 같이 해본 적은 없었다. 여러모로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참여를 결정했다. 최근 3~4년 동안 공연을 안 했던 터라 기대됐고, 후배들과 함께하면서 에너지도 주고받을 수 있을 듯했다. 그러다 코로나19로 공연이 취소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공연을 영상기록으로 대체하게 됐는데, 문삼화 연출은 단순히 기록하는 차원을 넘어서 영화로 재창조하기를 원했다. 결국 백재호 감독이 연출자로 왔고 또 다른 <붉은 장미의 추억>이 탄생했다. 시간과 장소에 제한이 있다 보니 제작진에게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텐데, 내겐 연극도 하고 영화도 하는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다. 정릉 지하 연습실에서 후배들과 모였던 날, 느낌이 딱 오더라. 예전에 작업하던 생각도 나고.

유다온_ 김영민, 배우경 선배님 외 나머지 배우들은 극단 공상집단 뚱딴지 소속이다. 문삼화 연출님이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기셨다. 상황이 이러저러한데 같이 하면 좋겠다고. 실은 그 채팅방이 ‘코로나19 피해자 모임’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준비했던 다른 작품이 코로나19로 취소되면서 다들 할 일 없이 헤매는 상태였거든. 연출님 말씀을 들어보니 그리 오래 걸릴 일이 아닌 데다 좋은 취지의 프로젝트였다. 무엇보다 대본을 안 외워도 된다고 하시더라. (웃음) 어차피 놀고 있으니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합류했다. 그때만 해도 지금 같은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다. 영화제에 가고 개봉까지 하는 상황이 얼떨떨하다.

 

현재 배급사, 홍보사 등과 협력하는 대신에 감독과 배우가 직접 개봉 업무를 소화하고 있다. 비용 절감 외에 다른 이유가 있나.

김영민_ 기본적으로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라 관객과 대면하는 일에 능숙하다. 개봉 전에 다 같이 모여서 회의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 자체가 재밌더라. 대부분 같은 극단 출신이다 보니 서로 척하면 척, 빠르게 진행되는 맛도 있고. 방향을 정하고 나면 이건 누가, 저건 누가, 그렇게 총대 메는 사람도 금세 나온다. 다들 연기뿐만 아니라 무대 청소, 매표, 입장 안내 등 여러 일을 경험해 봤으니까.

유다온_ 나는 총괄 매니저 역할을 맡았다. 감독님과 수시로 소통하면서 동료들에게 진행 상황을 공유한다. 조연출 역의 위다은 배우가 상영시간표 정리와 행사 섭외를 담당하고, 인석 오빠는 영화 홍보에 필요한 글을 쓴다. 글쓰기 실력이 좋거든.

이인석_ 감독님이 보내준 자료를 바탕으로 크라우드펀딩 소개글, 상영회 초대문, 보도자료 등을 작성한다.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아서 감독님께 “이렇게 하면 되나요?” 몇 번씩 물어본다. 수정 사항을 알려주시면 다시 고치고. 다온이는 매니징뿐만 아니라 디자인 업무도 겸한다.

유다온_ 크라우드펀딩 후원자에게 보낼 배지를 디자인했다. 근데 어쩌지. 영민 선배님께는 못 보여드릴 것 같다. 선배님 얼굴을 그렸는데 생각보다 단순화 작업을 여러 번 거쳐야 하더라. 제작 과정에서 잘생김은 점점 희미해지고 상징만 남은 상태가 됐다.

김영민_ 그게 더 재밌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2020) 포스터 봐라. 일부러 포커스 나간 것처럼 찍히려고 애쓴 티가 나지 않나. (웃음)

이인석_ 다온이가 특별 포스터도 만들고 있다. 아마 거기에 선배님의 잘생김이 온전히 담기지 않을까.

김영민_ 극단에서도 원래 디자인 일을 했나?

유다온_ 전혀. 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걸 다들 모른다. 숨겨야 하는데 큰일이다. 알게 되면 자꾸 일이 들어올 텐데.

이인석_ 디자이너 예명이라도 정해라. (웃음)

 

웃으면서 말하지만 만만치 않은 일이다. 무리해서 개봉을 결정했다는 생각도 드는데 왜 욕심이 났나.

김영민_ 우리도 우리인데 감독의 추진력이 큰 몫을 했다. 작업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같다. 재작년에 촬영해서 작년에 영화제 가고, 올해 개봉까지 해냈다. 감독이 손을 놓지 않고 작품을 책임져 줬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우리 딱 하루 촬영했거든. ‘이만큼 했으면 됐다’하고 잊을 법도 한데 계속해서 성과를 내더라. 연극은 공연을 마치면 그걸로 끝이다. 배우들은 다음 작품을 향해 가고 연출자도 마찬가지다. 근데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가 끝난 다음에도 후반 작업과 개봉 준비 등 감독이 해야 할 일이 쭉 이어지지 않나. 이 친구들에게는 무척 새로운 경험이 될 거다. 나 역시 그 과정을 함께 느끼는 중이고.

<붉은 장미의 추억>
<붉은 장미의 추억>

당시 촬영을 해가 진 이후부터 동트기 전까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끝내야 했다고. 말한 대로 배우들은 <붉은 장미의 추억>이 이렇게나 생명력 긴 작품이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

김영민_ 잘 기억도 안 나지? 영화 찍으면 대본을 버리지 말고 집에 꼭 보관해야 한다. 개봉할 무렵엔 내가 뭘 어떻게 했는지 거의 까먹거든. 인터뷰나 GV 가기 전에 나도 시나리오 꺼내서 한 번 읽는다니까. (웃음)

유다온_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시나리오 읽고 왔다. (웃음) 선배님 말씀처럼 촬영하고 나서 그걸로 끝난 줄 알았다. 근데 다음 해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시작으로 상영 소식이 연달아 들려오는 거다. ‘이상하다. 이거 진짜 길게 가네?’ 물론 감독님의 추진력 덕분이지만, 내 생각엔 문삼화 연출님이 던졌던 한마디가 큰 힘을 발휘한 것 같다. 코로나19로 취소됐던 <붉은 장미의 추억> 낭독극을 드디어 작년 말에 진행했다. 그때 공연을 보러 온 감독님에게 연출님이 딱 말씀하시더라. “개봉해야지?” 두 분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내년에 개봉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진짜 여기까지 왔다.

이인석_ 대화를 듣다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영화라는 것이 참 신기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모르게 잊은 부분이 있는데 영화를 통해 상기하게 된다.

 

좀 더 기억을 되살려 보자. 영화는 용마폭포공원을 배경으로 동명 연극의 리허설 과정을 담는다. 제한된 시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현장성을 강조하는 점이 인상적인데 실제 촬영장 분위기는 어땠나. 밤이슬 맞으며 영화를 찍던 시간이 어떤 기억으로 남았는지 궁금하다.

유다온_ 잘 들여다보면 우리가 점점 젖어간다. 몸은 축축해지고, 대본은 눅눅해지고. (웃음) 재미와 힘듦이 반반이었다. 가을 막바지라서 꽤 쌀쌀했거든. 추위와 싸우는 동시에 마음도 급했다. 해가 뜨면 영화를 더는 찍을 수 없으니 어떻게든 시간 내에 마무리하려고 다들 집중했다.

이인석_ 감독님은 처음부터 추가 촬영은 없다는 생각으로 준비했을 거다. 우리 예산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감독님, 촬영팀, 조명팀을 포함한 제작진 모두 최선을 다했다. 영민 선배님도 밤새 추위 속에서 버티며 고생하셨고.

김영민_ 작품 규모를 보면 현장이 대강 그려지지 않나. 난 이런 경우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간다. 희망을 품으면 더 힘들거든. ‘나 죽었네’ 하고 가야지. (웃음) 그래도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상상했던 것보다 공간이 예뻤다. 공간 분위기와 에너지를 느끼며 연기하기를 좋아하는데 그런 면에서 장점이 분명했다. 나보다 후배들이 훌륭했다. 연극과 달리 영화는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촬영하지 않나. 낯선 작업일 텐데 어려워하지 않고 금세 적응하더라. 속으로 그랬다. ‘너희 좋겠다. 잘해서!’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본 팀이라 가능했던 프로젝트 같다. 김영민 배우는 참여자이자 관찰자로서 이들을 바라봤을 테고, 다른 배우들은 새로운 형태의 작업을 시도하며 새삼 자부심을 느꼈을 거다. 

김영민_ 현장에 있는 배우로서든 작품 속 인물로서든 관찰자적 시선을 가질 만했다. 오랜만에 연극을 하는 데다 뚱딴지 친구들과는 첫 작업이었다. 이들은 연기를 어떻게 할까? 삼화 누나와는 어떤 방식으로 소통할까? 동시에 노필 감독님이라면 지금 이 순간을, 60년이 지나서 <붉은 장미의 추억>을 되살려내는 배우들을 도대체 어떻게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맞닿는 구석이 있다. 그때도 장국영은 찬실이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지 많이 생각했거든. 노필 감독님을 떠올리면서 촬영하는 내내 그 느낌을 가져 보려고 노력했다. 영화는 사라지고 시나리오만 남은 상황. 그 글을 길잡이 삼아 연기하는 젊은 배우들. 만약 감독님의 영혼이 그곳에 와 있다면? 그런 질문을 스스로 되새겼던 것 같다.

이인석_ 내 경우엔 계속 만나고 합을 맞췄던 친구들과 연기하다 보니 확실히 편안했다. 누가 뭘 하든 다들 알아서 잘 받아주더라. 불편한 사람이 없는, 서로 장난치고 놀리면서 웃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유다온_ 인석 오빠가 평소에도 놀림당하는 역할이거든. (웃음) 새롭지만 익숙했던 작업이다. 뚱딴지에서 문삼화 연출님과 이미 여러 차례 작업했고, 그중 우리는 비교적 낭독극도 많이 해본 편이다. 그러니까 작품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대략 짐작한다는 뜻이다. 대본을 손에 들긴 해도 분명히 무대에서 움직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신마다 장소가 계속 변하지 않나. 우리가 그걸 실제로 구현할 순 없으니 무대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장소 변화를 표현해 보자고 의견을 냈다.

 

배우들이 동선을 직접 구상했구나.

이인석_ 맞다, 사실 연출님은 별로 한 일이 없다. (웃음)

유다온_ 세상에. 오늘 웃기고 싶어서 무리하는데?

<붉은 장미의 추억>
<붉은 장미의 추억>

캐스팅 과정은 어땠나. 배역마다 오디션을 진행한 건가.

유다온_ 첫 번째 리딩이 일종의 오디션이었다. 연령대를 고려해서 송정자 역과 변호사 및 지배인 역만 각각 김지원, 배우경 선배님으로 정해져 있었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열어둔 상황이었다. 여자 주인공이 송현주인데 실은 내 본명이 현주다. 리딩 시작하기 전에 지원 선배님이 딱 이러시는 거다. “현주는 현주가 읽어야지.”

 

사전에 김지원 배우와 몰래 말을 맞춘 것은 아니고? (웃음)

유다온_ 진짜 아니다. 감사한 우연이었다. 근데 우리가 60년대 말투를 사용하지 않나. 연출님이 공지한 부분이라 준비해서 갔는데 다행히 마음에 들어 하셨다. 남자 배우들의 경우, 워낙 등장인물이 많다 보니 여러 차례 배역을 바꿔가면서 대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연출님은 배역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고르려고 하셨던 것 같다.

이인석_ 나랑 기억이 좀 다르다. 연출님이 60년대 말투를 쓰라고 미리 알려주셨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유다온_ 말씀하셨다. 우리 채팅방에 일찌감치 공지하셨잖나.

 

둘이 반대다. 유다온 배우가 칼을 갈고 준비했다면 이인석 배우는 별 야망 없이 임한 느낌?

김영민_ 나도 다온이가 많이 준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다온_ 대본을 소리 내어 여러 번 읽었다. 어릴 적부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의 옥희 흉내 내기를 좋아해서 그 말투가 아주 어색하진 않았다. 근데 이상하게 송현주가 아닌 다른 인물의 대사를 읽으면 어색한 거다. 현주 역을 욕심내야겠다 싶더라. 마침 지원 선배님도 기회를 주셨으니 제대로 하자는 마음이었다.

이인석_ 대다수 배우가 일인 다역을 소화했는데 본래 시나리오엔 배역이 훨씬 많다. 배우들이 낭독극을 준비하면서 각색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인물을 생략하거나 여러 인물을 섞어서 하나로 만들기도 했다. 연극에서 배우가 다역을 맡는 것이 아주 드문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니다. 미미와 미숙처럼 캐릭터가 전혀 다른 역을 동시에 소화한 정다연 배우도 준비 과정에서 고생했던 것으로 안다. 어쨌거나 김성철이 주인공이기에 분량이 가장 많았다. 남기욱, 김세중, 김태완 배우와 차례대로 리딩한 끝에 내가 성철 역을 맡게 됐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연출님과 낭독극을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영향을 준 것 같다. 우리가 참여했던 낭독극이 좋은 반응을 얻은 터라 나도 자신감이 있었고. 이번 작품도 재미있게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배우를 믿어준 연출에게 한 일이 없다고 말하다니.

이인석_ 이렇게 정리가 되나. 근데 나도 연출님을 믿었다. 서로 믿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김영민_ 연출님들이 일부러 그러기도 한다. 연출이 연습에 안 나오거나 일일이 잡아주지 않으면 배우들 마음이 급해지거든. 어느 순간 알아서 각성하는 거다. “우리 이럴 때 아니다, 연습하자.” (웃음)

 

김영민 배우는 유일하게 원작에 없는 인물을 연기한다. 대본도 촬영 임박해서 받았다고.

김영민_ 문삼화 연출이 언질을 줬는데 내용이 두루뭉술했다. 백재호 감독과 이야기를 나눈 것 같긴 했지만 어떤 역할인지 명확히 파악하기엔 어려웠다. 나중에 대본을 보니 노필 감독님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더라.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도 있고 잠깐 쉬었다 갈 수 있는 구간을 만들어 내는 역할이었다.

김영민 ⓒ이영진

원작은 전형적인 통속극의 줄기를 따르면서도 의외의 자극을 제공한다. 다들 시나리오는 어떻게 읽었나.

김영민_ 우선 크레디트 자체가 흥미로웠다. 우리가 익히 들어 온,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이름이 쫙 나오지 않나. 신용균, 김지미, 장민호 선생님, 거기에 정일성 촬영 감독님까지. 윤여정 선생님이 아카데미에서 수상한 후, 선생님의 작품 활동을 방송에서 다룬 적이 있다. 그걸 보고 선생님의 과거 작품을 찾아봤는데 정말 현대적 연기를 하시더라. 어떻게 연기할 것인가. 배우라면 누구나 고민할 문제인데 새삼 선생님은 그중에서도 무척 앞서가셨던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배우들이 <붉은 장미의 추억>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쓰인 시나리오 아닌가. 어렵게 받아들일 법한데 다들 고전과 현대를 적절히 섞어서 새로운 맛을 낸 것 같다. 단지 ‘옛날 영화 흉내 내기’에 그쳤다면 이건 영화가 아니라 학예회처럼 보였을 거다. 작품에 마음을 담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인석_ 솔직히 처음엔 호기심으로 접근했다. ‘60년대 대본은 대체 어떨까? 뭐가 다를까?’ 현재 시선으로 보면 촌스러운 구석도 있지만, 어떤 면에선 당시에도 이런 시도를 했구나 싶어 놀랍더라.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억울하게 옥살이하고 그런 통속적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반전이 있었다. 총격 신과 추격 신도 나오고. 살펴보면 액션, 스릴러, 로맨스 등 여러 장르를 포함하는 작품이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는 다 똑같구나.

김영민_ 거의 60년대 판 <헤어질 결심>(박찬욱, 2022)이지. (웃음)

유다온_ 페이지를 넘길수록 몰입됐다. 역시 막장이 최고구나 싶더라.

 

그래도 60년대 대본을 읽으며 우왕좌왕하던 인물들처럼 배우 역시 초반엔 당황했을 듯하다. 60년대 발성과 호흡, 목소리 톤, 언어 등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생경한 부분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준비했나.

이인석_ 알맞은 연기 스타일과 톤을 찾으려면 일단 선생님들이 예전에 어떻게 연기했는지 알아야 했다. 유튜브에서 자료를 한참 찾았다. 60년대 영화와 방송을 보면서 따라 했는데, 그중 신영균 선생님과 최무룡 선생님을 많이 참고했다. 신영균 선생님은 굉장히 톤이 굵어서 최무룡 선생님 보이스를 좀 더 섞어볼까 싶더라. 그렇게 선생님들 목소리를 들으며 연습하고, 내 목소리를 녹음해서 확인하고. 이 과정을 반복했다.

유다온_ 처음 리딩했던 날부터 촬영하기 전까지 매일 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틀어놓고 잤다. 아예 그 사운드와 느낌에 익숙해지도록. 알다시피 당대 작품에 여성이 메인 캐릭터로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여성 배우의 목소리를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작품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였다. 항상 틀어 놓다 보니 자연스레 귀에 익었고, 어미가 올라간다든지 하는 디테일이 점차 들리기 시작했다. 내 말투에 그런 요소를 적용하려고 했다.

 

김영민 배우의 연기는 영화에서 또 다른 반전을 낳는다. 누구나 이 남자를 노필 감독의 환영으로 여길 텐데 배우는 무게감을 지니거나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들지 않는다. 오히려 촐싹대고 호들갑 떨면서 놀이터에 온 어린아이처럼 연신 에너지를 발산하더라.

김영민_ 노필 감독님이라면 그럴 듯했다. 후배들에게 고마워하는 동시에, 자기 작품을 다시 한번 연출하는 상황에 흥분하며 즐거움을 만끽하는 거다. 자기도 모르게 흥에 막 젖어 있다고 해야 할까. 동선은 실제로 현장에서 움직이며 정했다. “레디, 액션!”을 외치는 말투와 포즈의 경우, 예전 느낌을 살리면서 재미를 주는 방식을 고민했다. 노필 감독님이 현장에 푹 빠져서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너무 방정맞나? (웃음)

 

예상을 벗어나서 좋더라. 그러다 중간중간 우수 어린 눈빛을 보여주기도 하고.

김영민_ 그 표정 찾는다고 혼났다. 현장에서 친구들과 호흡을 맞추면서도 혼자 머릿속으로 ‘어느 타이밍에 표현할까?’ 계속 생각했다.

 

순발력이 좋은 편인가.

김영민_ 그렇지는 않은데 처음부터 염두에 둔 부분이라 어떻게든 실현해 보려고 했다. 스치듯 지나가는 표정이라든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걸 뒤돌아서 감추는 모습 같은 것. 백재호 감독도 내가 배우들을 지켜볼 때나 엔딩 무렵에 복합적인 감정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했고.

유다온 ⓒ이영진

<프랑스 여자>(김희정, 2020) <찬실이는 복도 많지> 등 필모그래피를 짚어 보면 ‘유령 전문가’라고 부를 만하다. 노필이라는 유령과의 만남은 어떤 기억으로 남았나.

김영민_ 감독님은 마흔도 안 된 나이에 돌아가셨다. 작품을 보면 가슴 깊이 뜨거움을 간직한 분이셨구나 싶다. 그래서 멜로를 잘 만드셨을까? 한편으로는 흔히 통속극이라고 칭하는 상업영화를 연출하면서도 그보다 음악영화에 큰 열정을 가지셨다는 이야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어떤 분이었고 무엇을 꿈꿨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나는 ‘발굴’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노필인 나, 유령이 된 나를 현시대 사람들이 다시 발굴한다는 느낌이 컸다. 진짜 영혼이 있다면 감독님은 굉장히 애틋하고 기특하게 우리를 바라보지 않으셨을까.

 

먼 과거이자 만난 적조차 없는 사람이지만 연기하는 과정에서 노필 감독을 향한 묘한 책임감이나 사명감이 생겨났을 것 같기도 하다.

유다온_ 현장에서 ‘노필 감독님이 지금 보고 계실 수도 있겠다’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영민 선배님이 보여주신 집중력 덕분이다. 게다가 밤이었고, 실제 감독님 무덤이 자리한 산 근처에서 영화를 찍었으니까. 감독님이 오셔서 기분 좋게 보고 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비록 이전까지 몰랐던 분이지만 멋진 작품 만들어주셔서 감사했고 이제나마 연이 닿아서 기뻤다. 그런 마음을 연기에 잘 담고 싶었다.

이인석_ 어쨌든 감독님은 자기 작품을 모두 사랑하지 않으셨을까. <붉은 장미의 추억>도 감독님이 아끼는 작품일 거라 생각한다. 사명감을 갖고 작업에 뛰어든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서서히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그냥 우리끼리 재미있으려고 하는 일만은 아니구나. 재단 일이니까 당연히 참여해야 해서 하는 것만도 아니구나. 조금씩 나만의 의미를 더하면서 자부심을 느끼게 됐다. 많은 분에게 노필 감독님과 <붉은 장미의 추억>을 소개하고 싶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지 오래됐지만 이런 감독님이 계셨다고, 우리가 지금 그분의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인석 배우는 영화 속에서 노필 감독과 만난 이후 가장 크게 변화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극 초반에 ‘연기 못하는 연기’ 정말 잘하더라.

이인석_ 연기 못하는 연기가 더 어려웠다.

유다온_ 왜? 오빠는 워낙 연기를 잘하니까? (웃음)

이인석_ 그게 아니라 영화에서 난 대본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캐릭터 아닌가. 요즘 말로 바꾸고 싶다. 내 언어로 말해야 한다. 현시점에 왜 옛날 시나리오를 고수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불만을 토로하는 인물이라 태도에 신경을 썼던 것 같다. 감독님도 그 부분에 관해 여러 차례 조언했다. 좀 더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해서 ‘도저히 못 하겠다’라는 느낌을 내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그 와중에 다른 배우들이 성철 역을 호시탐탐 노리면서 웃음을 자아낸다. 남기욱 배우가 천연덕스럽게 치고 들어오던데.

이인석_ 티는 안 냈지만 옆에서 지켜보며 놀랐다. 얘가 오늘 미쳤나 싶더라. (웃음) 애드리브는 아닌데 리허설보다 적극적인 느낌이었다. 연습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주고받다가 자연스레 만들어졌던 설정이다.

유다온_ 영민 선배님이 무대로 들어올 계기가 필요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으니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했고, 그러면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자 싶더라. 배우들이 처음엔 현대 말투를 유지하다 보니 대사가 자꾸 엉킨다. 노필 감독님이 그때 나타나서 방향을 일러주는 거다. 작품이 탄생한 시대의 말투로 읽어보라고. 그렇게 오프닝 시퀀스가 정리되면서 다른 배우들도 캐릭터에 맞춰 연기를 준비했다. 그중 기욱은 “이게 어려워? 내가 해볼까?”라며 은근히 인석을 도발했지.

이인석_ 기욱이는 진심이었을걸. (웃음) 영화 속 영화, 그러니까 기욱이 맡은 허민이라는 캐릭터와 연결되기도 한다. 허민은 성철의 친구이자 그에게 밀려난 2인자 같은 인물이거든. 현주를 좋아하지만 현주와 성철이 애틋한 관계임을 알기에 고백할 용기도 못 내고. 다들 비슷한 방식으로 배우와 인물 사이에 공통점을 만들어 놓았다. 내 경우엔 노필 감독님과 대사를 주고 받는 장면도 있는데, 문득 촬영하면서 성철이 노필 감독님의 분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연기하는 내내 영민 선배님이 건너편에서 함께 호흡하며 에너지를 전해 주셨다. 덕분에 진짜 옛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더라.

 

옛날이라면?

이인석_ 60년대로. 영화 중간에 화면이 흑백으로 바뀌지 않나. 나중에 그 장면을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인석 ⓒ이영진

흑백으로 전환되는 장면에서 유다온 배우가 노래를 부른다. 영화 주제곡 ‘사랑한 죄로’를 부르는 배우의 목소리는 오래전 녹음한 김지미 배우의 목소리로 옮겨 간다. 은근히 부담을 느꼈을 텐데.

유다온_ 배역이 확정된 후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를 검색했다. ‘사랑한 죄로’를 들어보고 싶어서 여기저기 찾다가 블로그 하나를 발견했다. 영화 주제곡이 담긴 LP를 녹음해서 올려놓은 듯했는데 하필이면 ‘사랑한 죄로’만 재생이 안 되더라. 망설이다가 댓글을 남겼다. 운영자가 이걸 확인할까 싶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곧장 답글이 달렸다. 재생할 수 있도록 바꿔놨다고. 그날부터 음원을 녹음해서 연습에 돌입했다. 얼마 후 감독님이 리딩 현장에 왔는데 나한테 ‘사랑한 죄로’를 불러보라고 하더라. 엄청나게 떨었다.

김영민_ 여러모로 너한테 운명적인 작업 같다. 현주라는 이름부터 블로그 운영자의 호의까지.

유다온_ 맞다, 좋은 기회가 연달아 찾아와 줬다. 그날 감독님이 이 정도면 괜찮겠다고 해서 이후엔 AR을 들으며 연습했다. 문제는 녹음이었다. 감독님께 MR을 받았는데 키가 높은 거다. 긴장한 탓인가 하며 녹음실에 갔더니 실제로 음악 감독님이 키를 올렸다고 하더라. 고민하다가 그냥 불렀는데 망했다. (웃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쉽다. 내 목소리에서 김지미 선배님 목소리로 넘어가는 걸 진작 알았다면 그날 키를 좀 낮춰달라고 할걸. 영화 보고 후회했다.

 

김영민 배우의 자주색 셔츠와 양복, 이인석 배우의 2대 8 가르마에 콧수염, 유다온 배우의 빨간색 카디건과 머리띠 등 캐릭터에 어울리는 의상, 분장, 소품도 눈에 띈다. 이 또한 배우들의 아이디어였나.

김영민_ 드라마에서 바람둥이 역할을 했을 때 입은 옷이 집에 몇 벌 남아 있었다. 눈에 들어와서 챙겨 갔는데 다행히 극과 어울리더라. 셔츠 소재가 반들반들해서 옛날 느낌도 나고. 아무래도 작품 예산이 적으면 의상이나 분장 등 배우가 챙겨야 할 것이 생긴다. 누구는 황학동 시장도 가고 그랬는데.

유다온_ 배우경 선배님이 시장에서 그 가죽 재킷을 구해오셨다.

이인석_ 극단에 의상 보관실이 있다. 남자 배우들은 시장에서 옷 고르듯 그곳을 샅샅이 뒤졌다. 최대한 레트로 느낌이 묻어나는, 예전 아빠 옷처럼 품이 넉넉하고 무늬도 화려하게 들어간 옷들 위주로 모았다. 넥타이도 김세중 배우는 빨간색, 남기욱 배우는 파란색, 김태완 배우는 금색으로 딱딱 다르게 맞추고. 김지원 선배님이 입은 한복은 윤소정 선생님의 기증품이다. 몇 해 전 돌아가셨는데 선생님이 우리 극단에 의상을 여러 벌 주셨거든. 지금은 그렇게 만들려야 만들 수도 없는 근사한 옷들이다. 난 세련된 느낌을 되도록 지우려 했다. 머리 길이가 짧은 편이라 변화를 크게 주기는 어려워서 가르마를 2대 8로 탔다. 동시에 성철은 음악을 하는 젊은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깔끔하기보다는 덥수룩한 느낌을 내고 싶어서 일부러 수염을 길렀다.

유다온_ 의상을 자체적으로 준비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일이다. 큰 극장이 아닌 이상 연극에서 의상 팀을 따로 두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 나는 김지원 선배님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선배님이 소장한 의상 중 현주 역에 어울릴 법한 가디건과 원피스를 챙겨 주셨다. 인터넷으로 60년대 이미지도 많이 찾아봤다. 당시 내 머리가 단발이라 머리띠를 착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땅한 걸 구할 수가 없더라. 반다나를 묶어서 헤어 밴드처럼 만들었다.

 

하나씩 만들어 가는 재미가 컸겠다. 꾸준히 연기했지만 유다온, 이인석 배우가 장편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것은 거의 처음이다. 영화가 완성된 후 스크린에 투영된 내 얼굴과 몸짓을 보는 기분은 어땠나.

유다온_ 일단 보자마자 ‘아, 너무 포동포동한데?’ (웃음) 몸무게가 최고치를 경신했을 무렵이거든. 그래도 눈빛이 살아 있어서 마음에 든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때는 무엇보다 눈이 중요하다고 본다. 눈을 통해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니까. 물론 아쉬운 부분이야 있지만 눈에 감정을 담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느껴져서 만족한다.

이인석_ 처음엔 영화를 못 보겠더라. 미쳐버릴 것 같은 느낌? 부끄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김영민_ 나도 그렇다. 그냥 보면 되는데 이상하다. 처음 영화 시작했을 때부터 그랬다.

 

아직도 쑥스러운가.

김영민_ 연기를 못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 머릿속에 그렸던 모습과 달라선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주변에 물어봤더니 특히 연극을 했던 배우들은 대부분 공감하더라. “나도 여전히 못 봐.”

<붉은 장미의 추억>
<붉은 장미의 추억>

오히려 무대에서 연기하면 더 궁금하지 않나. 지금 내 모습이 어떤지 기록해서 보고 싶을 듯한데.

김영민_ <붉은 장미의 추억>은 연극을 기록한 영상이 아닌 영화이지만, 어쨌든 연극 장면이 나온다고 표현해 보자. 그러면 이건 백 퍼센트 감독이 잘 담아준 결과다. 아무런 연출 없이 연극 무대를 기록용으로 찍은 건 진짜 못 본다.

이인석_ 무슨 말인지 안다. 기록 영상엔 무대의 에너지와 느낌이 담기지 않거든.

김영민_ 백재호 감독과 이희섭 촬영 감독이 신경을 많이 써준 덕분이다. 근데 다온이랑 인석이, 너희 매체 활동하다가 나중에 베드신이라도 찍잖아? 영화 보면서 눈을 감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부끄러워서 아예 몸이 의자 밑으로 내려갈 거다. (웃음)

 

심지어 드라마라면 계속 재방송하고.

유다온_ 그 말을 들으니 처음 선배님이 연습실에 오셨던 날이 떠오른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재방송을 보다가 연습하러 갔는데, 방금 텔레비전 속에 있던 선배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거다. 깜짝 놀랐다. 선배님은 그날부터 우리 팀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셨다. 고생한다며 간식도 몇 번이나 사주시고.

김영민_ 다 된 밥상에 숟가락 얹는 사람인데 그거라도 해야지. 다들 힘 모아서 열심히 준비해 놓으면 난 마지막에 쓱 들어가는 것 아닌가. 미안하더라.

이인석_ 현장에서도 든든히 지켜주시는 느낌을 받았다. 감독님이 “이걸 드라마나 영화 현장의 보편적 상황이라고 이해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 보통 촬영장에서는 배우의 체력을 고려해 선배들을 먼저 찍는 편이고, 배우가 카메라에 본인이 잡히지 않는 장면에서까지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춰주는 경우도 흔치 않다고. 근데 선배님은 리허설부터 촬영 종료할 때까지 계속 우리와 함께했다. 그곳에 없는 선배님을 있다고 상상하면서, 허공을 보면서 연기할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유다온_ 야외인 데다 대기할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근데 우리가 연기하는 내내 주변을 맴돌고 계셨다. 시야에 선배님이 보이니까 노필 감독님의 환영과 함께하는 느낌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김영민_ 나도 영화 하면서 선배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 <협녀, 칼의 기억>(박흥식, 2015) 현장에서 (이)병헌 형이 딱 그랬다. 이제 들어가서 쉬시라 했는데도 괜찮다면서 내 연기를 계속 받아주더라.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맙다. 드라마 현장은 워낙 바쁘게 굴러가다 보니 매번 그렇게 하긴 어렵지만, 웬만하면 내가 안 나오더라도 상대 배우와 같이 연기하려고 한다. 연극을 했던 경험과 마음이 있어선지 그게 좋더라.

 

셋은 이번에 영화 찍듯 연극하고, 연극하듯 영화 찍은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유다온, 이인석 배우에게 김영민 배우는 일찌감치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좋은 예’ 아닐까. 가까이서 지켜보며 무얼 느꼈나.

김영민_ 난 잠깐 나갔다 와야겠는데? (웃음)

유다온_ 함께 호흡한다는 사실 자체가 영광이었고 감사했다. 선배님의 순발력에 여러 번 감탄했다. 전날 대본을 받았는데 바로 외우셨고, 심지어 본인의 것으로 만들어서 표현하셨다. 이래서 여기저기 선배님을 찾는 곳이 많구나. 잘 되는 사람은 이유가 다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 선배님 덕분에 스스로 부족한 점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인석_ 선배님은 배우로서도 인물로서도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라면 쉽지 않았을 텐데 선배님은 물 흐르듯 소화하시더라. 우리가 따로 노력하거나 챙겨드리지 않아도 될 만큼 편안해 보이셨고, 무엇보다 집중력이 엄청났다. 확실히 선배님은 선배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에겐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

김영민_ 난 반대로 후배들을 보면서 놀랐다. 대개 영화 출연은 처음이다 보니 정신없었을 거다. 테이크를 여러 번 가거나 장면을 끊어서 찍으면 당황할 법도 한데, 다들 긴장한 기색 없이 맡은 바를 다해줬다. 적절한 시기를 만나면 제 기량을 맘껏 펼칠 배우들이다. 각자 매력이 충분하고 대본을 해석하여 캐릭터를 창조하는 능력도 갖췄다. 시작하는 단계에선 낯설고 어려운 부분이 있을지 몰라도 점점 더 잘할 거다. 아직 때가 안 왔을 뿐이지 잘 될 친구들이다.

 

오랜만에 또 다른 재미를 느낀 현장이라고 했다. 시기마다 연기를 대하는 마음가짐과 고민이 달라질 텐데 요즘엔 어떤가.

김영민_ 즐겁게 연기하기, 그걸 유지하기가 참 어렵다. 연기가 주는 순수한 기쁨, 나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 생활에 관한 문제 등 여러 가지가 함께할 수밖에 없거든. 인정받지 못하면 괴로운데, 인정받고 나면 또 새로운 고통이 뒤따른다. 예전에 선배들이 연기를 도 닦는 일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알겠더라. 사실 고민은 쭉 이어지는 것 같다. 연극을 시작했던 20대와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앞만 보며 분주히 달리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조금 발전해 있고, 그러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마주하기를 반복하는 과정이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다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말하자면 배우의 운명이다. 캐스팅을 당하는, 타인의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입장. 이제 그걸 인정하고 이해하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게 됐다. 다양한 작품을 접하고, 이야기와 인물을 분석하면서 부지런히 공부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동시에 날 끊임없이 살펴봐야 한다. 난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왜 연기를 하는지 자문한다. 정답은 없겠지만 그렇게 내 안과 밖의 거리를 좁혀 나가려는 노력이 중요한 것 같다.

<붉은 장미의 추억>(1962)
<붉은 장미의 추억>(1962)

다른 두 배우의 속내도 궁금하다. 젊지만 어리다고 할 수 없는 나이다. 직업과 생활, 꿈에 관한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조급해지기도 할 텐데.

유다온_ 연기를 평생 직업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근데 현실을 외면할 수 없으니 해마다 무게가 더해진다. 1년에 영화든 드라마든 한 편, 연극은 적어도 세 편 이상 하기가 목표였는데 올해 캐스팅이 하나도 안 됐다. 기회가 점차 줄어드는 현실을 체감한다. 극단에도 후배들이 들어오다 보니 앞날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후배들에게 먼저 기회를 줘야 하고 나는 살길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언제까지 또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누가 물으면 아니라고 하는데 실은 되게 초조하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한계가 올 텐데, 그러면 연기를 위해 다른 직업을 하나 더 찾아야 하나 싶고. 주객이 전도된 상황을 마주하다 보니 괴리감을 느낀다. 누군가에게 날 배우라고 소개하면 멋있다거나 대단하다는 말이 돌아온다. 하지만 내가 진짜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난 누구지? 내 직업은 정확하게 뭐지? 이런 물음표가 언제나 따라붙으니 고통스러운 순간도 잦다.

 

그 불안과 괴로움을 어떻게 다스리나. 어쨌든 내일 아침에 또 눈을 뜨고 하루를 살아야 하는데.

유다온_ 무조건 성공할 거라고 믿는다. 마흔이든 예순이든, 백 살 할머니가 되어서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나치게 무모한 자신감인가 싶기도 한데 정말 그 믿음 하나로 버틴다.

 

무구한 믿음도 재능인지 모른다. 이인석 배우는?

이인석_ 글쎄, 재미에서 출발했지만 할수록 어려운 것이 연기다. 답이 없다. 연기도 답이 없는데 배우로서 생활을 지속하는 일에 답이 있겠나. 근데 이미 발은 들였고 내가 선택했으니 불평할 대상도 없다. 불만이 있어도 어쩔 수 없지. 상황이 달라져도 계속 숙제처럼 품고 갈 고민이라고 본다. 즐길 수 있으면 즐기자고, 선택한 이상 후회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요새 취미로 달리기를 하는데 꽤 도움이 된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얻고, 조금씩 거리를 늘리며 뛰다 보니 도전 의식도 생긴다. 올해 풀코스 마라톤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김영민 배우가 연기를 도 닦는 일에 비유했는데 달리기도 비슷한 느낌이다.

이인석_ 나의 주로를 닦는 거니까. 그렇게 달리면서 마주친 풍경과 사람이 좋은 에너지를 주더라.

유다온_ 오빠는 달리기에 진심이다. 풀코스 마라톤은 훈련이 필요하다며 코치님까지 모셔서 연습하더라.

이인석_ 나름대로 인생을 즐기고 있지. (웃음) 장거리 달리기에서는 무엇보다 페이스 조절이 중요하다. 배우의 일은 기다림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걸 잘 해내려면 지구력을 길러야 한다. 다온이나 나나 버틸 수 있는 힘을 기르면서 끝까지, 조금 늦더라도 오래오래 갔으면 좋겠다. 연기는 멀리 봐야 하는 길인 것 같다.

 

마라톤 외에 계획해 놓은 일이 있다면? 곧 연말인데 다들 어떻게 마무리하고 싶나.

김영민_ 올해 여름까지 김희애, 설경구 선배님이 주연한 드라마 <돌풍>을 찍었다. 정통 정치 드라마라고 부를 만한 대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숨막히게 몰아치는 매력이 어마어마해서 어떻게 나올지 기대된다. 지금은 드라마 <눈물의 여왕>을 촬영 중이다. <사랑의 불시착>(tvN, 2019)을 함께한 박지은 작가님의 차기작이다. 그밖에 특별한 계획은 없다. 평소와 다름없이 한 걸음씩 차근차근 가야지.

이인석_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마냥 연기할 기회를 기다리는 대신에 여러 경험을 쌓자는 생각이 들어서 도전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다.

김영민_ 감독님한테 연락해서 도움 좀 받아라.

이인석_ 안 그래도 완성하면 보여드리기로 했다. 몇 해 전 극단 워크숍을 통해 희곡을 쓰기 시작했고, 작품을 완성한 후 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근데 시나리오는 처음인 데다 연출적으로 아는 바도 적다 보니 쉽지 않다. 올해 안에 마무리해서 감독님께 피드백 받으려고 한다. 내년쯤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좋겠다.

김영민_ 원래 그렇다. 연기하다가 시나리오 쓰고, 그러다 연출하면 제작과 배급까지 해보고 싶고. (웃음)

유다온_ 내가 가장 기대하는 일정은 <붉은 장미의 추억> 개봉이다. 최대한 많은 관객과 극장에서 만나고 싶다. 12월까지 지역 극장을 돌며 GV에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그전에 잠깐 제주도에 다녀올 예정이다. 올해 초에 갔는데 겨울 한라산이 멋지더라. 지금 단풍이 절정이라고 해서 가을 한라산을 보러 가기로 했다. 기운 얻고 돌아와서 개봉 잘하고 싶다.

이인석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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