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흥주는 독특한 아저씨다. 세상 짐을 다 짊어진 표정으로 꿍해 있다가 소주 몇 잔에 금세 풀어져 킥킥댄다. 아내 마음이 진작 떠났다는 걸 알면서도 그 이유를 몰라 아내 주위를 뱅뱅 맴돈다. 가출했다가 돌아온 딸에게 사정을 묻거나 다그치기는커녕 난데없이 노란 장미 꽃다발을 들이민다. “사랑한다, 강이야” 분명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얼굴이다. 애인 뺨에 크림을 살뜰히 펴 발라주는 다정함은 있지만 애인이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재주는 없어서 허둥대다가 차인다.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답답한데 이상하게 꼴사납지 않다. 밉기보다는 차라리 조금 안쓰럽고 애틋해서 계속 보고 싶다. 남편, 아버지, 애인 같은 평범한 역할에 양흥주는 들여다볼 여지를 만들어낸다. 사춘기보다 무섭다는 중년의 열병을 앓는 남자를 연기하면서도 신기하리만치 퀴퀴하거나 축축하지 않다. <오늘 출가합니다> 속 성민도 마찬가지다. 출가하겠다고 아내와 딸에게 작별을 고한 후 가출한 이 아저씨는 나이 제한에 번번이 걸려 절에서 내쫓긴다. 여기에 영화 프로듀서인 친구 진우(나현준)가 함께하면서 산 넘고 물 건너는 출가 여정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양흥주는 수행자의 진중한 태도를 유지하는 한편, “오늘 출가합니다”라는 말을 무기처럼 사용하며 뻔뻔함과 익살을 자랑하기도 한다.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저울추를 옮겨 놓는 유연함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궁금해 만남을 청했다. 그의 아내이자 영화에서 진우와 일하는 한지혜 감독 역으로 출연한 전은주 배우가 매니저로 동행했다. 양흥주 배우가 쑥스러워 답을 피하거나 얼버무리면 전은주 배우에게 도움을 받았다.
곳곳에서 “강원을 대표하는 믿고 보는 배우”라고 칭하더라.
딱히 붙일 말이 없어서 그렇게 불러주는 것 같다. 강원도 춘천에서 오래 살았다. 태어난 곳은 인제인데 초등학교 6학년에 춘천으로 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졸업은 전부 춘천에서 했다.
아내와도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인가.
양흥주_ 은주가 한 스물넷 됐을 무렵에 만났지?
전은주_ 스물셋. 우리가 여덟 살 차이 나니까. 오빠는 그때 서른하나였고. 공연을 보러 갔다가 오빠를 처음 봤다. 당시만 해도 그냥 연기 잘하는 선배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후 같이 작업하면서 가까워졌다.
그간 서울에 오려면 기회야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춘천에 정착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양흥주_ 20대 초반에 함께 극단 생활하던 선배들이 대학로에 가는 걸 지켜봤다. 당연히 나도 가고 싶었다. 근데 아버지가 편찮으셨고 어머니는 계속 일하셔야 했다. 우리 집 식구라곤 아버지, 어머니, 나 셋뿐인데 내가 떠나면 어머니께 부담을 줄 것 같더라. 서울 가고 싶다고 말을 꺼내기는커녕 내색조차 안 했다.
전은주_ 지금은 어머님이랑 셋이 살고 있다. 옆에서 보면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크다는 게 느껴진다.
성민은 진우에게 절에 놀러 오라며 “매화꽃 필 때가 제일 좋다”고 소개한다. 비슷한 시기인데 요즘 춘천 풍경은 어떤가.
서울보다 기온이 낮다 보니 아직 만개하지 않은 상태다. 목련과 개나리는 활짝 폈는데 벚꽃은 따뜻한 곳에서만 조금씩 피고 있다. 아침 기온은 낮다. 어느 계절이든 춘천의 아침은 차다.


<오늘 출가합니다>는 다큐멘터리를 찍어 온 김성환 감독이 박준호 프로듀서의 실제 일화를 듣고 시작된 프로젝트다. 일종의 버디무비이자 원주와 대구를 회전하는 로드무비인데 어떤 점에 흥미를 느꼈나.
<철원기행>(김대환, 2014) 이임걸 피디가 소개해줘서 감독님과 처음 만났다. 출가를 마음먹은 주인공이 절에서 퇴짜 맞는다는 설정부터 흥미로웠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절과 종파마다 차이는 있지만 실제 출가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하더라. 50세 이하여야 하는데 상황에 따라 45세까지만 받는다든지, 가족 관계를 정리하고 최소 6개월은 지나야 한다든지. 보통 출가라고 하면 어린 나이를 떠올리지 않나. 또는 나이와 무관하게 누구든 원하면 수도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근데 출가에도 규제가 따른다니 낯설고 재밌더라. 심지어 실제 일어났던 일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고.
내용도 톤도 전혀 다르지만 절이 등장하는 로드무비라는 점에서 <겨울밤에>(장우진, 2018)가 떠올랐다. 영화 후반부, 각자 갈 길을 가는 부부의 모습을 비춘다는 점도 그렇고.
청평사에 방문하고 챕터마다 심우도가 등장하는 <겨울밤에>와 비교하면, 오히려 <오늘 출가합니다>는 불교적 색채가 약하다고 본다. <오늘 출가합니다>는 결국 사람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성민은 오랫동안 출가를 꿈꿨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자 가족, 특히 딸과 아내와 맺은 관계를 정리한다. 자기만 생각하는 결정인 거다. 그러다 출가가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이곳저곳 떠도는 과정에서 비로소 타인과 사물, 주변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물과 만난다. 성민이 자신을 첫째로 생각하는, 자신을 중심으로 바깥을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는 여정이라고 봤다.
성민은 길목마다 다양한 사람과 마주친다. 영화 데뷔작 <새출발>(2014)과 <철원기행>을 비롯해 그간 로드무비를 여러 차례 찍었다. 유랑하는 사람 또는 유랑 길에 스치는 사람, 그런 유연함을 간직한 인물이 어울린다.
실제 나는 부러 유랑을 계획하지는 않는다. 일 때문에 유랑하지. 공연이든 영화든 자주 떠돌 수밖에 없는 일이다. 짐 싸 들고 다른 지역에 가서 며칠씩 연습하다 오기도 하고, 순회공연을 시작하면 팀과 함께 이리저리 이동한다. 그게 몸에 배어들었을 뿐 혼자 유랑을 떠난 적은 없는 것 같다. 예전부터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건 잘했다. 젊은 시절엔 사람에게 욕심을 냈다. 더 알고 싶고 더 친해지고 싶고 더 오래 가는 관계를 만들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타고난 기질이 그렇다고 해야 하나. 어릴 적부터 형뻘 되는 사람들 만나면 잘 보이고 싶어서 무척 노력했거든. 지금은 아니다. 언젠가부터 그런 태도가 도리어 남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 나 또한 때때로 상처받기도 했고. 어떤 관계든 이제 물 흘러가듯 내버려 두고 지켜보는 편이다. 접점이 생기면 차츰 정이 쌓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작품에 참여할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연기하는 순간엔 상대 배우에게 집중하며 마음을 다한다. 예전처럼 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거다. 작품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신경을 많이 쓰게 됐다. 헤어지고 못 만나는 사람도 많고 몇 년 후에 다시 만나는 경우도 있는데, 이제 어느 쪽이든 굳이 연연하지 않는 편이다.
어쩌면 그 ‘연연하지 않음’이 곧 유연함 아닐까 싶다. 배역을 맡으면 무엇부터 시작하나. 연기를 일종의 생산 활동이라고 본다면 작업의 출발 지점은 어디인가.
인물의 목표와 관계를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인물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 거의 육하원칙에 따라 분석한다고 보면 된다. 장면마다 인물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쳐내려는 것인지, 그 장면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렇게 인물의 입장에서 장면을 파악하는 일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그러고 나서 인물이 지닌 성향과 조건에 맞춰 표현 방식을 정리한다.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반응이 달라질 테니까.

그렇다면 성민의 목표는 뭘까. 그는 왜 출가를 결심했을까.
학창 시절에 경험한 친구의 죽음이 영향을 줬을 거라고 본다. 그 일을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부터 눈앞에 친구가 보이면서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던 거겠지. 시나리오에는 성민이 미안한 마음으로 참선을 시작했고 그러면서 출가 의지를 점점 굳혀 간다고 적혀 있었다. 왜 출가를 결심했을까. 나도 그 이유를 꽤 오래 찾아봤는데 솔직히 놀랐다. 남이 보기엔 별것 아닌 일로 출가한 사람들이 정말 많거든. 어떤 분은 어릴 적 책상에 금을 긋고 “여기 내 자리니까 넘지 마!” 했는데, 옆자리 친구 손이 금을 넘자 쳐낸다는 게 그만 연필로 찍어버렸다고 하더라. 친구에게 상처 줬다는 생각, 그 아픈 마음이 계기가 되어 출가한 거다. 불교 자체를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 스님으로서 깨달음을 얻고 싶은 사람 등 이유는 다양하다. 어쩌면 그 중엔 “겨우 그런 일로 출가를 결심한다고?” 물을 만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도 있을 거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촬영했는데 그 안에 ‘출가 학교’가 있다. 성별도 나이도 서로 다른 이들이 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출가를 고민하며 수련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화에는 사찰을 포함해서 다양한 공간이 등장한다. 재개관한 원주 아카데미 극장, 태백 탄광 폐건물 등 탄생과 소멸을 되새기게 하는 공간이 자주 나오는데 이중 마음에 들어왔던 곳이 있나.
월정사에서 본 나무가 떠오른다. 100년 된 나무인데 지금은 쓰러지고 둥치만 남았다. 보고 있으면 굉장히 이상하다. 이미 죽어 마른 상태인데 표피에 나무가 긴 세월 성장하며 이뤄낸 흔적이 무늬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니 나무가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계속 나무를 보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무도 사람을 보는 것만 같다. 다른 시각을 갖게 해주는 거다. 눈앞에 물통이 놓여 있다고 치자. 보통은 ‘여기 물통이 있구나’ 하고 말겠지만 한 번쯤은 물통을 뒤집어서 볼 수도, 물통의 시선으로 나를 볼 수도 있다. 우리 영화에는 이처럼 시점의 이동에 관한 생각이 많이 깔려 있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고기를 찍은 장면이 있다. 우연히 발견하고 감독님에게 “여기 고기 있는데요?” 했더니 감독님이 “찍읍시다!” 하더라. 문득 민물고기 무리가 가족처럼 보이면서 ‘가족은 저렇게 함께해야 행복할 텐데’ 싶었다. 물론 사람이 하는 생각이다. 물고기 입장은 알 수 없지. 그렇듯 모르는 것을 상상하고 헤아려보자는 의미를 영화 곳곳에 담았다. 기억은 동영상처럼 저장될 수 없다. 가만히 되감으려 해도 어제 일조차 필름 돌아가듯 기억나진 않는다. 사진처럼 몇몇 장면과 이미지가 떠오를 뿐이다. 관객의 머릿속에 영화가 그렇게 남길 바란다. 민물고기가 헤엄치는 한 장면, 쓰러진 나무 한 장면 등이 어떤 의미를 갖고 각인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듯하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재미를 느꼈던 현장이구나.
그래서 에피소드가 많다. 영화에서 성민이 타고 다니는 코란도는 감독님이 장인어른에게 물려받은 차다. 번호가 8275인데 하루는 촬영 끝나고 술 마시다가 그 숫자가 눈에 딱 들어오더라. “장인어른이 영화 빨리 찍으라고 말씀하시는 거네. 팔이칠오! 빨리 찍어!” (웃음) ‘덕구’라는 차 이름도 내가 지었다. 성민이 복과 덕 모두 충분히 쌓였다는 뜻으로 ‘복덕구족’이라고 말하는 데서 힌트를 얻었다. 우리끼리 나름대로 그런 의미를 붙이다 보니 팀 전체가 굉장히 돈독했다. 평균 40대로 나이대도 엇비슷하고 스태프도 적은 편이라 재밌게 다녔다. 영화 순서대로 촬영했기에 그 자체로 여행이자 로드무비였다. 양양에서 일출 장면을 찍은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조감독이 이토록 맑은 일출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고 하더라. 그때 깨달았다. 세상엔 일출을 처음 보는 사람도 있다는 것, 누구나 봤을 거라고 여기지만 아닌 경우도 존재한다는 것.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만 기반해서 타인을 규정할 순 없다는 뜻이다. ‘아닌 경우’를 염두에 둘수록 타인과 공존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겠구나 싶더라. 성민이 진짜 출가하는 시점도 바로 그때다. 타인을 살피지 못한 채 자기 번뇌를 해소하려고만 할 무렵, 성민은 가출 상태다. 진우 역시 제작자로서 영화를 만들겠다는 욕망 때문에 집을 나와 있는 상태이고. 출가와 가출의 사전적 의미는 다르지만 어찌 보면 연결된다. 이를 이해해야만 성민은 출가할 수 있고 진우는 드디어 영화 제작을 마무리할 수 있다.
재차 관계를 말한 점이 흥미롭다. 양흥주는 혼자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 배우다. 그간 남편, 아버지, 애인 등 누군가와 관계 맺는 역할로 설명되는 캐릭터를 자주 맡았다. 자신보다 남을 바라보는 데 어울리는 눈을 가졌다고 해야 할까. 이번 영화를 보면서도 성민이 출가하든 않든 가족에게 돌아가리라 예상했다.
훈련한 결과라고 본다. 공연 준비하고 즉흥 연기하는 과정에서 외부에 날 열어 놓는 걸 계속 연습하거든. 즉흥 연기할 수 있는 에너지는 외부를 느끼는 데서 온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코로 냄새 맡는 것, 손끝에 만져지는 것. 이런 것들이 날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다. 거기서부터 모든 게 시작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에 영화 현장에서도 같은 상태를 유지하지 않나 싶다. 당연히 대사와 동선을 외우지만 어느 정도 습득하고 나면 관계에 집중한다. 상대 역을 맡은 배우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간이나 소품과도 배우는 관계를 맺는다고 보거든.


그동안 어떤 훈련을 했나. 지금도 계속하나.
물론이다. 기본적으로 내게 맞춘 훈련이긴 하다. 나는 내 연기가 유일하다고 믿는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호불호가 나뉘고 맞고 틀림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처럼 생기고 나처럼 말하는 사람은 우주에서 나뿐이니까. 훈련은 크게 몸과 정서에 초점을 맞춘다. 한 인물을 연기하려면 일단 정서를 생각해야 하고, 정서가 몸으로 나오려면 몸이 원활하게 돌아야 한다. 생각한 대로 몸이 움직이도록 평소에도 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한다. 나머지는 정서적 부분이다. 영화와 책을 많이 찾아본다. 요즘엔 20대에 봤던 연기 책을 다시 꺼내 읽는다. 그러면서 고민하고 또 좌절하기도 한다. 내 연기 방법이 틀렸나? 연기를 잘 못하나? 하면서 풀 죽다가 어느 날 누가 좋다고 하면 자신감을 살짝 되찾고. 엎치락뒤치락한다.
정서와 몸의 연결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 역할이 ‘아버지’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김세인, 2021) <최선의 삶>(이우정, 2020) <남매의 여름밤>(윤단비, 2019) 등 딸을 둔 아버지로 분한 경우가 많다. 딸이 낯선 세상과 부딪히며 사춘기를 치열하게 치르는 여성 청소년이라면, 아버지는 그 앞에서 방패가 되어주지 못해 쩔쩔매는 중년 남성이다. 억울함이나 분노보다는 미안함이라는 정서가 두드러진다.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든지 등을 굽혀 자세를 낮추면서 감정을 전달하더라.
능력과 책임, 그에 관한 아쉬움이 미안함으로 드러난다고 봤다.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지만, 최고로 잘해주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금방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실제로는 애가 없다 보니 반대로 우리 아버지를 자주 떠올린다. 20대 중반에 떠나보냈는데 당시 아버지가 59세였다.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지. 굉장히 유쾌한 분이었다. 술을 좋아하긴 하셨지만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 적도 일절 없고. 목수 일을 오래 하셨는데 몸이 불편하셨다. 근데 조금 나아지면 바로 자전거를 끌고 일을 나가셨다. 평소엔 내색하지 않다가 술 한 잔 드시면 에둘러 미안한 마음을 전하기도 하셨고. 누군가는 현실이 녹록지 않으면 능력을 키워야 할 거 아니냐고 다그칠 수도 있지만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나. 아버지가 지닌 미안함의 깊이라고 할까, 쌓고 쌓여서 지속되는 마음이라고 할까. 그걸 많이 느끼면서 자랐다. 하루는 아버지가 춘천이 아닌 타지에서 공사를 하고 돌아오셨는데 동료들과 싸우다가 한 대 맞으셨나 보더라. 그날 되게 속상했다. 아버지도 사람이구나, 고되게 사는 한 인간이구나. 그러다 보니 아버지 역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자식을 향한 미안함, 현실을 거스르지 못하는 고단함을 전달하는 방향으로 접근했던 것 같다.
<오늘 출가합니다> 속 성민과 도희(홍예지) 또한 서로 미안해하고 다독이는 부녀다. 한 작품을 보면서도 배우가 연기했던 다른 인물이 떠오른다는 건 똑같은 연기를 해서가 아니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해서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 정서라는 것은 결국 배우 본연의 결 아닐까.
아무리 연기라고 한들 내 인격 자체를 숨길 수는 없지. 난 배우를 셀로판지에 비교한다. 내가 푸른색이고 인물이 붉은색이라면 관객에게는 사실 보랏빛에 가까운 색으로 비추지 않을까. 어떤 선배가 이야기를 듣더니 “내가 완전히 투명해지면 완벽한 연기를 하겠네? 인물의 붉은색만 보일 테니까.”라고 하더라. 글쎄, 말처럼 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 물론 가능한 배우도 있겠지만 내게는 참 어려운 일이라고 느껴진다. 배우가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항상 훈련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라고 본다. 고유 색을 완전히 지워내긴 어렵지만 되도록 투명함을 갖추고자 노력할 뿐이다.
나를 백지로 만들겠다는 말과는 다르게 들린다. 투영을 훈련한다고 이해하면 되나.
빛이 오면 잘 받아서 그대로 돌려주는 상태. 그래서 나는 여기 있고 내가 연기하는 인물이 전면에서 관객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보였으면 한다.
양흥주 배우의 가장 큰 매력은 절제다. 추억과 상념에 잠길지언정 아이다운 구석을 간직한다. 말하자면 ‘소년미’가 있는데 인정하나.
전혀 아니다. 작품에 들어가면 인물을 눅눅하지 않게, 깔끔하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저 감정과 상황에 최대한 맞출 따름이다. 과하게 표현하거나 직선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피한다. 관객들이 곧바로 ‘아, 저 사람 화났네’ 받아들이기보다는 판단을 얼마간 유보했으면 하거든. 분노나 슬픔을 참는 편이고 좋아도 숨기려고 한다. 본래 사람이 그렇지 않나. 정말 기분이 좋다고 해도 100%로 표현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 쪽으로 생각하며 연기하다 보니 아이처럼 보이는 것 아닐까. 아내에게 물으면 소년미가 아니라 그냥 철없다고 할 거다. (웃음)

말이 나온 김에 전은주 배우가 보기엔 어떤가.
전은주_ 섬세한 면이 있다. 대화에서도 맥락을 빠르게 파악하는 편이라 같이 사는 입장에선 편하다. 예를 들어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가 마냥 쉬울 수만은 없지 않나. 되게 놀랐던 적이 있다. 셋이 대화하고 방에 돌아왔는데 남편이 “당신 아까 어머니가 한 말에 좀 서운했을 것 같아”라며 먼저 이야기를 꺼내더라. 진짜 그 한마디면 다 끝나는 일이거든.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내 마음을 알아줬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눈치를 본다는 것이 핵심 같다. 영화에서도 아는 척하며 타인을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읽고자 끊임없이 눈치를 보기에 소년 같다는 느낌을 받는 듯하다.
전은주_ ‘이 사람은 왜 이걸 이해 못 하지?’라며 답답했던 순간이 별로 없다. 이따금 남편이 아니라 언니랑 사는 기분이 든다. (웃음)
직장인과 연극인 생활을 병행하다가 마흔부터 본격적으로 연기에 전념하게 됐다고 들었다. 삶의 흐름을 크게 뒤바꾼 셈인데 당시 어떤 마음이었나.
직장에 다니면서 너무 힘들었다. 번아웃이라고 해야 하나. 나름의 도덕적 기준에서도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때로 심한 욕을 듣기도 했다. 한 달에 몇 건 이상 해야 한다는 실적 지표가 있는데 날이 갈수록 건수가 뚝뚝 떨어졌다. 한 5년까지만 해도 내 성향과 잘 맞는 일이라고 여기며 신나게 일했다. 근데 관둘 무렵엔 이 길은 진짜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연기를 계속해왔기에 연기하면서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조금 더 나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품었다.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막연히 미래를 그리며 용기를 냈다. 사표 던지고 아내에게 고백했던 날이 떠오른다. 아내가 눈물로 받아줬다. 케이크에 촛불 하나를 켜서 선물해주더라. 오늘 당신의 첫해가 시작됐다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나.
감정평가 법인에서 근무했다. 경매라든지 담보 처분 관련해서 다양한 일이 들어오는데 난 현장에서 물건 조사하는 일을 주로 했다. 땅, 집, 차, 중장비 등 자산으로 잡히는 건 뭐든 조사했다. 남의 집에 들어가서 자로 재고 사진 찍고 압류품 모델명 확인하고.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행동이 썩 내키지 않더라.
그래서 도덕적 기준을 말했구나.
조심스러운 이야기다. 그 일에 종사하고 계신 분들이 있으니까. 다만, 나는 지속하기 힘들었다는 뜻이다. 죄송하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시골집에 가서 이곳저곳 들춰보며 건축물대장과 대조하고 이건 맞네 저건 틀리네 따지고. 근데 일 마치고 가려고 하니 노부부가 “일 다 보셨으면 식사하고 가세요”라며 붙잡으시는 거다. 은행에 담보 맡긴 부동산을 확인하러 갔던 날엔 할머니 한 분이 손에 2만 원을 쥐여주시기도 했다. 자기 마음이니 꼭 받아달라고. 10년 가까이 일하며 마음에 자꾸 빚이 쌓였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만나기가 두려웠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지만 난 못하겠구나 싶더라.


연기하면서는 번아웃이나 슬럼프를 겪은 적이 없나.
당연히 있다. 그건 계속 온다. 반복 또 반복. 나를 선택해주는 분들 덕분에 연기할 기회를 얻긴 하지만 종종 표현하기 어려운 인물들과 마주한다. 그때마다 답답하다. ‘바보같이 이걸 왜 못해?’ 자책하고.
어떤 기준으로 쉽고 어려운 인물이 나뉘나. 특히 어렵다고 느끼는 인물은?
어릴 적엔 까불고 명랑한 역이 나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이상하게 어려워졌다. 말하자면 상업영화나 드라마에서 요구하는 인물을 잘 수행하지 못하는 거다. 결국 하나씩 배워 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요새 오디션을 많이 보러 다니는데 인물과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꿔볼 필요가 있구나 싶더라.
모드 전환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성민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출가를 거부당하는데 배우는 나이 든다는 걸 언제 실감하는지.
솔직히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려고 바득바득 노력한다. 나이 들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오면 내 자신이 싫을 것 같거든. 가능하면 사고뿐만 아니라 신체 능력까지 최대한 젊게 유지하고 싶다. 남이 보는 모습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내가 보는 나는 젊고 건강한 배우이길 바란다.
연극이나 영화를 직접 연출하고 싶진 않나.
아직은 아닌데 언젠가 연극을 다시 연출하고 싶긴 하다. 창작극 말고 고전을 해보고 싶다.
마음에 둔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피터 브룩이 연출한 흑백 영화 <리어왕>(1970)을 보고 엄청나게 충격받았다. 틀이 깨졌다고 해야 하나. 원안의 어떤 표현이라든지 이야기 흐름이 이렇게도 변화할 수 있구나 싶어서 놀랐다. 피터 브룩은 연극 연출을 더 많이 하는 사람인데 정말 연극적 요소 하나 없이 리얼한 영화를 만들었더라. 연극 무대에서는 실제로 가능하지 않은 장면을 영화에서 실현하는 걸 보고 매료됐다. <리어왕>은 몇 세기 전에 나온 고전이지만 현재 이야기해도 손색없는 작품이고, 기회가 된다면 나만의 시각으로 연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참 재밌는 텍스트인 것 같다. 누가 연기하는지에 따라 인물 자체가 달라지기도 하고.
나도 리어왕 역을 연기한 적이 있다. 황야에서 헤매는, 떠돌이 같은 리어왕이었다. 희곡 내용 자체도 흥미롭지만 지문 없이 대사만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대사와 대사 사이에 배우가 상상력을 발휘해서 채울 수 있는 영역이 무궁무진하거든. 우리나라 정서와 상황에 맞춰 재해석하면 재밌을 것 같다.
엔딩에서 저마다 꿈을 품고 사는 인물들에게 축언해주는 성민이 떠오른다. 연출 외에는 어떤 꿈을 꾸나.
양흥주_ 그냥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다. 말 그대로 복덕구족. 아주 풍족하지 않아도 큰 어려움 없이, 복과 덕이 부족하다는 생각 없이 그렇게 살았으면 한다. 나도 유명해지고 돈 벌고 싶은 욕심이 왜 없겠나. 그렇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당장 이룰 수 없는 꿈에 매달리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담배 한 대 피우면 좋고 커피 한 잔 마시면 행복하다. 어머니 건강하시고 집도 손봐야 할 곳이 있긴 하지만 안 망가지고 버텨주니 바랄 게 없다. 다 아내 덕분이다.
전은주_ 내가 오늘 같이 안 왔으면 이런 말을 안 할 텐데.
인터뷰에서 너무 아내에게 점수 따려고 한다.
양흥주_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솔직한 마음이다. 덕분에 소소한 기쁨을 누리며 산다.
전은주_ 그만 하세요. (웃음)
최근엔 어떤 작품을 준비하고 있나.
계속 오디션을 보는 중이다. 연극의 경우, 작년에 김유정의 단편소설 <금 따는 콩밭>을 각색해서 공연했다. 올해와 내년에도 그 공연을 하기로 해서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 그 외엔 정해진 것이 없다. 지난겨울이 마지막 촬영이었던 것 같다. 한국계 프랑스 작가 엘리자 수아 뒤사팽의 소설 <속초에서의 겨울>을 영화화한 작품에 출연했다. 문구점 사장 역으로 잠깐 나온다.
기대된다. <철원기행>의 중국집 사장 역이 잘 어울렸거든. 문구점 사장도 좋지 않을까?
나쁘지 않지. (웃음) 열심히 하고 왔는데 모르겠다. 한국에서 개봉할지도 알 수 없고. 내가 기대하는 작품 중 하나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촬영한 <프랑켄슈타인의 아버지>(최재영)다. 작년에 찍었는데 이야기가 재밌던 터라 어떻게 나올지 기다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