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 블루스
<다섯 번째 흉추> 박세영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3-08-11

“덕질하세요?” 박세영은 의외로 얌전한 취미 생활을 털어놓는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지만 필름은 비싸서 안 쓴다. 바이크를 타긴 했지만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 면허를 ‘자진’ 취소했다. 오래전부터 꾸준히 곁에 둔 것은 책. 모범생 같은 답변이 이어지는 바람에 살짝 김이 샌다. 제목부터 기이한 <다섯 번째 흉추>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영화다. 연인의 매트리스에서 곰팡이가 피어나고, 곰팡이에서 태어난 생명체가 무럭무럭 자라나더니 끝내 인간의 형상을 갖추기에 이른다. 말로 하면 우스꽝스러운데 박세영은 대뜸 아름다운 풍경을 펼쳐 놓는가 하면,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마저 빚어낸다. 질문 하나로 그의 상상력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가늠하려던 시도가 무안해지는 찰나, 박세영이 덧붙인다. 봄에는 가즈오 이시구로를 읽었고 지금은 로베르토 볼라뇨를 읽는 중이라고. 덕분에 박세영의 마음속을 맴돌 만한 단어 몇 개가 떠오른다. 환상, 탐욕, 모순, 접촉, 사랑 같은 것. 그들 소설 속에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묻는 비인간이 등장하고, 자본의 무자비함과 정서적 충족감이 공존한다. 적어도 박세영은 제 길을 성실하게 닦아가는 듯하다. <다섯 번째 흉추>와 그가 탐독하는 세계는 서로 멀다 해도 같은 궤도를 그려서다. 이 인터뷰는 세 문장으로 끝난다.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 같다. 해야만 하니까 했다. 다음엔 다르겠지.” 그 말을 창작자의 반성과 한계, 결심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픽션의 세계를 이제 막 비행하기 시작한 감독에게 준비물은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개봉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관객 반응을 마주하니 어떤가.

혹평이 70%다. 근데 재밌는 건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유가 같다는 거다. 누군가는 ‘그래서’ 좋아하는데 다른 누군가는 ‘그래서’ 싫다고 하더라.

 

<다섯 번째 흉추>는 그간 지속한 실험을 총망라하는 작품 같다. 주인공 ‘곰팡이’에 관한 단서는 단편 <호캉스>(2021)에 등장한다. 여기도 소통하지 못하는 커플, 뜻대로 잘 흘러가지 않는 밤, 그리고 곰팡이가 등장한다. 한편, 곰팡이의 탄생과 진화를 일지 형식으로 기록하기에 <다섯 번째 흉추>는 일종의 로드무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곰팡이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이동하는 주체라는 점에서 ‘배달하는 사람’이 주인공이었던 지난 <캐시백>(2019) <Godspeed>(2020) 등과 겹쳐 보인다.

일단 배경부터 설명해야겠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를 나왔는데 1학년은 영화를 찍을 수가 없었다. 못 찍게 한다기보다는 애초에 교육 과정에 없다. 2학년부터 단편영화를 하나씩 찍고 4학년에 졸업 작품을 만드는 식이다. 굳이 그 순서를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 학기에 한 편씩 만들자고 혼자 목표를 세웠다. 학교에서 지원을 안 해줄뿐더러 시간도 넉넉하지 않으니까 최대한 쉽고 빠르게 찍는 방식으로 1년에 두 편씩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매체적 실험에 관심이 생겼다. 미술과 수업을 찾아가서 듣기도 했고 실험 영화도 많이 접했다. 마이클 스노우, 홀리스 프램턴 등 한동안 구조주의 영화에 푹 빠졌다. 계속 실험 영화를 만들면서 매체 위주로 고민하다 보니 교수님들은 별로 안 좋아했다. 졸업 작품도 한 차례 퇴짜 맞았다. 아빠랑 강아지가 출연하는 슬로우 무비를 만들었다. 둘이 산책하던 중에 미지의 빛을 발견하고 추적하는 이야기. 2~3시간짜리 편집본을 들고 가니 교수님이 이건 영화가 아니라면서 졸업 못 시켜준다고 하더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든 졸업해서 혼자 작업하고 싶었거든. 마감까지 3주 남은 상황이었는데 교수님이 좋아할 것 같은 작품을 구상해서 부랴부랴 찍었다. 

 

그렇게 만든 <캐쉬백>(2019)으로 호평받았으니 당황했겠다.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에 달라진 바가 있나.

여태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캐쉬백>에서는 에고를 버려야 했다. 기승전결이 있는 영화를 처음 만들어 본 것 같다. <캐쉬백>도 ‘결’이 명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교수님을 위한 영화’라고 생각해서 딱히 정도 안 붙였다. 근데 이 작품으로 영화제에 초청되고 상을 받으니 혼란스러웠다. ‘이게 뭐지?’ 하면서도 계속 영화를 만들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다섯 번째 흉추>는 ‘교수님을 위한 영화’와는 또 거리가 멀거든. 그저 전작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다음 영화에서 채우는 식으로 작업했다. <캐쉬백>에서 아쉬운 것이 있으면 <Godspeed>에서 재시도하고, 단편에서 느낀 바를 장편에 반영하고. 말한 대로 주제나 소재가 비슷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내 딴에는 그간 하고 싶었던 것을 총집합해서 <다섯 번째 흉추>를 만들었다고 봤다. 근데 완성하고 나니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차기작 <지느러미>를 통해 또다시 로드무비 겸 맥거핀을 주인공으로 삼는 영화를 시도했다.

 

작업 속도가 빠르다. 혼자 일하는 데 익숙하다는 뜻이지만 무엇보다 아쉬움과 불만족이 가속도를 붙이는 것처럼 보인다.

후반 작업을 직접 하다 보니 영화에서 뭐가 부족한지 바로 알아챈다. 제작비가 늘 모자란 데다 배우도 대부분 친구다. 자연스레 타협하는 게 일이 된다. 이야기를 고치고, 촬영을 조정하고, 현장에서도 수습하느라 바쁘다. 그러다 편집하면서 내가 놓친 점을 깨달으면 아쉬움이 커지는 거다. 편집에서 최대한 수습할지언정 현재 영화에서 아쉬움을 모두 해소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빨리 다음 영화로 넘어가고 싶어진다. 이상한 강박 같은 건데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호캉스>
<Godspeed>

<다섯 번째 흉추>도 그렇듯 강박에서 비롯한 작품인가.

비슷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그간 제작 지원을 받아본 적이 없다. 장편을 준비하는 중에 ‘영화 만들기 방식을 개혁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더라. 글도 혼자 쓰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전고운 감독에게 모니터링을 부탁했다. 2주 간격으로 각본을 확인하면서 꾸준히 피드백을 해줬다. 근데 시간이 좀 흐르자 왠지 갇히는 느낌이 들더라. 무의식적으로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는지 결국 혼자 뭔가를 쓰게 됐다. 그게 <다섯 번째 흉추>다. 말하자면 학교나 제작사 등이 요구하는 어떤 정형화 된 틀을 못 견뎌서 만들어지는 작품이 내 영화인 것 같다. 각각 장단점이 있을 텐데 나는 둘 다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도 밖에서도 영화를 찍을 수 있다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양쪽을 접목하는 길도 찾지 않을까.

 

전고운 감독이 피드백해줬다는 시나리오가 <지느러미>인가.

아니, 그 영화는 아직 없다. 사라지거나 버린 것은 아니다. 지금 그렇게 쌓아 둔 아이템이 10개도 넘는다. 문제가 뭐냐면 답답하다는 거다. 7~80페이지 각본을 쓰다 보면 영화가 너무 멀게 느껴지거든. ‘적어도 3억은 필요한데 그 돈을 언제 구하지? 캐스팅은 어떻게 하지?’ 제작 과정을 아니까 가만히 기다리기가 어렵다. 하루라도 빨리 실질적인 뭔가를 만들고 싶어지는 거다. <다섯 번째 흉추> 시나리오를 전고운 감독에게 보여주니 대체 무슨 내용이냐면서 반대하더라. 내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카메오 출연을 부탁했다. (웃음)

 

둘은 어떤 인연인가.

전고운 감독이 미쟝센단편영화제 심사위원이었다. 그 후 감독의 제안으로 루이비통 광고를 같이 찍으면서 인연이 이어졌다. <지느러미>에 투자도 해줬다. 지분율이 꽤 된다. (웃음) 

 

<다섯 번째 흉추>는 일종의 크리처물이다. 생명체가 태어나고 자라는 곳으로 매트리스를 고른 이유가 궁금하다. 왜 하필 그 거대하고 무거운 물체에 끌렸나.

처음 구상했던 건 매트리스를 버리러 가는 용달 기사 이야기다. 스타렉스 뒷좌석에 매트리스를 싣고 폐기 장소에 가는데 매트리스가 갑자기 말을 건다. 그리고 자신에게 저장된 수많은 기억, ‘다섯 번째 흉추’에 얽힌 사연을 꺼내어 대화하기 시작한다. 당시 난 관계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싶었다. 중년 남자인 용달 기사가 어떤 혐오나 차별 없이 다양한 이야기에 접속하면서 매트리스와 대화로 엮이는 거다. 현재 버전도 그러한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제작비가 늘어나면서 크리처물이라는 장르를 포섭하긴 했는데, 크리처물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인간이 아닌 생명체를 대상화하는 시각을 탐구하려고 했다.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 친구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어떻게 표현할까? ‘크리처’라는 것도 인간의 시각으로 붙인 칭호 아닌가. 뒤집어서 보면 영화가 새로운 몽타주와 시간 규칙을 만드는 놀이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매트리스는 계속 움직이는 배경이자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주체다. 물체에 장소성을 부여한 셈이다. 맥거핀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방법을 고민하면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러면 매트리스가 머무는 공간은 어떻게 선택했나. 자취방, 모텔, 병실처럼 명확한 장소인가 하면, 공장 앞 골목이라든지 차 뒷좌석처럼 이동 중인 상태를 나타내는 곳이기도 하다. 

우선 자취방, 모텔, 차는 처음부터 원했던 곳이다. 자취방은 대부분 2년 단기 계약하고 살지 않나. 사용자가 계속 바뀌는 점이 재밌다고 봤다. 모텔과 병실도 마찬가지다.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 하고 집을 대신하기도 한다. 차는 정지와 움직임을 동시에 드러내는 공간이다. 곰팡이-생명체가 끊임없이 어딘가로 이동하며 성장하는 캐릭터라는 점을 고려할 때, 차는 만남의 장소로 적합해 보였다. 나머지는 대개 현장에서 구했다. 당시 내가 살던 동네를 중심으로 이동하는 중에 발견한 곳이 많다. 한국에 살면서 항상 궁금했던 위쪽, 그러니까 38선 주변 지역도 찾아갔다.

<다섯 번째 흉추>
<다섯 번째 흉추>

북부 지역이 궁금했던 이유는?

너무 가까운데 못 들어가니까. 미지의 공간이다. DMZ 자체도 민간인 출입 금지라서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고. 인간의 접근과 간섭을 모조리 차단한, 철조망으로 가로막힌 저 너머에 어떤 생태계가 존재할까. 그곳에 사는 동식물은 어떤 시스템을 이루고 있을까. 늘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역이다. 

 

수도권을 점차 벗어나는 경로라고 볼 수도 있다. 물리적으로 보면 곰팡이는 외곽으로 점점 밀려 나가는 모양새인데 그럴수록 생명력은 강화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느낌도 받는다. 

로드무비에 가장 안 어울리는 지역이 어디일지 생각해 보니 북부더라. 2000년대 초반에는 북한 혹은 남북 관계를 다루는 영화가 많이 나왔던 것 같다. 정확한 요인은 모르겠지만 정부가 바뀌면서 그런 흐름은 사라졌다. 이제 로드무비라고 하면 아래로, 특히 제주로 가는 경우가 많다. 더는 위쪽으로 안 가려고 한다. 공간의 수직성을 의식하는 현상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하기야 인간이 계속 위로 가면 결말은 두 갈래 아닌가. 사살당하거나 다시 아래로 돌려보내지거나. 실은 자동차 신을 아이다호 같은 곳에서 찍고 싶었다. 세상의 끝처럼 직선 도로만 길쭉하게 펼쳐져 있는 곳. 거기가 아닌 이상 차가 그렇게 흔들리는데 충돌 사고 한번 없이 오래 달린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 않나. 근데 한국에서 비슷한 데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금세 산이나 건물로 시야가 좁아지거든. 결국 차가 나오는 장면에서 외관을 보여주지 않고 내부만 촬영했다.

 

비전문배우를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애초 연기 잘하는 배우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캐스팅 과정에서 중요했던 건 뭐였나.

남자 배우는 전부 친구들이다.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이라고 하는데 알고 보면 정 많고 따뜻한 애들이다. 난 그런 식으로 편견이나 선입견을 타파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다. 곰팡이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징그러워도 보면 볼수록 묘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나. 친구들에게 공통점이 또 있는지는 모르겠다. 장발이라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는데 누가 묻더라. 일부러 머리 긴 남자들만 고른 거냐고. (웃음) 연기에 관심도 없던 애들이 품앗이하듯 내 영화를 도와주다가 여기까지 왔다. 아니, 품앗이라고 하면 안 된다. 한 8년쯤 하다 보니 이제 우리 사이에도 금전 거래가 발생하기 시작했거든. (웃음) 경험이 쌓이면서 나도 친구들도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했다. 아무래도 훈련량, 인내심, 대사 전달력 등 부족한 부분이 많다. 좀 더 전투적으로 장면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 끝에 여성 캐릭터는 전문 배우에게 맡겼다. 오히려 비전문 배우보다 전문 배우가 더 고생했을 거다.

 

친구들이 캐스팅에 만족하는지 궁금하다. 누구에게 무슨 역을 맡길지는 어떻게 결정했나.

고우, 재이 씨는 <캐쉬백>부터 모든 영화에 빠짐없이 출연했다. 갈수록 역할이 작아진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고 결국 이번에 제일 작은 역을 줬다. 오프닝에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데 그냥 코믹한 걸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함석영이라는 친구는 8년 가까이 알고 지냈고 엄청나게 좁은 자취방에서 1년 정도 같이 살기도 했다. 그때 경험을 갖고 연기하면 재밌겠다 싶어서 첫 번째 에피소드를 줬다. 한편, 정수민 씨는 딱 봐도 선한 사람 같지 않나. 한 번은 그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못되게 군다는 뜻이 아니라 포동포동하고 귀여운 인상에 어긋나는 이면을 들춰보려고 했던 거다. 계속 파다 보면 웃음으로 가린 슬픔이라든지 상처받은 과거, 또는 뭔가 변태적 감정이 나올 줄 알았다. 근데 실패했다. 수민 씨는 그냥 좋은 사람이더라. 돌이켜보면 늘 그렇듯 자유롭게 했던 것 같다. 솔직히 제작 지원 받고 몇억씩 들여서 찍는 영화라면 좀 더 안정을 중시하면서 리허설도 여러 번 했을 텐데, 이 영화는 망해도 내 돈 날리는 것 말고는 데미지가 별로 없으니까. ‘누가 이 인물을 연기하면 재밌을까?’ 생각하며 직관적으로 선택했다. 무엇보다 현장 분위기가 중요했다. 참여자에 따라 현장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 알거든. 배우든 스태프든 마초스럽지 않은, 착하고 의사소통 잘 되는 친구들 위주로 섭외했다.

 

함석영 배우에 관해 좀 더 이야기하자. 강렬한 듯 나른한 인상이 매력적이다. 주변을 어색하게 만드는 독특한 말투도 윤이라는 인물과 어울리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연기나 캐릭터에 관해 대화하다 보면 체스 두는 사람이 떠오른다. 약간 뒤로 빠져서 다음 수를 고민하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뭔가 계산할 것 같은 냉정함이 있고, 그런 면이 영화에서 이별을 고하는 느낌과 맞아떨어졌다. 자기중심적인데 밉지 않은 느낌이 좋더라.

 

함석영 배우와 연인으로 호흡을 맞춘 문혜인 배우는 짧은 시간에 사랑의 고저를 표현하며 집중력을 끌어 올린다. 극 초반에 관객에게 비교적 익숙한 얼굴을 내세운 전략도 유효했다고 본다. 

혜인 씨는 합천수려한영화제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Godspeed>로 혜인 배우는 <뒤로 걷기>(방성준, 2020)로 초대받은 상태였다. GV에서 사회자 질문에 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때 얘기를 꺼내면서 출연을 제안했고 다행히 수락해 줬다. <다섯 번째 흉추> 마친 후 혜인 씨도 자기 영화를 찍었다. 난 <트랜짓>(2022)에 촬영 감독으로 갔고 혜인 씨랑 뮤직비디오도 같이 찍었다. 서로 돕는 사이다. 내가 <지느러미> 찍을 때는 혜인 씨가 현장 제작팀으로 왔고 출연도 해줬다.

<다섯 번째 흉추>
<다섯 번째 흉추>

배우들이 시나리오 읽고 나서는 뭐라고 하던가. 

각양각색이었다. 문혜인, 함석영 배우는 머리로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나한테 태클을 엄청나게 걸더라. 그들에게 못 이겨서 자존감이 떨어진 상태로 퇴고를 거듭했다. 촬영 전날까지 각본을 바꿀 정도였다. 둘 다, 나까지 셋이 만족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은 추가 촬영에 ‘추추가’ 촬영까지 감행했다. 반면에 두 번째 커플로 나오는 온정연, 정수민 배우는 다 좋다고 했다. 현장에서도 이렇다 할 마찰 없이 촬영을 진행했다. 촬영을 직접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배우들과 함께 느끼면서 시간이 쭉 흘러가 버렸는데,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깨달았다. ‘각본이랑 180도 달라졌잖아?’ (웃음) 한쪽은 재차 준비하다가 결국 다시 찍고, 다른 쪽은 한 번에 끝냈다가 뒤늦게 수습하고. 결과적으로 쉬운 건 없었다. 박지현, 홍승기 배우는 동작 리허설에 집중했다. 한 사람의 동작을 둘로 나눈다고 생각하며 촬영도 구조적으로 접근했다. 둘의 경우, 많은 부분이 현장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 나는 촬영본 백업하면서 현장 편집을 한다. 배우들이 영화와 연기 톤을 확인하고 참고할 수 있도록. 

 

그러면 연출, 촬영, 편집까지 현장에서 역할이 너무 많지 않나.

몸에 습관처럼 붙었다. 그렇게 안 하면 안 되니까. 자본에서 벗어나 영화를 만들려면 그만큼 육체적 노동을 하는 수밖에 없다. 스크립터를 구한다든지 다른 방식을 찾을 수도 있는데 지금까지는 무식하게 했던 거다. 

 

현장에서 감독만큼 바빴을 거라고 예상되는 이들은 미술팀이다. 이미지를 결정하는 데 미술이 큰 역할을 했는데 팀은 어떻게 꾸렸나.

최이다 감독의 단편 촬영장에 촬영 감독으로 갔다가 전인, 김태리 미술감독을 만나게 됐다. 그분들이 한국 무속 신앙 사진집을 갖고 왔는데 한창 <다섯 번째 흉추> 시나리오를 쓰던 시기라서 자연스레 말이 오갔다. 한국적 지형에서 낯섦과 익숙함을 구현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에 두 분이 버섯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당시 난 버섯보다 균에 흥미를 느꼈다. 영화 작업을 같이 해보면 좋겠구나 싶어서 부탁드렸다. 실은 그때만 해도 제작비가 많이 들어올 줄 알아서 “원하는 거 다 해드릴게요” 큰소리쳤다. 신나서 버섯 공장에 전화했다. 특정 버섯을 대량으로 구해서 깔아놓을 생각이었거든. 근데 예산이 줄어드는 바람에 현실과 타협하는 수밖에 없었다. 

 

엔딩이 떠오른다. 각종 버섯으로 만든 기막힌 디오라마가 등장하는데, 바다라는 아주 큰 세계를 축소해 놓은 수조처럼 보이더라.

가까이에서 보면 무성하고 복잡하지만 멀리서 보면 초라한 느낌을 원했다. 거기에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내가 실수로 설치 장소를 잘못 알려주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결국 위치를 옮겨서 다시 만들어야 했다. 

 

<다섯 번째 흉추>는 화려한 스타일을 강조하는 듯하지만, 뜯어 보면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예술’이라는 명제에 충실한 작품 같다. 촬영에서도 보편적이지 않은 구도를 여러 차례 시도했는데.

스타일을 만들어서 보여주겠다는 목표로 찍은 영화가 아닌데,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됐더라. 나도 이번에 알았다. 관객에게 영화가 표면적인 질감으로 다가가면 거부감이 생기는구나. 아무튼 촬영은 보편적이지 않되 보수적으로 진행했다. 직접 샷 리스트를 짜고 콘티를 그렸다. 물론 최대한 콘티대로 찍으려 했고. 카메라가 50kg 정도로 무겁다 보니 현장에서 여러 번 찍기도 어려웠다.

 

즉흥으로 만들어 낸 신이 거의 없다고 봤다. 현장 강도가 상당했겠구나 싶더라.

다들 고생했다. 크리스마스를 얼마 안 남겨 놓고 촬영이 끝났다. 결국 뒤풀이를 크리스마스에 했다.

 

최악의 감독이네. (웃음) 컬러도 직접 아이디어를 냈나. 

미술팀과 공용 폴더를 만들고 레퍼런스를 공유했다. 내가 원하는 컬러 중에 실현 가능한 것을 추려서 미술팀과 콘셉트를 정리했다. 

박세영 ⓒ이영진

모텔과 자동차에 등장하는 녹색은 어떻게 만들었나. 야광이라고 해야 하나, 묘하게 발광하는 색이 눈에 띄더라. 

롤스로이스를 보면 밤하늘의 별을 표현하듯 천장에 다이아몬드 징 같은 걸 박아 놓거든. 원래 그걸 하고 싶었다. 태국에서 비슷한 느낌으로 커스텀한 차를 많이 봤는데 한국에는 별로 없더라. 그대로 구현하려면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서 결국 바닥에서 천장으로 쏘는 조명을 활용하게 됐다. 만 오천 원이면 사거든. 근데 촬영하다가 조명 리모컨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녹색밖에 못 썼다. 애초에 우리가 원했던 그림은 그게 아니다. 다양한 색이 나오면서 더 촌스럽게 빛났으면 했다.

 

노래방 미러볼처럼? 

딱 그거였다. ‘그래도 뭐 어떡해. 그냥 써야지.’ 하면서 할 수 없이 초록색을 메인 컬러로 정하게 됐는데 거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조명이 싸구려다 보니 카메라에 색이 잘 잡히지 않거나 너무 못생기게 나오는 거다. 색보정하는 과정에서 고민하다가 차라리 숨기지 말고 싸구려 맛을 살리자고 결정했다. 색을 강조하면서 글로우 효과를 주니까 말한 대로 야광처럼 보이더라.  

 

사운드 디자인 과정도 궁금하다. 음향효과와 음악이 거의 분리되지 않고 섞인다는 점이 흥미롭다. 음악은 마치 90년대 일본 드라마 OST처럼 청순하기도 하고, SF영화에 나올 법한 몽환적인 면도 있다. 여기에 온갖 신경을 긁는 소리들이 더해지며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컴퓨터에 다빈치 리졸브 프로그램 창을 세 개 띄워 놓고 편집, 색보정, 사운드를 동시에 작업했다. 본래 순서 편집을 마친 후 색보정과 사운드를 나눠서 진행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안 되겠더라. 노동량이 평소보다 늘어나더라도 샷이 좋은지 아닌지, 색깔이 얼마나 잘 먹는지, 소리가 어떻게 붙는지 한 번에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작업해서 가능한 방식이란 걸 안다. 이것도 나쁜 습관이라서 버리는 중이다. 

 

버리겠다고 다짐한 습관이 많다. (웃음) 

다빈치 리졸브도 버렸다. 지금은 프리미어 프로로 작업하는데 되게 힘들다. (웃음) 사운드 역시 ‘가내 수공업’으로 완성했다. 녹음한 소리, 저작권 무료 소스 등을 변형해서 넣었고, 음악도 내가 마스터링했다. 들어서 알겠지만 난 음악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다. 음악이 나오면 보통 다른 사운드 볼륨을 내려주지 않나. 이게 좋은 건 아닌 듯한데 난 오히려 볼륨을 키웠다.

 

혼자 일하는 것만큼이나 협업도 자주 한다. 관객이 아닌 클라이언트를 염두에 두며 일한 경험도 많은데, 양쪽 현장을 오가며 어떤 느낌을 받나.  

<다섯 번째 흉추> 찍을 때도 촬영 전날까지 외주 작업했다. 제작비를 마련하려고 3주 내내 쉬지 않고 일했거든. 사실 촬영하면서도 외주 작업 컨펌받고 재편집까지 했다. 늘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든 것 같다. 돈이 필요하니 일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러다 보면 꼭 일이 겹친다. 대조적인 상황이 재밌더라. 상업 현장에서는 돈을 퍼붓다시피 한다. 하루에 몇억도 금세 쓰니까. 감독은 뒤에 앉아서 그냥 지시를 내리는데 그가 “이거 해라”하면 곧 그렇게 된다. 근데 내 영화 현장에서 감독은 맨발로 뛰는 사람이거든. 뭐랄까, 지기 싫더라. 오기가 생겼다. 자본이 없으면 부족함이 발생한다. 그러면 그 부족함을 우리가 의도한 바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육체적으로 무리해서라도 채울 것은 채우고. 말하다 보니 클라이언트가 없는 환경이 마냥 좋지만은 않구나 싶다. 이러나저러나 눈치 보는 건 똑같거든.

 

왜 그렇게까지 고생하면서 또 영화를 찍나.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매체가 영화라고 판단한 건가.

나도 이유를 알고 싶다. 그래서 작년 말에 <지느러미>를 찍을 때는 단식을 했다. 하루에 초콜릿 바 하나씩 먹으면서 후반작업까지 마쳤다.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다. 게다가 연출과 촬영을 겸하다 보니 도무지 거리감이 안 생기더라. 자꾸 배우의 템포를 따라가게 되고, 속도도 빨라지고. 일부러 카메라는 더 무겁게, 내 몸은 더 가볍게 만들었다. 단식하면서 내 기운을 빼려고 했던 거다. 몸이 지치면 그나마 거리감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니더라. 밥을 안 먹거나 잠을 못 자면 오히려 약간 흥분 상태가 되지 않나. 그래도 좋은 경험이겠거니 한다. 

<다섯 번째 흉추>
<다섯 번째 흉추>

아까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게 된다. ‘이번에 아쉬웠으니 빨리 다음 작품으로 만회하자.’ <다섯 번째 흉추>는 어떤 점이 제일 아쉬운지 말해본다면.

관객을 고려하지 못했다. 누군가 이 화면을 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화면 내에 규칙을 만드는 데만 신경 썼던 것 같다. 좀 더 눈치를 봤다면 다른 영화가 나왔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다. 보상에 대한 아쉬움도 항상 뒤따른다. 도와준 분들에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안 좋다. 

 

그건 다음 작품을 만든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닐 텐데?

작품이 좋으면 해소되는 것 같다. 난 그렇거든. 돈 없는 현장에 갈 때도 작품이 좋고 감독이 좋으면 괜찮다. 근데 거기서 소통이 안 되면 다 관두고 집에 가고 싶어진다. 그런 기분을 안 느끼도록 현장을 만드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본다. 동료들과 늘 이야기한다. “서로 미안해하지 말고 그냥 좋은 작품을 만들자.” 그러다 미안함이 너무 커지면 다음 작품에서는 스태프 규모를 확 줄이기도 한다. 정답은 없다.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중요하다. 20만 원 있으면 20만 원에 맞춰서 찍고, 10억이 있으면 10억으로 만들 수 있는 걸 찍고.

 

<다섯 번째 흉추> 제작비는 얼마나 되나.

2천만 원 조금 안 된다.

 

영화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준 작품이 있나. 

일본 러브호텔을 찍는 작가 츠즈키 교이치의 사진집 『Satellite of Love』를 여러 번 봤다. 가장 큰 레퍼런스를 꼽자면 존 카사베츠. 딱 봐도 돈 없이 영화를 찍었구나 싶은데 그게 제약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가능한가. 어디서 발생하는 힘인가. 카사베츠 영화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카사베츠의 비밀을 알아냈나.

그보다는 굳이 자본에서 벗어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본을 모조리 등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영리하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하는구나. 돈이 얼마나 있는지를 떠나서, 돈이 어떻게 모이고 나뉘는지 그 흐름과 논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구나.  

 

영화를 만드는 기술보다 태도에 집중했다는 말로 들린다.

동시에 그걸 배웠다. 기술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아니면 아예 무지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는 사실. 내 이해도는 애매한 수준이니 이럴 바엔 백 퍼센트 이해한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고 봤다. 카사베츠의 경우, 기술에 관한 이해도는 거의 제로라고 생각했다. 혹은 기술을 일절 신경 쓰지 않기로 했거나. 카사베츠가 못생긴 이미지를 만들어도 못나 보이지 않는 이유다. 뭐든 대단한 의미 부여 없이 그냥 도구처럼 쓰니까. 말하고 나니 이 또한 태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박세영 ⓒ이영진

차기작 <지느러미> 진행 상황은 어떤가.

역시나 추가 촬영하면서 보완하는 중이다. 실은 작년 12월에 편집까지 끝냈는데 혼자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오희정 피디를 찾아갔다. 그분이 거의 처음부터 영화를 다시 만들듯 작업하는 걸 보면서 ‘이렇게 하면 후반에 훨씬 좋구나’라고 느꼈다. 그 후 칸 필름마켓 피칭 참가를 포함해 자본 시장에 뛰어드는 일을 뒤늦게 시작했다. <지느러미>도 진짜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만들었다. 전부 합해봤자 3,500만 원 정도인데 제작비가 10억쯤 되는 영화들과 섞여 피칭하는 것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돈 없이 찍어서 돈 있는 시장에 간 셈이지 않나. 자본을 끌어오려는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 내 영화를 포장해야 할까. 자본의 논리를 파악하며 그렇게 설득력을 갖춘 말하기 방식을 고민하는 일이 재밌더라.

 

‘지느러미’라면 이번엔 해양 생명체가 등장하는 건가.

아니, 어인족이 나온다. 인간은 인간인데 기형이다. 바다 오염으로 인해 기형종이 태어나고 한국 정부는 이들을 차별하면서 바다 청소부로 내팽개친다. 정부의 노예가 되어 혹독한 노동을 감당하는, 인간으로 분류되지 않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중에 한 명이 죽으면서 인간처럼 묻히고 싶다고 동료에게 유언을 남긴다. 주인공이 바로 그 동료다. 죽은 친구의 딸을 찾아서 그가 인간 세계로 들어가며 펼쳐지는, 말하자면 거대한 모험을 담은 블록버스터랄까. (웃음) 안티 파시즘에 관한 작품이기도 하고. 

 

관심사가 얼추 그려진다. 인터뷰에서 소통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왔다. 비인간으로 취급되는 존재에도 꾸준히 흥미를 느끼고.

겉보기엔 그저 자극적인 대상이지만 어떻게 맥락화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당연한 존재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두리가 중심부로 자리 잡는다든지 흔히 맥거핀으로 취급하는 것들이 핵심을 차지하는 상황이 내 영화에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 지역성에도 관심이 많다. 어릴 적 외국에서 살았는데 귀국하고 놀랐다. 이렇게 좁은 땅덩어리에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나누고, 심지어 경상도 안에서도 경북과 경남을 가르다니. 모든 것이 계급으로 연결되는 메커니즘이 내게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해외 생활은 어디서 했나.

캐나다 토론토. 아빠가 목사다. 신학 공부를 위해 1999년에 가족 전부 데리고 유학을 떠났다. 초등학교 6학년쯤 됐을 무렵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춘기에 접어드는 나이다. 적응하기 힘들었을 텐데. 

너무 무서웠다. 부모님도 걱정했는지 나를 일반 중학교가 아닌 대안학교로 보내더라. 포항 산골짜기에서 십 대를 보낸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 입학했다. 국어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던 건 그때부터다. 본래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한동안 재봉틀로 드레스 만들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책에서 마크 제이콥스를 인용한 문장을 봤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패션은 예술이 아닌 상업’이라는 내용이었다. 순간 패션에 정이 확 떨어졌다. 난 예술을 하고 싶었거든. 당시 개봉한 <다크 나이트>(크리스토퍼 놀란, 2008)를 보면서 ‘저게 바로 예술’이라고 생각했고 자연스레 영화과 진학을 결정했다. 근데 알고 보니 영화가 가장 상업적이더라. (웃음)

 

예술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놀이를 원했다. 카메라로 뭔가를 찍고 만드는 행위가 놀이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나중에 깨달았지. 애처럼 아무 생각 없이 놀이하려면 돈을 이해해야 하는구나. 

<다섯 번째 흉추>
<다섯 번째 흉추>

성격이 급하다고 하더니 말도 빠른 편이라는 걸 알고 있나. 1.5배속으로 영상을 돌리는 것처럼 단어와 단어 사이 호흡도 밭다.

시간 강박이 있거든. 딱히 시간을 정해두지 않았는데 지금도 인터뷰를 빨리 끝내야 할 것만 같다.

 

대사는 그리 빠르지도 많지도 않은데.

인물끼리 주고받는 대사 중 대부분은 배우들이 직접 만들었다. 내가 쓴 대로 말했다면 번역 투처럼 들렸을 거다. 실제로 영어로 시나리오를 쓴 다음에 한글로 번역한다. 당신이 원하는,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언어로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시나리오를 그런 방식으로 쓰는 건 영어가 편해서인가.

영어를 써야 글이 빨리 나온다. 이것도 지금 바꾸려고 한다. 혼자서 읽고 쓰는 것은 영어로 하는데, 실제 소통은 국어로 하고. 그러다 보니 점점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가 되더라. 

 

결이 한강에서 발견된 상괭이 사체에 관해 길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대사에도 배우들이 만든 부분이 있나.

그건 내가 쓴 대사인데 없애도 됐을 것 같다. 실제로 나도 배우들도 만족하지 못해서 몇 번이나 재촬영했던 장면이다. 배우들이 대놓고 말한 적은 없는데 ‘감독이 자기 생각을 우리 입 빌려서 말하는 거 아니야?’라고 의심하는 것이 느껴졌다. 실은 영화를 시작한 계기와 연결되는 이야기다. 한강도 어찌 보면 자본의 욕망이 투영된, 돈세탁하려고 만든 사업의 결과다. 이미 존재하는 걸 인간 편의에 맞춰 확장했는데 수영이 불가능할 정도로 오염됐다. 한강은 왜 그렇게 더러울까? 우리 민중은 한강을 그다지 존중할 만한 강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서울 중심을 통과하는데 다들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 한강 옆에서 먹고 마시고 여가를 즐기며 소비자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그 모습이 흥미롭게 다가오면서 한강을 부유하는 이물질은 끝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한강에 별걸 다 버리잖나. 아마도 임진강 따라서 흘러가다가 경계선에 모이지 않을까 했다. 영화의 모티브라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배우들이 원치 않더라. 나도 처음엔 당연히 “그럼 하지 말자” 했는데 추가 촬영하면서 마음을 바꿨다.

 

전체 촬영 기간이 얼마나 되나.

본 촬영, 그러니까 스태프랑 함께 찍은 건 8회차. 혼자 카메라 들고 추가 촬영한 분량이 5회차 정도 되고, 나중에 미술 감독들과 곰팡이 생명체 클로즈업 신을 하루에 찍었다. 어떻게든 편집으로 해보려다가 결국 “미안한데 다시 하자” 그러면서 지저분한 15회차가 됐다.

 

조각보 만들듯 완성했다.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 같다. 해야만 하니까 했다. 다음엔 다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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