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길은 가로막힌 듯 뻗어 나간다. 일찌감치 불이 꺼진 줄 알았던 마음에 따스한 빛이 깃드는가 하면, 예고 없이 바람이 불어닥쳐 낯선 곳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절해고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의 외딴 섬을 뜻한다. 제목만큼 고독한 인물을 다루면서도 영화는 그들을 고립으로 밀어 넣지 않는다. 오히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소멸을 향해 가는 생의 면면을 비춘다. 그 속엔 두 개의 이름을 갖는 이가 있다. 열아홉 지나는 돌연 미대 입시를 관두고 절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김미영 감독은 그에게 도맹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길 도, 싹틀 매. 직관적으로 쓴 이름인데 이연 배우를 만나고 보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에서 도맹이 된 그는 한때 출가를 꿈꿨던 아빠 윤철(박종환)과 서툴지만 꾸준한 몸짓으로 관계를 다져 나간다. 영화의 큰 줄기는 윤철을 따라가는 구조이지만, 이 작품을 만든 이의 마음은 지나/도맹과 가장 맞닿아 있는 듯했다. 윤철이 못 미덥다는 뜻이 아니라, 지나/도맹이 세상과 재차 어긋나면서도 나름대로 길을 찾아가는 항해자여서다. 이연이 그려낸 지나와 도맹은 그토록 부지런하다. 한 손에는 자기만의 시계를, 다른 손에는 나침반을 쥐고 “돌고 돌아서 제자리를 찾”아 낸다. 길 한가운데 고꾸라진 윤철을 일으켜 세우는 대신에 손수건만 건네고 사라지는데, 모퉁이를 돌아보니 걱정하는 기색을 감추며 말없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 또한 그 정도 거리에서 둘을 바라본다. 어느새 인물들은 서로 탓하기를 멈추고 소리 내어 “고맙습니다” 인사한다. ‘절해고도’의 시간을 버텨낸 이들이 애틋하고 대견해서 감독과 배우에게 나란히 대화를 청했다.
둘이 오랜만에 만났다고. 그간 어떻게 지냈나.
이연_ 최근에 촬영 마치고 한 달 정도 쉬었다. 사누키 우동의 본고장인 일본 다카마스로 친구들과 여행 가서 즐겁게 놀다 왔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감독님과는 거의 1년 만에 본다.
김미영_ 작년 (박)종환이 생일에 만났지?
이연_ 당시 종환 선배가 공연 중이었다. 같이 연극도 보고 생일 축하도 하고 겸사겸사.
둘의 생일에는 안 모였나.
이연_ 난 생일이랑 촬영이 겹쳤다. 감독님은 메신저에 생일 알람 꺼놓으셨더라. 날짜도 모르고 지나갔다.
김미영_ 생일 같은 거 별로 안 중요하다.
이연_ 그 생각이 영화에도 드러난다. 도맹의 생일만 겨우 챙겨주지 않나. (웃음)
가을에 어울리는 영화다. 널찍한 화면으로 보는 산과 바다의 경치가 너그럽고, 한편으로는 무서움과 외로움을 자극하기도 한다. 촬영은 어디서 했나.
김미영_ 마산, 창원, 밀양에서 찍었다. 마산은 이제 행정구역상 창원시로 통합되긴 했지만 마산 분들은 여전히 마산과 창원을 분리해서 말씀하시니까. 밀양과는 개인적으로 인연이 좀 있다. 영화 속 도맹이 머무는 수행 센터에 5~6년 정도 다녔고 지금도 1년에 한두 차례 방문한다. 강창호 미술 감독은 창원에서 오래 살았다. 학교도 거기에서 나왔고.
특별히 이 계절을 고집한 이유도 있나.
김미영_ 본래 한겨울에 눈 내리는 장면을 찍으려고 했는데 여건상 촬영 시기를 조정해야 했다. 계절을 바꾸고 나니 그런 대로 또 어울리더라. 처음부터 가을에 찍기로 했던 영화처럼. 내가 그렇다. 계획이 A에서 B로 변경되면 그냥 B를 베스트라고 여기게 된다.
공간이 주는 에너지가 남달랐을 것 같다. 배우는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나.
이연_ 수행 센터에 계신 스님들이 가끔 생각난다. 스님 한 분께 옷을 물려 입고 머리도 밀고서 그 속에 묻어 지내듯 살았다. 오죽하면 스님들이 스카우트 제의를 주실 정도였다. 스님 얼짱 대회 같은 것도 있다며 홍보 포스터 찍으면 딱이라고 하시더라. 역시 머리를 밀면 얼굴이 환해지나 보다. (웃음) 아침에 일어나서 센터 앞에 나가 보면 다들 블루베리를 따고 계셨다. 마주치면 말없이 손을 내밀어서 내 앞에 펼치신다. 나도 손을 펼쳐 보라는 뜻이다. 그러면 손에 블루베리를 한움큼 놓아주셨다. 그 블루베리 맛이 잊히지 않는다.
잘 먹이셨네. (웃음)
이연_ 이것저것 얻어먹어 토실토실해졌다. 마음 편안한 상태로 삼시 세끼를 다 챙겨 먹은 데다, 딱히 움직일 일도 없다 보니 살이 찌더라. 촬영 마친 후에 운동을 열심히 해야 했다.
지난 3년 사이 여러 작품을 거쳐온 터라 <절해고도>를 떠올리면 아득한 기분이 앞서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풍경을 떠올리는 것 같다.
이연_ 촬영 당시 앞선 작품들을 몰아치듯 찍었다. 이제 좀 편안해지면 좋겠다 싶을 무렵, <절해고도> 현장에 들어간 거다. 직전에 촬영한 드라마가 꽤 무겁고 심각한 작품이었다. 연기하면서 어느 정도 내상이 생길 수밖에 없었는데, <절해고도> 찍으면서 자연스레 회복한 것 같다. 일단 그렇게 아름다운 환경에서 촬영했던 적이 많지 않거든. 탁 트인 곳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니 상쾌하더라. 날씨도 참 좋았고.
그래서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하나 보다. 본래 작품을 마치면 후유증이 길게 남는 편인가.
이연_ 깊이 빠져 버리는 순간이 있다. 어떤 선을 정해 놓고 ‘여기까지 왔으면 충분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작품과 배역에 몰두하다 보면 계속 더 가게 된다. 그런 노력이 확실히 좋은 신을 만들어 내긴 하는데, 사람 이연에게는 간혹 안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작품이 끝나고 더는 그 인물을 연기하지 않아도 세포 하나하나에 기억이 남는다. 세포는 연기인 줄 모르지 않나. 내 몸엔 실제로 어떤 터치와 타격이 오가고, 난 머릿속으로 연기에 필요한 말과 생각을 끊임없이 굴리면서 얼굴 근육을 움직인다. 결국 세포에 그 경험과 감정이 새겨지는 거다.
감독은 <절해고도>를 떠올리면 어떤가.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어 개봉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으니 영화에 관한 생각도 차츰 달라졌을 텐데.
김미영_ 변화는 생길 수밖에 없다. 완전히 탈바꿈한다기보다는 의미들이 확장되고 더해지는 과정을 거쳤던 것 같다.
예를 들면?
김미영_ 원래는 자기 이해에 관해 말하려고 했다. 사람은 자신을 몰라서 고통을 겪고, 동시에 그 고통을 주변에 전이하기도 한다. ‘자기 이해가 좀 이루어지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따라가면서 주인공 부녀를 떠올리게 됐다. 근데 배우들과 만나서 촬영을 진행할수록 생각이 달라졌다. 꼭 자신을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겠더라. 다른 누군가의 극히 일부라도 이해한다면 그 사람의 폭이 넓어지거든. 전면적 이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작은 것 하나, 그것만으로도 사고와 관계의 확장으로 넘어가는 씨앗이 생길 수 있다. 집을 떠나서 제 길을 찾아보겠다고 하는 지나를 윤철이 그냥 인정해 주는 순간, 아버지와 딸이 서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주고받는 분위기. 글로 쓸 때는 잘 몰랐는데 두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자 ‘이거구나’ 싶었다. 윤철이 골방에 틀어박혀 자기 이해를 도모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바깥으로 나와서 상대와 작은 끄덕임을 공유하는 캐릭터가 되어 좋았다.
이연 배우를 캐스팅했던 이유는 영화 행사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에 반해서였다고. 티 없이 웃는 얼굴에 끌렸던 이유가 뭘까. 인물과의 공통점을 발견했다는 뜻인가.
김미영_ <담쟁이>(한제이, 2020) <코스모스>(임종민, 2020)를 포함한 영화 몇 편을 비슷한 시기에 접했다. 그러다 전주국제영화제 행사에 참여한 이연 배우를 우연히 보게 됐는데, 뭔가 자연스럽다고 해야 할까. 카메라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는 편안하게 제 감정을 표현하며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모습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토크 행사는 아주 딱딱한 자리라고 할 순 없어도 나름의 틀과 규율이 작동하는 공적 자리이지 않나. 알게 모르게 배우는 어떤 태도를 요구받기 마련이다. 근데 행사에 함께하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이연 배우는 엄숙하지 않더라. 정말 자유로운 사람이구나 싶었고 저 모습을 영화에 담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어땠나.
이연_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들은 건 처음이다. 동료 배우들과 얘기한 적이 있는데, 배우는 참 재밌는 직업 같다.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나의 무엇을 발견할지 모를 일이다. 감독님이 토크 행사에서 내 모습을 좋게 봐주셨다는 얘길 듣고 감사한 동시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건 진짜 나였거든. 일하다 보면 문득 소리를 시원하게 지르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묘하게 경직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해야 하나. 근데 또 예의를 갖춰야 하니 최대한 나를 누른다. 감독님이 말씀하신 행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말도 고르고, 다리 모으려고 애쓰고. (웃음) 그렇게 노력하지만 때로는 정리 안 된 감정이 툭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자, 한편으로는 그걸 꼭 피해야 하나 싶다. 모든 감정을 정리해야 할까? 정리된 감정만 표현할 수 있나? 난 별로 그러고 싶지 않거든.
삭발해야 한다는 말에 배우가 대수롭지 않게 반응해서 내심 놀랐다는 말도 전했다.
김미영_ 놀라는 정도가 아니지. 엄청나게 충격받았다.
당시 배우의 속내가 궁금하다. 삭발이 필요하다는 걸 이해했다고 해도 인물과 작품에 확신이 없다면 선뜻 결정하기 어려웠을 텐데.
이연_ 신기하게도 절에 다녀온 후 시나리오를 읽었다. 당시 낙산사로 혼자 여행을 떠났거든. 오디션을 반복하면서 지쳤을 무렵이다. 내게 맞지 않는 배역이란 걸 알면서도 오디션을 봐야 하는 시기가 있더라. 캐스팅 여부와 관계없이 오디션 감을 유지해야 하거든. 연기를 쭉 안 하다가 갑자기 좋은 연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디션을 쉬다가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난다? 그러면 오디션에 가서 무조건 말아먹는다. 당시 낙산사 근처 비치 호텔에 머무르며 다음 오디션을 준비했다. 막막한 마음에 소원까지 빌고 왔다. 낙산사에 거대한 미륵상이 있는데, 가까이 가서 보면 부처님 발치에 자그마한 두꺼비 조각상이 놓여 있다. 사람들이 그걸 만지면서 소원을 빌더라. “에이, 뭐야~” 하면서 또 따라 했지. (웃음)
뭐라고 빌었나.
이연_ 좋은 일 들어오게 해달라고. 근데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 시나리오를 딱 받았다. 처음엔 ‘절해고도’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삭발해야 한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고. 근데 종환 선배가 출연한다는 정보를 보고 마음이 40% 열렸다.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좋아하는 선배였다. 주변에서 선배 칭찬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참 좋은 사람이라고. 게다가 아까 말한 대로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잖나. 하필 두꺼비를 만지고 난 다음에 들어온 시나리오여서 더 마음이 갔다.
시나리오 읽고 나니 마음이 100% 열리던가.
이연_ 오래전부터 꾸준히 고민하는 주제 중 하나가 관계다. 나아가 관계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프레임이라는 것에 답답함을 느껴 왔다. 배우로 데뷔한 후, 촬영장 외에 여러 자리를 경험했다. 영화제에 참석하고, 개봉하면 오늘처럼 인터뷰도 한다. 방송에 출연하거나 SNS 라이브 방송을 하는 경우도 있다. 내 마음과 별개로, 어쨌든 자리의 성격에 걸맞은 애티튜드를 보여야 하지 않나. 사실 그것들이 나를 더 열정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차라리 내 열정을 어떤 틀에 잠시 넣어둬야 하는 시간에 가깝다. 영화 현장은 외부 시스템을 도입하며 굉장히 빠르게 변모하는 추세인데, 그러한 프레임은 어째서 변하지 않을까. 나를 신인 배우 혹은 연예인이라는 프레임에 비춰보는 이들에게 얼마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특정한 모습을 기대받는다는 사실에 갑갑함을 느꼈고, 그런 의미에서 <절해고도>는 해방감을 안겨 줬다. 딸, 아빠, 학생, 선생 등 인물 앞에 붙는 호칭과 역할에 관해 고민하는 계기도 됐고. 여러모로 반가운 시나리오였다. 스님이 되려고 했다는 윤철의 대사에 공감했다. 실은 나도 연기하다가 내 길이 정 아니다 싶으면 수녀원에 들어갈까 했거든. 그곳도 나이 제한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웃음)
영화 덕분에 안 가본 길을 경험하게 됐다.
이연_ 한때 고민했지. ‘수녀가 되려면 몸에 새긴 타투를 전부 지워야겠다’ 하면서. 영화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오는데, 애초 아티스트들이 그 길을 모르는 상태에서 많이 해볼 법한 생각 같다. 작품을 핑계로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게 되어 기뻤고,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회사와 주변 반응은?
이연_ 회사 식구들은 당황했다.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하겠습니다” 했거든. 삭발을 했던 <절해고도>, 남성 청소년을 연기했던 <소년심판>(넷플릭스, 2022) 모두 회사에서 조심스럽게 제안했던 작품이다. <절해고도>의 경우, 회사 본부장님이 특히 시나리오를 좋아했다. 내게 시나리오를 건네줄 때, 난감한 얼굴로 1인 2역이라고 말씀하시더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는 거다. “네가 절에 들어가. 머리를 싹 밀어야 할 것 같아.” 시나리오를 읽어 봤더니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 삭발은 당연했다. 여기에 동의하지 못하면 이 작품을 선택해선 안 됐다. ‘다음 작품 오디션도 봐야 하는데 삭발까지는 어렵지’ 생각한다면, 그래서 감독과 딜을 하게 된다면 포기해야 한다고 봤다. 회사에도 똑같이 말했다. 나는 이 작품을 하고 싶고, 머리를 밀겠다. 근데 만약 회사가 삭발 문제로 감독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미팅 자체를 안 하는 게 맞다. 괜히 감독님 시간 뺏지 말고 다른 배우 찾으라고 말씀드리자.
김미영_ 실은 가발부터 시작해서 모자까지 대책을 여러 가지 알아보는 중이었다. 근데 이연 배우가 첫 미팅에서 확실하게 말하더라. 같이 온 회사 분들도 전적으로 동의해 줬고.
이연_ 다 신의 뜻이구나 싶다니까. 회사 식구들도 이 얘기 나오면 늘 감탄한다. <절해고도>를 안 찍었으면 <소년심판>에서 백성우 역을 못 맡았을 거다. <절해고도>를 먼저 찍고 나서 반삭 상태로 <소년심판> 오디션에 갔거든. 본래 성우 역할에 10대 남성 배우를 캐스팅했는데, 제작진들 마음에 걸렸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극이 폭력적 내용을 담다 보니 실제 청소년에게 그 역을 맡기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한편, 나는 다른 역으로 오디션을 보고 왔던 참이었다. 오디션에서 연기를 제대로 못 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후 회사에서 연락이 온 거다. 합격하긴 했는데 배역이 달라졌다고.
긴급회의가 열렸겠다. 어떤 면에선 <절해고도>보다 고민거리가 많았을 작품이다. 백성우는 남성, 청소년, 심지어 범죄자였으니.
이연_ 본부장님이 그냥 전화로 말하면 될 텐데 굳이 회사까지 오라고 하더라. 무슨 일인가 싶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웃음) 막상 배역을 확인한 다음에는 두려움보다 흥미가 커졌다. ‘새로운데? 재밌겠는 걸?’ 곧장 연습에 들어갔다. 신의 뜻이라고 여기면서.
운명 같은 타이밍이 이어졌다. <절해고도> 찍으면서 감독과 대화를 많이 나눴다고 들었다. 둘의 대화는 어떤 식으로 흘러갔나. 지금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면 질의응답과 거리가 멀었을 듯한데.
김미영_ 배우의 시나리오 해석에 관해 옳고 그름을 논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일단 배우가 뭘 물어봐도 내가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왜? 감독이 쓴 글인데.
김미영_ 이연 배우는 뜻밖의 선물처럼 나타난 존재였다. <절해고도>가 현재 형태로 완성돼서 관객과 만날 수 있게 해준 사람. 게다가 누구보다 노력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앞서 연기를 준비하다 보면 깊이 빠지는 면이 있다고 했는데, 그만큼 혼자 생각하며 숙고하는 시간이 길다. 동시에 내가 본 첫인상대로 자유롭고 유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인다. 이연 배우에게 뭔가를 제시하는 일 자체가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내가 충분히 열려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배우에게 원하는 바를 말했던 적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실 그런 요구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현장에서 움직이는 이연 배우를 지켜보는 것이 훨씬 좋았다.
감독이 그려 왔던 상에서 어긋나거나 벗어나도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인가.
김미영_ 솔직히 이연 배우가 지나/도맹을 연기하기로 한 순간부터 다른 뭔가를 고집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냥 배우가 표현하는 대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재조정됐다. 당연한 선택이라고 말해주긴 했지만, 회사 입장에서나 배우 본인에게나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삭발도 커다란 일인데 그 과정에서 두피에 상처가 나는 등 이런저런 문제가 뒤따르기도 했다. 어렵게 결단해 줬다는 걸 아는 만큼 나머지 영역에서는 최대한 배우 본연의 모습과 해석을 존중하려고 했다.
이연 배우가 시나리오 책에 뭐라고 적었을지 궁금하다. 왠지 앞 장에 나와의 약속, 다짐 등을 써두었을 것 같거든.
이연_ 보통 시나리오마다 인물이나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써놓는 편이다. 근데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니 <절해고도> 책에는 아무것도 안 쓴 것 같다. 원래 다 기억이 나거든.
김미영_ 그만큼 마음 편히 본인을 캐릭터에게 나눠줬다는 의미 아닐까?
이연_ 맞다, 딱히 마음을 다잡을 필요 없이 그대로 현장에 있으면 됐다. 감독님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는 소통이다. 감독님이 진짜 훌륭한 리스너다. 촬영 전에 술자리를 몇 번 가졌다. “저는 술 마시면서 얘기하는 거 좋아하는데 감독님은 어떠세요?”
김미영_ “나도 술자리 되게 좋아해요.” (웃음)
이연_ 그렇게 만나서 별별 얘기를 다 했다. 일단 나를 파악해야 할 테니 연기를 시작한 과정부터 쭉 말씀드렸다. 무슨 말을 해도 “그랬구나” 하며 받아들여 주시더라. 촬영장에서도 자유도가 높았다. 배우끼리 대화하며 아이디어도 많이 냈는데, 감독님이 대부분 긍정적으로 들어 주셨다. 물론 아니다 싶으면 말렸고. 종환 선배가 하도 노래하고 흥얼거리는 바람에 우리 영화 뮤지컬 될 뻔했거든. (웃음) 선배가 감독님한테 “이 장면에서 또 노래해도 돼요?” 묻자, 감독님이 그건 아니라고 하더라. 어쨌든 의견을 자유롭게 주고받는 현장이었다. 딱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독님이 나한테 절박하게 멈추라고 했던 적이 있다. 머리 미는 날이었다. 미용실에 도착했는데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하시더라. 아마도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셨던 것 아닐까. 걱정과 미안함이 느껴졌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나.
김미영_ 물론이다. 나의 ‘대위기’였지. 한꺼번에 여러 감정이 몰려들었다. 배우가 말한 대로 삭발한 후엔 되돌릴 수 없었다. 예정된 상황인데도 압박감이 느껴지더라. 영화가 돌이킬 수 없는 길에 접어든다고 생각하자 긴장했던 것 같다.
이연_ 내가 몇 번 설득했는데 감독님은 단호했다. 아니라고, 잠깐 시간을 달라고.
막상 삭발 장면은 화기애애한 느낌으로 담겼다. 배우가 자유도를 언급했는데, 관련해서 감독이 현장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좀 더 듣고 싶다. 이연 배우를 포함해 다들 평소 모습에 가까워 보였거든. 편안하게 연기를 즐기는 듯하더라.
이연_ 감독님은 칭찬을 많이 해주신다.
김미영_ 분위기를 끌어 올리려고 일부러 칭찬한 것은 아니다. 스태프들과 사전 회의할 때부터 방향을 확실히 정했다. ‘배우가 하자는 대로 한다.’ 근데 다들 워낙 잘하니까 잘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이연_ 덕분에 자신감과 흥미를 잃지 않고 여러 가지를 시도할 수 있었다. 감독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 편인데, 그와 동시에 항상 일정한 BPM을 유지하신다. 분위기를 만들려고 에너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현장 상황이 어떻든지 휘둘리는 법 없이 차분한 태도로 임하신다.
김미영_ 마음속에선 폭풍이 몇 차례 몰아치긴 했지만. (웃음)
이연_ 종환 선배도 비슷하다. 아마 우리 중 BPM이 가장 빠른 사람은 나였을 거다. 지나고 보니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성향, 수행 센터라는 공간 분위기, 영화 톤이 전체적으로 잘 맞아 떨어졌던 것 같다. 촬영 감독님도 조용히 지켜보면서 움직이는 분이거든.
지나는 도맹으로 불리면서 외양, 분위기, 사는 곳 등이 변화한다. 현장의 차분함이 연기에도 영향을 미쳤을 듯한데, 지나와 도맹을 분리하여 생각했나. 차이를 두려고 했던 부분이 있다면.
이연_ 일단 외양이 달라지니 극 순서대로 촬영해야 했다. 나야 너무 좋았지. 인물과 함께 영화 속 여정을 통과하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 미는 장면을 포인트로 여기긴 했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인간 이연의 상태도 바뀌겠구나 예상했고, 확실히 묘한 감정이 싹트더라. 머리카락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처음 경험했으니까. ‘그래, 한 번 해보자!’라는 마음이 들었다. 연기에 미술, 분장, 의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도 했다. 배우가 역할에 몰입할 수 있도록 적합한 상태를 만들어 주는 거다.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채 산속에 들어가니 실제 나도 수행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시간의 흐름에 나를 맡긴 것 같다. 다만, 내 예상을 깬 부분도 있다. 도맹을 연기하며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반대였다. 지나보다 도맹의 감정 폭이 훨씬 컸다.
왜 그랬다고 보나.
이연_ 도맹이 자신에게 자유를 줬으니까. 감정을 숨기지도 외면하지도 않으니 내면이 요동칠 수밖에. 그러니까 애초 난 지나와 도맹을 분리하려고 했던 거다. 인물이 수행을 시작하면 차분해질 거라 짐작했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려고 계획했다. 근데 난 차분함을 연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도맹으로서 느끼는 감정을 무시하지 말고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했던 결대로 당장 인물을 표현하기란 어렵겠구나. 하지만 이처럼 거세게 요동치는 감정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그 과정을 통과하자, 실제 내 삶에도 스스로 자유를 허락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감정을 깎아내리거나 다른 무언가로 덧칠하지 않는 시간. 그래야 깊숙이 묻어 놓은 감정들이 배설되더라. 촬영하면서, 촬영 마치고 나서도 그 경험을 많이 곱씹었다.
영화를 보며 궁금했던 부분이다. 지나는 겉보기엔 질풍노도의 결정체 같지만, 윤철과 대화하는 모습에서 능숙함이 엿보인다. 아빠와 유지하는 관계의 점도마저도 지나의 노력으로 일궈낸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윤철에게 다가가고 물러나기를 반복해 본 사람, 대화에 수없이 실패한 후 적정선을 찾아낸 사람처럼 다가온다. 반면, 도맹에게선 분심이 두드러진다. 타협할 수 없을 정도로 억울하고 원통해서 그저 앞만 보고 달린다. 무엇이 그토록 속에서 치밀던가.
이연_ 지나는 감정을 억제하는 사람이라고 봤다. 분명히 세상에 화가 나 있거든. 부모, 친구, 학교, 그림 등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분노하지만, 애써 표현하지 않다. 지나 나름대로 도리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 적어도 저 사람에게는 화내지 말아야지, 화내는 모습을 보이지는 말아야지. 아빠와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윤철 말을 중간에 막 끊지 않나. 속은 울그락불그락 끓는데 자꾸 참다 보니 그런 거다. 내 눈엔 지나가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제 분노를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길도 답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뭐라도 해보려고. 근데 도맹이 되고 나서는 차라리 표현할 수 있는 거다. 수행센터를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니까. 이제 도맹은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길을 헤매는 자기 손을 잡아줄 스승도 곁에 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그 신이 나오나? 도맹이 근우스님에게 달려가서 속마음을 고백하는 장면. 그때 근우스님이 딱 한 마디 하는데.
김미영_ 법당 청소하라고 하지. “일단 청소부터 하자.” 그 장면은 편집 과정에서 들어냈다.
이연_ 말하자면 도맹은 프레임을 벗어난 상태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신경 쓰는 대신에, 내면에 집중하며 끓어오르는 감정과 마주한다. 뛰는 행위 역시 그 상태와 이어진다. 마음에 가득 찬 화를 단번에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소화시키는 거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인정하고, 또 꺼내놓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3년이 걸릴 수도, 다른 이는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도맹은 수행센터 안에 머물며 그 시간을 단축하는 듯했다. 19년을 살면서 경험했던 모든 일, 제 안에 쌓인 모든 감정을 하나하나 풀어내는 거다. 도맹 혼자서 그 과정을 치러야 했다면 살아온 만큼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르는데, 다행히 도맹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 덕분에 도맹은 시간을 좀 단축하면서 제 마음을 다져 나간다. 돌고 돌아서 제자리를 찾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이때 도맹은 속내를 표현하지 않고서는 그 과정을 이룰 수 없다고 여긴 것 같다.
삭제했다는 장면에 관해 덧붙일 말은 없나. 감독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텐데.
김미영_ 오늘 이연 배우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참 좋은 배우구나 싶다. 도맹이 스님에게 뛰어가고 두 인물이 대화하는 장면의 경우, 영화를 완성하고 보니 굳이 넣을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의 설명이나 지시 없이도 도맹은 스스로 관문을 넘어가는 사람이더라. 제 길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이 영화에 차근차근 드러났다. 근우스님도 마찬가지다. 도맹에게 그럴듯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아도 괜찮더라.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연_ 맞다, 그냥 계시면 된다. (웃음)
그러면 지나랑 윤철을 나란히 놓고 얘기해 볼까. 둘에게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과 치명적으로 닮은 점이 공존한다. 배우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연_ 지나의 결정력은 강단 있는 엄마를 닮았다. 한 번 결심하면 질질 시간 끌지 않고 행동에 옮긴다. 자퇴와 여행, 출가까지 곧장 실행하지 않나. 근데 자퇴한 이후 행보가 아빠를 빼닮았다. 사고와 정서를 이루는 바탕이 아빠와 판박이인 셈이다. 지나는 윤철 여자 버전이라고 할 수 있지. (웃음) 문득 상상했던 적이 있다. 윤철이 결혼하지 않았다면, 책임져야 할 아이가 없었다면 지금 어떻게 살까. 지나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스스로 터닝포인트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윤철은 제게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둘 다 바다에 떨어졌는데, 윤철은 파도에 몸을 내맡긴 채 떠다니고 지나는 어디론가 닿으려고 자꾸 헤엄친다. 재밌는 점은 두 인물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이 꽤 공평하다는 것이다. 성숙과 미성숙, 진보와 퇴보 등으로 차등을 두지 않는다.
김미영_ 두 인물은 두 개의 길이다. 한 사람이 갈 수 있는 두 갈래 길이 영화에 담긴다고 봤다. 윤철과 지나는 원래 평행 우주에 존재해야 하는데 부녀로 만나서 붙어 있는 거다.
윤철의 내레이션이 영화를 아우르며 멋스럽고 느긋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영화는 이따금 재밌는 방식으로 현실감을 끌어온다. 자식 앞날보다 제 미지근한 마음을 걱정하는 듯 보였던 윤철이 근우스님을 찾아가서 “지나가 스님으로서 비전이 있나요?” 묻는다든지, 도맹이 시장에서 호떡 먹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짐짓 의젓한 척한다든지. 속세의 연이라고 부를 만한 부녀 관계가 도드라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김미영_ 배우들이 현장에서 완성한 장면들이다. 대사야 정해져 있지만, 어떤 톤과 감정으로 연기할지는 나도 세세하게 알 수 없었다. 사전 리딩하는 과정에서도 장면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연기를 조율하는 방식으로 작업하지 않았고, 배우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대사 정도만 입에 맞게 고쳤다. 나도 배우들이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 모르는 상태로 현장에 갔던 거다. 시장 장면의 경우, 일단 윤철이 그렇게 반갑게 뛰어갈 줄은 몰랐다. 도맹이 호떡 기계 앞에서 지갑을 찾으며 귀엽게 눈치를 볼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고. 나뿐만 아니라 스태프들 전부 두 배우가 함께 나오는 장면을 좋아했다. 액션, 리액션이 남다른 배우들이라서 보고 있으면 즐겁거든.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생일 파티 장면에서도 “액션, 리액션”의 힘을 느꼈다. 윤철에게 날 두고 죽으려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한 후, 도맹은 울음을 삼키듯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문다. 그 순간 이연 배우가 지은 표정을 잊기 어렵다. 당시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이연_ 스태프와 배우들 다 같이 모여 밥 먹는 곳에서 그 장면을 찍었다. 종환 선배랑 정이 쌓였던 시점이다. 아주 긴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닌데 의지가 됐다. 들은 대로 좋은 사람이었고 여러모로 잘 챙겨줬다. 정말 아빠와 딸처럼 지냈던 것 같다. 잘 모르는 부분도 많지만 관계의 성격을 이해한 상태로 쭉 시간을 거쳐 온 거다. 사실 윤철이 수행센터에 와서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울컥했다. 지나는 프레임을 벗어 던지고 도맹이 됐지만, 윤철이 찾아온 덕분에 둘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 애초 생일 파티 장면에서 내가 울 줄도 몰랐다. 근데 대사를 뱉으니까 갑자기 슬프더라. 케이크를 먹는 장면도 아니고 먹을 생각도 없었는데, 그 순간 안 먹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확 나버렸거든. 옆에 근우스님도 계시고 아빠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으니 뭐라도 먹어야 했다. 내 생일이라고 축하해 주러 모인 사람들 앞에서 슬퍼지니 미안했다. 계산 없이 그저 대사가 주는 힘으로 찍었던 장면이다.
김미영_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다. 리허설 없이 바로 찍었거든. 영화에 담긴 좋은 장면들 대부분이 그렇다.
이연_ 윤철이 도맹 손에 밤을 쥐여주는 장면도! 실제로 주변에 밤나무가 많았는데, 하루는 제작부장님이 밤을 주워서 삶으셨다. 다들 출출해지면 하나씩 까먹었지. 근데 종환 선배가 수행센터를 떠나는 장면을 찍기 전에 밤을 갖고 차에 탔던 거다. 나를 포함해 아무도 몰랐다. 윤철이 차를 멈춰서 뭔가를 줬는데 손을 펼쳐 보니 밤이었다. 그때도 갑자기 울었다. 왜 슬픈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고마워서더라. 도맹이 된 다음부터 지나는 껍질조차 없는, 아주 순수한 상태의 감사를 계속해서 느꼈던 것 같다. 부모 자식 관계를 떠나서 윤철은 한 명의 사람 아닌가. 그가 아빠라는 이유로 여기까지 와서 봉사하고, 센터에서 떠나기 싫어하는 마음이 빤히 보이는데 덤덤한 척하며 길을 나선다. 그 와중에 밤을 쥐여주니 슬프더라. 둘의 관계가 잘 쌓인 덕분에 선배도 나도 자연스럽게 그런 감정이 나왔던 것 같다.
그게 밤이구나. 앞선 장면에서 윤철은 도맹에게 필요한 것이 없는지 재차 묻는다. 도맹은 번번이 없다고 답하는데 마지막에 윤철이 선물처럼 뭔가를 주고 떠난다. 둘만 아는 신호를 주고받는 듯해서 말한 대로 관계에 쌓인 시간을 가늠해 보게 되더라.
이연_ 마음이 일렁일 수밖에 없다. 자꾸 나한테 뭘 주니까! 아침엔 스님이 블루베리 주고, 촬영 들어가면 아빠가 밤 주고. (웃음)
김미영_ 윤철이 밤을 주고 떠나는 장면이 정말 분기점 같다. 영화를 보다가 나도 그 장면에서 감정이 좀 달라지더라. 테이크를 세 번 갔는데 앞선 두 번에서는 윤철이 그냥 떠났다. 그러다 마지막 테이크에 차를 멈춰서 도맹 손에 밤을 쥐어줬던 거다. 깜짝 놀랐지. 다들 난리 났다.
그 팀은 난리 나면 보통 어떤 정도인가.
이연_ 각자 좋아하면서 조용히 난리 난다. (웃음) 컷 하고 감독님이 와서 묻더라. “뭐야? 밤이구나.” 그제야 나도 조용히 눈물 닦고.
김미영_ 예고도 없이 사람을 울리고 말이지. 보면서 참 놀랍고 신기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렇게 마음에 와닿는 뭔가가 있구나 싶어서.
영화를 싹트게 한 질문은 “기존에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는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 무엇을 더 알게 될까?”였다고. 둘이 알게 된 요즘의 나는 어떤 모습인가. 나에 관해 무엇을 아나.
이연_ 나는 유명세를 즐기는 사람이 못 된다는 것. 오래도록 고민하는 주제다. 작품 선택하는 과정에도 분명히 영향을 미치고. 밖에서 날 알아봐 주시는 분들을 만나면 감사하다. 팬들과 인사 나누는 것도 반갑고 기쁘다. 근데 딱 그 정도가 좋은 거다.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싶다든지, 유명해지기 위해 뭔가를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배우라는 직업을 지속하는 한, 어느 정도는 그런 욕심이 필요한 것 같다. 인정하면서도 자꾸 부딪힌다. 내 성향과 가치관을 지키면서, 편안한 마음가짐을 유지하면서 계속 일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나는 객관적 시선과 주관적 시선 모두 활용하여 내 미래를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타인의 기대를 언제나 벗어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이때쯤 뭔가 나올 것 같았는데? 여기서 터지는 줄 알았는데?’ 늘 그런 식으로 예상을 비켜 나가겠구나 싶더라. 내가 속한 세계에는 이미 파도가 있다. 근데 그 파도를 타기엔 내 성향이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뉴 웨이브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듯하고, 또 오래 걸려야 하는 일이다.
눈앞에서 번져 나가는 파도를 보면서, 그 위에 올라탄 수많은 사람을 보면서 초조하진 않고?
이연_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이 직업에 안 어울린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고, 내 것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기존의 파도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비교하면서 동기부여가 된다면 차라리 속이라도 편할 것 같다. 근데 난 오히려 한 발짝 떨어져서 보게 되거든. 대단하다고 감탄하긴 해도 저걸 내 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솔직히 말하면 불안하지 않다. 난 믿거든. 당장 가시적 성과를 내진 못해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다만, 회사와 내게 돌아오는 이윤을 생각한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런 괴리감이 지속된다. 파도에 올라타면 분명히 돈을 버는데, 동시에 무조건 괴로움이 남거든. 아주 조금 가진 부분을 많이 가진 척, 더 크게 지닌 척해야 하니까. 엎치락뒤치락하며 고민하는 내 모습을 나날이 발견하고 있다. 안 그래도 이번에 쉬면서 ‘이러다 귀농하는 거 아니야?’ 했다.
김미영_ 안 되지!
롤모델이라고 해야 할까, 조언을 구할 만한 사람은 가까이에 있나.
이연_ 최근에 류승범 배우가 출연한 토크 프로그램을 봤다. 일찌감치 본인만의 뉴 웨이브를 만들어서 한 차례 방점을 찍은 선배 아닌가. 어느 순간 원하는 곳에서 힘을 발휘했고, 그 후 한동안 가족과 함께 삶을 꾸리는 데 집중했다. 그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번 더 마음을 다잡았다. 남들은 묻는다. “그냥 하면 되는데 왜 안 해?” 그들 눈엔 내가 기회를 놓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건 내 것이 아니거든. 이따금 괴롭긴 해도 나에게 맞는 길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려고 한다. 그 와중에 재밌고 훌륭한 작품을 여러 편 만났으니 운이 좋은 편이다. 가슴 뛰는 작품을 만나지 못하면 연기 활동에 공백이 생기기도 할 텐데, 그런 상황이 두렵진 않다.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중이다. 맞다, 나 얼마 후에 TV 프로그램에서 노래도 부른다. <더 시즌즈-악뮤의 오날오밤>(KBS2)에 출연하거든. 그렇게 영화든 드라마든 예능이든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범위를 고려하면서 계속 도전해 볼 생각이다.
감독은 아까 질문 듣자마자 한숨을 쉬었는데 어떤가. 요즘 알게 된 나는 누구인지?
김미영_ 그저 아침에 눈 떠서 기뻐하는 나를 발견한다면 좋겠다. 그런 날이 소중하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됐다. 왜일까. 예전에는 모든 날이 똑같이 안 좋았나? (웃음) 지금은 그 정도면 만족한다. 말 그대로 ‘일신우일신’이다.
매일 아침 기쁘게 일어나기란 어떻게 가능할까. 생활에 설렘이나 재미가 필요하다는 뜻인가, 아니면 마음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평화롭고 싶다는 뜻인가.
김미영_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아도 된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이면 기쁘게 일어날 수 있는 것 같다. 문제야 늘 있기 마련이고 피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그래도 괜찮다는 마음을 갖기가 어려운 거다.
차기작은 “가까이서 보면 희극인데, 영화가 끝나면 비극일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라고 했다. 어떻게 진행 중인가.
김미영_ 다음 영화 제목은 <이번 생의 친구들>이다. 우리 모두 이번 생에서 만난 친구들이지 않나. 시간이 갈수록 인연이라는 것이 참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녀를 중심으로 한 영화를 두 편 만들었는데, 차기작에선 엄마와 딸 그리고 딸의 남자친구까지 셋이 주인공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에 참가할 예정이다.
이연 배우도 올해 계획한 일이 많을 텐데.
이연_ KBS 단막극 <도현의 고백> 촬영을 마쳤고 공개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내게 다가오는 작품들을 좋은 마음으로 만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