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엔 일부러 만날까요?
<튤립 모양>
차한비 / Choice / 2023-04-21

백 명이 각자 머릿속에 튤립을 그린다고 생각해보자. 백 개의 꽃은 대략 비슷한 이미지겠지만 그중 똑같은 모양은 없을 것이다. 색깔과 크기, 질감이 천차만별일 테고 어쩌면 종 자체가 아예 다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식물을 떠올리는가 하면 누군가는 그림이나 조각을 상상할 수도 있다. 때마침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에게는 두둥실 흘러가는 구름 위에 튤립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튤립 모양>은 그렇게 같은 대상을 놓고도 늘 서로 다른 모양을 그릴 수밖에 없는 너와 나의 이야기다. 3년 전 도쿄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남자를 잊지 못해 그를 찾아 공주에 여행을 온 여자 유리코(유다인), 무성영화 시대에 활약했으나 전쟁 이후 자취를 감춘 일본 배우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남자 석영(김다현). 두 남녀가 천천히 만나고 엇갈리는 며칠 사이, 튤립은 사랑이나 운명 같은 추상어로 대체되면서 신비로운 모양으로 피어난다.

석영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극장에서 홀로 가와기타 유코의 영화를 보고 있다.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며 미소 짓던 스크린 속 여자는 편지를 받아 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쓰러져버린다. 한편, 극장 밖엔 봄기운이 가득하다. 낮은 담벼락마다 햇빛이 반짝이고 길가에 핀 꽃은 바람을 반기는 듯 좌우로 몸을 흔든다. <튤립 모양>은 1.37:1의 화면비와 흑백을 활용하여 공주를 한 폭의 수묵화처럼 담아낸다. 산세는 정갈하고 강물은 넉넉하다. 무령왕릉과 공산성을 비롯하여 백제 문화를 풍성하게 보존한 이 오래된 도시는 속도 빠른 세상과는 넌지시 거리를 둔 채, 자연에 둘러싸여 저만의 고요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공주 특유의 단정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본래 지닌 성품 자체가 공주와 잘 맞는 것일까. 캐리어를 든 유리코는 영락없는 이방인이지만 인적 드문 시골 마을에 자연스레 섞인다. 그녀에게서 여행자의 흥분과 경계심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낯선 남자가 다가와 차를 마시자고 청하자, 유리코는 석영이 보던 영화 속 가와기타 유코처럼 천연한 웃음으로 답한다. “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튤립 모양>
<튤립 모양>

석영은 유리코가 3년간 마음에 품고 그리워한 남자다. 홈스테이하는 고택 주인 미자(문희경)와 그의 딸 유리(민하람)는 유리코를 신기하게 바라보는데, 정작 유리코는 그 남자에 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장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르지만 일단 만나기만 하면 단번에 알아볼 거라 자신한다. 그런가 하면 석영에게 유리코는 꿈 같은 여자다. 이전까지 필름 속에만 존재하던 신기루, 가와기타 유코가 꼭 영화 밖으로 걸어 나온 듯하다. 눈앞에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유리코에게 석영은 금세 마음이 끌린다. 처음 만나자마자 둘은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친밀감을 느끼지만 이유는 각자 다르다. 서로 운명이라 여기는데 유리코는 그 모양을 기억하고, 석영은 상상한다. 착각과 환상에 힘입어 시작된 관계이니 갈등은 얼마간 예견된 일이다. 다만, 둘은 멈추고 망설이면서도 서서히 모양을 맞춰나간다.

<튤립 모양>은 시공을 적극적으로 제한하며 인물을 동화 같은 세계로 이끈다. 영화의 정적인 리듬은 산과 강이 고즈넉하게 어우러지는 소도시의 안온을 반영한 결과이고, 이때 공주는 도시의 현대적 속성을 차단한 세트장에 가깝다. 볕이 드는 처마, 문풍지를 바른 창문, 손때 묻은 가구와 소품 등 유리코가 머무는 한옥 곳곳에도 예스런 풍취가 스며들어 있다. 이는 <튤립 모양>이 지향하고 애호하는 영화적 조형과 긴밀하게 맞닿는다. 석영의 영화 취향으로 암시하듯 감독 또한 일본 고전 영화에 깊은 향수를 느끼는데, 특히 오즈 야스지로를 향한 동경이 진하게 드러난다. 카메라는 거실에 펼쳐놓은 상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는 세 여자의 모습을 눈높이에서 응시하고 전화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유리코를 비추면서 ‘다다미 쇼트’를 구현한다. 유리코가 자전거를 타고 숲을 내달리는 모습은 <만춘>(1949)에서 자전거를 타며 싱그럽게 웃던 하라 세츠코의 얼굴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튤립 모양>
<튤립 모양>

무엇보다 영화는 인물들을 나란히 앉혀 마주 보게 하거나 중앙에 위치시키며 비운 공간과 채운 공간을 균등하게 배분하는 데 애쓴다. 덕분에 인물과 인물, 인물과 배경은 사각형의 프레임 속에서 위계 없이 대등하게 존재한다. 서로 다른 것은 어떻게 공존하고 또 연결될 수 있을까. <튤립 모양>은 이 질문에 답하고 싶은 듯하다. 영화 속 공주는 기억과 상상처럼 상이한 경로로 탄생한 모양들이 공존하는 공간이자, 유리코와 석영이 영역을 이동하며 교집합을 찾아 나가는 공간이다. 연인은 언어와 국경의 경계를 넘어 사랑을 키워 가고, 영화는 꿈과 현실을 오가며 일상의 풍요를 담는다. 비단 남녀뿐만 아니라 더 많은 존재가 애정을 기반으로 접속할 수 있다며 <튤립 모양>은 확장된 연결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어느 날 석영이 자주 방문하는 극장이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처한다. 주로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상영해온 소규모 지역 극장으로, 극장주는 개인의 열정에 기대 운영을 지속하기엔 이제 벅차다고 토로한다. 또 하나의 극장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뜻밖에 “작은 기적”이 일어난다. 전국 곳곳에서 후원금을 보내준 것이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 그냥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합해 한 공간을 지켜낸다.

<튤립 모양>은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인 양윤모 감독의 데뷔작. 멜로 드라마의 줄기를 따라가면서도 소란을 피하며 충돌마저 느긋하게 다루는 태도가 특징이다. 다소 단조롭게 흘러가는 영화가 매력을 잃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배우들이 이뤄낸 균형에 있다. 유다인은 1인 2역을 능숙하게 소화하며 영화에 환상과 서정을 불어넣는다. 일본어의 어조와 강세가 남아 있는 독특한 발음으로 한국어를 구사하면서 사랑을 찾아 멀리 떠나온 유리코의 절실함을 전달하고, 커다란 눈망울에 설렘뿐만 아니라 난처함 또한 품어내며 마음의 동요를 표현한다. 덕분에 영화 속 많은 순간은 빛바랜 사진첩에 박제된 장면이 아니라 맑은 기운으로 되살아난다. 느린 호흡을 지키면서 석영을 진중한 캐릭터로 빚어낸 김다현, 단지 어떤 인물이 아닌 환대라는 단어 자체를 연기하듯 넓은 품을 보여주며 소녀다운 생기까지 덧칠한 문희경 또한 주목할 만하다. 중심인물의 관계가 복잡하거나 치밀하진 않지만, 배우들은 섬세하게 시선을 주고받으며 만남의 가능성을 그려낸다.

 

튤립 모양 Shape of Tulip 감독 양윤모 출연 유다인, 김다현, 문희경, 민하람, 김정균, 이지용 제작·배급 삼거리픽쳐스 제작연도 2021년 상영시간 106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3년 4월 19일

 

 

Choice
오직 한 번
<두 사람>
차한비
2025-02-12
Choice
아이 없는 학교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손시내
2024-12-26
Choice
나침반이 없어도
<힘을 낼 시간>
차한비
2024-12-20
Choice
불면의 크리스마스
<이처럼 사소한 것들>
손시내
2024-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