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재능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나이였다. 타고난 재주가 많아서가 아니라 뭐든 할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무한했기에 모두 재능 넘치는 아이들이었다. 모델, 뮤지컬 배우, 래퍼 등 꿈은 각양각색으로 빛났다. 장래 희망이 로봇공학자였던 동수는 평소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를 즐겨 봤다.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수학여행을 떠난 동수가 끝내 제주도에 도착하지 못한 그날 이후 9년이 흘렀다. 동수 엄마 김도현 씨는 아들이 좋아했던 <원피스> 주인공 루피 피규어를 공들여 닦는다. ‘미래의 해적왕’ 루피는 쾌활하고 호기심 넘치는 행동대장. 꿈을 향해 돌진하는 캐릭터로 늘 눈을 반짝이며 모험을 떠나고 제 꿈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타인의 꿈도 존중할 줄 안다. 세월호 참사 후 동수 엄마는 아들이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을 뒤늦게 따라 봤다. 친구를 구하러 결투에 나선 루피가 적 앞에서 외친다. “내가 누구보다 강해지지 않으면 녀석들을 전부 잃어버리게 돼. 온 힘을 다해 싸울 방법을 생각했지. 아무도 잃지 않도록! 아무도 멀리 떠나보내지 않도록!” 동수 엄마는 루피가 되기로 했다. 바다 모험에 뛰어든 나이 어린 선장처럼 밀짚모자를 쓰고 샌들을 신은 채 연극 무대에 올라섰다.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에서 준비한 이 연극의 제목은 ‘장기자랑’, 수학여행을 앞두고 장기자랑 연습에 매진하는 아이들 이야기다. 세월호 참사 피해자로 구성된 배우들은 이름보다 누구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데 열중한다. 엄마들의 ‘장기자랑’은 사실 ‘자식자랑’이어서다. 내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한지, 얼마나 아름답고 용감한지 관객에게 보여줄 작정이다. 내 아이를 꼭 닮은 인물이 되어 무대를 밟고 서면 또 다른 세상이 보인다. 한 명의 아이도 더는 잃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해 싸우는 과정에서 연극은 그렇게 새로운 항로를 열어줬다.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은 2015년에 창단했다. 시작할 무렵만 해도 하느니 마느니 의견이 분분했다. 김태현 연출가는 “세월호 엄마들이 연극을 하고 싶어 해”라는 전화를 받고 곧장 달려왔는데, 정작 엄마들은 지나가듯 내뱉은 말 한마디가 현실로 돌아오자 덜컥 걱정이 앞섰다. 미안해서 못 도망갔다는 수인 엄마 김명임 씨는 처음 대본 읽은 순간을 떠올린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감정에 맞춰 목소리를 내는 건 생각보다 즐거웠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단원 복지관 무대에 선 자신을 발견했다. 그 후 3년간 엄마들이 전국을 돌며 펼친 공연만 200여 회. 연극 ‘장기자랑’은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세 번째 작품이다. 엄마들과 글짓기 수업을 진행했던 변효진 작가가 희곡을 썼다. 관객은 연극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만난 적 없는 아이들의 얼굴을 점차 그려볼 수 있게 된다. 예진 엄마 박유신 씨는 대사량이 많은 배역도 능청스레 소화해낸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에 뮤지컬 배우를 꿈꿨다는 예진은 엄마의 끼를 물려받은 것이 분명하다. 영만 엄마 이미경 씨는 남한테 지는 걸 싫어한다. 열정이 아무리 대단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실력은 제자리걸음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남보다 두세 배 연습한다. 아이돌 영상을 돌려보며 춤 동작을 가다듬는 그의 모습에선 랩에 푹 빠져 종일 가사를 읊었다는 영만이 자연스레 겹쳐 보인다. 하지만 연극 연습은 좀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배역을 정하는 과정에서 예진 엄마와 영만 엄마, 두 배우가 주연 자리를 놓고 신경전을 벌여서다. 그들이 서로 질투하고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자 다른 엄마들도 화가 난다. 진상 규명이 이뤄질 때까지 노란 머리를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순범 엄마 최지영 씨는 “어차피 같이 가야 하는” 사람끼리 등지는 상황에 머리가 아프다.


피해자가 무대에서 웃고 떠든다. 유가족이 메이크업하고 의상을 차려입는다. 엄마들이 토라지고 싸운다. <장기자랑>은 세월호 참사를 다룬 기존 다큐멘터리와 커다란 구별 지점을 갖는다. 그간 대중에게 공개된 영화들은 대체로 4월 16일의 진실에 주목했다. 여객선이 침몰한 이유를 파헤치는 동시에 무책임한 정부를 비판했고 피해자의 억울함과 트라우마에 귀 기울였다. 이러한 작업의 성취와는 별개로 유가족은 카메라 앞에서 비교적 단일한 이미지로 재현됐다. 그들은 목 놓아 울며 증언했다. 거리 시위에 참석했고 몇 번이나 삭발과 단식을 감행했다. <장기자랑>에 등장하는 엄마들도 공포와 절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들 또한 다시 거리에서 밤을 보내며 박근혜 사면 결정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친다. 그러나 영화는 이와 같은 장면을 더 많이 수집해서 보여주는 데 욕심내지 않는다. 차라리 배우에 관한, 연극 작품을 탄생시키는 어느 공동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겠다는 접근으로 무대 앞뒤를 관찰한다. 배우라는 새로운 직함은 피해자, 유가족, 엄마라는 정체성을 종종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은 거리낌 없이 욕망을 드러내고 에너지를 발산한다. 자식을 보낸 엄마가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누군가는 의아해하겠지만 영만 엄마는 말한다. “그냥 나는 더 멋지게 살고 싶을 때도 있어요.” 순범 엄마는 아들을 보러 가는 길에 연신 “경찰청 창살 철창살”을 외며 또렷한 발음을 연습한다. 죽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이 뒤엉키는 자리, 카메라는 그곳에서 뚝심 있게 버틴다. 덕분에 영화 속엔 인물들의 평범해서 낯선 얼굴이 담긴다. 다시 안 볼 것처럼 굴던 그들은 어느새 서로 “짱이야” 칭찬하느라 바쁘다. 붙임성 좋게 손님을 상대하며 가게 홍보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쉬는 날에는 동네 미용실과 세탁소를 이용한다. 영화는 그렇게 친구, 노동자, 이웃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을 따라가도록 길을 낸다. 생존자 부모 중 유일하게 연극에 참여한 애진 엄마 김순덕 씨, 뒤늦게 극단에 합류해 자신만의 속도로 연극을 즐기는 윤민 엄마 박혜영 씨도 조심스레 속내를 풀어놓는다. 막이 오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엄마들은 피해자나 유가족이라는 덩어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매력을 뽐내는 인물로 존재한다.
일종의 캐릭터 무비 전략을 취하며 <장기자랑>은 피해자 재현의 전형을 벗어난다. 카메라는 인물들을 헤아릴 수 없는 고통에 가두고 경직된 자세를 유지하는 대신에,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 다양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본다. 영화는 나아가 애도와 기억의 방식 또한 좀 더 폭넓게 상상할 것을 제안한다. 누구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엄마들은 연극배우가 되어 그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통곡만이 아니라 폭소도, 내가 우는 일이 아니라 남을 웃기는 일도 애도일 수 있다. 무대 곳곳을 누비면서 아이가 어떤 순간에 눈을 반짝였는지 기억할 수 있으니까. “우리 아이들이 이런 아이들이었다고 보여주고 싶”기에 엄마들은 “한번 제대로 놀아봅시다!”라고 소리친다. 세월호 참사 9주기를 앞두고 얼마 전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유가족들은 또 한 번 선언했다. “우리가 바꿔 나가지 않는다면 참사는 계속 반복될 것이고 또 다른 국민이 억울한 유가족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멈추거나 포기할 수 없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도 함께 자리했다. 침몰과 압사로 사고 양상은 다르지만 유가족의 첫 번째 요구는 동일하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이 체념할 수 없는 목표를 이뤄내는 여정에서 <장기자랑>은 든든한 이정표가 될만하다. 데뷔작 <할머니의 먼 집>(2016)을 연출한 이소현 감독이 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전작에서 감독은 자살을 시도했던 할머니 옆에 머물렀다. “그해 여름 할머니가 나를 떠나지 못하도록 지키기로 했다”는 다부진 마음가짐, 눈물보다는 웃음을 공유하려 애쓰는 태도는 <장기자랑>까지 이어지는데, 특히 긴 시간 인물 곁을 흔들림 없이 지켜낸 심지와 유연한 시각이 돋보인다.


장기자랑 The Talent Show 감독 이소현 출연 김명임, 김도현, 김순덕, 박유신, 이미경, 최지영, 박혜영, 김태현 제공·제작 영화사 연필 공동제공·배급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22년 상영시간 92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3년 4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