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가만, 뚜벅뚜벅
<두 사람을 위한 식탁> 김보람·박채영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3-10-27

“그건 내 몫이다.” 강단 있는 두 여자가 말한다. 당신이 내 삶에 돌이킬 수 없이 큰 영향을 줬지만, 변화한 삶을 붙들고 사는 건 온전히 나의 몫. 대신 너무 멀어지지 말자고, 식탁에 둘러앉아 밥 먹고 대화하자고 그들은 말한다. 박채영은 10대 시절부터 거식과 폭식을 오가는 섭식장애를 겪어왔다. 30대가 된 지금까지도 병은 가장 가까운 동반자. 그는 질병과 함께 사는 법을 꾸준히 모색 중이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그런 채영과 엄마 상옥의 이야기를 담는다. 상옥은 전라북도 무주의 대안학교 사감으로 일하며 홀로 딸을 키웠다. 노동운동에 투신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는 교육 현장에서 새로운 빛을 찾았다. 한편,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어린 딸에게 거식과 폭식은 “내 삶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행위였다. 김보람 감독은 그런 사정을 모르는 채로 두 사람 사이에 뛰어들었다. <피의 연대기>(2017)를 끝내고 섭식장애에 관한 영화를 준비하던 때였다. 여러 면담자의 말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던 계획은 심상치 않은 모녀의 등장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몸과 마음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지, 질병과 함께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지, 서로 돌보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차근히 질문하는 여백 많은 다큐멘터리다. 누군가의 사연을 낱낱이 뜯어보는 대신 관계의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 과정에서 박채영과 김보람은 자신에게 남은 몫을 가만히 곱씹는다. 그리고 뚜벅뚜벅 걷는다. 그토록 초연하면서도 능동적인 태도가 어떻게 가능한지 묻기 위해 두 사람을 만났다.

 

 

개봉에 맞추어 책을 출간한다고.

박채영_ 시기를 맞추느라 급하게 마감했다. (웃음) 『이것도 제 삶입니다』라는 에세이다. 섭식장애와 함께 살아온 지난 15년을 기록했다. 병을 중심으로 내가 맺어온 관계들과 가족사를 돌아본다.

 

영화가 공개되고 1년 정도 지났다. 어떤 변화가 있나.

박채영_ 영화를 계기로 엄청 많은 분을 만나게 돼 반갑고 기분이 좋다. 처음엔 화면에 나오는 내가 낯설어 잘 못 봤다. 그러다 점점 제대로 보게 되더라. 책 쓰면서 영화 찍기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김보람 감독은 2020년 <자매들의 밤> 인터뷰했을 때 이미 섭식장애를 주제로 다큐멘터리 작업 중이라고 했다. 당시 1년 뒤에 완성할 수 있겠다고 했는데 예상보다 늦어졌다.

김보람_ 촬영은 2021년 설에 끝났다. 그런데 편집을 정말 오래 했다. 편집해 놓은 걸 다 날리고 다시 하는 일도 잦았다. 그 와중에 임신과 출산으로 공백이 생겼다. 그러다 작년 여성영화제에 출품하고 주변에 보여줬는데 반응이 너무 안 좋더라. 죄송하지만 출품을 철회하겠다고 영화제 쪽에 말씀드리고 그때부터 엄청나게 달렸다. 편집 감독님이랑 촬영 소스를 처음부터 다시 다 확인하면서 채영 씨 대사 하나하나를 받아 적었다.

 

주로 어떤 피드백을 받았나.

김보람_ 뭐에 관한 영화인지 잘 모르겠다는 의견이었다. 섭식장애에 관한 건지 모녀 관계에 관한 건지, 주인공이 채영인지 상옥인지, 일이 일어난 순서는 또 어떤지 잘 모르겠다고. 아무튼 정신이 좀 없다고들 하더라. 아마 그때까지 나 역시도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섭식장애에 대한 오해를 씻어내는데 어느 정도 일조해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그래서 채영 씨가 섭식장애를 설명하는 긴 장면을 초반에 넣었다. 그랬더니 누군지도 모르는 인물이 나와서 마냥 강의하는 상황이 됐다. 한편으론 상옥 선생님의 운동권 배경, 그러니까 꿈과 이상이 무너진 여성이 폐허에서 아이를 갖게 된 아이러니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혼자 지난 역사를 15분 동안 말하는 장면이 들어가더라. (웃음) 그걸 다 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많은 부분을 비워둔 채로 넘어가기로 했다. 이건 <피의 연대기>와 달리 모두를 위한 영화는 될 수 없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영화의 시작에 <피의 연대기>가 있다. 박상옥 선생님이 학교에서 <피의 연대기> 상영과 GV를 추진한 일이 계기가 되어 인연이 시작됐다고. <피의 연대기>를 만들고 보았을 즈음 각자 몸에 관해 어떤 고민을 안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박채영_ 섭식장애를 겪으며 자연스레 몸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관해 공부하게 됐다. 초경을 하고 나서 섭식장애를 앓으며 쭉 월경이 끊겼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마음의 동요를 경험했는데 바로 그다음 주에 생리를 했다. 몇 년 만이었다. 그러면서 월경이 단순히 체중이 변한다고 나오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한편으로 난 월경 용품으로 인한 염증을 달고 살았다. 그러다 <피의 연대기>에 다양한 월경 용품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됐다.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김보람_ <피의 연대기> 시작할 땐 일자무식이었다. 외국 친구들한테 한국 생리대가 최고라고 말했더니 왜 생리대를 쓰냐고 하더라. 그럼 뭘 쓰지? 동갑인데 뭐가 이렇게 다른가 싶어 검색해 보니 해외에서는 ‘이어 오브 멘스트레이션’이라며 생리의 해를 축하하기도 하더라. 그 붐이 한국에 오기 전에 생리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영악한 생각을 했다. (웃음) 그런데 공부하다가 알았다. 내 몸이 이렇게 큰 혐오의 역사 속에 있다는 거 말이다. 너무 뿌리 깊은 역사였다. 종교나 의학처럼 건드리지 못할 것 같은 영역에도 여성혐오가 깃들어 있다는 점에 놀라기도 했다. <피의 연대기>는 나를 개안하게 해준 영화다. 그때 문득 ‘우리는 모두 아름답고 예쁘다’는 말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도저히 동의가 안 됐던 거지. 안 예쁜 건 안 예쁜 거다. 모두가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하는 건 강요와 압박 아닐까? 섭식장애도 자기 긍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 마치 아름다움을 일깨우면 치료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건 뭔가 아니다 싶던 차에 채영 씨를 만났는데 둘이 그런 얘기를 했다. 아름답다는 말이 싫다고. 그때 이 사람이랑 뭔가 다른 걸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채영 씨는 본인이 겪은 섭식장애의 오랜 기록자이기도 하다. 어떤 형태로든 작업 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시기인가?

박채영_ 섭식장애에 관련된 건 뭐든 하리라, 그런 마음이 있었다. 내가 겪는 일이 뭔지 궁금했다. 그래서 공부했는데 간단치 않더라. 와중에 치료 방식이 뭔가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병원 다니는 걸 중단하고 엄마랑 별걸 다 해봤다. 단식 운동을 하면, 독소를 배출하면, 뇌에 좋은 영양소를 주면 낫는다고 해서 온갖 걸 했다. 굿까지 했다니까. 그런데 치료는 안 되고 증상은 계속됐다. 내게 기록은 해소였다. 풀어낼 데가 없으니까 계속 글을 썼다. 영화는 감독님에 대한 신뢰 때문에 시작했다. 감독님이라면 다르게 다뤄줄 것 같았다.

 

서로의 첫인상을 매우 좋게 기억하고 있더라. 김보람 감독은 채영 씨가 엄청나게 밝았다고 회상하던데.

김보람_ 사실 그게 진짜 첫인상은 아니다. <피의 연대기> 행사 끝나고 박상옥 선생님이 “우리 딸이에요.” 하면서 채영 씨를 소개해 주셨는데, 둘 다 되게 멋있었다. 박상옥 선생님 카리스마도 엄청난데 채영 씨는 캐나다에서 막 돌아왔다는 거다. 게다가 키도 크잖나. 내가 키 큰 여자에 대한 선망이 있거든. (웃음) 아무튼 지식인 어머니 아래서 자라 캐나다에서 유학하는 사람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혼자 오셔서 딸이 10년 넘게 거식증이라고 하시더라. 그때까지 인터뷰한 분 중에 그 정도의 거식증을 겪은 분은 없었다. 조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채영 씨를 다시 만났는데 사람이 너무 밝았다. 실제로 증상이 잘 컨트롤되던 시기이기도 하지 않았나?

박채영_ 그건 아니다. 우울증이 너무 심해져서 일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캐나다에 갔다 서비스업을 해서 웃어야 하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그래서 서울 생활을 접었지만 엄마랑 살기는 싫었다. 찾아보니 캐나다에 돈이 없어도 일하면 먹고 자면서 최대 1년까지 지낼 수 있는 가톨릭 공동체가 있다 해서 갔다. 초반에는 괜찮았는데 점차 증상이 다시 시작됐다. 너무 절망스러웠다. 가톨릭 공동체 룰이 답답하기도 했다. 여자들은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어도 안 되고, 남자와 단둘이 걸어가도 안 됐다. 핸드폰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밖에 나가면 해외 배송으로 책을 엄청나게 시켰다. ‘자본주의와 기독교’, ‘기독교와 여성주의’ 이런 걸 읽으면서 이 문화를 어떻게든 이해하고 버텨서 1년 채운다, 이러고 있었는데 낙태 반대 시위에 다 같이 간다는 거다. 그때 한국으로 돌아왔다. 3개월 만이었다. 그래서 감독님 만났을 땐 사실 엄청나게 우울한 상태였다. 물론 겉으로는 밝았다.

 

촬영 시작하기까지 얼마나 걸렸나.

김보람_ 바로 그다음 주에 서울에서 촬영했다. 그런데 대로변에 있는 스튜디오를 잡아서 녹음이 제대로 안 됐다. 그래서 무주로 갔지.

박채영_ 남자친구가 워킹홀리데이 간다기에 한 달 만에 나갈 준비를 하던 시기였다.

김보람_ 한 달의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이 찍자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러 주인공 중 한 명이었으니까.

박채영 ⓒ이영진

그러다 유일한 주인공이 됐다. 어떤 과정을 거쳤나.

김보람_ 2019년 7월 28일에 무주에 가서 선생님 하루, 채영 씨 하루 인터뷰를 했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도 너무 재밌었다. 녹취를 풀면서 여기 뭔가 있구나 했지. 채영 씨는 “엄마는 해인데 나는 그 빛을 이길 수 없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고. 선생님은 7~80년대 운동권 얘기를 하시고. 그런 상태에서 채영 씨가 호주로 떠난다기에 공항 데려다 줄 테니까 촬영하자고 했다. 한데, 두 번째 만난 날에 선생님이랑 채영 씨가 부엌에서 갑자기 말을 막 쏟아냈다. 난 너무 놀라서 복도에 나가서 숨어 있었지. (웃음) 그 싸움을 도저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촬영 감독님이 정말 애써서 그 상황을 담아내셨다. 이건 한 1년은 찍어야 나오는 장면이라면서. 찍고 나서 정리하는데 박상옥 선생님이 5년 동안 병에 대한 얘기를 한 번도 안 했다고, 오늘이 처음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그것도 너무 놀라웠다. 그렇게 채영 씨는 호주로 갔고 난 혼자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 얘기를 영화에서 빼거나, 아예 이 사람들 얘기를 해야 했다. 호주에 가서 채영 씨를 설득했고 돌아와서는 선생님을 설득했다. 그렇게 2019년 겨울을 기점을 기존 방향을 정리하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게 됐다.

 

5년 만의 대화에 카메라와 감독의 존재가 영향을 주었나 보다.

박채영_ 계기가 됐지. 서로 너무 말하고 싶지만 너무 무서워서 할 수 없던 이야기가 있는데,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말문이 트여버린 거다. 그래서 스파크가 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엄마는 인터뷰를 안 하겠다고 하셨다. 거기서부터 깊게 빡쳤다. 이 병을 나 혼자 겪었나? 지금 체면이 중요해? 아마 엄마도 화가 났을 거다. 내가 그동안 뭘 어떻게 참았는데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런 마음이었겠지. 그러니까 터졌을 거다. 감독님을 만나고 셋이 시간을 보내면서 알았다. 엄마랑 내가 같이 있을 때 얼마나 긴장 상태인지, 서로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는지 말이다.

 

유일한 주인공 자리를 수락한 이유는?

박채영_ 이미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했기 때문에 내가 더 나오든 안 나오든 상관없었다. 다만 가족 일을 걱정했다. 내 경우엔 지난 이야기를 하려면 이모들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럼 그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으니 걱정스러웠다.

김보람_ 박상옥 선생님이 들려준 몇백 시간 분량의 이야기에도 채영 씨 이모들이 자주 등장한다. 영화에는 하나도 안 썼다. 내가 찍고자 한 건 채영 씨였고, 그 약속에 이모들은 포함이 안 돼 있다고 여겼으니까. 그러다 보니 퍼즐이 빠진 것처럼 비어있는 자리들이 생겼는데, 우리가 남들 얘기 들을 때 나름 사정이 있겠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라고 봤다.

박채영_ 감독님이 독려해 주셔서 책에는 그 내용을 썼다. 이건 채영 씨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모들이 등장하더라도 써야 한다고 하셨거든. 그 말에 용기를 얻고 끝까지 책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김보람_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겠지만, 이모들의 이야기가 가진 보편성이 있다. 그 시대 여성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만한 인류학적으로 중요한 기록이라고 본다. 책을 꼭 읽어보시면 좋겠다. 영화에 담기지 않은 많은 이야기가 있다.

 

박채영, 박상옥을 주인공으로 정했을 때,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더 가보고 싶었던 영역은 어디인가.

김보람_ 채영 씨가 호주에서 안 올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딸이 물리적으로 멀어진 것 자체가 독립의 계기가 될 수 있겠다고 여겨서 그 변화 과정을 기록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한편 상옥 선생님은 나의 등장으로 인해 과거를 탐색하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딸은 새 삶을 개척하고, 엄마는 자기 삶을 돌아보는 사념적 다큐멘터리를 생각했다. 그런데 채영 씨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어느 순간 이 사람이 낫는 걸 보고 싶어지더라. 어느 피칭 자리에서 채영 씨가 나을 때까지 찍겠다고 했다. 심사위원들이 몇 년 찍을 거냐고 묻기에 10년 본다고 했다. (웃음)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

박채영_ 제2의 <보이후드>. (웃음)

김보람_ <피의 연대기>와 <자매들의 밤>을 촬영했고, <교토에서 온 편지>(2022)의 연출자이기도 한 김민주 촬영 감독이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을 촬영했는데, 우리만의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우리 둘이 엄청나게 유명해져서 채영 씨 완치 기념으로 이 영화를 내놓자는 거다. 그때 심사위원 한 분이 왜 극복 서사를 하려고 하냐는 얘기를 하셨다. 대안 서사를 내놓아야 한다고. 당시에는 화가 났다. 나을 수 있을 거다, 그 모습이 여자들한테 필요하다면서 막 싸웠다. 그런데 나중에 편집하면서 “대안 서사가 돼버렸군.” 했다. (웃음)

김보람 ⓒ이영진

감독이 진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김보람_ 특히 애를 낳고 생각이 많아졌다. 만약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면? 채영 씨에 따르면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아프지 마”라고 하는데, 내가 그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이게 참 어려운 병이고 어려운 길이라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실제로 제작비도 떨어졌다. (웃음) 결국 그 시점까지 함께 했던 흔적을 기록하고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박채영_ 사실은 내가 촬영 중단을 요청했다. 상태가 진짜 안 좋았다. 이미 관계가 쌓여서 감독님한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고, 이 사람이 촬영 때문에 나를 만나나 싶어 혼란스럽기도 했다. 내 불안정한 모습을 카메라 앞에서 보일 수 없겠더라.

김보람_ <피의 연대기>는 추가 촬영을 많이 했는데 이건 딱 끝냈다.

 

세 사람의 화학 작용이 영화의 보이지 않는 부분에 깊이 새겨져 있는 셈이다.

박채영_ 영화에 다 담기지 않았지만 우리 사이에 정말 엄청난 감정이 오갔다. 격동의 시간이었다.

 

감독이 주인공들과 밀착된 관계를 형성한 것과 별개로 영화는 담담한 정서를 전한다. 다만 촬영은 굉장히 다정다감하다는 인상이다. 이 사람들의 일상을 따스하게 담고 싶은 마음이 엿보인다고 할까. 원칙이 있었나.

김보람_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만, 난 영화를 영상 예술이라고 한다면 아름답게 찍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물론 폭력을 아름답게 찍을 수는 없겠지. 그래서 폭력은 찍지 않는다. 어쨌든 내가 설득한 주인공은 멋있게 혹은 따뜻하게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촬영 감독님과 카메라 기종이나 렌즈를 세심하게 골랐다. 또 고통이 고통스럽게 표현되지 않아야 했다. 최대한 보기 편하게, 채영 씨와 상옥 선생님이 동의하는 선에서 한다는 게 원칙이라면 원칙이었다. 근데 처음 영화 봤을 때는 두 분 다 본인들이 멋있게 찍혔는지 아닌지 잘 모르시더라. (웃음)

박채영_ 매일 거울을 보며 알던 내 얼굴과 달라서 좋았다. (웃음) 나 되게 예뻤네, 예쁜 데 살았네, 우리 엄마가 저런 표정으로 내 얘기를 하네, 그런 생각 많이 했다. 맘에 든다.

 

후반부 주방 바닥에서 하는 대화가 정말 인상적이다. 자다 깬 사람이 비몽사몽간에 핸드폰으로 찍은 듯한 장면이고, 오가는 대화의 내용도 꽤 무겁다. 지난 세월을 한꺼번에 반추하면서 각자의 깊은 상처를 꺼낸다.

김보람_ 셋이 놀고 떠들다가 바닥에 앉았는데 갑자기 얘기가 거기로 갔다.

박채영_ 밥 먹고 치우면서 웃고 떠들다가 지쳐서 주저앉았지.

김보람_ 그냥 채영 씨 겨울옷 가지러 간 날이었다. 그래서 촬영 팀도 없었다. 어린 시절 일기며 온갖 걸 다 꺼내서 보고 놀았다.

박채영_ “나는 행복해진다, 나는 오늘 하루 건강하다.” 이런 문장이 한 10개 쓰여 있는 종이가 있다. 엄마가 그걸 병실 벽에 붙여줬었다. 하루에 10번씩 소리 내서 읽어야 한다고.

김보람_ 그 종이를 아직도 갖고 있더라니까. 아무튼 그런 걸 보면서 엄청 웃고 완전히 릴렉스한 상태로 주방 바닥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그런 상황이 된 거다. 구형 핸드폰을 켜서 가까스로 찍었다. 그게 없었다면 영화가 완성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지. (웃음)

<두 사람을 위한 식탁>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영화와 더불어 관계가 변했기에 그런 이야기도 편히 나눌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박채영_ 초반에는 늘 심각했다. 둘씩 있으면 괜찮은데 셋이 만나면 너무 심각해지더라. 항상 체할 것 같았다.

김보람_ 같이 있으면 채영 씨는 거의 안 먹었다.

박채영_ 그랬는데 그때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도 깔깔거리며 할 수 있는 상태가 됐다. 나도 엄마도 털어낼 것들을 좀 털어냈고.

 

그러한 긍정적인 변화가 있는 한편, 촬영을 더 할 수 없는 힘든 상황이 겹쳤다는 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삶은 정말 복잡하다고 할까.

박채영_ 정말 그렇다.

 

섭식장애를 다룬 영화라고 할 때 보통 생각하기 어려운 장면인데, 정성스럽게 요리하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이 돌봄이라는 주제와 이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채영 씨는 요리하는 게 직업이다. 음식에서 어떤 의미를 찾나.

박채영_ 18살에 우연히 요리를 시작했다. 건물에 사는 사람들을 밥 먹이는 일을 했고, 마침 같이 일하던 사람이 비건이었다. 그러다 비건 중에는 동물성 음식을 섭취하면 아픈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난 폭식과 구토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식이 요리였다. 그 성취감이 엄청나게 컸다. 그때는 매일 아침에 영등포 시장에 갔다. 시장 할머니들한테 온갖 나물을 배웠다. 그 기억이 너무 좋게 남아서 계속 음식 관련한 일을 해왔다. 지금은 스트레스가 크다. 한국 사회에서 음식을 파는 건 엄청난 쓰레기를 만드는 일이다. 공장식 축산을 유지하며 엄청난 양의 고기를 소비하는 일이다. 아무도 음식을 남기는 것에 죄책감이 없고, 누가 음식을 만드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환멸이 난다. 내가 생각하는 식사는 늘 만찬이다. <안토니아스 라인>에 나오는 그런 만찬. 이모들이 내게 물려준 식사에 대한 정서가 그런 거다. 울고 싸웠어도 눈물 닦고 다 함께 즐겁게 먹는 거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이 돈으로 거래되는 시스템 속에 있는 게 내게 안 좋은 일로 느껴진다. 요즘은 좀 쉬고 싶다.

김보람_ 채영 씨랑 상옥 선생님이 밥을 많이 해줬다. 촬영 갔다가 못 이기는 척 먹고 올 때도 있었다. (웃음) 최근에 읽은 책에서 돌봄이 인류를 살아남게 했다는 구절을 봤다. 선사시대 인류의 대퇴골이 부러졌다 다시 붙은 흔적은 다른 누군가 다쳐서 사냥과 채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먹이고 돌본 흔적이라고. 그런 돌봄이 여성의 일이었다고 해서 이제는 외주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흐름을 정말 뼈아프게 생각한다. 오히려 모두의 일이 되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박남옥상을 받았는데, 수상 소감에 굳이 “아이가 먹던 것을 치우다가 수상을 알게 됐다”는 문구를 썼다. 다른 일을 위해 하는 나의 돌봄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지 말자는 마음이었다. 아이를 위해 밥을 하는 일과 영화를 찍고 영화제에 가는 일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싶었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을 찍으면서 돌봄에 대해, 무언가를 같이 견디고 사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박채영_ 11월 이후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엄마 집으로 간다. 지금껏 돌보며 살 수 있는 관계를 찾아 헤맸다. 친구들 가까이 살기 위해 이사를 다니고, 애인과 같이 살고, 고양이랑 같이 살고 이것저것 했는데, 서울 생활을 유지하면서 돌봄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나를 돌볼 수 없다. 출퇴근을 반복하고, 쉬는 날 겨우 빨래 널고 청소하고, 월급날 돈이 싹 빠져나가고, 다음 달 카드값을 벌기 위해 다시 출근한다. 친구들이 가까이 살아도 얼굴 볼 시간이 없다. 다들 지쳐있고, 만나면 술 마시고 헤어진다. 갈수록 우울해지는 친구들을 보는 것도 쉽지 않다. 아픔이 막 부딪히다가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는데, 관계를 회복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다. 일단 회복이 필요하겠다고 판단했다. 진짜 살기 위해서 우선은 서울을 떠나보기로 했다.

 

제목은 어떻게 지었나.

김보람_ 상옥 선생님이 채영 씨랑 둘이 앉아서 밥 먹는 거 너무 긴장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정말 가슴 아팠다. 그런데 막상 선생님 집에 가면 항상 식탁에서 얘기하고 뭔가를 먹었다. 마음 편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밥 먹고 싶은 게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라는 생각이 들어 제목을 지금처럼 지었다. 그전에는 영제만 하나 있었다. 선생님을 무주의 산 능선으로 표현하고, 채영 씨를 호주의 해안선으로 표현해서 ‘Nerves Curves’라고 지었는데 주변에서 4대강 영화냐고 하더라. (웃음) 안 되겠다 싶어서 바꿨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이 각자에게 남긴 건 무엇인가.

박채영_ 일단 감독님을 만났다는 게 의미 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 인생을 이렇게 응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다니.

김보람_ 이유가 없진 않지. 영화 만들다 보니 응원하게 된 거지.

박채영_ 개인적 욕심으로 만났는데 이렇게 좋은 사람이었다니. (웃음) 내가 만나는 사람이 곧 나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인연을 만들 수 있었던 걸 보면 내가 아직 좋은 사람인가보다 하고 느끼게 된다. 영화를 찍지 않았다면 책을 쓰지 않았을 거고, 그랬다면 지금처럼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그럼 그냥 이 병을 원망하며 살았겠지. 내가 원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절망스럽지만, 아직 내가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게 남아있다는 걸 영화 덕분에 알게 됐다.

김보람_ 두 분의 삶을 통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내 생각의 지평이 넓어졌다. 최근에 GV에서 채영 씨가 이제 영화를 통해 세상에 데뷔하는 느낌이라고 하더라. 병과 고통을 겪으며 채영 씨가 일종의 사상가가 됐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 발언을 해야 해서 이 영화가 나왔구나 싶었다. 이제 이 사상가가 꿈을 펼치는 일만 남았다. (웃음) <피의 연대기>는 이제 내 품을 떠났다고 생각하는데,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내게 너무나 많은 질문을 남겼다. 이제 그것은 나의 몫이다.

ⓒ이영진
Interview
저마다 어떤, 누구나 한번
<극장의 시간들> 윤가은·이종필·장건재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6-03-25
Interview
언제나 달리기
<오, 발렌타인> 홍진훤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6-03-19
Interview
우울한 자유, 불안한 세계
<광장> 김보솔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6-01-15
Interview
해와 달, 바다의 주문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여설희·서지안·우화정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5-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