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만, 영어로는 Youngman Kim이라고 표기한다. 1979년, 스물셋에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내 험악하기로 제일가는 뉴욕 이스트빌리지에 정착한다. 그는 야채 가게, 슈퍼마켓, 세탁소 등 손대는 장사마다 대박을 터뜨리며 사업 규모를 키워 가더니, 불과 6년 만에 제 이름을 딴 비디오 왕국을 건설한다. ‘킴스 비디오’는 금세 뉴욕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고 허드슨강을 건너 뉴저지까지 진출하기에 이른다. 특히 누아르, 액션, 아방가르드, 스릴러, 코미디, 클래식, 웨스턴, 호러, 아시아, LGBT 등 수많은 타이틀로 영화를 소개하는 자체 컬렉션이 큰 인기를 끌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영화를 구할 수 있다는 소식에 씨네필이 몰려들었다. 마틴 스콜세지와 쿠엔틴 타란티노를 비롯한 거장들이 ‘킴스 비디오’ 단골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코엔 형제는 600달러의 연체료를 빚지기도 했다. 정작 왕국의 건설자, 김용만은 베일에 가려졌다. 떠도는 소문은 수십 개인데 누구 하나 그의 정체를 속 시원히 밝히지 못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2023년 9월, 김용만은 영화 <킴스 비디오> 개봉을 앞두고 내한했다. 김용만과 그가 소장했던 비디오의 행방을 찾아 나선 두 감독, 데이비드 레드먼과 애슐리 사빈은 영화 내내 미국과 한국, 이탈리아를 오가며 ‘비디오 구출 대작전’을 펼친다. 열정을 넘어 집착에 가까운 그들의 모습은 과거 30만 편에 달하는 영화를 섭렵했던 김용만과 얼핏 겹쳐 보인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김용만은 명함을 건넸다. 2008년 폐점한 ‘킴스’ 왕국의 마지막 근거지, Mundo Kim’s 로고가 선명하게 그려진 명함이었다. 몰고 다니는 소문만큼이나 김용만에게 따라붙은 별명도 여러 개다. 그는 강인한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터프 가이이고, 밤낮없이 일해도 끄덕없는 철인이다. 무질서와 혼란이 범람하는 도시에서 갈등 상황을 조율하며 시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김용만은 제 이름 그대로 Young man, 젊은이다. 매일 새로 태어나는 영화들과 더불어 그의 젊음은 무르익어 간다.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 이후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감독들은 뭐라고 하던가.
굉장히 익사이팅하다고 하지. 그 친구들도 한국에 와서 개봉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는데 하필 밴쿠버국제영화제와 일정이 겹쳤다. 그들은 캐나다로 튀고, 난 여기로 오고. 그렇게 담당 구역을 나눴다.
영화에선 출장 중인 당신을 만나기 위해 두 감독이 한국으로 온다. 실제 첫 만남이 그때인가.
2008년에 마지막 매장을 정리했다. 며칠 사이에 다큐멘터리 제작 리퀘스트가 여러 건 들어왔다. 내 딸이 웨슬리언대학교에서 필름 공부를 하는데 그쪽 교수도 영화를 제안하더라. 딸을 통해 들어온 부탁이다 보니 거절하기가 난처해서 아예 답장을 안 했다. 당시 사업 종료하고 우리 컬렉션을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위치한 살레미로 보내기로 했다고 밝히자, 뉴욕타임스에서 연락이 왔다.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I just wanna be forgotten. Because I was a loser.”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토록 아끼던 비즈니스를 정리했으니 그럴 만하지 않겠나. 무엇보다 좀 쉬고 싶었다. ‘킴스 비디오’는 흔히 떠올리는 비디오 대여점과 달랐다. 정말 치열하게 했거든. 컬렉션 하나하나를 구하는 과정이 나에겐 전투였다. 매일 전투 치르듯 일했고 자연스레 애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소장 자료를 살레미에 보내면서 이제 끝이라고 여겼다. 영화나 음악에 두 번 다시 관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거다. 그 와중에 다큐멘터리를 찍자고 하니 응할 리가 없지. 여러 오퍼를 묵살하다시피 했는데, 2~3년쯤 지나서 <킴스 비디오> 감독들에게 연락받았다. 과거 우리 매장에서 일했던 매니저가 징검다리 역할을 했더라. 하지만 데이비드와 애슐리의 제안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 존재를 잊어버렸을 즈음, 그러니까 2~3년이 또 지난 후에 두 번째 연락이 왔다.
삼고초려나 다름없다. 감독들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이 동했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미 오래전에 내 승낙 없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더라. 한번 만나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서울에 머무르는 중이라고 하자 둘도 서울로 오겠다고 했다. 만나서 그간 촬영한 내용을 보여줬는데 양이 상당했다. 20년 전에 같이 일했던 직원들 인터뷰는 물론이고, 내 기억에서 지워진 이야기까지 담겨 있었다. 그것만 봐도 그림이 그려졌다.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지, 창작자의 의도와 방향이 무엇인지 알겠더라. 내가 또 거절해도 둘은 이 영화를 계속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정식으로 승낙했다. 좋다, 해보자.
그러면 촬영을 2년 정도 진행한 시점에 처음 만난 건가.
둘이서 거의 3년을 찍었더라.
감독들은 영화 안에서나 밖에서나 앞뒤 안 가리고 밀어붙였네.
막무가내로, 무작정. 그게 내 스타일이기도 했거든. (웃음)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를 만남의 장소로 고른 것도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매장을 하나씩 닫을 때마다 컬렉션 대부분을 대학에 기증했다. 최초로 영업 종료한 매장에서 보유했던 3만여 개 자료를 한예종에 줬다. 교내 영상 자료실 입구에 ‘킴스 비디오로부터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리는 조그마한 현판이 설치되어 있다. 학교에서 비디오를 책임지고 디지털라이징한다는 조건으로 보냈고, 실제로 한예종은 약속을 지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피아 보스라는 둥 당신을 둘러싼 무성한 소문에 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었나.
직원들을 훈련하면서 몇 가지 인스트럭션을 분명히 줬는데 그중 하나가 ‘킴스’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모두 프라이드를 갖고 일하길 바랐거든. 그들이 미국에서 보편적으로 겪던 방식과 내 요구를 비교하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킴스’에 와서 몇 달만 일해도 우월 의식이랄까, 나름대로 프라이드가 생긴다. 무례한 손님들에게도 아주 단호하게 대처했고. 어떤 면에서 보면 건방진 건데 난 그런 태도가 꽤 마음에 들었다. 분위기가 이미 만들어진 데다, 스태프들 입장에서 나와 대면하는 기회는 많지 않았기에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을 거다. 난 일주일에 최소 한두 번은 미팅을 진행하면서 매니저들과 주로 소통했다.
명함에 적힌 메일 주소를 보니 아이디가 ironkim으로 시작한다. ‘아이언 킴’은 별명인가.
젊은 시절부터 썼던 메일이다. 주변에서 날 아이언 맨이라고 부르곤 했다. 내 말과 행동을 지켜보고, 또 메일 주소까지 들으면 바로 이렇게 말하지. “He is very tough!” 터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터프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시안 이민자로서 챌린지가 워낙 많으니까. 게다가 23살에 미국에 갔으니 나이도 좀 어정쩡했다. 이민자 1세도, 2세도 아니고. 사실 알고 보면 난 굉장히 나이스 가이거든. 근데 사업하면서 터프 가이가 되더라.
일종의 생존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드러운 면을 보이는 순간, 약점을 잡혔을 테니까.
불행하게도 그랬다. 친구나 가족 앞에선 전혀 다른데, 비즈니스 현장에 가면 도저히 본모습을 보일 수가 없더라. 아침에 사무실 도착하면 책상에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우리가 자정까지 매장을 오픈했거든. 내가 저녁 6시에 퇴근한다고 하면 매장 닫기까지 6시간 동안 별별 일이 생긴다. 출근하자마자 소매 걷어붙이고 일했다. “Everyday is something. Okay, I’m ready.” 하며 직원과 오너의 일은 명백하게 구분된다. 직원이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직접 해결하거나 직원에게 해결책을 알려줘야 한다. 근데 내가 제시한 방안이 그들에겐 낯선 거다. 본인들이 경험한 적 없는, 이상한 길을 알려 주니 나를 미스테리어스한 인물로 여겼지.
대체 뭐였기에?
다들 내가 빈손으로 미국에 왔다고 하는데 아니다. 나에겐 거대한 자산이 있었다. 평생 멘토로 생각하는 사람이 셋이다. 첫째는 우리 할머니, 둘째는 어머니, 셋째가 아내다. 우연히 여자 셋을 인생 멘토로 만나게 됐지. 어릴 적 할머니 무릎에서 낮잠을 참 많이 잤다. 어머니보다 할머니와 자주 놀았고 특히 옛날이야기 듣는 시간을 좋아했다. 호랑이가 담배 피우는 이야기, 곰이 마늘 먹는 이야기, 엄마를 해친 늑대가 남매를 찾아와서 떡 줄 테니 문 열라는 이야기 등 한국의 온갖 전래 동화를 듣고 자랐다. 뉴욕 이스트빌리지라는 곳에 가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 다들 빵빵 터지더라. 무슨 호랑이가 담배를 태우냐면서. 근데 배경과 디테일을 설명하며 스토리를 풀어주잖아? 그러면 얘네가 감탄해서 거의 나가 자빠진다. 한편, 어머니는 삶의 지혜를 공유해 주셨다.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많이 배우면서 컸다. 집사람이야 한참 후에 만났으니 이 주제로 엮기는 어렵고. (웃음) 그러니까 사업가로서 뭔가를 고민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과거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가 영향을 미치는 거다. 당연히 미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내 선택이 생뚱맞겠지. 듣도 보도 못한 해결 방안을 내놓으니까. 근데 할머니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어머니 말씀을 따르다 보면 일이 원만하게 풀리더라.
문화를 유산이자 자산으로 존중하는 태도는 ‘킴스 비디오’의 특징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기존과 전혀 다른 사업 가치를 선보였던 셈인데 당시 주변 반응은 어땠나.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고, 그러다 차츰 마음의 문을 열었다. 효과는 큰데 원리는 간단하다. 미국식 사고방식을 흉내 냈다면 난 그저 수백만분의 일에 불과했을 거다. 하지만 내가 터득한 한국적 교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 다들 관심 있게 보더라. 이 사람 뭐지? 이상한데 또 흥미롭네? 그렇게 나만의 영역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사업에 몰두하는 동시에, 영화 제작과 역사 등을 공부하면서 꾸준히 연출을 시도했다. 애초에 영화를 바라보며 미국으로 갔던 건가.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목표라고 하기엔 또 막연했다. 운이 좋았다. 처음 떨어진 곳이 하필 이스트빌리지라니. 영화와의 재결합에 지역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스트빌리지를 모르면 내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거다. 내가 도착했을 당시, 그곳은 한마디로 혼란의 극치였다. 갱단이 어마어마하게 활약하던 시기였고 마약 딜러끼리 충돌도 잦았다. 알파벳 시티라고 부르는 동네가 있는데, 그쪽이 월 스트리트와 가깝다 보니 부유층이 종종 방문했다. 마약 구매하려고 큰돈을 들고 찾아오는 거다. 홈리스의 헤드쿼터라고 할 만큼 노숙자도 많았다. 길이든 공원이든 어딜 가나 보여서 뉴욕의 홈리스는 전부 그곳에 모인다고 했을 정도다. 건물주는 임대 계약에 실패하고 세금만 쌓이니 건물을 버렸다. 그럼 홈리스가 빈집에 들어가는 거다. 날이 추워서 불을 피웠다가 화재가 발생하고, 그렇게 건물을 통째로 태워 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난 생각했지. 이야, 세상에 이렇게 자유로운 곳이 또 있을까?


혼란을 자유로 받아들였다니 놀랍다. 무섭지 않았나.
반대였다. 여기서 할 일이 많겠구나 했지. 이스트빌리지엔 나와 비슷한 사람이 흘러 들어왔다. 갱과 홈리스가 무서우니 웬만하면 그곳을 피하는데, 어떤 젊은이들은 제 발로 걸어온다. 영화, 음악, 연극, 문학 등 예술에 꿈을 품은 예술가. 유럽에서 공부하러 온 유학생. 미래를 기대하며 뉴욕에 왔으나 돈 없는 이들이 이스트빌리지에 둥지를 틀었다. 위험하더라도 값싼 지역을 찾아왔던 거다.
가난뱅이 예술가들의 동네였네.
딱 그런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난 그들과 달리 홈리스나 갱이 무섭지 않더라. 오히려 무척 친하게 지냈다. 인사 주고받고, 길에서 만나면 자리 잡고 앉아서 수다도 떨었다. 유럽에서 온 친구들은 근처에 홈리스가 오기만 해도 무섭다며 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상대는 더 거칠게 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지 않겠나. 친구들은 강도를 당한다든지 이런저런 불쾌한 일을 자꾸 겪더라. 반면에, 내겐 나쁘게 대할 이유가 없는 거다. 우연히 마주치면 다들 “Kim! Kim!” 반가워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중엔 친구들의 보디가드 역할을 도맡았다. 애들이 생활하다 보면 과제라든지 파티라든지 밤늦게 귀가할 일이 생기거든. 알파벳 시티는 애비뉴 A, B, C, D로 나뉘는데 얘네는 A에도 못 산다. 집세가 좀 더 저렴한 B나 C로 가지. 그러면 밤에 구역 하나를 넘어야 하는 건데 혼자선 무서우니 나한테 온다. 같이 좀 가달라고. 당시 내 별명이 ‘알파벳 시티 메이어’ 였다. 홈리스나 갱과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고, 밤마다 친구들 집에 데려다주고. 그렇게 몇 년 하다 보니 어느새 유명 인사가 됐더라. 동시에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로부터 자극과 영감을 얻었다. 영화를 향한 열정이 되살아났지. 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디오 샵을 차리게 됐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작품만 놓고 따져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영화가 많았거든. 이런 영화를 구해서 다 같이 보면 좋겠다는 마음, 그것이 ‘킴스 비디오’의 효시이자 동기다.
연도별로 타임라인을 정리하다가 당황했다. 작은 잡화점으로 시작해 세탁소와 비디오 대여점 등 매년 사업 규모를 확장했고, 바쁜 와중에 영화 공부까지 병행했다. 하루 24시간을 꽉 채워 산 듯한데 20대를 돌이켜보면 어떤가.
이틀 전 오전 5시쯤 한국에 도착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시차도 느끼고 피로가 쌓였으니 좀 쉬지 않겠나. 근데 난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지금까지 타임 투 타임으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젊은 시절엔 훨씬 더했지. 1980년 11월, 이스트빌리지에서 첫 가게 계약을 맺었는데 돈이 부족했다. 수중에 지닌 몇천 달러를 먼저 주고 나머지 금액은 매달 갚는 조건으로 가게를 인수했다. 금세 벌어서 줄 테니 나한테 맡겨보라고 설득했지. 그렇게 24살에 난생처음 사업을 시작했다. 가게 이름이 ‘킴스 프로듀스’였다. 과일과 채소, 간단한 식료품 등을 팔았는데 초반에는 홈리스들이 와서 물건을 훔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도 난 그들과 언성 높이며 싸워본 적이 없다. 각자 양심에 맡겼더니 어느새 그들도 딱 먹을 만큼만 가져 가더라. 돈 없는 손님에게 외상을 주기도 했다. 나중에라도 갚으면 좋고, 안 갚으면 어쩔 수 없고. 다들 손해 볼 것 같다고 하는데 정반대였다. 1년 지나고 보니 장사가 너무 잘 되는 거다. 히스패닉 영감 한 명이랑 같이 ‘킴스 프로듀스’를 운영했는데 다음 해에 그보다 6배 큰 매장으로 옮겼다. 직원도 40명까지 늘었다. 당시 알파벳 시티에서 ‘킴스 마켓’을 열고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뭔 줄 아나? 가게를 24시간 오픈해 버렸다. 부모님을 포함해서 주변인 모두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난 그럴수록 의지가 확고해졌다. 해가 지면 대부분 문을 닫아서 저녁만 되어도 거리 전체가 어두컴컴했다. 근데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큰 가게를 열고 종일 불을 환히 밝혀 놓으니 주민들이 너무 좋아하더라. 날이 갈수록 사업이 번창했다.
왜 ‘메이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알겠다. 커뮤니티의 등대를 자처했던 것처럼 보이거든.
하루 멀다 하고 사건 사고가 이어지는 동네였지만, 우리 가게는 예외였다. 가끔 좀도둑이 들거나 홈리스가 먹거리를 훔쳐 가긴 해도 큰일이 벌어진 적은 없다. 그러다 보니 동네에서 홈리스나 갱단과 문제가 생긴 사람들이 협조를 구하려고 나를 찾더라. 어쨌든 직원이 늘어나면서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됐고, 그때부터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새 학기 등록할 때마다 자문했다. ‘내가 이번 학기를 끝마칠 수 있을까?’ 실제로 자주 드롭아웃 했다. 한 학기에 두 과목만 듣는데도 지속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비즈니스 자체가 바쁜 데다 도매 시장에 가려면 새벽부터 움직여야 했거든. 일찍 가지 않으면 신선한 상품을 못 구하니까.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물건을 구매하고 돌아와서 잠깐 눈 붙였다가 학교 가는 식이었다. 우리 매장 지하실에 야전 침대를 놓고 쪽잠을 자며 생활했다.
세탁소를 연 시점은 언제인가. ‘킴스 비디오’는 애초 세탁소에서 ‘숍인숍’ 형태로 출발했다고 들었는데.
‘킴스 마켓’을 운영하고 2년 후에 오픈했다. 세탁소만 하기엔 공간이 커서 일부를 비디오 샵으로 만들었다. 이전까지 애비뉴 A에 세탁소가 하나도 없었다. 1985년이 되자 비로소 그 거리에 양복 차려입은 직장인과 젊은 부부, 데이트 하러 나온 커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켓을 운영하며 손님들을 유심히 관찰했거든. 동네에 새로운 유형의 인구가 유입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하다가 세탁소를 오픈했다. 곧 비디오 1,700개를 들이면서 대여점도 시작했다. 돈을 벌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킴스 비디오’가 완전히 히트했다. 어찌나 손님이 많은지 숍인숍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어서 1986년에 매장을 분리 이전했다. 드디어 ‘킴스 비디오’라는 근사한 간판을 붙여서 샵을 운영하기 시작한 거다.
사업적 성공보다 영화예술을 대하는 본인만의 철학을 확고하게 지키려고 했던 것 같다. 당시 그렸던 ‘킴스 비디오’의 청사진은 뭐였나.
우선 돈은 목표가 아니었다. 돈이야 다른 업체에서 충분히 벌고 있으니 ‘킴스 비디오’만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꾸리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어떤 사례나 조언을 따라가는 대신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보자고. 이제껏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아주 특별한 비디오 가게. 무식한 아이디어였지만 실현 가능한 길이기도 했다. 새로운 영화를 소개하면서 차차 ‘킴스 비디오’만의 개성이 뚜렷해졌다. 다들 오해하는데 우리도 소장 비디오의 60퍼센트는 사람들이 흔히 찾는 영화로 채웠고 나머지 40퍼센트를 자체 컬렉션으로 꾸렸다.
비디오 대여 사업을 확장하며 여러 지역에 진출한다. ‘킴스 비디오’ 매장만 5개가 넘었다고.
Mondo Kim’s, Kim’s Underground, Kim’s Mediapolis, Kim’s West 등을 포함해 총 7개였다. 뉴욕뿐만 아니라 뉴저지에도 매장을 열었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킴스 비디오’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당시 기사를 보니 비디오 대여 사업을 진행하며 대학과 다방면으로 교류했더라.
여러 대학교가 우리와 함께하길 원하며 사업을 제안했다. 컬럼비아대에서는 영화 만드는 학생들 대상으로 ‘킴스 비디오’ 장학금도 만들었다. 교수진의 선발을 거쳐 작품 10편이 들어오면 내가 수상작을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상금을 전달함과 동시에 그 친구의 영화를 비디오로 제작해서 우리 매장 전체에 진열했다. 학생들이 굉장히 좋아했지. 컬럼비아대와 뉴욕대를 포함해서 학교에 영화를 공급하는 일도 꾸준히 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한국 대학에도 마찬가지였다. 계약 구조상 교보문고가 서울대에 영화를 납품하는 형태였지만, 실질적으로 영화를 공급한 것은 ‘킴스 비디오’였다.
‘킴스 비디오’에는 신인이라는 라벨조차 붙지 않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감독들의 낯선 영화가 가득했다. 심지어 영화학교로 유명한 대학과 주립 도서관보다 수급이 빨랐는데, 어떻게 그 많은 작품을 접하고 또 가져올 수 있었나.
밤낮없이 움직였다. 팀을 꾸려서 해외 곳곳으로 파견했고, 내 경우엔 일 년 중 절반을 집 밖에서 보냈다. 그만큼 출장이 잦았다.
직원을 뽑는 기준은 뭐였나.
거창하게 요건을 따지지는 않았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 영화에 관해 기본 소양을 갖춘 사람에게 기회를 줬다.
‘킴스 비디오’는 마치 365일 계속되는 영화제 같다. 당신은 사업가인 동시에 프로그래머이자 수집가였다. 여러 창작자와 교류하며 직접 영화도 여러 편 만들었다. 이토록 왕성한 에너지를 뿜어내며 온갖 종류의 일을 해낸 동력이 뭐였는지 궁금하다.
그냥 너무너무 재밌으니까. 게다가 돈을 벌 생각도 아니었는데 돈이 벌렸다. ‘킴스 비디오’ 전체 회원이 25만 명에 육박했고 개인당 200~500달러씩 보증금을 예치했다. 물론 사업을 정리한 후 그 돈은 잡음 없이 모두에게 반환했다. 하여간 늘 거액의 현금을 보유했다는 뜻이다. 비디오 대여료 또한 대개 현금으로 결제하지 않나.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돈을 가득 쌓아놓고 세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다.
영화에서 감독들과 함께 소장품을 이전한 살레미에 재방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담당 관리인 앞에서 애써 말을 삼키던데 속으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착잡했지. 하지만 사업가에게는 사업가로서의 본능이 있다. 그 자리에서 감정을 표출했다면 협상이 어려워질 것이 빤했다. 최대한 감정을 노출하지 않으며 선을 정확히 그었다. 내가 개입하는 순간, 이탈리아 쪽에서는 막대한 금액을 요구할 테니까. 실제로 관심 없다는 태도를 취하며 협상 테이블에서 물러나자 감독인 데이비드에게 집중이 옮겨 갔다. 데이비드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확인한 후, 협상 금액은 50분의 1로 줄어들었고.
비디오 해방에 매달리는 감독들의 분노와 아쉬움은 어느 정도 당신을 향한다. ‘우리의 보물을 왜 방치하는 거예요? 어째서 다시 책임져 주지 않는 거예요?’라는 뉘앙스를 느꼈을 텐데.
이탈리아에서 차일피일 결정과 책임을 미루자 감독들도 상당히 화가 난 상태였다. 문제는 내가 컬렉션에 개입하는 순간, 영화 플롯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었다. 감독들이 애초 계획한 제작 방향이 있을 것 아닌가. 처음부터 난 영화 제작에도, 컬렉션을 되찾는 일에도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감독들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만, 영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순간에 별수 없이 나를 찾아왔던 거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해결사처럼 나서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봤다. 감기에 걸렸는데 자연 치유할 거냐, 아니면 항생제를 먹을 거냐. 따져 보면 그런 문제다. 돌고 돌아도, 시간과 노력이 좀 더 필요하다고 해도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감독들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은 아니었겠지만 난 자연 치유하는 쪽이거든. 그래서 지금까지 이렇게 건강하지 않나. (웃음)


감독들은 결국 영화를 참조하여 독특하고 과감한 방식으로 비디오를 구출한다. 그들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전해 들은 후,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정말 고다르가 도왔다면 난 반대할 이유가 없어요. 나는 고다르의 결정을 지지할 뿐이에요.” 서로 통하는 데가 있구나 싶더라.
깜짝 놀랐다. 감독들이 그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거든. 장 뤽 고다르는 우리 킴스 비디오에서 신이라고 불렸다. 그의 영화를 모아놓은 섹션에 GOD이라고 써 붙이고 뒤에 소문자로 -ard를 적어놓았지. 다들 그걸 발견하고 좋아했다. 감독들과 대화하다 보니 그때 기억이 떠오르더라.
소장품을 되찾으라고 설득하는 감독들에게 “내 권한 밖의 일”이라며 거절 의사를 전하면서도 긴 시간 그들과 교류하며 영화를 찍었다. 작품이 완성된 후 영화제에 참석했고, 현재도 개봉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어떤 마음인가. 누군가가 당신을 보며 깨달음을 얻고 움직이길 바라나.
예나 지금이나 내 마음은 같다. 문화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독립 영화인과 인디 뮤지션 등 자본 밖에 있는 창작자들이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킴스’가 그런 플랫폼을 뉴욕에서 20년 가까이 성장시켜 왔다. 수많은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가 우리에게 의지했고, 또 그들끼리 영향을 주고받았다. ‘킴스 비디오’는 창작자와 소비자에게 네트워크의 장을 열어주고 도움을 제공하면서 역할을 확대해 갔다. 근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테크놀로지와 자본, 그건 불가항력이었다. 밀고 들어오는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아무리 거대한 물결이라고 해도 트렌드가 변화하려면 10년 이상 걸리는데, 당시 3년 사이에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대책을 강구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뼈 아픈 실패였고, 영화에 두 번 다시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또 세월이 흘러 <킴스 비디오>라는 영화가 관객을 만나게 되니 바람이 생긴다. 영화의 행간을 주의 깊게 읽어준다면 좋겠다. 유쾌한 톤에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그 안에 감독의 메시지가 분명히 담겨 있거든. ‘킴스’의 정신이란 무엇인지, 감독은 왜 이렇게까지 킴스 컬렉션에 집착하는지. 관객에게 그런 부분이 깊이 전달되기를 바라지만 사실 알 수 없지. 결국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서 영화는 다르게 해석되니까.
영화와 잠시 거리를 두고 당신이 걸어온 자취에만 집중한다면,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싶나.
시작하는 단계부터 내 철학은 명확했다. 나무가 자라려면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세종대왕의 가르침 아닌가. 뿌리, 즉 언더그라운드 육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 K-컬처가 생명력을 이어 가려면 독립영화 창작자와 관련 사업에 투자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걸 간과한다면 기억에 오래 남는 작품을 만들어 내는 데 한계가 온다. 한국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이목을 끄는 일? 일시적으로 반짝할 수야 있겠지만, 언더그라운드와 인디펜던트 인더스트리를 단단하게 다지지 않는 이상 길게 보긴 어렵다. 기업도 그렇지 않나. 삼성이라는 거대한 기업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중소 협력업체가 건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삼성이, 또 국가가 정책적으로 지원에 나선다. 영화도 똑같다. ‘킴스’는 정부나 어떤 관련 기관보다 그 역할을 충실히 해왔던 거다. 30년 가까이 노력했는데 허망하게 무너져서 아쉬울 따름이다. <킴스 비디오>가 세상에 나온 것을 계기로 사람들이 이러한 메시지를 공유하면 좋겠다.
최근 살레미와 다시 손잡고 ‘씨네 킴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어떤 영화제로 성장했으면 하나.
페스티벌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 현재 한국도 그렇지만 유럽 국가 대부분이 비슷한 문제를 앓는다. 지역 소도시에 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떠나고, 유럽 특성상 국가 간 이동도 잦다. 결국 소도시에는 노인들만 남게 되는 거다. 살레미 청년들 몇몇이 의기투합해서 연락을 줬더라. 영화제를 열 계획인데 나를 활용하고 싶다고. 내 조건은 딱 2개였다. 첫 번째, 영화제 이름에 꼭 ‘킴’이 들어가야 한다. 두 번째, 프로그램 콘셉트는 귀향의 여정을 뜻하는 오디세이로 하자. 고향을 떠난 청년들, 혹은 부모 세대를 따라서 다른 곳으로 이주한 청년들이 돌아오며 순환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당분간 기틀을 다지는 데 집중하면서 규모를 차근차근 확장하려고 한다. 영화제가 주목받고 펀딩이 성사되면 시나리오 공모라든지 제작 지원 등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올해 2회 영화제를 개최했고 내년에 열릴 3회 영화제를 준비하고 있다. 영화제는 7월 마지막 주에 시작해서 8일간 계속된다. 홈페이지(https://www.kimsvideosalemi.com)에서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나도 물심양면으로 노력하는 중인데 특히 해외 국가의 협력과 공조를 요청하는 데 애쓰고 있다. 내년에는 더 많은 국가를 설득해서 다양한 창작자와 영화를 초대하고 싶다. 유럽 내 모든 소도시가 이 영화제에 함께하기를, 서로 연계해서 지역을 돕는 운동으로 이어지기를 꿈꾼다.
사업 형태는 달라졌으나 가치는 여전하다는 점에서 결국 ‘킴스 비디오’가 영화제로 부활한 느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겠지만, 가능하면 유능한 한국 청년들과 더불어 일을 키워 나가고 싶다. 자신 있게 제안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개런티다. 당장 청년들에게 보상을 약속할 만한 상태가 아니다 보니 주저하는 거다. 내 라이프 스토리를 픽션으로 제작할 계획이다. 현재 시놉시스와 제안서를 여기저기 돌리며 제작자를 찾고 있다. 꽤 재밌을 것 같다. 스토리 자체도 굴곡이 많고, 로케이션만 해도 한국, 미국, 이탈리아 등 다채롭지 않나. 이 계획을 현실화해서 수익을 만들어 낸다면 개런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 영화제라는 조그마한 플랫폼을 토대 삼아 한국 청년들과 작업하며 파이를 키워 나가고 싶다.
사업 종료하고 뉴욕타임스와 인터뷰했던 그날로 지금 되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말하겠나. “난 그저 잊히길 바랄 뿐이다. 실패자니까.”
그래야 하지 않을까. 뭔가를 시작한다면 새로운 비전을 가진 청년들이 주체가 되어 나서야지, 노인네가 그 앞을 막고 있으면 되겠나. 나보다 훨씬 참신하고 생산적인 청년들이 등장할 거다. 사업 방식과 모양은 바뀌겠지만 ‘킴스’의 콘셉트는 계승될 수 있다고 본다. 비디오라는 매체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비디오 제너레이션은 분명히 끝났다. 다만, 그다음의 매체가 무엇이 될지는 청년들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들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이끌어 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