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은 없다
<지옥만세>
손시내 / Choice / 2023-08-19

“그냥 다 망해버렸으면 했어.” 세상에 도무지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소녀는 저주의 마음을 담아 악플을 쓴다. 그저 악플일 뿐이다. 또 다른 소녀는 억울함과 분노가 차오를 때 굵은 나무 허리를 있는 힘껏 걷어찬다. 걷어차는 발만 엄청나게 아파 보인다. 가슴 속에 차오르는 절망의 크기는 너무나 큰데, 몸집 작은 여자아이들은 그걸 도무지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모르는 것만 같다. 그래서? 이들은 그냥 죽기로 한다. 집단 괴롭힘과 따돌림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는 제대로 세상 하직할 방법을 찾고 있다. 그런데 갖가지 방법을 하나씩 시도하다 주마등을 본 나미는 갑자기 죽기 전에 채린(정이주)을 만나 그 애 인생에 ‘기스’라도 내야겠다고 성화다. 나미와 선우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악마 같은 기지배. 괴롭힘과 따돌림을 주도한 여왕벌 같은 아이. 그런데 남의 인생을 그렇게 망쳐 놓고 한가롭게 유학이나 준비하고 있다고? 그럼 일단 걔가 있는 서울로 가자. 그렇게 둘의 자살 계획은 미뤄지고 생은 연장된다. 학교의 다른 아이들이 모두 수학여행을 떠난 어느 가을의 일이다.

폭력, 따돌림, 죽음 등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짐작하게 하는 소재가 두루 쓰였지만 <지옥만세>는 생각보다 발랄하고 엉뚱하다. 무엇보다 영화는 모험극의 활기와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나미와 선우가 밤 버스를 타고 동네를 떠나 도시로 향할 때, 마침내 당도한 서울에서 한강 다리를 걷고 청계천 근처를 서성일 때, 이들은 날 선 복수자보다 천진한 여행자의 행색에 더 가까워 보인다. 결국 채린을 만나고 ‘효천 선교회’라는 이상한 집단을 마주했을 때도 두 사람은 여전히 낯선 세상을 탐색하는 모험가 같다. 물론 그러는 중에도 이들은 많이 지치고 두려운 얼굴이다. 어서 이 여정을 마치고 원래 세워둔 계획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속내가 자꾸만 새어 나온다. 영화에서 느껴지는 생기가 혹시 어른의 시선으로 덧씌운 낭만적 공기는 아닌지 걱정할 무렵, 아이들은 그처럼 장식되지 않은 어둠을 무심히 꺼내 보여준다. 나미와 선우는 일부러 밝은 체하거나 별나게 구는 캐릭터가 아니다. 영화가 그리는 두 소녀는 그저 보통의 10대들처럼 서툴고 이중적이며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끓어오르는 화 때문에 자꾸만 발을 구르다가도 평범한 위로 한마디에 풀썩 주저앉는다. 그러다 대뜸 춤을 추기도 한다. <지옥만세>는 10대 여성 특유의 에너지를 구체적 상황과 세밀한 묘사를 통해 고스란히 실감하게 하는 독특한 성장영화다.

<지옥만세>
<지옥만세>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지옥을 겪는다. 친구들과 곧잘 어울리다가 어느 순간 혹독한 따돌림을 당한 나미, 새 학교로 전학하자마자 ‘구라’라는 별명을 얻고 거짓말쟁이 취급을 당한 선우, 집안이 쫄딱 망해 도망치듯 떠나야 했던 채린. 학교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얽혀있는 세 사람이지만 삶이 곧 지옥이라고 믿는 건 피차 마찬가지다. 어쨌든 지옥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나미와 선우가 죽음을 꿈꾼 것과 달리 채린은 구원과 낙원의 가능성에 매달린다. 나미와 선우가 SNS 너머로 접했던 채린의 유학 소식은 알고 보니 사이비 종교와 관련된 미심쩍은 약속이었다. 상벌제도에 따라 점수를 가장 많이 얻은 청소년 신도는 남태평양에 있다는 낙원으로 보내진다. 채린의 부모는 이미 그곳에 가 있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나미와 선우가 채린의 마지막 동아줄이 된다. 회개하고 속죄하며 용서를 구한 이는 보통의 선행으로는 넘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점수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사과할 대상이 제 발로 찾아오다니, 채린에겐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 셈이다. 너무나 맑은 얼굴로 나미와 선우를 맞이하고 진심 어린 표정으로 사과하는 채린. “박채린 하나도 안 변했어. 걔 아직도 여왕벌이야.” 무언가 간파한 듯한 선우의 말을 나미는 무시한다. 어쩌면 채린의 사과가 진심인지도 모른다. 나미는 흔들린다.

“그걸 믿냐?” 나미와 선우가 채린을 만나고 어영부영 선교회 사람들과 일상을 공유하게 될 즈음, 영화는 믿음이라는 테마를 주요하게 제시한다. 체계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상벌제도, 낙원에 대한 아리송한 이야기, 모니터 너머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목사의 존재, 허름하고 폐쇄적인 시설은 선교회의 그 어떤 말도 믿을 수 없게 한다. 찬찬히 따져보지 않더라도 이건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봐 온 사이비 종교의 면면이다. 중요한 건 이토록 엉성한데도 열과 성을 다해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사는 게 지옥 같아서 믿음을 찾아왔다는 전도사 명호(박성훈)나 전 재산을 “낙원에 몰빵”했다는 혜진 아버지의 광기 어린 눈은 감독의 표현처럼 “도피처를 찾는” 절박한 마음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채린을 믿는 문제는 그보다 좀 더 복잡하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용서를 구하고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는 채린은 나미 뿐 아니라 관객도 헷갈리게 한다. 영화가 채린의 악행이나 거짓의 정황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기에 모호함은 더욱 커진다. 여러 질문이 떠오른다. 아무리 점수가 걸려있다고 한들 사과는 사과가 아닌가? 진정성은 어떤 조건 위에서 진정으로 꾸밈없는 것이 되는가? 그 모든 질문에 앞서, 과거의 죄는 그리 쉽게 사해지는 것인가?

<지옥만세>
<지옥만세>

그 애 얼굴에 ‘기스’를 내겠다며 커터칼을 손에 쥐고 누구보다 격렬하게 흔들리던 나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슬기로운 답에 도달한다. 마주 봐야 할 상대는 채린이 아니라 선우이며, 이제는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을 나미는 깨닫는다. 임오정 감독은 나란히 걷고 있으나 절대 같은 입장은 될 수 없는 두 여자의 이상한 동행과 복잡한 우정을 이미 단편 <거짓말>(2009)과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2018)에서 보여준 적 있다. 임오정의 여자들은 서로의 차이를 제거해서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대신, 일단 내가 겪는 고통과 슬픔의 실체를 가늠해 보며 상대가 침범할 수 없는 경계선을 확보한다. 그러고 보면 <거짓말>의 연희(이채은)도,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의 영신(공민정)도, <지옥만세>의 나미와 선우도 모두 예민하고 겁 많은 고양이를 닮았다. 새침데기처럼 보이지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태도야말로 그들이 지옥 같은 삶을 견디기 위해 찾아낸 지혜일 것이다. 세 영화의 결말은 제법 비슷하다. 정확히 마주 본 뒤, 두 여자는 다시 반대 방향으로 멀어진다. 어쩌면 다시 괴로워질 수도 있겠지만 지옥을 함께 사는 이가 있다는 걸 알기에 아마 덜 외로울지도 모르겠다.

 

지옥만세 Hail to Hell 감독 임오정 출연 오우리, 방효린, 정이주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 KAFA 배급 찬란 제작연도 2022년 상영시간 109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3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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