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여름
<클로즈>
차한비 / Choice / 2023-05-05

“슬픔과 분노는 꽤 비슷해” 수확을 앞둔 꽃밭에서 전쟁놀이를 벌이는 천진한 소년들은 슬픔과 분노의 유비를 아직 알지 못한다. 들리지 않는 총성에 깜짝 놀라고 보이지 않는 적군을 피해 급히 달아나는 이들을 추동하는 건 오직 환상이다. 그들만의 놀이를 발명하고 그들만의 비밀을 공유했던 레오(에덴 담브린)와 레미(구스타브 드 와엘), 두 소년이 애써 쌓아 올린 환상의 성채는 언제까지나 공고할까. <클로즈>는 흑과 백으로 또렷이 이분된 현실의 습격에 노출되면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레오와 레미의 관계를 근접해서 보여준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마지막 여름방학, 레오는 제집처럼 레미의 집을 드나든다.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한 침대에 눕는다. 레미가 한밤중에 생각을 멈출 수 없다며 뒤척이자 레오는 그의 머리맡에서 곧장 이야기를 지어낸다. 동화 속에서 레미는 갓 태어난 새끼 오리가 되고 레오는 그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도마뱀이 된다. 오리도 도마뱀도 남들 눈에는 이상한 존재인데 레오는 둘을 특별해서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 티 없는 확신이 레미의 불안을 잠재운다. 쌍둥이 형제조차 그들만큼 가깝지는 않을 것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완전히 밀착된 상태, 두 소년은 어느 프레임에서든 동시에 등장하며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인다.

그러한 우정과 친밀감, 눈에 띄는 결속력이 이들을 공격하는 이유로 작용한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레오와 레미는 동급생에게 추궁당한다. “너희 둘이 사귀니?” 레미가 입을 꾹 다문 사이, 우리는 형제나 다름없는 친한 친구라며 레오는 쏘아붙이듯 항변한다. 관계에 울타리를 친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진다. “계집애”와 “호모”라는 비아냥거림, 위아래로 훑으며 의심하는 눈초리, 몸을 밀어 넘어뜨리는 물리적 폭력. 전쟁터에 들어선 레오는 새로운 규범과 규칙을 익히기로 결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상상하며 레미와 꽃밭을 달리는 대신에, 남자다움을 흉내 내며 눈앞에 놓인 보통 세계로 흡수되는 일에 몰두한다. 이제 레오는 레미와 같은 책상을 쓰지 않는다. 제게 기대어 잠든 레미를 밀어내고 다른 남자애들 곁으로 자리를 옮긴다. 몸과 몸을 맞대는 부드러운 신체 경험을 중단하고 레오가 선택한 것은 아이스하키다. 몸과 몸을 거세게 부딪치며 점수를 내는 게임은 또 다른 놀이가 아니라 진짜 전쟁이다. 영화는 마스크와 보호대를 착용한 채 빙판에서 충돌하는 레오를 반복해서 보여주며 남성성을 취득하려 애쓰는 소년의 분투가 얼마나 치열한지 상기한다. 집단이 용인하는 범주에 속하려면 그렇듯 본 모습을 감춰야 하고, 표준과 정상이라는 기준에 부합하려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클로즈>
<클로즈>

<클로즈>는 소년들을 성소수자라고 확정하지 않는다. 또래 집단은 그들이 “친구라기엔 너무 가깝”다며 동성애적 친밀감을 나눈다고 판단하지만, 이는 그들을 표적으로 삼아 괴롭히는 이유에 불과하다. 레오와 레미가 겪는 주요한 갈등은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둘러싼 고민이 아니라, 한 뿌리에서 태어난 듯한 두 인물이 유대감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불거진다. 다시 말해 영화는 레오와 레미를 불행한 퀴어 청소년으로 재현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이 혹은 두 소년 중 누가 성소수자인지 밝혀내려 하는 무례한 호기심에 대항하듯 관련 단서를 최소화하며 소년들의 일상에 들이닥친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데에 집중한다. 누구와도 다르기에 특별하다고, 특별해서 아름답다고 북돋던 밤이 돌연 사라진다. 남다른 존재는 곧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학습한 후, 레오는 레미와의 관계에서 서서히 포용력과 상상력을 잃는다. 둘이 함께 쌓은 역사를 부인하며 등 돌린 레오 뒤에서 레미는 당황하고 상처받는다. 이는 남성성을 취득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성장은 아니라는,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거리 두기와 자기 부정을 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둘 사이는 차츰 어긋나고 사랑과 신뢰도 결국 무너진다. 영화 중반부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나면, 레오는 분노와 분리되지 않는 슬픔에 철저히 압도당한다. 소년이 상실한 것은 다정함이다. 살결과 숨소리와 체취를 지닌 고유한 다정함, 그것은 다름 아닌 가능성을 상징한다. 팔다리를 포개고 웃음을 주고받는 동안, 소년들은 어떤 씨앗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무엇을 꽃피울지도 모르는 몸과 마음으로 존재했다. <클로즈>라는 중의적 제목은 갈림길처럼 두 갈래로 나뉘는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레오는 가까운 이와 다정함을 누렸으나 이를 외면했고, 이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과거의 문은 영영 닫혀버렸다. 하지만 한 소년의 어리석은 실수로 요약하기엔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 지나치게 크다. 레오는 레미와 마찬가지로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했고 제대로 된 방어막 없이 공동체가 요구하는 바에 응했다. 레오를 짓누르는 후회와 죄책은 통과의례처럼 거쳐야 할 유년의 성장통이 아니라 기나긴 애도의 시작이다. 예전의 풍요를 더는 기대할 수 없는 지독한 현실이 그 앞에 놓여있다. <클로즈>는 그해 여름이 지나고 다음 여름이 돌아오기까지 긴 시간을 할애해 레오 곁에 머문다. 이는 닫혀버린 문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레오에게 그 누구도 혐의를 씌우지 않도록, 누구보다 레오 본인이 그러하지 않도록 지켜내려는 결정이기도 하다.

<클로즈>
<클로즈>

영화는 클로즈업과 바스트 쇼트를 활용하여 인물의 표정과 몸짓을 눈여겨본다. 소년들의 얼굴에 애정, 당혹, 긴장, 두려움 등이 스쳐 지나가는 한편, 그처럼 한 가지 단어로 명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시시각각 어른대고 뒤엉킨다. 예상보다 전환을 얼마간 지연하면서, 끝내 인물의 심중을 투명하게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반응을 포착해 내는 카메라는 집요하기보단 인내를 발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카메라의 오랜 기다림에 부응하듯 배우들은 적절한 순간에 에너지를 표출하며 시선을 붙든다. 주연을 맡은 에덴 담브린과 구스타브 드 와엘 외에 레미의 어머니 소피 역을 연기한 에밀리 드켄도 눈길을 끈다.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1999)에서 평범한 일상을 갈망했던 소녀는 이제 그와 닮은 소년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양육자가 짊어진 무게를 충실히 그려낸다. 루카스 돈트의 데뷔작 <걸>(2021)에 이어 <클로즈>까지 연달아 작업한 촬영감독 프랭크 반 덴 에덴은 배우들을 근거리에서 비추며 인물의 나약과 기백을 묘사하는 동시에, 활기와 짜증이 뒤섞인 여름날 특유의 모순적 분위기를 풍부하게 담아냈다.

 

클로즈 Close 감독 루카스 돈트 출연 에덴 담브린, 구스타브 드 와엘 수입·배급 찬란 공동배급 하이스트레인저 공동제공 소지섭, 51k 제작연도 2022년 상영시간 104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3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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