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우리의 하루>
손시내 / Choice / 2023-10-27

몇 가지 단서만 가지고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주인공이 계단을 올라가야 나오는 집에 산다든가, 누군가 주인공을 찾아와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든가, 주인공이 라면에 고추장을 풀어서 먹는 독특한 식성을 지녔다든가. 반면 주인공의 성별과 나이 같은 정보는 정해지지 않고, 직업이나 취미도 딱히 제시되지 않는다. 그들의 사정이나 속마음 같은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아마 각양각색의 영화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중심 주제와 굵직한 소재 정도를 공유하며 다양한 연출자들이 함께 제작하는 옴니버스 영화 같은 예시도 떠오른다. 그런 작업은 비슷한 조건에서 출발한 각각의 작품이 얼마나 많이 달라질 수 있는지 관찰하는 즐거움을 준다. 인물이 지닌 서사와 이야기의 뼈대를 채워가는 서로 다른 방식이 결과물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홍상수의 서른 번째 영화 <우리의 하루>는 얼핏 그와 비슷한 경우처럼 보인다. 영화는 상원(김민희)과 의주(기주봉)의 하루를 번갈아 가며 보여준다. 이들은 계단 위의 집에 머물고, 방문객을 맞이하고, 고추장 푼 라면을 먹는 공통점을 지녔다. 하지만 그만큼 다르기도 하다. <우리의 하루>는 두 인물이 속한 세계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을 가늠해 보게 하는 재미를 주면서, 영화라는 건축물을 세우는 기초적 원리에 관한 흥미로운 탐구를 이어간다.

상원은 한때 배우였으나 지금은 연기를 그만두고 선배 정수(송선미) 집에 머물고 있다. 딱히 하는 일은 없어 보인다. 놀라울 만큼 오래 자고, 일어나서는 정수가 키우는 고양이 ‘우리’에게 간식을 주는 것 정도가 전부다. 지수(박미소)가 그런 상원을 찾아온다. 오랜만에 만났다는 두 사람. 상원은 배우가 되겠다는 지수를 뜻밖이라 여기고, 지수는 상원에게 배우로 일한 경험을 전수받길 원한다. 대화와 식사가 이어지더니 갑자기 고양이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해 상원과 정수가 찾으러 나간다. 의주는 나이 많은 시인이다. 혼자 사는 듯한데 젊은 여자 기주(김승윤)와 젊은 남자 재원(하성국)이 그를 방문한다. 기주는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고 졸업 작품으로 의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재원은 연기를 하는 사람인데 의주에게 삶과 사랑, 진리에 관해 묻고 싶어 한다. 의주는 심장이 안 좋아져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세 사람은 술판을 벌인다. 상원의 하루와 의주의 하루가 교차되는 동안 두 인물 사이, 혹은 두 세계 사이의 관계에 관한 가벼운 의문이 인다. 뭔가 연관이 있는 것일까? “누가 라면에 고추장을 넣어 먹어? 너 말고?” “있어 그런 사람이.” 상원은 자기가 아는 사람이 먹는 방식이라며 라면에 고추장을 푸는데 앞서 의주가 그렇게 먹은 적이 있다. 상원의 지인이 의주라는 뜻일까? 아니면 이들은 그저 독립된 작품 속의 주인공일까? <우리의 하루>는 이러한 의문을 명확히 해소하지 않고 불투명한 영역에 남겨두면서 다른 질문을 제시한다.

<우리의 하루>
<우리의 하루>

<우리의 하루>는 상원의 하루와 의주의 하루를 1장과 2장, 혹은 1부와 2부로 나누어 구성하지 않는다. 대신 상원과 의주가 번갈아 등장할 때마다 검은 화면에 흰 글씨로 쓴 긴 자막이 나와 앞과 뒤를 구분한다. 자막은 친절하게도 상원과 의주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알려준다. 이런 식이다. “상원은 선배 정수에게 의지하여 서울 생활을 시작하지만 정말 의지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뒤따라 나오는 장면을 보고는 상원이 ‘정말 의지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다른 자막도 마찬가지다. 의주가 “정작 원하는 건 아프지 않은 생활”이라거나, 상원이 지수와 이야기하며 “후련해지지는 않고 막막해지기만” 한다는 문장은 뒤에 이어지는 장면들과 묘하게 불일치한다. 인물은 속마음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고, 알아달라고 굳이 티 내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카메라는 애초에 누군가의 마음이나 생각 같은 건 보여줄 수 없는 사물이다. 카메라에 비치는 건 그저 한 장소에서 배우가 말하고 움직이는 광경일 뿐이다. 영화는 그러한 이미지들을 배열해 이야기를 만들고 세계를 구성한다. 배열이 매끄러울수록 몰입은 쉬워진다. <우리의 하루>는 글과 이미지를 분리하고 빈칸과 여백을 남겨두면서 그 사이에 틈을 만든다.

연기를 하고 싶다는 지수에게 상원은 솔직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에게 씌워진 습관, 편견, 이미지를 벗겨내고 자기를 제대로 쳐다봐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는 지수의 물음에 상원은 아니라고 답한다.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모종의 이유로 배우 일을 그만둔 상원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지만, 한편으로 홍상수의 영화에 관한 언급이기도 하다. 그는 줄곧 영화 제작의 관습과 규칙에 미세한 틈을 내는 방식으로 작업해 온 창작자다. 그의 영화는 공간의 통일성을 교란하거나 인물의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어 매체가 근본적으로 품는 덜컹거림을 작품의 표면에 새겨왔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가 영화 만들기의 관습과 규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홍상수의 영화는 여전히 장소와 배우를 필요로 하고, 최소한의 줄거리와 대사를 통해 진행된다. 시나리오의 재료가 되는 몇 가지 단서에서 시작해 서로 다른 두 주인공의 구체적 하루에 이른 듯 보이는 <우리의 하루>는 ‘영화’가 발붙이고 있는 조건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의 하루>
<우리의 하루>

<우리의 하루>는 사방으로 열린 영화다. 인물들이 창문을 열거나 베란다에 나가거나 옥상에 오를 때, 영화엔 생활 소음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소리가 마구 침범해 들어온다. 상원과 의주는 말끔하게 정돈되고 통제된 영화적 공간에 살지 않는다. 그들을 찍는 카메라는 세상 속에 놓인 채 공사장 소리와 길거리의 웃음소리를 흡수한다. <우리의 하루>는 다른 의미로도 현실과 닿아있다. “누구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나에게 자극을 줬지.”라며 연기를 그만둔 이유를 전하는 상원의 말은 배우 김민희의 이야기처럼 들리고, 의주가 기주와 재원에게 제안한 “그 유명한 가위바위보”는 술자리에서 가위바위보를 시키곤 했다는 홍상수 감독의 일화를 생각나게 한다. 한편 상원과 지수의 관계는 <인트로덕션>(2020) 속 인물들의 관계가 연장된 것처럼 보인다. 정수의 베란다에서 꽃을 가만히 쓰다듬는 상원의 모습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의 어느 장면과 너무도 닮았다. 이처럼 <우리의 하루>는 여러 관계 속에서 구멍 뚫린 채 존재하며 그러한 방식으로도 영화가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의 하루 In Our Day 감독 홍상수 출연 김민희, 송선미, 박미소, 기주봉, 김승윤, 하성국 제작·배급 영화제작전원사 제작연도 2023년 상영시간 84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3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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