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만개한 계절, 카메라는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보더니 조금씩 뒤로 물러난다. 하늘과 벚꽃이 네모난 창문 너머에 자리하면 심박수 측정기를 비롯한 각종 병원 장치의 일정한 소음을 배경으로 여자들의 대화가 들려온다. 멀리 보이는 세상은 아름답지만 그녀들은 병실에 갇혀 있다. 둘 중 하나는 죽음이 임박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시간이 좀 더 남아 있다. 죽음을 직감한 여자는 유언을 전하듯 마츠리(고마츠 나나)를 보며 힘주어 말한다. “끝까지 살아내도록 해.”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이 깃든 당부, 하지만 마츠리는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불치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마츠리의 기대 여명은 10년. 시작하기도 전에 결론이 나버린 삶 앞에서 마츠리는 우는 법을 잊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켜본 타인의 죽음은 제 미래의 예고편 같은데 10년은 매일 슬퍼하며 보내기엔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다. 마츠리에게 스무 살의 봄은 애매해서 잔인하다.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자니 못해본 게 너무 많고, 어디론가 나아가자니 눈앞을 가로막는 벽이 선명하다. 2020 도쿄 올림픽 개최 확정 소식을 떠들썩하게 전하는 뉴스 앞에서 가족들이 침묵에 잠기는 순간, 마츠리는 그저 빙긋 웃어넘긴다.
<남은 인생 10년>은 일본 작가 코사카 루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는다. 극 중 마츠리와 마찬가지로 폐동맥성 폐고혈압증이라는 희소병을 앓던 작가는 『남은 인생 10년』 집필과 투병을 병행했고, 끝내 출간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 채 2017년 사망했다. 영화는 원작에 코사카 루카의 실제 에피소드를 반영하면서 마츠리를 조금씩 탈바꿈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우연히 코스프레에 참가했다가 만화 그리기에 빠져든다면, 영화 속 마츠리는 학창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냈던 소설 쓰기에 다시 도전한다. 물론 영화 역시 마츠리와 중학교 동급생 카즈토(사카구치 켄타로)의 재회를 담으며 안타까운 러브 스토리를 전개하는 데 무게를 둔다. 넓게 보면 도이 노부히로의 <지금, 만나러 갑니다>(2005) <눈물이 주룩주룩>(2007)에서 미키 타카히로의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2017) <유어 아이즈 텔>(2021)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2022) 등으로 이어지는 일본 최루성 멜로 영화의 계보에 속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여자와 남모를 상처와 비밀을 간직한 남자가 만나 운명 같은 사랑을 나눈다는 점에서 <남은 인생 10년>은 신파극의 줄기를 고스란히 따른다.


미래를 계획할 수도, 지금과 다른 모습을 꿈꿀 수도 없는 청춘이라니. 상황은 분명히 암담하지만 마츠리는 친구와 가족의 응원에 힘입어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며 자신의 20대를 펼쳐 나간다. 잡지사에서 일하는 사나에(나오)의 권유로 글쓰기를 시작하고, 고향에서 열린 동창회에 참석해 반가운 얼굴들과 마주한다. 앞날을 확신할 수 없는 보통의 젊은이를 연기하며 애써 생기를 되찾아 갈 무렵, 마츠리 앞에 카즈토가 나타난다. 마츠리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그는 죽고 싶다고 토로한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려 도망치듯 도쿄에 왔으나 인생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창밖으로 뛰어내린 카즈토에게 마츠리는 평소처럼 유보적 태도를 취하는 대신에 비겁하다고 꾸짖는다. 영화는 한 차례 갈등을 겪은 후 친밀해진 두 인물에게 마법 같은 순간을 선물한다. 퇴원한 카즈토와 나란히 밤거리를 걷던 마츠리가 약속을 청한다. “나도 힘을 낼 테니까 너도 죽고 싶다는 생각 그만해” 그때 어디선가 돌풍이 불어오고 둘은 화들짝 놀라서 몸을 낮추다가 서로 마주 본다. 일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 주황빛 가로등 조명 아래 하늘하늘 흩날리는 벚꽃 잎. 슬로 모션으로 완성한 이 장면을 통해 영화는 사랑의 시작을, 세상의 시계가 정지하고 오직 우리 둘만 살아 숨 쉬는 듯한 절대적 순간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남은 인생 10년>은 클리셰에서 출발했을지언정 시한부라는 설정을 단지 관객을 울리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우정과 사랑만큼이나 질병 또한 청순하게 다뤄지는 측면이 있으나, 영화는 갈수록 짙어가는 마츠리의 그늘을 무시하지 않고 보여준다. 무엇보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추며 10년이라는 세월을 최대한 정직하게 쌓아가려는 태도를 유지한다. 여기에는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도,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SNS도 등장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제 앞에 놓인 징검다리를 하나도 빼먹지 않고 건너겠다는 듯 착실하게 생의 문을 두드리고, 영화는 2년 단위로 시점을 옮겨 가되 몽타주 신을 활용하여 10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든 시각화한다. 매번 새로운 추억을 덧칠하는 방식이 아니라 계절마다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봄에는 꽃구경을 떠나고 정월에는 신사에 방문하면서, 마츠리와 카즈토의 사랑은 10년에 걸쳐 천천히 무르익는다. 둘은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애정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내는 연인이다. 마츠리에게 10년이 끝을 알면서도 현재를 절망에 내어주지 않고 버티며 자신만의 글을 써내려가는 시간이라면, 카즈토에게 10년은 그러한 마츠리 곁에서 자립과 재활에 나설 힘을 기르는 시간이다. 경제적 기반을 모조리 상실하고 부모에게조차 마음을 의지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 “일단 가능한 일부터” 해보기로 결심하면서 카즈토는 비로소 자신을 책임지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영화 전반과 후반에 마츠리가 지어 보이는 웃음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울분과 허무함을 들키지 않으려 입꼬리를 올렸던 마츠리의 마지막 표정은 어떨까.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 영화는 <라라랜드>(데이미언 셔젤, 2016)의 엔딩과 동일한 선택을 한다.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누리지 못한 미래가 총천연색으로 펼쳐진다. 마츠리는 그제야 ‘축제’라는 제 이름 뜻을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남은 인생 10년>은 심은경 주연으로 국내에서도 큰 관심을 끈 <신문기자>(2019)를 연출한 후지이 미치히토의 신작이다. 주제는 다르나 전작에서 정부의 여론 조작과 민간인 사찰 등 굵직한 사회 현안을 다뤄내며 보여줬던 묵직한 호흡은 그대로 이어진다. 최근 <야쿠자와 가족>(2021)에서는 한 야쿠자의 철없고 패기 넘치는 10대 시절부터 산전수전을 겪으며 중년에 이르는 긴 여정을 그려냈다. 진실을 추적하는 기자와 시대에 떠밀리는 조직 보스를 표현했던 바와 같이 <남은 인생 10년> 또한 시간의 축적이 발휘하는 힘을 바탕으로 뭉클함을 더한다.
남은 인생 10년 余命10年 The Last 10 Years 감독 후지이 미치히토 출연 고마츠 나나, 사카구치 켄타로, 쿠로키 하루, 마츠시게 유타카, 릴리 프랭키 수입 엔케이컨텐츠 배급 디스테이션 제작연도 2022년 상영시간 125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3년 5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