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도 이름도 낯선 ‘듣보인간’들이 카메라 앞에 모여 외친다. “우리 대박 날 것 같아! 우리 다 떠야지!” 대체 이들이 꿈꾸는 대박이란 무엇이며 또 어디로 뜨겠다는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말들이 추임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가라앉는 기미가 보일 때마다 이들은 반대로 말하며 기합을 불어넣는다. 애초 머나먼 미래를 상상하면서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권하정과 김아현은 소규모 공연에서 싱어송라이터 이승윤을 만난 후, 무작정 그를 찾아가서 뮤직비디오를 찍자고 제안했다. 그가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기 1년 전 일이다. ‘무명가수’ 이승윤은 단어를 고르고 골라 긴 답장을 썼고 그때부터 듣보인간과 무명가수는 서로 팬을 자처하며 한 팀이 됐다. 밖에서 보면 ‘덕업일치’의 근사한 예인데, 뮤직비디오든 노래든 좋아서 하는 일에는 생각보다 고비가 여러 번 찾아왔다. 두 감독은 명암을 마주하며 우왕좌왕하는 여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그 사이 ‘최애’는 스타가 되는 기적을 이뤘고 권하정과 김아현은 '생존 신고'를 거하게 치르며 관객과 만날 준비를 마쳤다. 대책 없는 낙관과 뭐라도 붙들어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았을까. 둘이 밤을 새워 가며 만든 <영웅수집가> 뮤직비디오의 유튜브 조회수는 약 170만 회. “그 정도면 초대박”이라는 둘에게 또 다른 대박을 꿈꾸냐고 묻자, 예상외로 군더더기 없는 답변이 돌아온다. “이제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어요.”
내용에 비해 제목이 다소 방어적이다.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라기엔 큰일을 벌였는데.
권하정_ 영화과를 나왔는데 한동안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에서 내 이미지가 ‘영화 안 하는 애’로 굳어지더라. 하루는 학교 선배를 우연히 만났는데 이런 얘기를 들었다. “너 영화 안 한다더니 살아있었네?” 자격지심인지 모르겠지만 속으로 따졌다. ‘뭐 영화 안 하면 죽는 거야?’ 그러다 다큐멘터리를 시작했고 문득 생존 신고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왜 방어적이라고 했는지 알겠다. 다만, 우리가 이런 일을 해냈다고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끼리 소소하게 영화를 만들어봤는데 한번 봐주세요”라는 느낌으로 지은 제목이다. 그래봤자 아무도 우리를 모를 거란 생각에 ‘듣보’라고 칭했고.
김아현_ 대학 동기로 만났는데 하정이가 한 살 언니다. 언니에게 제목을 처음 듣자마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우리 영화와 색깔이 잘 맞는 것 같더라.
권하정_ 덧붙이면 내가 좀 자조적인 스타일이다. “이걸 만들어도 누가 보겠어. 누가 좋아하겠어.” 반면에 아현이는 훨씬 긍정적이다. “이거 될 것 같아. 사람들이 좋아할 거야.” 물론 속마음이야 다르지 않다. 나도 영화가 잘 됐으면 좋겠고 공감을 얻길 바란다. 근데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오지 않을까 봐 안 좋은 쪽을 먼저 상상한다.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까.
방금 속마음이라고 표현한 것,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구와 에너지가 영화에도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제목이 내숭처럼 들리더라. 영화를 찍으면서 특정 관객을 상상해 본 적은 없나.
권하정_ 솔직히 대상을 정해놓고 작업하진 않았다. 누구한테 보여주자는 마음은 아니었는데 굳이 꼽자면 나인 것 같다. ‘나 여기 살아있다’라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김아현_ 뮤직비디오가 정확한 목적과 형식을 지닌 프로젝트라면 다큐멘터리 제작은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에게 달려 있었다. 최종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마감 기한이 필요했다.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해서 영화제에 출품하자.” 본래 부산국제영화제가 목표였는데 편집 기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서울독립영화제에 처음 출품했다. 어떻게 보면 영화제, 그리고 영화제 관객을 바라보며 영화를 마무리했던 것 같다.
스스로 자조적이라고 표현했듯 하정 감독은 영화 속에서도 주저하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 그렇듯 겁 많은 사람이 제 발로 낯선 뮤지션을 찾아가서 뮤직비디오 제작을 제안하다니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나.
권하정_ <무명성 지구인> 뮤직비디오를 만들 때까지만 해도 우리끼리 하는 작은 활동에 가까웠다. 승윤 씨에게 그 영상을 전달하는 상황까지 염두에 둔 건 아니었고, 노래가 좋으니 당장 뭔가를 만들어 보자고 합심했던 거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늘 그런 편이다. 먼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지금에 초점을 맞춘다. ‘지금 뭘 하면 될까?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큰 고민 없이 노래와 가장 어울릴 만한 영상을 만드는 일에 푹 빠졌다. 그러다 승윤 씨에게 영상을 전해주러 갔던 날, 현실감이 확 오면서 무서워지더라. 영화에 자세하게 나오진 않는데 그날 정말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 했다. 승윤 씨는 공연 마치고 맥주를 마시던 중이었고 내 뒤에선 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하고 내가 누군지 소개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입이 안 떨어져서 그냥 뮤직비디오가 담긴 USB와 선물을 무턱대고 건넸다. USB를 파일에 붙여 갔는데 승윤 씨가 되돌려주더라. 내가 실수로 소지품을 줬다고 생각한 거다. 전혀 용감하지 않았고 지금도 떠올리면 부끄러운 기억이다. 친구들한테 그날 내 모습에 관해서 얘기하지 말라고 한다. (웃음)
김아현_ ‘듣보인간3’으로 등장하는 (구)은하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언니가 난처해하는 것이 보여서 처음엔 나랑 은하가 같이 가주겠다고 했는데 언니가 그러더라. “내가 할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오겠다는 말로 들려서 믿고 기다렸다.


뮤직비디오도 다큐멘터리도 둘에게 첫 작업이었다. 하나만도 벅찼을 텐데 두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했던 이유는?
김아현_ 뮤직비디오 제작비를 지원받고자 공모전을 알아봤다. 15분짜리 숏폼 영상을 만들어야 했는데 기왕 이렇게 됐으니 뮤직비디오 제작기를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우리 모습을 남겨 놓자는 욕심도 났고. 그렇게 시작하긴 했는데 당시 다큐멘터리 촬영에 집중하긴 어려웠다. 뮤직비디오 만드는 일에 온 신경을 쏟는 상태였으니까. 결국 앵글이니 뭐니 고민할 겨를없이 카메라를 거치해 놓고 내버려 뒀다. 덕분에 우리 일상이 날 것 그대로 찍혔다.
공동 연출자로서 역할 배분은 어떻게 했나.
권하정_ “이건 내가, 그건 네가” 하는 식으로 나누진 않았다. 그냥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함께했다. 편집의 경우, 다큐멘터리는 같이 했고 뮤직비디오는 외부에 맡겼다. 뮤직비디오 촬영장에서는 내가 임의로 감독 역할을 맡았다. 여러 명이 감독 포지션에 있으면 혼란스러울 것 같다고 판단해서 일단 슛을 외치는 사람을 나로 정해 놓는 정도였다. 다 같이 상의하면서 만들어 간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정 감독이 아이패드를 들고 다니며 끊임없이 메모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전체적인 틀을 잡고 일정을 조율하는 것은 하정 감독의 몫이었던 듯한데.
권하정_ 내가 불안도 높은 INFP라서 그렇다. (웃음) 이야기를 마친 후에도 자꾸 확인하려고 한다. 이미 구상도 끝났고 그냥 하면 되는데 또 얘기하거든. “이렇게 하면 되겠지? 진짜 될까?” 그때마다 아현이가 “언니야 된다니까~” 하면서 다독여 줬지.
학교 들어가자마자 친해졌나.
김아현_ 전혀 아니다. 그룹 자체가 달랐다. 언니는 당시 총대였고 나랑 은하는 총대 말을 안 듣는 ‘아싸’ 중의 ‘아싸’였거든.
권하정_ 총대는 과대 같은 역할인데 여기서 반전은 내 희망 사항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신입생들 모이는 자리에 일찍 도착했더니 선배들이 “네가 총대 하면 되겠다”라고 해서 얼렁뚱땅 수락했다. 내향적인 성격 탓에 쉽지 않았지만 어쨌든 해야 하는 일이니 열심히 했다. 학기마다 영화과 학생 모두 참석해야 하는 자리가 몇 개 있는데 아현이는 매번 나타나지 않았다. 연락하면 말은 또 착하게 한다. “언니야 이번엔 꼭 갈게!” 근데 아니나 다를까, 가보면 또 없고. (웃음)
왜 그렇게 총대를 애태웠나.
김아현_ 여럿이 모여서 북적대는 분위기를 못 따라가겠더라. 지금보다 사회성도 없었고 이상하게 학교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1학년 여름방학에 은하랑 같이 유학원에 갔다. 한국은 아닌 것 같다면서 우리 미국으로 가보자 했지. 결국 아무도 미국에 안 갔지만. (웃음)
권하정_ 아현이랑 비슷한 시기에 휴학하고 부산을 떠나 서울살이를 시작하면서 가까워졌다. 아현이는 소품실에서 일했고 나는 FD로 일했던 무렵인데 힘드니까 자주 만났다. 복학하고 나서 작품도 같이 했다. 하필이면 작품이 좀 힘들었다. 촬영 끝나고 대관한 집을 원상복구 해놓아야 했는데, 어느새 다들 도망가고 우리만 남았더라. 하수구가 막혀서 손으로 일일이 쓰레기를 걷어냈다. 문득 엄마가 보면 슬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얘기했더니 아현이가 “이런 모습은 절대 못 보여드리지”라고 하더라. 그 순간 아현에게 마음이 열렸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끝까지 남아있는 친구이기도 했고.
김아현_ 나도 사람에게 경계심이 많은 편인데 한번 마음을 열면 확 연다. 언니한테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계기는 없지만 언니와 비슷한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시간이 그만큼 쌓였던 덕분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에 하정 감독의 인터뷰 장면이 나온다. 이승윤의 팬이 되고 뮤직비디오 작업을 결심한 2018년이 유난히 힘든 해였다고 말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을까. 처음 만든 <무명성 지구인> 뮤직비디오를 보니 당시 감독이 겪었다는 괴로움은 외로움 또는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한 불안과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에서 원동력을 찾아낸 과정이 궁금하다.
권하정_ 학교를 졸업한 다음이었다. 그 시기를 얘기하려고 하니 또 복받친다. 모든 것이 내 곁을 떠나가는 듯했다. 가족과 친구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없는 곳에 혼자 남겨진 느낌이었다. 같이 살던 강아지가 아팠고 종일 간호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의식조차 없는 강아지를 지켜보는 것이 힘들었는데 걔를 집에 두고 외출할 용기도 없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불안정하게 흘러갔다.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구나, 전부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어쩔 줄 모르겠더라. 룸메이트였던 친구와 갑자기 사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다 떠나고, 멀어지고, 아프고. 당시엔 그 상황이 지속될 거란 생각에 사로잡혔다. 지금은 비슷한 일을 겪어도 이겨낼 힘이 있는데 그 무렵에 나는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보며 너무 커다란 압박감을 느꼈다. 사실 그해를 기억하려고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별로 없다. 그냥 집에 누워만 있는 내 모습이 그려질 뿐이다. 그러다 아현이에게 연락을 받았다. 서울에서 자기 작품을 상영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하더라. 에너지가 없는 상태였는데 신기하게도 아현이를 응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아현이를 따라갔다가 승윤 씨까지 알게 됐다.
김아현_ 원래 매일매일 연락하는 사이였는데 그 시기에는 그냥 기다렸다. 뭐하냐, 괜찮냐, 수시로 묻고 확인하면 언니에게 더 부담만 줄 것 같더라. “난 항상 이 자리에 있어”라는 마음만 전달하기로 했다. 답이 천천히 오면 오는 거고, 안 오면 안 오는 거라고 여겼다.
아현 감독도 그날 이승윤이라는 뮤지션을 처음 만났다. 하정 감독처럼 단번에 마음이 가던가.
김아현_ 처음엔 아니었다. 내게는 말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나쁜 남자’ 이미지였다. 근데 언니를 위해 사진 한 번만 같이 찍자고 부탁했다. 웃긴 건 내가 언니랑 승윤 씨를 찍어줘야 하는데, 정작 언니가 우리를 찍어줬다는 거다.
권하정_ 아현이가 찍어준다고 했어도 극구 사양했을걸. 얘가 승윤 씨에게 다가갈 때부터 난 뒷걸음질 쳤다.
김아현_ 나도 엄청나게 떨렸는데!
권하정_ 승윤 씨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이렇게 사진 찍어도 어차피 제 노래 안 들으실 거잖아요.” 우리가 막 아니라면서 손사래를 쳤지.
김아현_ 나중에 처음 만난 날을 얘기했더니 승윤 씨도 기억하더라. 그날 공연과 길에서 사진 찍었던 일들. 난 승윤 씨의 엄청난 팬이어서기보다 언니랑 같이 작업한다는 데 좀 더 의미를 뒀다. 평소엔 그리 대범하지 않은데 언니와 함께라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하정_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얘 대범하다. 뭘 제안해도 “그래, 좋아!”하는 예스맨이다.
김아현_ 그래서 언니는 더 걱정했단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는 걸까 봐.
이승윤을 좋아하는 이유로 노랫말을 자주 꼽더라. 특히 어떤 가사가 그토록 와닿았나.
권하정_ <무얼 훔치지>에 이런 가사가 있다. “선반에 숨겨놓았던 후회를 하나둘 꺼내서 읽으려다 말았어. 거의 외웠으니까.” 당시 내 모습이 딱 그거였다. 누워서 나쁜 생각만 하고, 이것저것 후회하고. 동족을 발견한 듯 친밀감을 느꼈던 동시에 창작자로서 부럽기도 했다. 나는 그 마음을 영화로 표현할 수가 없는데 이 사람은 노래로 해냈구나. 어떻게 했을까.


영화에서 보여준 관계 맺기 방식도 독특하다. 팬심으로 모든 일을 벌인 것처럼 설명하지만, 막상 작업을 시작한 다음부터는 사적 감정을 뺀 채 대하더라.
권하정_ 선을 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자칫 작업을 핑계로 친해지려는 사람처럼 느낄까 봐 걱정스러웠다. 의심받고 싶지 않아서, 내 창작물을 존중받고 싶어서 거리를 지켰던 거다. 물론 창작자이자 또래로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최근 시사회에서 승윤 씨를 오랜만에 만났다. 1년 사이에 참 많은 것이 달라졌는데도 여전히 나와 비슷한 데가 있구나 싶더라. 승윤 씨는 코어가 훨씬 단단한 사람이고 내가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방향은 조금 알 것 같다. 큰 변화를 겪는 와중에도 핵심을 유지한다고 해야 할까. 승윤 씨가 지킨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난 이걸 지키려고 해.” 세상을 살짝 삐뚤게 바라보고 자조하면서도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김아현_ 난 시사회에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 다른 세계의 사람이구나.
어떤 면에서 다르다고 느끼나.
김아현_ 승윤 씨나 나나 각자 지향하는 삶의 모습이 있다. 근데 그렇게 살도록 세상이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느낀다. 여기까지는 비슷한데 그다음이 다르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난 세상이 어떻든지 내 식대로 살겠다고 마음먹은 쪽이다. 그냥 다정하고 따뜻하게 살고 싶다. 누군가는 편협하다거나 미성숙한 태도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둘도 참 다르다. 친한 친구와는 같이 일하지 말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는데, 영화만 보면 둘 사이에 이렇다 할 갈등이 없더라. 상황이 워낙 촉박하다 보니 서로 서운함을 느끼거나 불만이 터져 나올 만도 한데.
김아현_ 일하면서 싸운 적은 없다.
권하정_ 근데 기자회견에서 싸웠다고 말했잖나.
김아현_ 한 기자가 우리가 아예 싸운 적이 없다고 받아들이기에 정정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진솔하게 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했던 말인데 언니는 당황했을 수도 있다. 여느 때처럼 작업하다가 새벽 3시를 넘겼던 날이다. 언니가 이제 그만하고 내일 보자고 하더라. 그 말이 빨리 가라는 것처럼 들려서 좀 다퉜다.
일에서 맞닥뜨린 난관은 뭐였나.
권하정_ 카메라를 거치해 놓고 찍으니 한 클립이 40분~1시간 정도였다. 게다가 회의하는 장면이 대부분이라서 편집 방향을 잡기가 어려웠다. 너무 우리만 아는 얘기 같더라. 뮤직비디오를 못 본 관객이 과연 이 대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 어느 부분을 영화에 넣어야 하지? 디데이를 표기할지 고민하기도 했는데 소스가 뒤죽박죽이라서 애매했다. 결국 스토리 중심으로 구성안을 짰다. 우리가 재미있게 작업하는 모습과 험난한 시련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면 관객도 어느 정도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겠더라.
김아현_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처음이기에 편집 방향부터 확실히 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각자 원하는 스타일이 달라서 시간이 좀 걸렸다. 컴퓨터 한 대를 놓고 하루는 언니가, 다음 날은 내가 편집하며 점점 결을 맞춰 나갔다.
스타일이 어떻게 다른가.
김아현_ 언니는 정돈되고 짜임새 있는 영화를 원했다. 나보다 진지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반면에 난 지루하지 않도록, 사람들이 좀 더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발랄한 톤을 만들고 싶었다. 편집에만 10개월 정도 걸렸다. 서로 편집본을 주고받으며 에피소드 하나하나 검토했다.
권하정_ 얼추 마무리했다고 여겼는데 다음 날 가면 아예 판이 바뀌어 있는 거다. 내가 빼놓은 에피소드를 도로 집어넣고, 기껏 정성 들여 만져놓은 걸 고쳐버리고. 대체 왜 이러나 싶었는데 재밌게도 아현이가 만든 흐름이 나쁘지 않더라. 덕분에 긴 시간 작업하면서도 거듭 새로운 시각으로 촬영본을 볼 수 있었다.
3년 전 모습이 담긴 영화를 보면 어떤가. 그때와 지금의 ‘나’는 분명히 달라진 부분이 있을 텐데.
권하정_ 제삼자처럼 보게 되더라. 오래전 사진첩을 펼쳐본 듯 당시 감정이 떠오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저만큼 도전적이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날 원래 그렇다고 생각할 텐데 아니거든. 영화 속 우리가 반짝반짝해 보였다. 저 때로 돌아가서 다시 하라고 그러면 못 할 것 같다.
김아현_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다 알면서 다시 하는 건 힘들지. 몰랐으니 무모하게 도전했던 것 아닐까. 나도 언니랑 비슷하다. 조금 거리를 두고 보게 된다. “나다!”가 아니라 “김아현이네?”라는 느낌. 다들 최선을 다했구나 싶고. 근데 말하다 보니 걱정된다. 과거와 현재의 우리를 나란히 마주했다가 관객이 실망하면 어떡하지? 우리에게야 3년 전 모습이지만 관객에게는 2시간 전 아닌가.
권하정_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20대를 마무리하는구나 생각했는데 안 끝난다. 영화제, 개봉, GV, 인터뷰 등 계속 이어지고 있다. (웃음)
이승윤이 왜 이렇게까지 해주냐면서 고마움을 표현하자, 감독은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잖아요”라고 답한다. 요즘에는 어떤 일을 하고 싶나. 새로운 관심사나 목표가 생겼는지 궁금하다.
권하정_ 뮤직비디오나 <듣보인간의 생존신고>처럼 짜릿한 일은 잘 모르겠다. 영화와 영상을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긴 하다. 개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많이 배우고 있거든. 우리가 홍보 영상을 직접 만들어서 공개했는데 재밌더라.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됐다.
창작에 즐거움과 보람을 느낀다는 뜻인가.
권하정_ 만드는 재미도 재미이지만,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얻는다. 배급, 홍보, 극장 등 영화 한 편을 개봉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정말 많다. 그분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 벅찬 울림을 느꼈다. 경이롭다고 해야 하나. 더는 우리 영화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달리 말하면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보다 우리라고 부를 사람들이 훨씬 늘어났다. 차기작에 관해 질문받으면 잘 모르겠다고 답하곤 했는데 요새는 영화를 좀 더 잘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김아현_ 아직 난 언니처럼 생각을 정리하진 못한 것 같다. 고민하는 것 중 하나는 보답이다. 언니가 말했듯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 마음을 받은 만큼 주고 싶은데 어떤 형태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 차차 풀어 가야지. 당장 하고 싶은 건 등산이다. 가을이 빨리 오면 좋겠다. 산에서 햇빛도 받고 바람도 느끼고 싶다.


혹시 극영화 연출 계획은 없나.
권하정_ 최근에 시나리오를 썼다. 배급사 시네마 달 김일권 대표님이 푸시해 줬다. 시나리오를 써보라며 마감 기한을 정해준 거다. 데드라인 없이 혼자 글을 쓰기란 어렵지 않나. 성인이 되고 나서 맞닥뜨린 가장 큰 공포가 그거였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 대표님이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다. 당장 정해진 계획은 없지만 이번 과정을 계기로 에너지가 생겼다. 나 쓸 수 있는 사람이구나, 안 써서 그렇지 나도 할 수 있구나.
김아현_ 본래 영화라는 매체보다 글에 관심이 많다. 영화과 재학 시절에는 모든 글이 무조건 시나리오가 되어야 했고, 영화로 만들어져야 했다. 이제 그런 목적을 떠나서 글을 쓰고 싶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일단 짧은 글을 완성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대표님께 제안받고 나 역시 감사했다. 다만, 누가 운을 떼서 시작하는 것과 스스로 마음이 우러나와서 시작하는 것은 다르지 않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매번 어려웠는데 이번에는 해보고 싶다.
어떤 창구를 통해서든 다시 만나면 좋겠다. 둘의 협업도 기대되고.
김아현_ 근데 오늘 말을 잘했는지 모르겠다. 내 말은 인터뷰에 거의 못 쓸 것 같은데. 마음이 앞서다 보니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조리 있게 얘기를 못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너무 진심이라서 적당히 표현할 방법을 못 찾겠다. 글이 편한 이유가 있구나 싶고.
큰마음을 작게 잘라내서 말하기가 어려운가 보다.
권하정_ 좋은 말이다. 다음에 써먹어라. “저는 마음이 커서 작게 자르기가 어려워요.”
김아현_ 언니는 은근히 남을 웃기려고 노력하는 면이 있다.
권하정_ 나도 과묵해지고 싶다. 그냥 멋있게 앉아 있고 싶은데 안 된다. 상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거든.
서로 부러워하는 데가 있겠다.
권하정_ 아현이는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 근데 난 주저하다가 그 마음이 없어진다. 어쩌다 마음을 실천해도 너무 주저했던 터라 임팩트가 없다. 아현처럼 넉살 좋게 타인을 대하거나 분위기를 띄우지도 못한다. 아현이 따라했다가 한 번씩 ‘현타’ 온다. 분위기를 살리기는커녕 흑역사만 쌓이고.
김아현_ 날 부러워한다니 신기하다. 언니는 내게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권하정_ 그렇다기엔 내가 한 게 없는데. 이 자리에서 진실을 고백해야겠다. 얘가 자꾸 날 그런 사람으로 봐줘서 내가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썼던 거다. 이렇게나 믿어주는데 실망하게 할 수가 없더라. 아현이는 입버릇처럼 “언니는 다 알잖아”라고 말한다. 아니거든. 내가 다 알 리가 없다. 근데 아현이를 보면 노력하게 된다.
김아현_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웃음)
권하정_ 아현이가 어딜 가든 내 자랑을 하는 바람에 난감한 적도 많았다. “하정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아세요? 이것도 잘하고요, 저것도 잘한다니까요.” 처음엔 웃으면서 조용히 말렸는데 나중엔 ‘쟤 혹시 내 안티인가?’ 의심했다.
김아현_ 언니가 정색하더라. 근데 실제로 재능도 많고 인기도 많다. 기사에 동서대학교 12학번 퀸카 권하정이라고 적어줘라. 학교 선배들 전부 언니 좋아했거든.
권하정_ 다들 날 좋아했다니 말이 되나. 이제 난 아현이 다루는 법을 안다. 이럴 때 말을 그만해야 한다. 아니라고 달려들면 불난 곳에 기름 붓는 거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