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데드
<다섯 번째 흉추>
손시내 / Choice / 2023-08-05

<다섯 번째 흉추>의 주인공은 “더럽게 안 지워지는 곰팡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곰팡이에서 피어난 의문의 생명체다. 생명체는 척추를 강탈한다. 사람들의 척추를 하나씩 빼내어 모으더니 점차 인간의 형체를 갖춰간다. 이게 무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다섯 번째 흉추>에선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 영화는 생명체가 탄생하기 538일 전에 시작해서 그가 태어나고 484,498일 후에 끝난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서는 이 여정은 연인들의 찐득한 감정, 노동자들의 피로, 서울과 경기도의 풍경을 두루 아우른다. 독특한 스타일로 공포와 로맨스의 정서를 종횡무진하는 동안 영화에 고이는 건 의외로 기묘한 슬픔. 상대와 온전히 마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느끼는 외로움과 그리움이다. <다섯 번째 흉추>는 처음부터 인물들이 어긋나는 순간을 그린다. 두 명의 용달 기사가 건물 앞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며 재촉하고 화를 낸다. 짐을 옮기려고 기사를 부른 이가 하필 약속 시간에 늦은 모양이다. 기다리던 자들이 떠나면 골목 끝에서 결(문혜인)이 달려 나온다. 불과 3초 차이로 이들은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 틀어진 자리에 제법 멀쩡한 모습의 매트리스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다. 여기가 바로 곰팡이가 태어나 머물게 될 서식지다.

곰팡이는 결과 그의 연인 윤(함석영)의 자취방에서 처음 피어난다. 결이 좁은 방으로 가지고 들어온 매트리스는 방이 점차 아수라장이 돼가는 동안 조용히 희고 푸른 균을 키운다. 결과 윤이 보통의 연인들처럼 다정한 날과 미운 날을 번갈아 보내다 마침내 다툴 때, 북받치는 감정을 어쩔 줄 모르는 결이 “죽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을 때 곰팡이는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이 생명체의 삶은 “저주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정말 괴이한 일은 그때부터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다. 그저 얼룩 정도에 불과했던 곰팡이는 어느새 기다란 촉수로 자라나 사람의 몸을 건드리는 지경에 이른다. 촉수는 매트리스 가까이 있는 인간의 척추를 마치 과일 따듯 똑 떼어간다. 그러더니 점차 부피 큰 무언가가 되어간다. 나중엔 급기야 내장 기관 비슷한 것마저 생겨난다. 이 괴상한 생명체를 보며 중얼거릴 수밖에 없다. 아니, 이게 언제 이렇게 컸지? 감독은 자취방 벽에서 자라난 곰팡이를 보고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때 그 곰팡이는 과연 무얼 먹고 그렇게 자랐을까. <다섯 번째 흉추>의 생명체는 사랑, 증오, 분노, 질투, 연민, 다정함, 그리고 척추를 양분 삼아 자란다.

<다섯 번째 흉추>
<다섯 번째 흉추>

생명체가 무럭무럭 커가며 마주치는 인물의 면면은 다양하다. 종알종알 말 많은 결은 한강 아래 묻힌 타인의 무수한 비밀을 가늠해 볼 정도로 주변에 관심이 많다. 그의 연인 윤은 좀 회피하는 성격이다. 이야기를 듣다가도 까무룩 잠들어 버리곤 한다. 그러니 어쩌면 둘의 이별은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결이 윤을 떠나자 생명체는 윤의 척추뼈 하나를 빼앗는다. 최초의 척추 강탈이다. 희미한 시야와 숨소리를 얻은 생명체는 곧 매트리스와 함께 거리에 버려진다. 그리고는 잠시 짬을 내 담배를 피우는 공장 노동자들의 척추를 쏙쏙 뽑아댄다. 매트리스의 다음 행선지는 휘황찬란한 러브모텔. 비를 피하러 급하게 모텔에 들어온, 실은 이별 직전의 연인 율(온정연)과 준(정수민)이 다음 희생양이다. 단호하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율과 그런 상황이 안타까운 준. 이들은 한때 정말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그만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만드는 슬픔을 보여준다. 어쨌거나 결국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은 곧 척추를 빼앗긴다. 꽤 많은 척추를 모은 생명체는 이제 미숙하게나마 대화도 시도한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낼 뿐이지만, 병상에 누운 솔(김예나)은 놀랍게도 그의 말을 알아듣는다. 솔과의 만남 이후에도 생명체는 매트리스와 함께 서울 곳곳을 떠돈다. 누군가 매트리스를 버리면 또 누군가 다시 주워간다. 그러는 동안 거리를 떠도는 풋풋한 연인과 피로에 찌든 배달 기사, 그 밖의 다양한 이들이 등뼈를 빼앗긴다.

부지불식간에 척추를 잃은 사람들 사이엔 희미하게 공통점 하나가 보인다. 타인과의 소통을 간절히 원하지만 끝내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너와 나 사이에 완전한 소통이란 도대체 가능한 것일까? 애초에 잘못된 질문이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그 수많은 연인들은 왜 그토록 눈물과 욕설을 흩뿌리며 헤어졌겠는가. 어쩌면 영화 속에 넘쳐나는 극단적 클로즈업은 그처럼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영화 나름의 언급인지도 모른다. 얼굴 전체가 화면에 안정적으로 담기는 경우와 달리, 프레임에 입술과 치아만 가득 찰 정도의 극단적 클로즈업은 반응이나 응답의 쇼트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통상적 사이즈를 벗어난 쇼트들이 관습적 편집 규칙으로부터 일종의 자유를 얻는 셈이다. 어쨌거나 여기서 소통과 대화는 불가능하다. <다섯 번째 흉추>는 소통 불능의 상황을 매트리스와 곰팡이라는 독특한 설정과 특유의 촬영, 편집으로 맞닥뜨려 본다. 영화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그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장치를 찾는 방식으로 동력을 얻는다. 그렇게 아주 멀리, 서기 3328년까지 간다.

<다섯 번째 흉추>
<다섯 번째 흉추>

<다섯 번째 흉추>는 물론 아주 낯설어 보이는 영화지만 실은 익숙하게 볼 여지도 얼마든지 있는 작품이다. 피, 점액질, 근육, 피부의 혼합물처럼 생긴 이상한 생명체는 우리가 일찍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1983)이나 존 카펜터의 <괴물>(1982) 등에서 봐 왔던 괴생명체와 무척이나 닮았다. 인간이 인간 아닌 존재에게 무언가를 빼앗기고 운동성을 잃은 채 풀썩 고꾸라지는 모습은 ‘개념을 빼앗는’ 외계인이 등장하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2018)를 떠올리게도 한다. 영화의 기묘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건 다름 아닌 음악인데, 마치 우주에서 들려오는 듯한 사운드트랙은 신시사이저 음악가로 유명한 토미타 이사오의 작업을 단번에 생각나게 한다. 물론 <다섯 번째 흉추>는 이 다양한 요소를 마음껏 재조합해 독창적인 세계를 만들어 낸다. 다른 별에서 온 것처럼 낯설면서도, 한편으론 연출자를 매혹시킨 여러 레퍼런스의 놀이터와도 같은 이 독특한 작품은 영화, 조형예술, 비디오아트를 전공하고 <캐쉬백>(2019), <갓스피트>(2020) 등의 단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박세영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영화다.

 

다섯 번째 흉추 The Fifth Thoracic Vertebra 감독 박세영 출연 문혜인, 함석영, 온정연, 정수민, 김예나 제작 문스톤 픽처스 배급 인디스토리 제작연도 2022년 상영시간 65분 등급 15세이상관람가 개봉 2023년 8월 2일

 

 

Choice
꿈의 궁전
<내가 누워있을 때>
손시내
2025-05-31
Choice
삼마이 나가신다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
손시내
2025-03-21
Choice
오직 한 번
<두 사람>
차한비
2025-02-12
Choice
아이 없는 학교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손시내
2024-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