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연한 모험
<흐르다> 이설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3-03-28

다른 이야기라는 이름 뜻대로 이설은 남다르다. 미숙과 성숙을 고루 끌어안은 얼굴은 작품마다 신비한 궤적을 그린다. 그는 비밀을 간직한 천재 사이코패스였고 낯선 이와 선뜻 길을 떠나는 여행자였다. 악마와 영혼을 거래하는가 하면 카지노를 찾는 뜨내기를 상대로 ‘콤프깡’을 하며 먹고살기도 했다. <흐르다>(김현정, 2022)에서 이설은 서른 살 취업준비생 진영을 연기한다. 진영은 결승 지점도 모르는 채 제자리를 맴돌며 진자 운동을 반복하는가 싶더니, 불쑥 자신을 붙잡는 중력을 모조리 거부하겠다고 나선다. 이렇다 할 표정 변화 없이 침묵을 지키던 진영의 입가에 기쁨과 절망이 번지는 드문 순간, 이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감없이 힘을 발휘한다. 어디로 튈지 몰라서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 그가 자주 듣는 칭찬 중 하나는 “뭘 해도 잘 어울린다”는 말이다. 투명한 바탕을 무기 삼아 이설은 지금껏 자신 위에 다양한 그림을 그려 왔다. 최대한 많은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차근차근 계획하고 차곡차곡 쌓는다. 행복도 불행도 어차피 지나고 나면 전부 경험이다. 스스로 보고 듣고 겪어낸 세상이 폭넓어질수록 마음이 단단해진다는 사실, 그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부심으로 자리 잡는다는 진실을 이설은 일찌감치 눈치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신문을 펼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부지런히 땅을 일구는 농부가 떠올랐다. 이설은 여전히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로 맞장구쳤다. “농부가 됐어도 잘했을 거예요.”

 

 

연극 연습하느라 바쁘다고 들었다. 5월 개막하는 예술의전당 전관 개관 30주년 기념 연극 <오셀로>에서 데스데모나 역을 맡게 됐는데.

<허스토리>(민규동, 2018)로 데뷔하기 전에 이순재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극단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연극을 준비하다가 <허스토리>에 캐스팅이 됐다. 극단에 알렸더니 영화를 먼저 해보라며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더라. 이후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도 연극 무대를 내심 꿈꿨는데 좋은 기회를 얻었다. 연극은 처음이다 보니 재미와 부담, 둘 다 느끼는 것 같다.

 

<흐르다>는 2020년 가을에 대구에 머물며 촬영한 작품이다. 최근 영화를 다시 보면서 어땠나. 공개 직후에는 아무래도 본인 연기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거리를 좀 두고 볼 수 있을 듯한데.

날 보면 그냥 3년 전에는 저렇게 생겼구나 싶다. ‘머리가 길었지, 열심히 살았네.’ 그때는 20대였으니 지금과 느낌이 좀 다른 것도 같다. 영화를 보면서는 <흐르다>라는 제목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흐르다’의 주어를 뭐라고 생각했나.

삶, 삶이 흐른다. 처음부터 그 제목이었다. 주변에서 몇몇은 ‘흐르다’의 어감이 별로라며 관객에게 각인될 만한 제목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감독님도 그 얘길 듣고 고민하셨는데 난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괜찮으니 감독님 믿음에 따라 선택하시라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난다.

 

어떤 타이밍에 만난 작품인지 궁금하다. 전년도인 2019년에 남부럽지 않은 한 해를 보냈다. MBC 드라마 <나쁜형사>와 KBS 단막극 <옥란면옥>으로 신인상 등을 차지하며 크게 주목받았다. 드라마, 그중에서도 캐릭터가 좀 더 두드러지는 작품을 고를 거라 예상했는데 <흐르다>를 선택했다.

‘앞으로 난 어떻게 될까? 어디로 흘러갈까?’ 그런 질문을 거듭하던 무렵에 <흐르다> 대본을 받았다. 어쩌다 보니 데뷔작부터 강한 캐릭터를 계속 맡게 됐다. 자연스러운 인물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연달아 드라마 세 작품을 마친 다음이라 한 번 더 영화에 도전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다 때마침 평소에 좋아했던 감독님에게 연락받은 거다. 김현정 감독님의 단편 <은하비디오>(2015) <입문반>(2019)을 재밌게 봤다. <입문반>에 출연한 한혜지 배우에게 반해서 단편 <면도>(정지혜, 2017)도 찾아봤고. 한창 영화제 수상작을 챙겨 봤던 시기다. 어떤 여성 감독이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만장일치로 대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겼다. 그게 김현정 감독님의 <나만 없는 집>(2017)이었다.

<흐르다>
<흐르다>

캐스팅을 제안하며 감독이 뭐라고 하던가.

대본 어땠냐고 묻더라. 너무 좋았습니다.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럼 같이 해봅시다. 그 정도 대화를 나눴다. 둘이 말을 많이 주고 받는 사이는 아니다. 영화도 조용하게 찍었다. 만나면 조용하게 반가워하고, 헤어질 때도 조용히 작별 인사를 나눈다. (웃음)

 

<흐르다>를 포함해서 김현정 감독의 영화는 종종 문학 작품처럼 느껴진다. 인물을 천천히 또 끈질기게 바라보는 점이 인상적인데 시나리오는 어떻게 쓰여 있었는지 궁금하다.

가장 큰 매력이 그거였다. 문학 작품 같은, 무척 자연스러운 시나리오였다. 읽기에 무리가 없었고 고칠 대사도 안 보였다. 유려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걸리는 부분 없이 전체적으로 잘 흘러가는 느낌이더라. 덕분에 이야기와 인물에 스며들 수 있었다. 촬영하면서도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 같은 순간이 더러 있었다. 일상을 그대로 떼어온 듯한 현실 감각을 지닌 작품 아닌가. 감독님의 개성이 잘 묻어난 것 같다.

 

시나리오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장면은 뭐였나.

진영이 엄마와 언니(강진아) 가족들과 식사하는 장면. 대화 중 엄마가 진영에게 오렌지 주스를 사 오라고 한다. 진영이 사람들 틈에 껴서 줄을 서는데 그 장면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더라.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 속에 섞여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진영. 취업 준비하는 진영의 모습을 표현한 듯했다.

 

모녀 관계를 탐구하는 독립영화는 많은데, <흐르다>는 가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엄마의 부재로 인해 갈등을 겪는 부녀에게 주목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진영과 아버지, 두 인물 모두 마음을 드러내는 방식이 제한적이고 감정 또한 굉장히 절제하는 편이다.

내게도 흥미롭게 다가왔던 부분이다. 진영과 비교하면 난 훨씬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다. 연기할 때도 감정을 좀 더 표현하고 싶었는데 감독님은 계속 담담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최선을 다해서 감독님이 요구하는 선을 맞췄다. 촬영하는 내내 감독님을 유심히 관찰했다. 진영이라는 인물이 감독님을 투영하지 않나 싶었거든. 감독님 특유의 자세가 있다. 항상 똑같은 가방을 메고 다니는데 등이 약간 구부정하다. 그 모습을 많이 따라 했다. 촬영을 두 달밖에 안 했는데 실제로 등이 굽더라. 영화 찍고 나서 열심히 운동했다. (웃음)

<흐르다>
<흐르다>

평소 준비할 때도 감독을 지켜보며 힌트를 얻나. 진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감독과 대화를 나눈 부분이 있다면.

어느 작품에서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자주 시도하는 편이다. 감독님뿐만 아니라 현장 동료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다. <흐르다> 팀은 무척 차분했다. 조용하고 덤덤한 현장 분위기가 연기에 자연스레 반영된 것 같다.

 

대구 영화인들은 끈끈하기로 유명하다. 여러 번 손발을 맞춘 팀이라 안정감이 남달랐을 텐데.

자본이 큰 영화가 아니다 보니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근데 다들 똑똑하게, 또 긍정적으로 헤쳐 나가더라. 서로 이해도가 높고 친밀감도 꽤 쌓인 상태였다. 누군가 실수하거나 현장에 문제가 생기면 스태프들이 일부러 웃으면서 “괜찮아요~!” 외쳤다. 합창단처럼 한목소리로. (웃음) 되게 귀여웠다. 촬영 마치는 날까지 ‘괜찮아요’ 메들리가 이어졌다.

 

성격만 놓고 보면 진영과 공통 분모를 찾기 어려웠을 듯한데 어떻게 인물을 받아들였나.

다르다는 사실에 오히려 매력을 느꼈다. 진영은 대체로 조용조용하다. 소심한 사람 같은데 한편으로는 고집스러운 구석도 있다. 꾹꾹 참다가 갑자기 화를 분출하기도 하고. 어떤 문제를 마주하면 대화로 풀어가려고 하는 나와 달리, 대부분 상황에서 침묵을 유지하는 진영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특히 아빠(박지일)와의 관계에서는 대화를 단절한 상태가 관성으로 굳어진 느낌이다.

같은 집에 살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 같지. 현장에서도 박지일 선배님과 연기나 작품에 관해 세세한 부분까지 대화하며 합을 맞추지는 않았다. 어색하고 거리감을 간직한 부녀로 나오기에 서로 간격을 어느 정도 유지하려고 했던 것 같다. 공사 분리가 잘 됐다. 실제 모습은 무척 유쾌하고 ‘스윗한’ 분이다. 쉬는 시간에는 편하게 수다 떨다가 촬영에 들어가면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집중했다.

 

다른 작품에 비해 유난히 또래 배우가 없는 현장처럼 보인다. 부담스럽거나 외롭진 않았나.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또래와 호흡을 맞춘 경우가 거의 없다. 시작했을 때부터 항상 선배님들과 함께했다. <흐르다>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박지일 선배님과 촬영한 날도 많지 않다. 혼자 찍는 신이 대부분이었다.

이설 ⓒ이영진

몸에 관해서도 얘기해보고 싶다. 부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듯 영화는 몸을 비춘다. 진영은 샤워 후 편하게 욕실 밖으로 나올 수 없고, 아마도 아빠를 닮아서 마음에 안 드는 코를 수술한다. 아빠에게 대항하는 순간, 가장 먼저 외치는 말은 “내 몸에 손대지 마!”다.

몸을 의식하면서 연기한 적은 없는데 재밌는 해석이다. 마지막 발언은 아버지에게 경고하는 거라고 봤다. 진영은 그간 가부장적으로 구는 아버지를 보며 굉장히 스트레스 받았을 것 같다. 엄마(안민영)한테 왜 가만히 있느냐는 식의 이야기도 분명히 여러 번 했을 테고. 함부로 대하지 마라. 그래도 된다고 착각하지 마라. 이런 뜻 아닐까.

 

다만 그렇게 감정을 표출하기 전까지는 어딘가 무기력해 보이는 인상이다. 딱히 불성실하진 않은데 나사가 하나 빠진 느낌이랄까. 달리 보면 그런 무신경함, 무정함을 애써 가장하는 사람 같기도 하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진영은 뭘 생각할까? 머릿속에 가장 많이 떠오르는 질문이 뭘까?’ 오랜 시간 취업을 준비해온 사람 아닌가.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을 감당하다 보면 정작 자신이 뭘 원하는지,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 놓칠 듯했다. ‘난 대체 뭘 위해서 이러고 있지? 어디쯤 와 있는 거지?’ 진영이 던질 만한 질문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느낌이 나온 것 같다. 한편, 누구나 살다 보면 타인을 모른 척하고 싶은 순간과 맞닥뜨리지 않나. 진영의 인간적 면모가 와 닿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집과 공장에 오가며 아버지를 뒤치다꺼리하는 상황이 무척 고됐을 거다. 어느 시점에서는 가족이든 뭐든 전부 뒤로하고 그냥 나를 위해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갖지 않았을까.

 

죄책감을 짊어지는 게 차라리 나은 선택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곁에서 책임지는 것만큼이나 외면과 자책도 고통스럽지만 지금은 혼자 되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진영은 다 내려놓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부모의 기대, 나의 이상,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 진영은 예전에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가려고 준비했다가 그만둔 적이 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취소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끝내 뭔가를 놓지 못한 것 아닐까 싶더라. 시간이 흐른 후 캐나다행을 선택한 건, 새로운 환경에서 새 마음으로 살아내고 싶은 욕구라고 봤다.

 

많은 사람이 꿈꾸는 모습이기도 하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삶을 ‘리셋’하기.

국가 경계가 사라지는 추세다 보니 최근 그런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것 같다. 진영의 선택에 공감하는 관객이 적지 않을 듯하다. 실제로 내 주변에도 해외 이주를 고민하는 친구들이 있고, 나 역시 다른 곳에서 살면 어떨지 이따금 상상해본다. 엔딩에서 진영은 설렘과 긴장을 골고루 느끼는 상태라고 해석했다. 전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기대감이 좀 더 크지 않을까. 사실 난 지금 버전보다 밝게 표현하고 싶었다. 가족들이 전송한 사진을 보는 장면의 경우, 처음엔 더 활짝 웃으며 연기했다. 근데 감독님은 그때도 담담하게 가자고 하시더라. 늘 농도를 낮추시는 분이라 미소의 농도도 낮췄다. (웃음)

 

진영처럼 멀리 떠나본 적 있나.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여행지가 있다면.

미국이나 프랑스가 가장 먼 곳 아니었을까. 샌프란시스코에 방문했을 때 바로 그런 기분을 느꼈다. 지인 집에서 홈스테이하며 2주 정도 머물렀는데 동네 사람들이 굉장히 환대해주는 느낌이었다. 날씨도 너무 좋고. 이런 곳에서 살아볼 기회가 있다면 좋겠구나 싶더라.

<썬더버드>
<방법: 재차의>

그간 작품을 모아놓고 보니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공통점이 눈에 띄더라. <흐르다>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옥란면옥>에서 조선족 사투리를 썼다. 최근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영화제에서 공개한 <믿을 수 있는 사람>(곽은미, 2023)에서는 탈북민으로 나온다. 스스로 언어적 재능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나.

능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재밌어하는 건 사실이다. 다른 나라 문화와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 좋고 또 외국어 연기를 잘 해내고 싶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서는 실제 탈북민과 중국어 선생님을 소개받아서 연습했다. 언어를 익히는 것보다 문화를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언어의 경우, 사람마다 억양이라든지 실제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지 않나. 그걸 주입식으로 외우려고 하니 너무 괴롭더라. 말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더라도 문화적 측면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에게도 그런 부분을 더 많이 물어봤고, 언어는 그 외 시간에 혼자 대사를 반복하며 연습했다. <흐르다> 촬영하면서도 주변에 사투리 쓰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어느 역할이든 내가 자연스럽게 뱉을 수 있는 말로 연기하는 게 중요하다. 인물과 나의 언어가 잘 융화되기를 바랐다.

 

다른 공통점은 냉랭한 곳에 자주 서 있다는 점이다. 세상이 인물에게 그리 따뜻하지 않다. 돈의 하수인이 된 이들이 모여드는 <썬더버드>(이재원, 2022)의 사북 풍경은 황량하고, 드라마 <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tvN, 2019)에서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인물을 연기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라서 나도 궁금하다. 내 어떤 점을 보고 감독님들이 그러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걸까. 근데 뭘 해도 잘 어울린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극 중 인물이지만 정말 어딘가에 실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무슨 뜻인가 싶어 의아했는데 요즘은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자신감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소 무거운 이야기나 인물이 버겁게 느껴질 때는 없나.

힘든 역할에 몰입해서 작품을 마치고 나면 잠시 여파를 겪는다. 실제 생활은 꽤 윤택한데 난데없이 쫓기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후유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넘어가는 편인가, 아니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의식이 필요한가.

고생했다는 의미로 나에게 선물을 하나씩 준다. 최근에는 여행을 다녀왔다. 지난 7개월간 드라마를 찍었는데 마지막 촬영이 끝난 다음 날 곧장 발리로 떠났다. 맛있는 음식 많이 먹고, 좋은 데서 자고, 실컷 놀고. 그렇게 2주 정도 아낌 없이 쉬다가 왔다.

 

어느덧 데뷔한 지 6년이다. 활동 시작할 무렵에 상상했던 모습과 현재는 어느 정도 일치하나.

글쎄, 어떤 목표를 달성해서라기보다는 내 속도대로 잘 가고 있어서 만족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해나간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상업영화와 드라마로 연기를 시작해서 독립영화도 찍고, 얼마 후면 연극 무대에도 올라간다. 그렇게 배우로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일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좋다.

이설 ⓒ이영진

자부심이 느껴진다. 이미 해봤던 것보다는 낯선 과제에 좀 더 흥미를 느끼는구나 싶고.

연기가 그래서 재밌는 것 같다. 매 신, 매 테이크가 챌린지처럼 다가온다. 하나하나 ‘클리어’하면서 조금씩 ‘레벨 업’하는 느낌. 동시에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지 고잉’에 가깝다. 하고 싶은 일을 하자,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조건이나 상황을 너무 따지지 말자. 그렇게 날 다독이면서 도전을 즐기는 편이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아닌가.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는 마음으로 뛰어드는 것 같다.

 

데뷔하고 2년 만에 300:1 경쟁률을 뚫고 드라마 주연을 따냈다. 어떤 궤도에 빠르게 진입한 셈인데 의외로 유명세나 인지도에 크게 목매지 않는 듯하다. 독립영화처럼 소규모 작품에도 꾸준히 출연하고.

명예나 인기는 성실하게 활동하다 보면 자연스레 뒤따르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자신감과 자부심이다. 돌이켜보면 데뷔 후 독립영화를 선택한 데는 경험을 쌓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부족한 면을 스스로 들여다보고 채워서 지금보다 자신 있는 상태로 나아가길 원했다.

 

연기의 물리적 양을 늘리고자 했다는 뜻인가.

물론 그것도 맞지만 결국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연결되는 것 같다. 경험이 가장 큰 자산이자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거라고 믿는다. 그때그때 들어오는 좋은 제안을 잘 받아들이고 수행하면서 나라는 사람을 채워 나가고 싶다.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여유가 생기면 뭔가 경험하는 데 투자를 많이 하는 편이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을 때는 책, 드라마, 영화, 유튜브 등을 통해 새로운 것을 접하려고 한다. 세상엔 내가 아직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럼 현재 시점에서 가장 큰 자랑거리는 무엇인가. 최근 긍지를 느꼈던 순간이 있다면.

겁내지 않고 연극 출연을 결심했다는 것. 사실 두렵기도 했다. 연극은 또 다른 영역인 데다 예술의전당이 소극장도 아니지 않나. 하지만 늘 그렇듯 도전하는 쪽에 의의를 뒀고 그게 좋은 선택이기를 바란다. 아직은 모른다. 내가 잘 해야지.

 

본명은 강민정인데 이설이라는 이름을 새로 짓고, 스스로 ‘다른 이야기’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의지가 반영된 작명 같은데 구체적으로 뜻을 들려준다면.

전 회사에서 지어준 이름인데 처음에는 왠지 사연 많은 느낌이라 별로였다. 그래도 태도라고 해야 할까, 다짐 같은 걸 넣고 싶어서 한자를 생각해봤다. 다를 이에 이야기 설, 실은 아는 한자가 그뿐이었다. (웃음) 근데 짓고 나니 조합이 괜찮더라. 다른 이야기를 지닌 사람, 많은 이야기를 잠재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담았다. “너는 참 다르다”라는 말을 칭찬으로 건네는 순간이 있지 않나. 누구와도 다른 존재, 그걸 내 지향점으로 삼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감도 마음에 든다. 사람들이 “설아” 하고 불러주면 친근하게 느껴져서 기분 좋더라. 고향이 경상도라서 이름 마지막 글자만 떼어 부르는 문화에 익숙하거든.

<청산, 유수>
<두개의 방>

책을 즐겨 읽기로 유명하다.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소설 리뷰 채널 <사각사각>을 2년 동안 진행하기도 했다. ‘다른 이야기’라는 이름과 잘 어울리는 취미다.

책은 여전히 좋아한다. 지금은 소속사 식구이기도 한 (김)신록 언니의 인터뷰집 《배우와 배우가》(2023)를 읽고 있다. 와 닿는 구절이 많은데 그중 행위예술가 안재현 씨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한 동작을 천 번 한 사람의 마음가짐”에 관해 말하며 자부심을 표현하더라. ‘맞아, 하나를 꾸준히 하기란 어려운 일이지. 그걸 해내면서 날 믿는 힘을 기르는 거지.’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살 수 없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눈으로 확인한 듯했다. 잠시 간과했던 부분을 깨우쳐준, 참 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엔 이런 에세이나 인터뷰집, 전문 서적을 많이 읽으려고 한다. 2~3년간 소설을 계속 읽고 나니 장르를 바꿔야겠다 싶더라.

 

말한 대로 직접 보고 듣는 ‘경험 쌓기’를 중요하게 여기는구나 싶다.

근데 확실히 다른 매체보다 종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신문도 구독해서 읽는다. 주변에서 지적 허영이 심하다고 놀리는데 좀 억울하다. 그냥 조용히 집중하는 시간을 즐길 뿐이다. 종이를 넘기면서 읽는 게 편하고 신문 특유의 냄새도 좋아한다. 관심 있는 기사 혹은 헤드라인만 읽는 날도 많다.

 

오래된 습관처럼 들리는데. 신문은 보통 아침에 읽나.

일찍 일어나려고 한다. 7시쯤 하루를 시작하면 시간을 버는 기분이 들거든. 새벽에 신문 도착하는 소리 듣고 깰 때도 있다. 신문 펼치면 일단 띠별 운세부터 확인한다. (웃음) 어릴 적부터 신문을 읽었다. 우리 집은 조선일보부터 한겨레신문까지 다양하게 구독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신문 읽으며 아침을 여는 게 습관이 됐다. 규칙적인 생활에 안정감을 느낀다. 내 시간을 내가 계획해서 쓴다는 점이 재밌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엄청나게 즉흥적인데 일상만 놓고 보면 계획적인 편이다.

 

읽기 외에 다른 취미도 있나.

최근 수영을 배웠다. 이 또한 새로운 경험인데 생각보다 즐겁더라.

 

<흐르다> 개봉하고 연극까지 마치고 나면 올해 상반기가 끝난다. 공개 예정된 작품이나 혹은 현재 준비 중인 다른 작품이 있다면.

드라마 두 편을 찍었는데 정확한 공개 시점은 모르겠다. 당분간은 연극에 집중할 생각이다. 차기작에 대한 바람이라면 해외 로케이션 경험해보기? <썬더버드> <흐르다> <믿을 수 있는 사람> 등 연달아 지방에서 촬영했다. 거의 1~2년은 서울 떠나서 살았던 셈인데 이쯤 되면 해외도 한 번 갈 법하지 않나 싶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면 휴차가 되게 산뜻해진다. 걷기만 해도 좋고. 기본적으로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 것 같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오래 머물며 연기할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이설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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