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풀어 광기를 짓다
<맥퀸>
조지훈 / Feature / 2018-10-05

젊은 천재의 비극적인 죽음은 신화가 되곤 한다. 2010년 전 세계 패션계의 주목을 받고 있던 영국의 천재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이 40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1년 후인 2011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런던 V&A 뮤지엄은 그의 회고전 <알렉산더 맥퀸: 세비지 뷰티>전을 개최했다. 100여 점에 달하는 그의 옷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백만 명이 넘는 기록적인 관객이 몰려들었다. 2015년에는 영국 작가 앤드류 윌슨이 저술한 전기 <알렉산더 맥퀸: 살갗 아래의 피>가 출판되었고 최근에는 <45년 후>를 연출한 앤드류 헤이그 감독이 잭 오코넬과 함께 이 전기를 각색하여 그의 전기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맥퀸>은 세상을 떠난 지 8년이 되었지만 드라마틱한 인생과 탁월한 천재성 때문에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 세계 폐션계의 신화가 되어가고 있는 알렉산더 맥퀸의 전기 다큐멘터리다.

한 인물의 일생을 2시간 안에 담아내야 하는 전기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을 바라보는 감독의 관점과 태도다. <맥퀸>의 감독은 두 명이다. 패션 필름과 뮤직 비디오 감독 이안 보노트와 다큐멘터리 작가 피터 에트귀. 에트귀는 말론 브란도의 육성 녹음 테이프를 바탕으로 브란도의 일생을 담아낸 놀라운 다큐멘터리 <리슨 투 미 말론>의 공동 작가이기도 하다. 두 감독은 맥퀸의 말에서 이 다큐멘터리가 가야할 길을 찾아냈다. “당신이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내 작품을 보면 된다.” 

두 연출자는 맥퀸의 옷과 패션쇼를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렌즈로 삼았다. 실제로 맥퀸의 중요한 패션쇼는 모두 자기 고백적이다. 과거의 기억과 트라우마, 현재의 감정과 새롭게 알게 된 모든 것들이 뒤섞여 옷을 매개로 패션쇼 안으로 들어온다. 스스로도 자신의 작품들은 너무 사적이어서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두 감독은 그의 일생에서 큰 변화를 겪었던 중요한 시기에 이루어진 다섯 개의 패션쇼를 선택하고, <맥퀸> 속에서 그의 전체 일생을 구분하는 다섯 개의 챕터로 활용한다.

<맥퀸>
<맥퀸>

대부분의 전기 다큐멘터리들은 수많은 자료 영상과 인터뷰를 잘라 붙인 일종의 몽타쥬다. 몇 년 전부터 영어권 다큐멘터리들을 중심으로 컷을 최대한 잘게 쪼개고, 빠른 리듬으로 감각적으로 편집하여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경향이 눈에 띄는데, 최근 들어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맥퀸>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영화가 시작한지 단 15분 만에 맥퀸의 초기 22년 인생을 감각적으로 엮어낸 첫 번째 챕터, ‘희생자들을 쫓는 살인마 잭’이 그렇다. 패션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 제목은 런던패션위크에 초청된 그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예술학교 졸업 컬렉션의 제목이다. 맥퀸은 스폰지처럼 주변의 정보를 빨아들여 그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재구성해서 거침없이 표현하는 독창적인 아티스트다. 영국 런던 북동부 빈민가 이스트 엔드 출신인 맥퀸은 자신의 첫 컬렉션에서 1888년 이스트 엔드의 전설적인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를 매개로 자신의 고향, 이스트 엔드의 어두운 역사를 담아냈다. 그의 천재적인 재능은 이렇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맥퀸은 어린 시절 누나가 매형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자신도 매형에게 강간당했다. 그는 졸업 후 2년 만에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야 할 이 끔찍한 트라우마를 가장 독창적이고 도전적인 방식으로 1995년 자신의 패션쇼 ‘하일랜드 레이프’에 녹여냈다. 이 영화의 두 번째 챕터이자 그의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했을 패션쇼였다. 그런데 맥퀸은 어머니에게 들은 맥퀸 가문의 역사에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발견한다. 개인의 고통스런 기억은 과거 전쟁에서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에게 행한 잔혹했던 강간의 역사에 포섭되어 확장된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그의 내면과 자신감으로 펄떡거리는 분열적 에너지와 상상력은 고스란히 패션쇼에 담겼다. 혹평과 호평을 오가는 극단적인 평가 사이에서 그는 단번에 영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다.

<맥퀸>
<맥퀸>

사실 패션쇼는 길거리에서 구입할 수 있는 예쁜 옷을 선보이는 쇼케이스가 아니다. 한 브랜드의 이미지를 홍보하고 마케팅하는 가장 상업적이고 화려한 이벤트에 가깝다. 16세부터 런던 최고의 맞춤양복점에서 재단기술을 배운 그는 패션업계의 오래된 전통을 존중했지만, 보수적인 패션업계의 관습과 규칙은 모두 부숴버렸다. 그의 패션쇼는 옷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옷을 통해 감정과 철학, 동시대의 경향을 담아내는 하나의 거대한 비주얼 아트였다. 영화는 그의 대표적인 패션쇼들을 하나씩 보여준다. 

프랑스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된 후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며 활동했던 시절, 동료들과 함께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폭발적인 열정으로 완성해낸 ‘세상은 정글’(1997), 그의 경력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는 최고의 패션쇼 중 하나였던 ‘보스’(200)는 각각 세 번째와 네 번째 챕터로 다루어진다. ‘보스’를 준비할 무렵 맥퀸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불안, 우울에 시달렸다. 오래된 친구들이 그를 못 견디고 떠나갔다. 그는 당시의 복잡하고 어두운 감정을 ‘보스’에 담아냈다. 정신병동과 조엘 피터 윗킨의 그로테스크한 사진 ‘요양원’을 모티브로 한 이 패션쇼는 말 그대로 압도적이다. 2002년 구찌의 디자인 부문 최고 책임자로 맥퀸의 브랜드 알렉산더 맥퀸을 사들였던 톰 포드의 두 번째 장편영화 <녹터널 애니멀스>(2016)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뚱뚱한 모델을 주제로 한 그로테스크한 현대미술 전시는 맥퀸의 이 전시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 분명하다.

패션쇼는 일반 대중을 상대하는 반복가능한 공연이나 영상이 아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단 한번 기회, 그걸 놓치면 다시 볼 수 없다. 그리고 그 어떤 이벤트보다 화려하다. 온갖 유명인사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패션업계는 대중문화의 최전선에 있다. 그래서 흥미롭다. 2009년 패션 잡지 보그의 전설적인 편집장 안나 윈투어에 대한 다큐멘터리 <셉템버 이슈>가 나온 이후 패션 업계의 거물들을 다룬 이른바 ‘패션 필름’들이 연달아 만들어졌다. 

<녹터널 애니멀스>
<셉템버 이슈>

<맥퀸>도 그 중 하나다. 대부분의 ‘패션 필름’의 중심에는 브랜드와 유명인사와의 인터뷰가 있다. 그러나 <맥퀸>의 두 감독은 처음부터 이런 ‘패션 필름’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특정 브랜드의 홍보의 장으로 활용되지 않았다. 또한 맥퀸이 얼마나 위대한 패션 디자이너였는지를 말해주는 유명인사들의 분석과 평가 역시 이 영화엔 별로 없다. <맥퀸>의 두 감독은 맥퀸의 또 다른 자아나 다름없었던 패션쇼를 통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맥퀸의 일생을 연대순으로 담아내며 인간 맥퀸의 내면과 그의 창조적인 작업방식을 들여다보는데 집중한다.

사실 일반적인 전기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맥퀸>의 연대기적 내러티브는 특별할 것 없다. 그러나 영화는 시종일관 그의 패션처럼 세련되고, 숙련된 전문 재단사의 재봉틀 소리처럼 경쾌하고 매끄럽다. 또한 두 감독이 친구와 가족들로부터 어렵게 확보한 사진과 영상에는 맥퀸의 꾸밈없는 모습과 생생한 내면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더불어 HIV, 마약, 그의 재능을 확신하고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낸 이사벨라 블로우와의 관계 등 그를 둘러싼 예민하고 미묘한 이슈와 자살하기 직전의 상황과 심경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맥퀸이 가장 사랑했던 영국의 대표적인 영화음악 작곡가 마이클 니만의 음악은 활기 넘치는 패션쇼에 역동성과 감정을 불어넣고, 어두운 내면의 이야기에 깊이를 더한다. 

또한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분열적이며 기괴한 그래픽 이미지들은 맥퀸의 복잡하고 어두운 내면을 상징적으로 담아낸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스스로 사라져버린 한 천재, 아니 천재라고 불렸던 불완전한 한 인간의 다면적인 삶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해낸 이 다큐멘터리는, 그래서, 불안한 내면과 싸우면서도 독보적인 능력으로 정글과도 같은 패션업계에서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고 확장해나간 맥퀸의 세계와 닮아 있다. 1990년대 쿨 브리타니아(Cool Britania) 시대의 영국 문화 산업의 상징과도 같았던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리고 특별한 재능을 가졌던 한 천재 디자이너가 패션을 통해 발견해낸 아름다움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다면, <맥퀸>은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맥퀸>

 

맥퀸 McQueen 감독 이안 보노트, 피터 에트귀 출연 알렉산더 맥퀸, 이사벨라 블로우, 케이트 모스, 존 갈리아노, 톰 포드 수입·배급 엣나인필름 제작연도 2018년 상영시간 111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18년 10월 4일

 

 

Feature
우리가 사랑하는 방법
반짝다큐페스티발 이은혜·민다홍·조이예환·문창현·이인섭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5-05-18
Feature
독립영화, 어디서 볼까
8주간의 약속, 1%가 먼저 시작합니다
손시내
2025-03-21
Feature
맴도는 마음, 마주한 질문
인디그라운드 2024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이강희·장주은·김건희·김로사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4-12-16
Feature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인디그라운드 퍼스트링크 김진웅·정태원·염문경·이종민·성송이·이혜인·박준호
글 차한비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4-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