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테 혹은 피아노
<드림팰리스> 김선영·이윤지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3-06-16

<드림팰리스> 시사회에서 김선영은 “이렇게 40대 아줌마들 둘이 나와서 자식이나 건강 말고 본인들 얘기하는 영화가 거의 없잖아요”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윤지는 두 가지 기쁨을 말했다. “선영 언니”와 연기한 시간이 즐거웠고, 스크린을 선명히 채운 자기 맨얼굴을 보며 통쾌했다고. 그러다 작품 속 인물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여전히 혜정과 수인으로 살아가는 듯 둘 다 눈물을 글썽였다. <드림팰리스>는 그간 알게 모르게 묵혀 온 갈증을 해소해준 고마운 작품이다. 아마도 출발선에 선 그들에게 응원보다는 염려가 수시로 쏟아졌을 테지만 둘은 지혜롭게 함께 가는 길을 찾아냈다. 온도를 따지면 둘 다 뜨거운데 화면을 장악하는 방식은 딴판이다. 김선영은 유연하면서도 강직하다. 물 흐르듯 자유로운 와중에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만큼 제 자리를 세게 붙잡는다. 용암이 터져 나오는 활화산처럼 김선영은 눈에 보이는 인물과 상황을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린다. 한편, 이윤지는 저만 아는 곳간에 장작을 부지런히 쌓아둔 듯 계속해서 불씨를 살려낸다. 불길은 은근하게 타오르더니 끝내 바닥 전체를 달궈 놓으며 화력을 입증한다. 만만치 않은 열기가 충돌하는 가운데, 놀랍게도 <드림팰리스>는 ‘불꽃 튀는 연기 대결’ 같은 수식을 거부한다. 산업재해와 아파트 미분양 사태 등 몰아치는 사건 속에서 인물들은 서로 대립각을 세우지만 두 배우의 연기는 셈여림을 조율하며 근사한 화음을 쌓는다. 덕분에 혜정과 수인의 만남은 남김없이 활활 태워버리는 사고가 아니라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사건으로 남는다. 개봉하고 열흘이 지났을 무렵, 두 배우를 만났다. 여전히 김선영은 이윤지를, 이윤지는 김선영을 귀하게 대했다. “우리 윤지 참 좋은 배우”라며 김선영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 이윤지는 쑥스럽다는 듯 말없이 듣다가 “맥주 사올까요?” 농담했다. 치열했던 현장에서 둘은 든든한 언니와 애틋한 동생을 얻었고, 그렇게 각자의 방식대로 상대를 챙겼다. 둘은 지금도 영화를 소개하는 자리에 부지런히 나선다. 그들이 서로에게 발견한 것을 관객도 분명히 봐주리라 믿어서다.

 

 

시기나 상황에 따라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드림팰리스>에 얼마나 만족하나.

김선영_ 안 할 이유가 없는 작품이었다. 시나리오가 깊은 울림을 줬고 다행히 촬영 일정도 맞출 수 있었다. 난 마음대로 작품을 고를 수 있는 배우가 아닌데 이렇게 긴 호흡으로 연기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결과물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볼 때,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내 만족을 정하진 않는다. 내게 작업은 새로운 감독을 만나 그의 색깔을 접하는 경험이고, 이를 하나하나 인정하고 존중하며 맛보는 과정이다. 완성도에 따라 매기는 점수는 큰 의미가 없다. 그렇게 치면 내 연기는 항상 100%겠나.

 

100%는 거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김선영_ 내가 그런 면이 없잖아 있지. 인정합니다. (웃음) 영화 연기를 여기까지만 하고 끝낼 것도 아니고, 배우에게 중요한 건 편견에서 벗어나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이다. 완성본을 보며 가성문 감독은 <드림팰리스>를 어떻게 만들고 싶었는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 확인하면서 나의 시야를 확장하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재미와 만족감을 느꼈다. 이와 같은 작품을 계속하면서 배우로 살아갈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드림팰리스>
<드림팰리스>

이윤지 배우는 어떤가. 누구보다 작품과 연기에 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듯하다.

이윤지_ 영화 경험이 많지 않기에 이 분야가 늘 궁금했다. <드림팰리스>는 내게 새로운 시작점인 것 같다. 처음으로 돌아간 느낌을 받는다. 그간 지향점이라고 해야 할까, 살아가며 바라볼 지점을 명확히 찾지 못했던 것 같다. 언제나 작품을 통해 만나는 인물, 그 인물이 된 나에게만 집중했다. 스물아홉에 사춘기 같은 내적 풍랑을 겪었는데 서른아홉에 그게 한 차례 또 왔다. 일하고 아이들 키우면서 끝없이 분주한 와중에 ‘여기가 어디지? 이 나이쯤 되면 뭔가 찾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모르겠네?’ 하는 상태가 된 거다. 그 무렵에 <드림팰리스> 출연을 제안받았다. 시나리오가 훌륭해서 단숨에 선택했지만, 무엇보다 마흔을 앞둔 그 시점에 수인이라는 인물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꼭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 난 욕심도 질투심도 많은 편인데 모순되게도 남과 비교하는 성격은 아니다. 때마다 만나는 캐릭터에 당시 내 모습과 삶이 자연스레 들어간다고 여기는 편이라 지난 작품에 관해서도 크게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연기하면 더 잘할지도 모르겠지만 연기에 정답은 없지 않나. 최선을 다했기에 만족한다.

 

그러고 보면 수인도 ‘여기가 어디지?’ 자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윤지_ 내 삶과 캐릭터의 삶이 기찻길처럼 나란히 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수인을 맡아서, 수인과 마음을 함께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내게 여러모로 영향을 준 작품이다. 이 인물과 현장 덕분에 많은 생각을 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분이 실질적으로 영향을 줬고. (웃음) 아까 말했던 바라볼 지점을 선영 언니 덕분에 좀 찾게 됐거든. 말할수록 ‘덕후’ 같은 느낌이긴 한데 내가 살면서 계속 쫓아다니고 싶은 언니라고 해야 하나. 언니는 왜 이렇게 질척대냐며 뿌리칠 수도 있지만.

 

긴 시간 연기했지만 그간 둘 사이에 접점은 전혀 없었다. <드림팰리스> 전까지 김선영과 이윤지를 나란히 떠올렸던 사람도 거의 없을 거다. 서로 캐스팅 소식을 듣고 어땠나.

김선영_ 윤지의 연기를 본 적은 많지 않다. 이 친구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난 연극에 매진했다. 집에 TV도 없었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당시 유행가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러다 내가 TV와 가까워질 무렵엔 윤지가 아이를 낳으면서 활동을 쉬었다. 서로 존재는 알아도 현장에서 만날 일이 없었다. 근데 하루는 어떤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이 친구 눈이 좋다고 느꼈다. 배우들 버릇이고 또 내 편견일 수도 있는데, 눈을 보면 마음이 좀 그려진다. 마음이 유연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아니면 마음을 가만히 굳혀 놓는 사람인지. 윤지는 잠깐 봤을 때도 전자였다. 한번 계기가 생기면 마음이 확 퍼져나갈 배우라고 생각했기에 수인 역에 잘 어울릴 거라 기대했다. 수인은 연기를 아무리 기술적으로 잘한다고 해도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으면 표현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상대 배우로서 고마웠다. 이 친구 눈을 보며 연기하는데 볼수록 눈에 힘이 있더라. 깊고 슬프고 진심이 전해지는 눈. 윤지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 보고 너무 자랑스럽지 않을까? 주변에서 윤지 얘기를 많이 한다. 이 배우가 연기를 이렇게 잘하냐고, 이런 모습을 보여줄 줄 몰랐다면서 다들 깜짝 놀라더라.

김선영 ⓒ이영진
김선영 ⓒ이영진

‘연기를 잘한다’, <드림팰리스>를 봤다면 누구나 할 말이다. 오늘은 그걸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면 좋겠다. 연기를 어떻게 그토록 잘하는지.

김선영_ ‘어떻게’에 관해 듣고 싶으면 돈을 내라. (웃음) 기자 꿈이 배우인가? 왜 그걸 궁금해 하나.

 

영화 속 이윤지 배우를 지켜보며 나 역시 놀랐거든. 수인의 상황이나 심정과는 별개로 속 시원한 연기였다.

김선영_ 숨어 있던 보석을 발견한 느낌이지. 얘가 이렇게 연기하는 걸 사람들이 잘 모른다. 대개는 데뷔 당시 예쁘고 통통 튀는 이미지로만 기억하거든. 윤지에게서 다른 모습을 찾아낸 감독도 대단하다. 오래전 어떤 영화에서 윤지를 봤다고 하더라. 왠지 모르게 자꾸 생각나서 그때부터 마음에 뒀다고. 인지도나 다른 요소 때문에 이 친구를 캐스팅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기가 꽂혀서 밀고 나간 거다. 윤지에게 수인 역을 제안하고 끝까지 믿어줬다는 점에서 감독이 참 뛰어난 사람이구나 싶더라.

 

이윤지 배우를 떠올리면 기억나는 장면이 몇 개 있다. 예를 들면 드라마 <제3의 매력>(JTBC, 2018)에서 자기 합리화에 빠진 수재(양동근)를 다그치던 주란의 모습. 버럭 소리를 지른 다음에 돌아서서 눈을 질끈 감더니 결국 그 공간을 나와서야 눈물을 터뜨린다. 그 순간 인물을 넘어 배우의 마음씨가 드러난 듯했다. 화가 날지언정 소중한 사람 앞에서는 눈물을 꾹 참는구나, 그렇게 상대를 지키는구나 싶더라.

김선영_ 배우에게 관심 많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가 보다. 원래 난 연출을 꿈꿨는데 공부하면서 알았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연기 디렉팅이구나. 실제로 외국에는 연기 디렉터라는 전문 영역이 존재하지 않나. 연기를 통해 진실을 빚어내는 아주 짧은 순간, 난 그때 짜릿함을 느낀다. 내가 잘할 때보다 다른 배우를 잘하게 할 때, 그와 소통하면서 좋은 연기를 찾아냈을 때 느끼는 희열이 어마어마하다. 남편인 이승원 감독과 꾸려가는 ‘극단 나베’에서 그 일을 한다. 연출은 남편 몫이고 나는 딱 배우들 연기에만 집중한다. 올해 봄 <에뛰드>를 선보이면서 그런 기쁨을 느꼈다.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김선미 배우에게 몇 년간 얘기했던 부분이 있다. 연기 정말 잘하는 배우인데,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뭔가 나올 것 같은데 그 친구가 자꾸 중간에 멈추더라. 그러지 말고 해보자, 해보자 했는데 이번에 진짜 해냈다. 무대 보면서 울었다니까. 근데 선미도 같은 말을 하더라. 자기 이제 알았다고, 그게 뭔지.

이윤지_ 듣는 나도 눈물 날 것 같다.

 

하지만 현장에서 배우들끼리 연기에 관해 터놓고 말하기란 쉽지 않을 텐데. 둘은 어땠나.

김선영_ 평소에는 절대 얘기 안 한다.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아도 최대한 거절한다. 난 극단에서 일을 하다 보니 알거든. 그게 얼마나 신뢰가 쌓여야 가능한지. 잠깐 본 것으로 말하거나 적당한 친분으로 접근해서 될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그 현장에 연출자로 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상대가 연기에 집중하도록 내 에너지를 평소보다 크게 줄 때는 있다. 난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신이지만 상대와 함께, 좀 더 과하게 연기하는 식이다. 하지만 <드림팰리스>처럼 깊이 있는 작품을 하다 보면, 서로 믿음이 있다는 전제하에 조심스레 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는 순간도 이따금 마주한다.

이윤지_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가지 않더라도 촬영하면서 순간순간 느꼈다. 언니가 날 살피고 있구나. 예를 들어 수인과 혜정이 창문 철창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장면. 언니가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그때 내 바스트 신을 먼저 찍자고 했다. 둘의 관계가 절정으로 치닫는, 영화 흐름상 중요한 장면이기에 긴장감이 상당했다. 내가 인물에게 몰입해 있다는 것, 그래서 마음이 괴롭다는 것을 언니가 알아차린 듯했다. 나중에 완성본을 보면서도 “지금 수인이 너무 좋으니까 수인이부터 찍자” 슬쩍 얘기하던 언니 모습이 떠오르더라. 결국 우리는 현장의 배우로서든 영화 속 인물로서든 각자의 해석과 입장을 갖고 부딪쳐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충분히 표현할 수 있도록 언니가 기회를 주는 느낌을 받았다.

김선영_ 알고 있구나? (웃음) 앞서 말했듯 모든 작품에서 그렇게 하진 않는다. 이 영화가 특별한 경우다. 감독님과 신뢰를 쌓은 상태이기에 의견을 냈고, 결국 우리 영화를 위해 선택했던 바다. 연기 디렉팅을 오래 하다 보면 그냥 알 때가 있다. 이 배우, 지금이다. 이거 놓치면 다음엔 안 나올 수도 있다. 윤지를 옆에서 지켜보며 몇 번 그런 순간을 목격했다. 당구장 신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카메라가 날 찍는 중이었는데 빨리 바꾸자고 했다. 지금 카메라 뒤집어서 윤지 찍어야 한다고. 보통 현장이라면 그런 짓은 안 한다. 포지션을 벗어나는 일이고 다르게 말하면 월권 아닌가. 이 작품에서 거의 처음으로 용기를 냈다. 나만 잘 나온다고 좋은 영화가 될 리 없으니까.

<드림팰리스>
<드림팰리스>

철창과 당구장 신, 분위기는 정반대라고 할 만큼 다른데 둘 다 동일한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혜정과 수인의 관계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사랑 아닐까. 전사를 보여주는 플래시백 장면 한 번 없이 현재의 분노와 죄책감 등을 표현하며 상대를 향한 끈덕진 애정을 설득해 냈다. 이 과정은 어떻게 가능했나.

김선영_ 관계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것, 우리는 그걸 시나리오에서 읽었다. 사랑하지 않고 관심 없는데 왜 화가 나겠나. 얘는 날 믿고 따르며 좋아했으니 저만큼 분노하는 것이고, 나 역시 얘를 아끼고 의지했으니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거다. 전사는 편집된 것이 아니라 애초 시나리오에 없었다. 하지만 글에 묘사된 관계를 통해 원망, 미안함, 그리움, 안타까움 등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그 모든 감정을 바탕에 품은 상태였으니 혜정과 수인이 만나는 순간 그게 어떻게든 표현될 수밖에 없었겠지. 혜정이 천막 농성장에 와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수인이를 본다. 영화에서 둘은 그렇게 시작한다. 사실 그때 난 헤어진 연인을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쟤가 저러고 있는 게 가슴 아프고, 부끄러우면서 억울하기도 하고.

이윤지_ 난 계속 속이 상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내내 고민했는데 ‘속상하다’ 외엔 달리 못 찾겠다. 지금 언니가 그 장면을 얘기하는데도 속이 상한다. 적어도 속이 상했다는 말의 깊이를 스스로 이해하는 만큼 속이 상해버렸다. 수인이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 느꼈을 슬픔과 맞먹을 정도로 혜정에게 속상했던 것 같다. 이미 더 상할 수가 없는 지경인데 계속 상하는 거다. 아마 난 계속 그러지 않을까. 수인과 혜정을 생각하면 할머니가 돼도 속상할 것 같다.

김선영_ 우리 윤지 참 좋은 배우다. 흔히 감성이 풍부하다고 하지 않나. 이 친구는 내가 만난 배우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하다. 어디 저장 창고인지 항아리인지 뭔가 하나 있는 것 같다. 사실 사람이 감정을 쏟아내고 나면 다음에 똑같이 그러기가 힘들거든. 근데 윤지는 신기할 정도로 계속해서 내놓는다. 그런 배우가 드물게 있더라. 배두나 배우도 그렇다. 둘이 되게 비슷하다. 난 아니다. 사람이 모든 걸 가질 순 없지.

이윤지_ 와, 방금 그 말 다시 해줬으면 좋겠다. 정면에서 표정을 보고 싶다. (웃음)

김선영_ 근데 진심이다. 배우로서 굉장히 부럽거든.

이윤지_ 그러지 맙시다. 인간적으로 그것까지 욕심내지는 말아야지.

김선영_ 타고나는 영역이라고 본다. 그건 윤지가 삶을 거쳐오며 얻은 선물이기도 하지만, 실은 DNA 자체가 다른 거다. 교감 신경이 남들보다 한 3배쯤 많다든가. 근데 힘들지 않나? 감정을 그렇게 쓰다 보면 벅차고 아플 때도 있을 텐데.

 

작품 속 인물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눈에 밟히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실제로 어떤가. 남다른 면이 있다는 걸 자각하나.

이윤지_ 이렇게 말하면 언니의 DNA 가설을 인정하는 듯한데 평소에도 소리를 잘 듣는다. 솔직히 역할을 준비하는 방법에 관해 잘 모르겠다. 내 경우엔 들린다. 인물의 속내가 계속 들려오고 그걸 잘 말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연기한다. 점점 소리에 민감해져서 요즘엔 텔레비전을 길게 못 본다. 어릴 적엔 텔레비전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그 바람에 배우가 됐는데.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음 아픈 일이 종종 있다. 기쁘면 이렇게 기뻐해도 되나 싶고, 슬프면 언제까지 이렇게 슬프려나 싶고. 그러다 연기할 때 가끔 귀랑 입이 일치하지 않으면 난처해진다. “언니, 도와주세요. 소리가 들리는데 말이 안 나와요.” (웃음)

김선영_ 너도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단다. (웃음) 배우에게는 큰 재산이다. 그만한 감수성을 지닌 입장에선 삶이 종종 버겁겠지만. 말하자면 윤지는 피부를 한 겹 벗겨낸 상태인 거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건드린다고 해도 피가 안 나지. 근데 윤지는 표피가 없으니 바로 피가 나버린다.

이윤지_ 그래서 연기하다 보면 일면 해소가 되기도 한다. 예민함이 쓸모를 가지니까.

이윤지 ⓒ이영진
이윤지 ⓒ이영진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다.

김선영_ 그렇지, 어떤 배우들은 윤지를 너무너무 부러워할 거다. 결국 사람마다 가진 것이 다르다는 뜻이다. 김혜수 언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자신의 단점을 명확히 파악하고 개선하려 노력하는 건 중요하지만, 단점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더라. 어쨌든 배우는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하니까. 그래서 나도 뱃살에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웃음)

 

그러면 이번에는 김선영 배우의 재능에 관해 말해보자. 이만큼 모든 계급을 자유자재로 소화하는, 사회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선을 순간 이동하듯 넘나드는 배우가 또 있을까? 단지 외양을 변신하며 귀족과 하층민 전부 표현한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미천한 자의 고귀한 면부터 아주 고상한 인물의 천박한 면까지 낱낱이 드러낸다. 이건 타고난 건가, 아니면 남모를 노력의 결과인가.

김선영_ 재밌는 얘기다. 연기 잘한다는 말은 꽤 들어봤는데 이건 처음 듣는 표현이다.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주변에 말을 좀 해줘라. (웃음) 돌이켜보면 어릴 적부터 사람에게 관심이 병적이다 싶을 만큼 많았다. 종종 오해받기도 했다. 매체 일을 막 시작했을 무렵이다. 현장에서 만난 배우의 연기가 좋아서 대기 시간에 이것저것 물어봤다. 몇 차례 말을 주고받았는데 그분이 “취조당하는 느낌”이라고 하더라. 그제야 깨달았다. 의도가 어찌 됐든 내 관심에 누군가는 불편해할 수도 있구나. 당시만 해도 그 정도로 눈치가 없었다. 늘 사람이 궁금했고 한 번 대화를 시작하면 질문이 끝나질 않았다. 지금도 선명한데 예닐곱 살쯤 됐을까. 동네 친구가 언니랑 싸웠다는 거다. 집 근처 밭을 빙글빙글 돌면서 해가 지도록 걔를 붙잡고 물어봤다. 왜 싸웠는지, 기분은 어땠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말하자면 난 그 애의 마음과 선택, 삶이 다 궁금했던 거다. 20대까지 그랬다. 우스갯소리지만 살인자 빼고 다 만나본 것 같다. 나이, 성별, 직업 등 온갖 조건을 막론하고 다양한 사람과 만나서 대화했다. 연극을 하던 시절에는 대학로에서 노숙자들과 새벽까지 술 마신 적도 있다. 다음날 마로니에 공원 근처 교회에 따라가서 무료 배식하는 밥도 얻어먹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질문을 받으니 그때가 떠오른다. 전기 기사에게 무슨 일하는지 묻다가 핀잔 듣고, 몸에 커다란 호텔 수건 한 장 두르고 길바닥에서 담배 피우는 여자애랑 우연히 만나 놀기도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김선영이 연기한 인물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는 모멸감 때문인 듯하다. 살다 보면 한 번쯤 혜정처럼 제 테두리에서 밀려나는, 억지로 무릎 꿇리는 듯한 기분을 맞닥뜨리지 않나.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뒤얽히는 그 순간을 예리하게 비춘다. 그 감정이 워낙 파괴력을 갖다 보니 깊이 들여다보지 못한 채, 그저 연기 잘한다는 칭찬으로 뭉뚱그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김선영_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모멸감은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고 나 역시 자주 경험했다. 사람이 겁이 없으면, 혁명적으로 자기 개방을 하다 보면 그런 순간에 쉽게 노출된다. 난 수백 가지 모멸을 겪어봤다. 말, 제스처, 표정으로 다가오는 화살들. 예전에는 버스 정류장 근처에 노점상이 많았잖나. 작은 창문 하나 두고 신문 파는 곳. 난 거기서도 모멸감을 느껴봤다. 정확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내가 상점 주인에게 뭘 물어봤겠지. 그분에게서 받은 인상을 잊을 수 없다. ‘너 같은 게 감히? 뭘 그런 개떡 같은 질문을 하고 있어?’ 말하는 듯한 느낌. 그러면 별수 있나. 혼자 집 가는 길에 곱씹어 보는 거지. 딱히 대꾸할 말이 없거든. 당시엔 마냥 억울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이해가 간다. 그분은 그럴 만했다. 왜? 내가 낯설었을 테니까. 익숙하지 않은 존재가 훅 들어오면 누구나 공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드림팰리스> 촬영 현장
<드림팰리스> 촬영 현장

그렇다면 현재 관심사는 무엇인가.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눈여겨보는 대상이 있다면.

김선영_ 따지고 보면 관심사는 줄곧 변하지 않는 듯하다. 좋은 연기, 좋은 배우, 좋은 작품을 만나면 가장 신난다. 최근 <이니셰린의 밴시>(마틴 맥도나, 2023)를 봤다. 우정이 끝난 시점에서 영화가 시작하지 않나. 대체 그런 발상은 어디서 기인했을까. 코멘터리 영상을 봤는데 감독이 10년 전에 생각했다고 하더라. 언젠가 우정이 끝나는 순간부터 시작하는 영화를 만들 거라고. 그런 얘기를 듣고 나누는 시간이 재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파헤치고 굴려 나가는 작업, 일종의 창조 아닌가. 난 무엇을 하든 24시간 내내 그런 상태에 가깝다. 그림을 오래 그리는데 요새 백현진 음악을 자주 듣는다. 예전에 들리지 않던 백현진의 이야기와 목소리가 신기하리만치 와 닿는다. 정말 좋은 의미로 이 사람 미쳤구나 싶더라. ‘어떻게 이 무시무시한 생각을 이토록 쉽게 툭 꺼내 놓지? 어떻게 이런 말투와 목소리로 노래하지?’ 내가 경험한 적 없는 시간을, 어느 찰나의 정서를 음악으로 그려버리거든. 듣고 나면 그 노래 속에서 살다 온 사람이 된다. 김밥 먹고 책 보다가 자위하더니 개운하지 않은 낮잠을 잔 남자, 그의 삶을 내가 살아버린 거다. 백현진의 노래를 통해 연기적 스펙트럼을 넓히는 셈이다. 그처럼 강렬한 순간을 선사하는 예술가를 발견하면 심장이 뛴다. 내가 생각하는 위대함이란 바로 그런 거다. 내게 동력이 되어주는 걸 하나하나 얘기하려면 밤을 새워도 시간이 모자란다. 그림과 음악, 내 외로움에 집중하는 것, 끊임없이 자극을 찾아 헤매는 것. 그러다 보니 일상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편인데 다행히 가족들과 성향이 잘 맞는다. 남편과 딸, 우리 셋은 다들 자유롭게 살거든. 자극을 좇다가 어느 순간 과부하에 걸리면 아무것도 안 한다. 사실 아무것도 안 한다기보다는 아무것도 안 하는 내 상태에 집중하는 거다.

이윤지_ 계속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최근 내 관심사는 선영 언니인 것 같다.

김선영_ 난 관심받을 만한 가치가 있지. 아주 좋은 관심사다. (웃음)

이윤지_ 얼마 전에 깨달았는데 언니는 거의 모든 면에서 나와 다른 사람이다. 사실 난 곁에 사람을 많이 두는 스타일이 아니다. 속이 시끄럽다 싶을 만큼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많다 보니 그만한 기운이 나지 않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과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겪거나 스스로 문제라고 여겼던 것은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바퀴를 굴려 가며 조용히 살아가는 데 집중했다. 결혼 전 얘긴데, 하루는 아빠가 걸쭉하게 취하신 채 부르시더라. “윤지야, 너 친구 만들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이러다 내 결혼식에 친구 딱 둘만 오게 생겼다면서 걱정하시는 거다. (웃음) 그때나 지금이나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편이 아니다. 근데 이상하게 언니한테는 자꾸 찝쩍댄다. ‘언니가 왜 좋지? 나답지 않게 왜 자꾸 달라붙지?’ 생각해 보니 너무 달라서인가 보다. 여기서 반전은 우리 MBTI가 똑같다는 사실이고. (웃음)

 

이윤지가 생각하는 이윤지는 어떤 사람인가.

이윤지_ 오래전부터 날 소금쟁이에 빗대곤 했다. 언제나 물에 떠 있는, 아마도 후 하고 불면 날아갈 정도로 가벼운 소금쟁이. 다리 길이는 일정한데 물 위에서 다리를 뻗는 간격이 점점 벌어진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하루하루 수행하는 과제라든지 역할이 늘어나고 버거워져서 다리가 찢어질 것 같은 순간. 이러다 물에 빠지겠구나 싶을 때쯤 사춘기처럼 뭔가 왔다. 스물아홉과 서른아홉, 10년에 한 번씩. 언니가 말한 그 감정 항아리가 꽉 차버렸던 시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몸으로 반응이 나타난다.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고 토해버린다거나. 흔히 아홉수라고 하지 않나. 이게 그거구나 하고 넘기면 될 일 같기도 한데 내 딴에는 꽤 심각하게 치른다. 다행히 이번에는 운명처럼 그때 언니를 만났고.

김선영_ 듣다 보니 기억난다. 일전에 윤지한테 어떤 배우랑 친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문소리, 김태훈 배우랑 가깝게 지내고 서로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한다. 이 업계에서 계속 일하려면 그런 사람을 찾는 건 중요하다고 본다. 마음을 나눠야 하니까. 근데 윤지가 자기는 배우 친구 별로 없다면서 웃더라. 신기했다. 속으로 ‘그동안 얘 힘들었겠는데?’ 했다. 나보다 이곳에서 훨씬 긴 세월을 보낸 친구 아닌가.

 

동종 업계 친구가 꼭 필요하다. 중간부터 끊어서 얘기해도 알아듣는 사람.

김선영_ 그건 정말 중요한 힘이다. 같은 일하는 사람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뭔가가 있거든.

이윤지_ 언니한테 의사를 물어본 적은 없지만 요즘 ‘무슨 일 생기면 선영 언니한테 일러야지!’ 생각한다. 딱히 그럴 일도 없으면서.

김선영_ 일러라. 같이 욕해줄 수 있다. 그렇게 얘기할 사람 한두 명은 꼭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살지. 숨이 좀 쉬어지지. 일단 욕을 많이 해야 한다. 나랑 얘기하자.

이윤지_ 아이고, 감사합니다. (웃음)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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