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바리와 뱀파이어
<그녀의 취미생활> 정이서·김혜나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3-09-02

제목만 들으면 온화한 풍경이 떠오른다. 음악을 들으며 티타임을 즐기는 그녀, 햇빛에 말린 로브를 걸쳐 입은 채 정원을 돌보는 그녀. 물론 영화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 모든 풍경을 담는다. 다만, 꽃을 주고받던 두 여자가 어느새 총을 장전하고 등을 맞댄다는 점에서 ‘그녀의 취미생활’은 반전을 선사한다. 겁에 질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정인(정이서)은 생각보다 대범하고, 거침없이 마을을 누비는 이방인 혜정(김혜나)의 동공은 이따금 흔들린다. 둘은 삶을 되찾으려 힘을 합친다. 취향을 탐구하고 여가를 확보하는 가장 보통의 삶을 소원하며, 제거해야 할 대상을 뿌리 뽑고 안전을 위협하는 자에게 벌을 내린다. 기이한 결속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두 배우는 많이 울었다. 정이서가 연신 눈물을 흘리면서도 단정함을 잃지 않았다면, 김혜나는 평정을 되새기다가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덕분에 영화는 뜨거움과 차가움을 골고루 오가며 우아한 복수를 완성했다. 멀리 떨어져 손 인사만 어색하게 나누던 두 여자는 어쩌다 손을 맞잡게 됐을까. 나란히 앉은 정이서와 김혜나는 깔깔거리며 기억을 풀어 놓았다. 처음 만난 날, 김혜나 눈에 비친 정이서는 악바리였고 정이서 눈에 비친 김혜나는 뱀파이어였다. 근성도 목숨도 질긴 상대를 부드럽게 끌어안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은 듯했다. 정인과 혜정처럼 서로 이끌고 받치며 둘도 자유로운 곳을 향해 전진했다. 

 

 

'취미생활'부터 이야기해 보자. 정이서 배우는 얼마 전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더라.

정이서_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할 즈음 시작했다. 영화제에 카메라를 들고 가면 뭐라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 워낙 집순이라서 일상생활만 놓고 보면 콘텐츠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거든. 촬영은 매니저님에게 많이 도움받는데 편집은 직접 한다. 시간도 금방 가고 재밌다. 쉬는 날에 혼자 있으면 기분이 좀 가라앉는데 유튜브 시작하니 그럴 틈이 없다. ‘오늘 편집해서 완성하자’ 목표가 생기니까 집중력도 올라가고. 집 밖으로 안 나갈 이유가 하나 더 늘었지. (웃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배우상 받은 순간도 찍었던데. 

정이서_ 영화제 참석도 처음이었다. 생애 첫 영화제에서 수상이라니, 이래도 되나 싶더라. 유튜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작한 지 두 달도 안 된, 올 여름에 생긴 취미다.

 

honestly august, 인스타그램 아이디랑 유튜브 채널명이 똑같다. 8월이 각별한 달인가.

정이서_ 태어난 달인데 별 의미는 없다. 그냥 ‘어거스트’라는 어감이 좋다. ‘어니스트리’도 마찬가지고. 오래 쓴 아이디라서 유튜브 채널명도 통일했는데 친구들은 검색하기 어렵다며 자꾸 바꾸라고 한다. 한글로 ‘정이서’ 치면 나오게 하라고. 그러면 나도 친구들한테 조른다. “그냥 이렇게 하게 해줘~ 해줘~” (웃음) 

 

영상뿐만 아니라 사진도 찍는다. 촬영장에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고.

정이서_ 몇 해 전부터 필름 사진에 빠졌다. 무엇을 어떻게 찍었는지 바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매력이다. 휴대폰 촬영과 달리, 현상할 때까지 조마조마 기다리는 재미가 있다. 현장에 카메라를 가져간 건 비교적 최근이다. 바쁜 날엔 카메라를 꺼낼 정신도 없지만 여유가 생기면 스태프 사진을 찍는다. 현장에선 생동감 넘치는 사진이 많이 나와서 찍으면서도 즐겁다. 현상하면 기념 선물처럼 보내주기도 하고. 별거 아닌데 왠지 뿌듯하고 기분 좋더라. 

<그녀의 취미생활>
<그녀의 취미생활>

김혜나 배우의 SNS 프로필에는 짤막한 소개 글이 적혀 있다. 연기, 바다, 반려견을 언급했는데.  

김혜나_ 셋 다 중요하지. 서울을 떠난 지는 5년 정도 됐다. 본래 양양에서 살다가 동네가 번잡해져서 주문진으로 이사했다.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바다가 보인다. 오늘 강릉에서 오전 6시에 출발했다. 예전에는 서울 일정이 잡히면 전날 미리 출발했는데 요즘엔 그냥 당일에 온다.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고 출퇴근하듯 바로 움직이는 것이 훨씬 편하더라.

 

매년 다양한 영화제에 심사위원, 홍보대사, 사회자 등으로 참여한다. 영화제라는 공간, 영화와 동료를 향한 애정이 느껴진다. 

김혜나_ 영화제에 가면 개봉관에서 미처 만나지 못한 작품을 접할 수 있다. 수많은 배우의 보석 같은 연기를 감상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양분을 얻는다. 뒤풀이에서 술 마시고 노는 것도 재밌는데, 무엇보다 영화 공부하러 간다는 마음이 크다. 데뷔작 <꽃섬>(송일곤, 2001)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으면서 자연스레 영화제를 알게 됐다. 부산에 일주일간 머물면서 매일 영화를 봤고 다음 해부터는 초청작이 없어도 훌쩍 다녀왔다. 다른 배우들은 이 얘길 듣고 놀라워했는데 나한테 영화제 방문은 딱히 어렵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좋아하는 영화제가 몇 군데 생겼고 가능하면 매년 놀러간다. 서울독립영화제 무대에 사회자로 오른 것도 벌써 10년 가까이 됐다. 

 

올해 직함이 하나 더 늘었다. 단편 <시기막질>을 연출하며 감독 데뷔했고,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도 다녀왔는데.

김혜나_ 조만간 국내에서도 상영할 예정이다. 춘천영화제와 섬진강영화제에서 초청받았고 올해 삼척에서 처음 개최하는 단편영화제에서도 연락이 왔다. 춘천영화제에서는 <그녀의 취미생활>도 상영한다. 같은 날 GV를 두 번 하게 됐다. 한 번은 배우로, 또 한 번은 감독으로. 

정이서_ 몇 시? 나도 그날 언니 영화를 봐야겠다.

김혜나_ 오전에 오면 볼 수 있다. <시기막질>을 먼저 틀거든. GV 끝나면 뒤이어 <그녀의 취미생활>을 상영하는 일정이다. ‘시기막질’은 심부름을 뜻하는 북한말이다. 어느 날 강원도에서 남북 관련 영화 혹은 영상을 만들어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주변에 영화인이야 많으니 그중 누구라도 하겠지 싶어서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다. 근데 친구며 선배며 다들 “네가 해”라면서 마감일이 다가와도 꿈쩍하지 않더라. (웃음) 결국 부랴부랴 시나리오를 썼다. 

 

연출에 오래전부터 흥미를 느꼈나.

김혜나_ 전혀 아니다. 제작에는 관심이 있고 실제로 기획PD 역할을 할 만한 좋은 소재를 찾는 중이다. 근데 감독은 꿈꾼 적도 없거니와 이번 기회를 통해 확실히 깨달았다. 이거 진짜 아무나 할 일이 아니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나리오라는 걸 쓰고 콘티를 그려봤다. 살이 쭉쭉 빠지더라. 그래도 촬영, 편집, 믹싱 등 옆에서 많이 도와준 덕분에 완성할 수 있었다. 잘 되면 은혜를 갚을 테니 이번만 도와달라고 했지. 영화 끝나고 쫑파티를 했는데 같은 동네에 사는 이현승 감독님이 응원하러 와주셨다. 스무 명 넘게 둘러앉은 모습을 보더니 툭 말씀하시더라. “야, 너 잘 살았다!” 

김혜나 ⓒ이영진

사진, 유튜브, 영화 등 둘은 결국 제 목소리로 이야기하려는 사람이고, 그러한 면이 <그녀의 취미생활>에 잘 녹아든 것 같다. 배우로서 보여줄 부분이 많은 장르여서 시나리오를 즐겁게 읽지 않았을까 싶은데.

정이서_ 어렵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정인이 어렵겠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지금껏 맡은 배역과 다른 점이 많은 캐릭터였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상황과 감정 속에 놓인 인물이다 보니 정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려낼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다. 근데 감독님이 처음부터 “이서 씨가 딱 정인이”라며 믿어주셨다. 덕분에 나도 믿음이 생겼던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겠구나.

김혜나_ 감독님께 그날 얘기를 들었다. 이서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빛이 나더란다. ‘이토록 사랑스럽고 밝은 이에게 어둠을 씌우면 어떻게 달라질까?’ 생각하며 기쁘셨다고. 감독님은 그 순간 정인의 본모습을 봤던 거다. 생기 넘치고 반짝반짝 빛나는 여자. 영화는 결국 정인이 어둠 밖으로 나와서 빛을 회복하는 여정을 담는다. 그런 면에서 이서 특유의 에너지가 정인에게 잘 스며든 것 같다. 한편, 나도 이서와 비슷한 지점에서 고민했다. 혜정 같은 캐릭터를 맡아본 적이 없어 걱정이 앞섰다. 그간 연기했던 인물은 주로 정인에게 가깝다. 맞고, 당하고, 죽고. 그런 역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이제 맞는 연기도 진짜 잘한다. (웃음) 내게 익숙하고 쉬운 쪽이 정인이라면 혜정은 낯설고 어려운 인물이었다. 감독님께 털어놓았더니 명쾌하게 말씀하시더라. 혜나 씨는 당연히 혜정도 될 수 있다고.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시골 마을이 배경이다. 실제 촬영지는 어디였나.

정이서_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일단 정인 집은 파주, 혜정 집은 양양. 그리고 포천도 갔지?

김혜나_ 호수 장면을 포천에서 찍었다.  

 

영화에서 혜정과 정인의 집은 비밀 정원을 사이에 둔 채 위아래에 위치한다. 정인은 올려다보고 혜정은 내려다보는 구조가 독특한데 현장에서는 나눠서 찍은 건가.

김혜나_ 아예 다른 곳이니까. 서로 바라보는 장면을 찍을 때마다 이서나 나나 시선 맞추느라 고생했다. 

정이서_ “좀 더 위를 볼까요? 얼마나요?” 허공을 보면서 높낮이를 조정한다는 게 만만치 않더라. 정인 집 장면을 먼저 찍고 후반부에 혜정 집으로 넘어갔다. 너무 행복했다. 내 집과 다르게 쾌적하고 에어컨도 틀 수 있고. (웃음) 정인 집이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서 촬영하며 내심 힘들었는데 막바지에 호강했다.

 

의상도 대조적이다. 혜정은 마을을 들썩이게 할 정도로 화려한 차림인데, 정인은 전반부에 거의 단벌 차림으로 등장한다. 대체 저 낡은 체크 셔츠를 언제 벗을까 싶더라.

김혜나_ 얘가 일단 할머니 집으로 올 때부터 짐이 없다. 요만한 시장바구니 같은 데다 당장 필요한 것만 대충 챙겨 왔으니 옷이 많을 리가 있나. 

정이서_ 감독님이 들려주신 비하인드 스토리를 덧붙이면 정인은 일부러 그 셔츠를 고른 거다. 등에 난 흉터를 감추려고 항상 목까지 덮는 옷을 입는다고 하더라. 

 

영화는 두 인물의 대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흔히 여성을 빗대는 동물, 토끼와 여우 같은 이미지를 보여주다가 갈수록 전형성을 배반하더니 마지막엔 보란 듯이 순백의 전사로 변신하더라.

정이서_ 흰색 원피스를 보고 나선 솔직히 당황했다. 사람을 죽이러 가는데 흰옷을 입는다고? 현실적으로 너무 위험하지 않나. 이렇게 눈에 띄는 차림으로 가다가 도중에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고. 

김혜나_ 얘가 불편하면 손을 꼼지락거리는 버릇이 있다. 옷을 입고 난 다음에도 밑단을 연신 만지작대더니 나한테 묻더라.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정이서_ 결국 언니와 함께 감독님을 찾아가서 여쭤봤고 30여 분 대화를 나눈 끝에 납득했다. 감독님은 해당 장면에 깃든 환상성을 설명하며 정인과 혜정이 의식을 행하는 의미로 흰색 원피스를 입는다고 말씀하셨다.  

정이서 ⓒ이영진

그 순간 둘은 살인자가 아니라 제사장이니까.

김혜나_ 말한 대로 심판관처럼 보여야 했다. 다만,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고 해도 감독님에게 이유를 듣고 제대로 설득당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안 그러면 촬영하면서도 민망할 듯했거든. 

 

혜정의 헤어와 스타일 또한 감독 아이디어였나.

김혜나_ 여러 차례 상의했다. 헤어는 얼마나 밝게 염색할지, 웨이브는 얼마나 넣을지 사진을 주고받으며 세세하게 맞췄다. 의상의 경우, 콘셉트는 단순명료했다. “무조건 예쁘게!” 근데 그거야말로 진짜 어려운 거 알지? 의상 팀장님이 내 인스타그램을 일일이 뒤져가며 나에게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아냈다. 실제로 혜정 의상 중에 개인 옷도 꽤 섞여 있다. 매일 골치 아팠다. 오늘은 혜정을 어떻게 입혀야 하나 싶어서.

 

혜정과 정인이 꽃무늬 원피스를 맞춰 입은 장면도 떠오른다. 옷도 옷인데 줄곧 혜정을 뒤따르던 정인이 처음으로 앞장서서 걷는 장면이라서 기억에 남는다.

김혜나_ 영화 속에 숨겨 놓은 설정이 많다. 심지어 그 장면에서 정인이 제한 금지구역으로 들어가지 않나. 감독님과 대화를 엄청나게 나눴다. 누가 먼저 걷는지, 문을 닫는지 열어둔 채로 떠나는지. 서로 아이디어를 공유하다가 일단 얘기 나온 것들 전부 찍자고 했다. 어떤 버전을 사용할지는 나중에 감독님이 편집실에서 고민하시라고. (웃음)

 

영화는 직접적으로 공포감을 선사하거나 폭력을 묘사하는 대신에, 은유와 함축을 통해 뉘앙스를 전달한다. 긴장을 유지하며 정인의 선택을 설득해 가는 과정에서 정이서 배우의 집중력이 돋보인다. 

정이서_ 최대한 구체적으로 상상하려고 했다. 나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고 싶을까? 대사 없이 표정과 움직임으로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장면이 많아서 어렵더라. 일단 날 관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얼굴 근육을 어떻게 쓰는지 모르니까.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며 연습했다. 녹화본을 돌려보며 하나씩 다듬었는데 나중엔 휴대폰 저장 용량이 모자랄 정도였다.

 

대사는 적지만 묵직하다. 둘 다 입만 열면 명대사를 내뱉는다. (웃음) 일례로 정인의 상처를 마주한 혜정은 딱 한 마디 한다. “난 지지 않아.” 자칫 부담스럽게 들릴 대사인데 위화감 없이 다가오더라. 

김혜나_ 할 말이 많은 장면이다. 당시 연기하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바람에 그 대사를 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됐다. 정인이 수건을 내리고 등에 난 칼자국을 보여주는데 속에서 뭔가 확 올라오더라. 실제로 흉터를 처음 봤던 순간이기도 하다. 분장이란 건 알지만 이미 혜정으로서 정인을 바라보는 상황이다 보니 충격이 컸다. 첫 테이크를 찍고 나서 감독님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어요. 여기서 혜정이는 울면 안 되니까 감정 좀 식혔다가 담백하게 갈게요.” 숨 한 번만 잘못 쉬어도 울 것 같은 상태에서 억지로 감정을 누르며 다시 찍었다.

김혜나 ⓒ이영진

정인과 혜정의 결속을 놓고 보면 내적 동기가 궁금한 쪽은 혜정이다. 등장할 때부터 정인은 폭력에 못 이겨 달아난 모습인데, 혜정은 이미 폭력을 건너온 사람처럼 보인다. 정인에게 손을 내민 이유에 관해서도 끝내 미스터리를 간직한다. 배우는 그 부분을 어떻게 해석했나.

김혜나_ 혜정이 왜 이곳에 왔을까? 어쩌면 혜정도 숨을 곳이 필요한 사람 아닐까? 그런 질문을 던지면서 영화에 드러나지 않는 인물의 전사를 짐작해 봤다. 혜정은 두 번 결혼했는데 남편이 모두 죽었다고 말한다. 감독님이 “그 대사에서 혜정이 눈물을 흘리는 것까지는 아닌데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치면 좋겠어”라고 하더라. 과거 혜정에게 벌어진 사건, 당시 공간과 상황 등을 상상하며 임의로 신 하나를 만들었다. 혜정은 정인보다 더한 일을 겪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근데 직진하는 성격이다 보니 남편과 싸웠고, 또 살아남았고. 내 눈에 혜정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벽을 쌓아서 여린 속내를 감추고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화가 나도 소리 지르지 않고 아무리 좋아도 마음 놓지 않는다. 아슬아슬하게 중간을 유지하며 달리는 여자, 혜정을 그렇게 정의했다. 동시에 혜정은 관찰자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구석구석 살피고 정인에게서 예전 제 모습을 발견한다. 자신과 닮은 면을 보니 자꾸 눈에 밟히고 신경 쓰이는 거다. 정인이 밭에 전동 가위를 몰래 숨기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정이 나지막하게 “찾았다”고 말한다. 여러 의미를 담은 대사인데 그중 첫 번째는 ‘얘도 나랑 같구나’ 아닐까. 긴 말이나 재고 따지는 과정 없이 서로 알아보는 관계라고 여겼다.

정이서_ 고통과 두려움, 분노에 이르기까지 정인의 내면에서 오만 감정이 소용돌이칠 듯했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과 악에 받쳐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할 텐데, 결국 할머니가 남긴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돌 것 같더라. “아무도 안 볼 때 확 꼬집어버려!” 다만,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물음표가 떠올랐을 거다. 그때 정인 앞에 혜정이 나타난다.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주는 유일한 조력자. 개인적으로 정인이 혜정으로 인해 180도 변화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인은 복잡한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길을 만들어 나간다. 전동 가위를 숨기는 장면도 영화엔 한 번만 나오지만, 감독님은 그게 처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정인은 오래전부터 가위를 수없이 떨어뜨리면서 덫을 놓았을 거라고. 

 

말하자면 혜정은 산전수전 다 겪어서 웬만한 일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슬아슬하게 중간을 유지하며 달리는 여자”를 표현하는 과정은 어땠나.

김혜나_ 사실 난 감정 기복이 심하고 표정도 잘 숨기지 못한다.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얼굴에 티가 난다더라.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다. 근데 혜정은 감정을 밖에 드러내는 타입이 아니다. 언짢은 상황에서도 웃으면서 할 말 다 하는 사람이고 기분이 상하면 평소보다 약간 차가워지는 정도다. 혜정을 연기하려면 자연인 김혜나가 차분해져야겠더라. 현장에서 까불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인들이 봤으면 깜짝 놀랐을 거다. 네가 장난을 안 친다고? 수다도 안 떤다고? (웃음) 널뛰는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혜정이 그냥 센 캐릭터에 머물거나 그저 그런 인물로 남을 듯했다. 아주 좁은 그래프 사이를 섬세하게 왔다 갔다 하는 과정이었다. 혜정이 아닌 내가 튀어나올까 봐 내내 조심했는데 한 번은 어쩔 수 없더라. 정인이랑 물놀이하는 장면. 촬영 전에 이서가 덜 젖게 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처음엔 살짝 물을 뿌리는 식이었는데 별로 신나 보이지 않는다는 피드백이 돌아왔다. ‘어떡하지? 나 이거 하면 진짜 잘할 수 있는데.’ 고민하다가 결국 이서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다음 신나게 놀았다. 

정이서_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젖었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느낌이었다. (웃음)

 

배우들이 언급한 <델마와 루이스>(리들리 스콧, 1993)를 포함해 <몬스터>(패티 젠킨스, 2003) <아가씨>(박찬욱, 2016) 등 여러 작품이 떠올랐다. 정인과 혜정이 신체적 거리를 좁히는 장면은 여성들이 나누는 우정에 연대감뿐만 아니라 에로틱한 친밀감도 섞여 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김혜나_ 나도 찍으면서 느꼈다. 여자친구 남자친구 같은 연애 감정이 아니라, 그냥 이 여자를 향한 무한한 사랑이 차오르는 순간이 있더라.

정이서_ 바닷가에서 둘이 손을 잡는 엔딩 장면은 사실 세 가지 버전으로 촬영했다. 손잡기, 손은 안 잡고 서로 바라보기, 혜정이 떠나고 정인 홀로 남기. 지난겨울에 언니랑 편집실로 놀러 갔다. 감독님이 어떤 장면을 골랐을지 우리도 궁금하고 기대됐다. 

김혜나_ 손잡는 버전이 가장 마음에 들었거든. 끈끈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멀리서 손 흔들며 인사했던 두 사람이 비로소 함께하는구나 싶고. 손 인사를 놓고도 우리끼리 엄청나게 고민했다. 단순한 제스처이지만 감정이 실려야 하고, 점차 가까워진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정이서_ 현장에서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대부분 시나리오 순서대로 촬영했다. 그러한 환경 덕분에 훨씬 수월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 나랑 언니도 영화 속 정인과 혜정처럼 차츰 친해졌다. 처음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다가 나중엔 손도 잡고. (웃음) 

 

둘에게도 복수하고 싶은 상대가 있나. 혹은 그런 마음을 원동력 삼아서 나아갔던 시기라든지.

정이서_ 배우가 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너처럼 숫기 없는 애가 어떻게 연기를 하겠냐며 말리시더라. 수업 시간에 발표도 못 할 만큼 내성적이었거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혼자 숨어서 울고. 부모님 얘기를 듣는데 오기가 발동했다. 복수심이라기보다는 스스로 극복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나도 할 수 있다고, 얼마큼 할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 연기 학원에서 공연을 올리게 됐다. 학원이라고는 해도 또 하나의 사회 아닌가. 경쟁이 치열했는데 운 좋게 오디션에 합격하며 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이때부터 진짜 영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필이면 아빠가 재직하시는 학교 내 소극장으로 공연 장소가 정해진 거다. 미치겠더라. 아빠가 연극을 보러 오면 어떡하지? 실망해서 더 반대하면? 어쨌든 공연 날짜는 다가왔고 아침 일찍 리허설을 마쳤다. 연습 장소로 돌아왔는데 피자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이게 다 뭔가 싶어서 어리둥절한 내 앞으로 학원 선생님이 씩 웃으며 오시더라. 알고 보니 아빠가 리허설을 몰래 지켜봤고 다 같이 먹으라며 피자도 보내주셨던 거다. 

정이서 ⓒ이영진

눈물 젖은 피자를 먹었겠다. 

정이서_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학원 선생님도 좋아하셨다. 부모님이 반대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터라 은근히 마음을 쓰셨거든. 돌이켜보면 부모님 입장에선 갑작스럽게 느끼실 만도 했다. 나야 중학생 때부터 배우를 꿈꿨지만 적극적으로 말씀드린 적이 없으니까. 아빠가 미술을 하신다. 내게도 미대 진학을 권하셨고 난 고등학교 내내 미대 입시에 매달렸다. 결국 대학교에 보란 듯이 떨어진 다음에, 성인이 돼서야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연기하고 싶다고.

김혜나_ 잘 그리면서 일부러 선 하나만 긋고 시험장을 나온 건 아니고? (웃음) 

정이서_ 열심히 해도 안 되더라. 물론 아빠에게는 이렇게 들렸을 수도 있다. ‘보셨죠? 저 미술에 재능이 없어요.’ (웃음)

 

어쩌다 보니 연기를 시작한 계기에 관해 말하게 됐는데 김혜나 배우는 어떤가. 

김혜나_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한 것도, 데뷔작을 만난 것도 다 운이 좋았다. 열아홉에 무작정 진로를 예체능으로 바꿨다. 공부하기가 너무 싫었거든. 체력장 3급이라 체대는 언감생심이고, 미술은 중학생 이후 접어둔 상태였다. 음악은 더 심했다. 남들은 열 살 미만부터 준비하는데 이제 시작해서 어느 세월에 악기를 익히겠나. 문득 연극영화과가 떠올랐다. 예쁜 어린이 선발대회에서 여왕으로 뽑힌 적이 있다. 어린 마음에 한동안 장래 희망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이었는데 이후 건축가, 고어 연구자 등 꿈이 계속 바뀌었다. 아무튼 선생님께 농담 반 진담 반처럼 연극영화과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하루는 생물 선생님이 점심 시간에 과학실로 오라고 하더라. 뭔가 잘못했나 싶어서 조심스레 찾아갔는데 한예종을 알려주셨다. 여기는 여름에 시험이 열리니까 연습 삼아서 지원해 보라고. 근데 담임 선생님이 원서를 안 써주는 거다. 접수 마감일까지 실랑이하다가 결국 용기 내어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까지 아빠는 내 진로 계획을 모르셨거든. 

 

둘 다 아빠와 드라마를 한 편씩 썼구나. (웃음)

김혜나_ 덕분에 원서를 무사히 접수했다. 선생님이 아빠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원서를 써주시더라. 솔직히 아무도 합격을 예상하지 못했다. 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시험 당일에 복장도 제대로 못 챙겼다. 검은색 쫄바지를 입고 오라고 했는데 흰색 쫄바지를 입고 갔다. 집에 검은색 쫄바지가 없었거든. 교수님들도 당황하시지. 얘는 대체 뭔가. 연기는 이상하고, 고3인데 머리는 숏커트에 노랗게 염색까지 하고. 나중에 왜 나를 뽑았냐고 여쭤봤다. 어떤 교수님은 “날라리 같아서”라고 하시더라. “너는 뭐라도 하겠구나 싶어서”라고 말씀하신 분도 있고. 아무튼 운 좋게 입학하긴 했는데 그때부터 아빠와의 싸움이 시작됐다. 아빠는 선생님에게 화가 나서 원서를 써주라고 했던 것이지, 딸이 연극영화과에 가길 바란 게 아니었거든. 설마 시험에 붙겠나 싶어서 보내줬던 거다. 아빠가 서울예전 출신이다. 얼마나 힘든 길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를 어떻게든 단념시키려고 하셨다. 아빠도 결국 배우의 꿈을 포기하고 회사에 취직했으니까. 원래 사이좋은 부녀였는데 입학하고 몇 달간 한마디도 안 하다가 첫 영화를 찍은 다음에야 인정해 주셨다. 

 

출발선에서 품었던 마음이 비슷하다. 이대로 지기는 싫어서, 우려를 응원으로 바꿔 놓으려고 애썼다. 

김혜나_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야 살다 보면 그때그때 생긴다. 근데 전부 까먹는다. 다시 만나면 아는 척도 안 하려고 했는데 막상 마주치면 누구보다 반갑게 인사하고. (웃음)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복수는 진작에 포기했고 앞으로도 안 할 생각이다. 어차피 기억을 못 하는데 무슨 소용인가. 

정이서_ 나도 그렇다. 어느 날엔 잊지 않으려고 메모해두는데 시간 흘러서 보면 내가 이걸 왜 썼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녀의 취미생활>
<그녀의 취미생활>

누군가를 미워하기보다 좋아하는 데 마음을 쓴다는 뜻 아닐까. 좋아하는 사람 챙기기만도 바쁘고.

김혜나_ 싫어하는 사람 생각해봤자 좋을 게 없다. 내 기분만 상하고 내 시간만 망가진다. 하나하나 따지고 싸우는 일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더라. 세 번까지는 참고 넘어간다. 근데 상대가 다음에도 똑같이 무례한 행동을 하면 대화를 청한다. 상황이 이만저만해서 불편하니 조심히 해줬으면 좋겠다고.  

 

일전에 인터뷰에서 <꽃섬>의 김혜나가 아니라 <그녀의 취미생활>의 김혜나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대표작을 갱신하고 싶다는 말로 들리진 않아서 무슨 뜻인지 물어보고 싶다. 뭔가 증명하겠다는 마음으로 연기하는 것처럼 다가오지 않았고, 굳이 표현하면 받쳐주는 역할을 자처했는데.  

김혜나_ 조급하게 생각했던 시기도 있다. 항상 100%를 보여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하루는 최민식 선배가 그러더라. “내가 모든 신에서 100%를 하면 그 영화는 망해.” 주인공은 계속 나오는 역할이지 않나. 선배는 중요한 장면 서너 개를 120%로 해내고 나머지는 다른 배우들도 연기할 수 있도록 내려놓는다고 하더라. 그래야 영화도 살고 본인도 산다고. 생각해 보니 강약 조절 없이 모든 장면에 100%를 해버리면 관객이 질릴 듯했다. “나만 봐! 나만 봐!” 외치는 느낌으로 비칠 테니까. 말한 대로 이번 영화에서는 상대를 받쳐주는 일에 집중했다. 극을 이끄는 인물은 정인이고, 정인이 돋보이도록 조력자 역할을 충실하게 하면 된다고 봤다. 영화에도, 나를 위해서도 그게 더 좋은 방향이라고. 어릴 적엔 몰랐다. 어떻게든 튀려고 했지. 한 작품을 마치기도 전부터 다음 작품이 안 정해졌다며 불안해하고. 다 자기만의 때가 있는 것 같다. 20대에 욕심을 부렸다면 30대엔 많이 비웠다. 나한테 오는 작품을 열심히 하자는 마음으로 버텼고, 그러다 30대 후반부터는 나이를 먹어선지 여유가 생겼다.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고 연기하면서도 좀 능글맞아졌다고 해야 하나. 영화와 내 역할을 동시에 볼 수 있게 되면서 연기하는 것이 훨씬 좋아졌다.

 

20대부터 현재까지 통과한 경로를 말해줬다. 정이서 배우는 스스로 보기에 그중 어디쯤 와 있나. 

정이서_ 이제 막 30대에 진입했다. 아직 언니만큼 내려놓지는 못한 것 같다. 

김혜나_ 지금은 내려놓으면 안 돼! (웃음)

정이서_ <그녀의 취미생활>은 전작 드라마 <사막의 왕>(왓챠, 2022)에 이어 두 번째로 정식 제안을 받은 작품이다. 오디션 없이 주인공으로 발탁됐기에 설렘만큼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정확히 어떤 모습을 보고 캐스팅했는지 알 수 없으니 불안하고, 혹시나 감독님의 기대에 못 미치면 어쩌나 싶어 무섭기도 하고.

김혜나_ 그래선지 이서 첫인상은 악바리 같았다. 근데 알면 알수록 사랑스럽더라. 감독님이 왜 이서에게 빛이 난다고 표현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밝고 천진한 사람이다. 하는 짓도 귀엽고.

정이서_ 언니는 리딩하는 날부터 혜정으로 등장했다. 뱀파이어가 떠오를 만큼 화려한 인상에 포스도 대단했다. 다가가기 어려워 보여서 내심 걱정했는데 현장에서 벽이 허물어졌다. 마음 여리고 정도 많아서 지금도 이것저것 챙겨준다. 얼마 전엔 언니가 구매 대행을 해줬다. 헤어 에센스를 뭘 써야 할지 못 정하고 방황했는데 언니가 추천한 제품이 진짜 좋았거든.

김혜나_ 그래도 너보다 몇 년을 더 살았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웃음)

 

하반기 계획을 들려달라.

정이서_ 우리 영화 열심히 홍보하고 다음 작품도 잘 준비하려고 한다. 요즘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쓴다. 

김혜나_ 영양제 챙겨 먹어야 할 나이에 돌입했다. 건강검진도 빼먹지 말고. 

정이서_ 안 그래도 올해 처음으로 건강검진을 했다. 내 몸을 스스로 챙기는 습관을 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곧 드라마를 촬영할 예정이다. 체력 관리 잘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김혜나_ 당분간 영화제를 돌면서 <시기막질>을 선보일 듯하다. 10월 말쯤 드라마를 촬영을 시작하는데 처음으로 악역을 맡는다. 미워할 수 없는, 푼수떼기 악역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모으는 중이다.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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