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과 투영
<컨버세이션> 조은지·박종환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3-02-28

이토록 수다스러운 영화는 오랜만이다. <컨버세이션>(김덕중, 2023)은 두 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떠들며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는 인물들을 지켜본다. 말은 관계를 둘러싼 해묵은 감정을 들추다가 이따금 변화를 암시하며 독특한 리듬을 구사한다. 종잡을 수 없는 대화의 중심에 은영과 승진이 있다. 은영이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여기는 여자라면, 승진은 말해봤자 똑같다고 믿는 남자다. 매년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며 필모그래피를 빼곡히 채우는 가운데 재작년에는 <장르만 로맨스>로 감독 데뷔에 성공한 조은지가 은영을 맡는다. 영화에서 그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고 하룻밤을 같이 보낸 남자의 속내를 떠본다. 처음 본 택시 기사 입에 곶감을 넣어주는가 하면 떨리는 목소리를 웃음으로 감추며 얼마나 외로운지 고백한다. 규칙 없이 시간을 흩어 놓는 <컨버세이션>에서 조은지는 장면마다 다른 표정을 짓지만 언제나 같은 심성을 지닌 채 말한다. 덕분에 은영은 소중한 것을 지키려 애쓰는 사람으로 남는다. 설령 무너진다고 해도 다시 일어나 자신과 주변을 예전보다 더 단단하게 가꿀 듯하다. 승진은 그런 은영을 반신반의한다. 소년처럼 말갛게 웃다가 어느 날엔 그 미소를 앞세워 돌연 섬뜩한 에너지를 전달하는 박종환은 승진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 그는 머문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유쾌한 친구부터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어 매력 넘치는 애인까지 자유자재로 오간다.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사람일 텐데 상대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쿡 찔러대는 모습이 이상하게 밉지 않다. 캐릭터만큼이나 두 배우에겐 다른 점이 많다. 박종환은 말하면서 생각을 곱씹고 조은지는 생각을 마쳐야 말한다. 박종환이 정확한 단어를 고르느라 머뭇거리면 조은지는 농담과 격려를 번갈아 전하며 침묵을 깬다. 한 인물에도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을 정도인데 둘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신기하리만치 잘 통한다. 조은지와 박종환, 그들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려 부지런히 나눈 ‘컨버세이션’을 옮긴다.

 

 

SNS에 공개한 홍보 영상과 에필로그가 재밌더라. 배우들이 이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느껴졌다.

조은지_ 처음에 종환 배우는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보더라. 영화 너무 좋다고.

박종환_ 시나리오 읽으면서 ‘이건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가 될 것 같다’ 예상했는데 역시나 그랬다. 내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을 포함해서 촬영하며 혼자 상상했던 부분이 전부 채워진 상태라 보는 내내 흡족했다. 롱테이크 촬영은 모든 배우에게 똑같이 주어진 조건, 말하자면 공통 과제였다. 다른 배우들은 어떻게 해냈는지 확인하며 즐거웠다. 동지애와 경쟁심을 동시에 느꼈달까.

조은지_ 경쟁했구나! 실제로 종환 배우가 염탐하러 촬영장에 온 적도 있다.

박종환_ 내가 안 나오는 장면 중에서 특히 여자 셋이 만드는 장면이 궁금했다. 염탐하러 갔다가 자리 잡고 앉아서 한동안 구경했다. 최초의 관객이 된 셈이다. 테이크를 다시 간다고 할 때마다 난 속으로 앙코르를 외쳤다. 계속 보고 싶어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라는 건 무슨 의미인가.

박종환_ 이야기와 관계에서 애정 어린 느낌을 받았다. 큰 사건은 없지만 감정을 건드리는 지점이 분명히 있었다.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역동성이 생길 것 같더라. 영화적 구성으로 묘한 재미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그런 작품에 내가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은지 배우도 시나리오 읽자마자 단번에 마음이 갔나.

조은지_ 궁금증을 자아내는 시나리오였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일단 감독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첫 촬영을 마친 후에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행간을 읽지 못해도 감독님이 채워주겠구나 싶더라. 전작 <에듀케이션>(2019)을 재밌게 봤다는 점도 출연을 결심하는 데 크게 작용했다. 내게 <컨버세이션>은 여러모로 낯선 작품이지만 감독님을 믿었다. 분명히 그리고자 하는 의미가 있을 거라고.

 

직접 연출한 단편 <2박 3일>을 상영한 영화제에서 감독과 처음 만났다고. 감독 대 배우가 아니라 동료 감독으로 인연을 시작했다는 뜻인데.

조은지_ 내가 배우인 줄 몰랐다고 하더라. 이전까지 나한테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지. 미팅하면서 듣기로는 <카센타>(하윤재, 2019)를 보며 캐스팅할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감독님의 사고 회로가 어떻게 작동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따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나 보다.

조은지_ 날 몰랐다는 말에 기분이 상해서 더 안 물었다. (웃음) 장난이고, 뭐 이유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나 싶다. 중요한 건 감독님이 나를 은영으로 선택했다는, 내가 그 일을 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니까.

<컨버세이션>
<컨버세이션>

박종환 배우는 <얼굴들>(이강현, 2019)에서 보여준 모습이 기억에 남아 연락했다고 하더라. 그러고 보면 두 작품은 내러티브에 힘을 덜고 몽타주를 수집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자장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컨버세이션>의 승진만큼이나 <얼굴들>의 기선도 어떤 궤도에 오르기를 주저하는 인물이고.

박종환_ 나도 <얼굴들>을 좋아한다. 출연작 중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라 지금도 곱씹어본다. 비선형적 구조의 경우, 그 자체로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감독님도 좋아한다고 하니 반가웠다. 근데 승진과 기선을 닮았다고 생각하진 못했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면이 비슷하긴 해도 상황이 다르다. 기선은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표현하지 못한다면, 승진은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데도 자신을 꽁꽁 싸맨다.

 

기선에게 좀 더 열정이 있구나.

박종환_ 의지가 명확했던 것 같다. ‘어디서 어딘가로’, 기선은 그런 방향에서 의지를 발휘하려고 한다.

 

감독을 포함해서 스태프는 3명으로 아주 단출한 규모였다. 이러한 제작 여건은 어떻게 다가왔나.

조은지_ 그런 쪽으로 무딘 편이다. 상황에 맞춰서 움직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현장 규모와 연기는 무관하다고 본다. 난 그냥 연기자로서 연기에 집중하면 되니까. 걱정하기는 했다. 감독님을 포함해서 다들 일당백을 해야 했으니까.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우려보다는 즐거움을 느꼈다. 엔딩 신을 촬영 마지막 회차에 찍었다. 산 속으로 300미터 정도 들어가야 했는데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알아서 짐을 챙겼다. 종환 배우랑 나도 같이 조명 들고. 문득 이게 협업이구나 싶더라. 종환 배우가 얘기한 적 있거든. 지금 우리는 영화 만드는 과정을 함께하는 거라고.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더라.

박종환_ 소수 정예라서 집중력이 더 높았던 것 같다. 롱테이크로 촬영하다 보니 셋업 자체가 간소했고, 셋업하고 나면 별다른 변화 없이 쭉 연기하면 됐다. 현장에 인력이 많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기에 사람이 부족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2020년 11월에 촬영을 시작해서 2021년 6월에 마지막 신을 촬영했다.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한 장면씩 찍었다고. 만날 때마다 독립적인 시퀀스를 완성해야 했는데, 낯선 촬영 방식을 경험하며 각자 뭘 느꼈나.

조은지_ 신마다 주제와 관계가 각각 달라서 연기하긴 훨씬 수월했다. 감정을 계속 이어가야 했다면 어려웠을 거다. 예전 감정을 되살리기가 쉽지 않고 현장에서 시간도 걸렸을 테니까. 다만, 돌이켜보면 아쉽긴 하다. 우리는 촬영 끝난 후에 더 돈독해졌거든. 6개월간 자주 만나면서 영화 얘기하고 그랬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박종환_ 달리 보면 띄엄띄엄 만나는 바람에 6개월이나 함께 보낸 것 아닌가. 덕분에 촬영을 마친 다음에도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 같다. 난 흔치 않은 작업 방식을 경험한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무척 기대했다. 내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일이지 않나. 감독님이 먼저 제안해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6개월 사이에 그리 많은 것이 변하진 않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구석이 보이더라. 나에게, 또 상대 배우에게. 관객은 주로 특정 시기에 찍힌 배우들의 모습이나 영화의 환경을 접하는데 <컨버세이션>은 상대적으로 범위를 넓게 벌려놓는다. 관객이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좀 더 새롭고 신선하게 느끼지 않을까 하는 설렘이 있다.

 

카메라는 배우의 모든 말과 움직임, 표정과 전신을 롱테이크로 기록했다. 평소보다 카메라를 강하게 의식했는지, 아니면 카메라에서 더 자유로워졌는지 궁금하다.

조은지_ 회차를 거듭할수록 후자에 가까워졌다. 스태프 인원이 적은 데다 카메라도 대부분 고정되어 있었다. 나중에는 스태프나 카메라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조은지 ⓒ이영진

테이크를 여러 번 가서 그랬을까?

박종환_ 난 처음부터 그랬다. 신 길이가 보통 10분 내외다. 액션 사인이 떨어지는 동시에 10분 동안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게 주어진 대사를 소화해야 하고, 상대방과 느슨하게나마 약속 같은 걸 했다면 그것도 지켜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연기한다는 감각에서 벗어난다. 자의식도 사라지고. 내가 지금 연기를 하는지 안 하는지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편해진다. 아주아주 편안해진다.

 

그런 현장에 들어가기 전에는 무엇을 얼마나 또 어떻게 계획하나. 밑그림을 빼곡하게 채워 넣으면 오히려 ‘수행’하는 데 방해받을 것 같다.

박종환_ 딱히 채워야 할 부분이랄 게 없었다. 인물의 태도라든지 해당 신의 분위기는 이미 대사에 확실히 제시된 상태였다. 배우마다 자기 입장을 갖고 현장에 들어가면 됐다. 사전에 리허설도 안 했다. 한 번 했나?

조은지_ 동선을 변경하는 경우에 한두 번 정도 했다. 사실 은영은 감독님에게 도움을 꽤 받았다. 은영이라면 어떻게 할까. 그런 의문에 빠질 때마다 감독님이 곁에서 많이 짚어줬다. 촬영하며 점차 인물을 파악했던 것 같다.

박종환_ 어쨌거나 시나리오에 존재하는 세계가 명확했다. 감독님 혼자서 쓴 시나리오치고 인물 6명 모두 뚜렷하잖나. 배우가 구태여 뭔가를 보충하거나 부연할 필요가 없었다. 감독님 입장에선 본인이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가 이 시나리오를 좋아해 주기만 하면 됐던 거다.

 

그게 참 신기하다. 배우의 힘을 빌려서 캐릭터를 완성했는지, 아니면 감독이 정말 6개의 자아를 동시에 굴렸는지 궁금하더라.

조은지_ 한 사람이 썼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인물마다 성질이 다르지. 얼마 전에 감독님한테 들었다. 늘 망상한다고 하더라. 직업, 나이, 성별 등을 바꿔 가면서 자꾸 새로운 자아를 소환해낸다고. 그 정도면 병 아니냐고 놀렸는데 속으로는 열정에 감탄했다. 감독님은 어떤 모델을 두고 관찰하면서 인물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만들어낸 성질을 인물에게 담아내는 거다. 보통 작업이 아니다.

박종환_ 그게 병이면 고쳐야 하나, 안 고쳐야 하나?

조은지_ 영화를 위해서라면 안 고쳐야겠지. (웃음)

 

연출자의 통제력을 실감했다. 감독이 지휘권을 꽉 잡고 있는 와중에, 어쩌다 얻어걸린 장면처럼 보이도록 함정을 놓는다는 생각이 들더라.

박종환_ 그래서 이 영화의 즉흥성에 관해 묻는 분들이 무척 많은가 보다. 사실 애드리브라든지 배우가 즉석에서 뭔가를 시도한 경우는 거의 없다. 테이크를 거듭하면서 큰 변화를 주지도 않았다. 나도 촬영할 때보다 관객으로 영화를 보면서 훨씬 자유롭다고 느꼈다. 내가 참여하지 않은 분량까지 전부 확인하니 영화를 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여지가 생기더라. 그렇다고 현장에서 자극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승진이 필재와 원형 산책로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 인물들은 카메라와 가까워지고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때 거리감에 자극받았다. ‘우린 지금 카메라로부터 숨고 있어’ ‘우린 곧 카메라 앞에 다시 등장하게 돼’ 그렇게 사라지고 나타난다는 느낌이 흥미로웠다. 감독님이 앵글에 관해 일일이 설명하진 않았지만, 당시 난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현장에서 모니터링 꼬박꼬박했나.

조은지_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근데 우리 카페 신에서는 한번 했지?

박종환_ 그때는 마이크가 보이는지 확인하려고. 전체적으로 모니터링은 거의 안 하는 분위기였다.

박종환 ⓒ이영진

그러면 오케이와 엔지 사인은 어떻게 받아들였나.

조은지_ 감독님은 테이크를 거듭할수록 갱신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더라. 지금도 좋지만 다음엔 더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계속 갔다고. 터놓고 말해 우리 현장에서 오케이는 시간에 달려 있었다. 해가 지면 오케이, 카메라 배터리가 떨어지면 오케이. (웃음) 그만큼 감독님이 집요했다. 배우를 향한 애착, 그걸 받았다고 생각한다. 현장에서는 장난치면서 대체 언제 끝낼 거냐고 투덜댔지만 속으로 되게 기분 좋았다. 나한테 관심을 쏟는구나. 갱신된 내 모습을 보면서 흡족해하는구나. 그게 내 눈에도 보였다. 감독님은 나중에 편집 과정에서 테이크를 고르는 데 시간을 많이 썼다고 하더라.

박종환_ ‘오늘은 이 장면 하나만 찍는다.’ 다들 그 목표를 공유하고 있으니 중간에 그만둘 이유가 없었다. 아직 해도 안 졌고, 배터리도 충분하고. (웃음) 감독님을 영화를 향한 애정만큼 성실함도 갖춘 분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촬영하면 순간순간 지치다가도 좋았다.

 

적게는 10회, 많으면 20회 내외로 테이크를 갔다고. 체력과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조은지_ 롱테이크 촬영을 처음 해봤는데. 기술적 요소에 기대지 않고 컷 하나에 내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 감정을 전달해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새삼 연기하는 재미를 느꼈다. 비슷한 작업이 있다면 또 참여하고 싶다.

박종환_ 곽민규 배우와 내가 촬영을 먼저 시작했다. 앞서 말한 원형 산책로 신을 처음 찍었는데 그날 좀 힘들었다. 현장을 통제할 인원이 없다 보니 행인 출입을 막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우리는 코로나19 상황을 배제하고 가기로 했거든. 신이 거의 막바지로 달려갈 때쯤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카메라 앞을 지나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 장면에서 내가 또 담배를 피운다. 프레임 밖에서도 계속 담배를 피우면서 연기했다. 그렇게 10회를 넘어가니 지치더라. 민규가 나보다 형이면 힘든 티를 냈을 텐데 동생이라 투정도 못 하겠고. 하필 그날따라 해도 유난히 안 저물었다. (웃음) 그러다 순간 정신을 차렸다. ‘이 감정에 함몰되면 안 된다. 여기서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촬영하는 내내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결국 그게 원칙이 됐다. 이미 찍은 것 중에 오케이 컷이 있나 없나 생각하지 않기. 지친 내색하지 않기.

조은지_ 진짜 아무 말도 안 하더라. 나는 종환이보다 누나지만 힘들다고 했거든. (웃음) 이 친구는 촬영 방식에 빠르게 적응했거나 원래 성격이 둥글둥글한가 보다 했다.

박종환_ 다음 회차부터는 힘들다는 말을 안 했다. 그러다 보니 위로도 못 해주고.

 

“나도 그래” 한 마디면 되는 일 아닌가. (웃음)

조은지_ 그런 구석이 있다니까. 나보다 연상인 줄 알고 한동안 오빠라고 불렀다. 그때도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더라. 나중에 물어봤더니 그냥 웃기만 하고.

박종환_ 나도 내가 오빠인 줄 알았다.

조은지_ 여전히 말도 안 놓는다. 오빠인 줄 알면서도 존대했는데 동생이 된 마당에 어떻게 말을 놓냐고.

박종환_ 존댓말 하면서 놀리는 게 더 재밌거든. (웃음)

 

지금 둘의 대화가 평소 리듬이라고 한다면, 영화에서는 좀 더 속도감 있게 대화를 진행한다. 시간당 소화하는 말의 양도 많고. 인물이 말하는 방식을 어떻게 설정했나.

박종환_ 승진은 상대방과 교감하는 과정에서 오래 생각하는 인물은 아니라고 본다. 타인의 말에 관해 고민하거나 제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본인이 할 수 있는 말을 반사적으로 내뱉는 편이다. 승진은 대부분 방어하는 데 말을 사용한다. 상대의 목적을 재빨리 간파해서 대응하려 하고, 상대가 말하는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답변한다. 자연스레 말을 주고받는 박자가 빨라졌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은영은 말을 머금으면서 타이밍을 기다린다.

조은지_ 은영은 어떤 상황에서든 듣고 싶은 말이 명확하게 있는 인물이다. 승진을 방어적이라고 보면서도 끊임없이 대답을 유도하고, 친구들과 셋이 모인 자리에서는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다. 그러다 자신이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지 친구들에게 털어놓으면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도 하고.

박종환_ 은영과 승진, 여자 친구들, 남자 친구들 등 감독님은 팀마다 대화 분위기를 다르게 내고 싶어 했고, 우리는 그에 어울리는 대사 톤과 속도를 유추하면서 연기했다. 아마도 은영과 승진이 ‘손병호 게임’하는 장면에서 대사 흐름이 가장 빠를 거다. ‘여기선 둘이 핑퐁하듯 리드미컬하게 주고받아야 감독님이 바라는 분위기에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영진

사전에 감독과 논의한 적은 없나. 말의 빠르기나 세기 등을 묻는다든지.

박종환_ 그렇진 않았다. 먼저 배우들이 연기를 보여주면, 감독님은 그걸 토대로 생각했던 것 같다. 신의 의미를 말로 정의한다거나 A 대신 B를 해달라는 식으로 연기를 디렉팅하지도 않았다. 본인이 원했던 배우들과 같이 작업한다고 여겨서인지 대체로 우리 연기를 좋아해줬다. 테이크를 서너 번 이상 가고 나면 테이크마다 좋았던 부분이 생기기 마련 아닌가. 첫 번째 테이크에서는 여기가 좋고 두 번째에선 저기가 좋고. 그렇게 취합하는 선에서 고민했을 거라 본다. 근데 이마저도 분명하게 말한 것은 아니고 그저 짐작해볼 뿐이다. 여차저차해서 한 번 더 가겠다고 이유를 알려준 적이 없다. “아 그게 조금, 그냥 조금…” 이런 식이다. (웃음) 내게는 그 ‘조금’이라는 말이 아쉬움으로 들렸다. 이전 테이크에서 마음에 든 부분이 이번에는 안 살았구나. 그걸 좀 더 집중해서 잘 살려보면 어떨까. 사실 내 습관이다. 감독님 훔쳐보기. 물론 대화해야지. 함께 작업하려면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게 맞는데 한동안 감독님들과 묻고 답하기를 안 했다.

 

일부러?

박종환_ 말로 설명하기를 어려워하는 감독님을 많이 만났다. 장면이 여러 갈래로 나아가지 않고 한 가지 의미만 표현할까 봐, 오히려 제한되고 축소될까 봐 말씀을 아끼시는 것 같더라. 그걸 느낀 다음부터는 나도 잘 묻지 않았다. 자연스레 훔쳐보기가 습관이 됐고 <컨버세이션> 촬영하면서도 감독님이 뭘 아쉬워하고 좋아하는지 살펴봤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감독님의 속내를 완전히 헤아릴 수는 없다.

조은지_ 그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쉽지 않지.

박종환_ ‘덕중의 의중’ 괜찮은데? (웃음)

조은지_ 감독님에게 뭔가를 질문했다가 딱 떨어지는 대답을 듣지 못했던 적이 있다. 그날 집에 돌아가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살다 보면 말로 표현하거나 설득할 수 없는 감정과 종종 마주하지 않나. 감독님에게도 그런 것들이 당연히 있겠지 싶더라. 어쩌면 내가 은영이라는 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은영이 누구인지 감독님보다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는지도 모르고.

 

롱테이크 촬영의 멋진 사례처럼 들린다. 촬영하고 시간이 꽤 지났지만 그 말을 했던 순간은 선명하게 떠오른다고 꼽을 만큼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면.

조은지_ 여자 친구들과 셋이 와인을 마시다가 은영이 툭 말한다. 남편이 나 때문에 이 집에 들어와서 사는 것 같다고. 처음 시나리오 봤을 때도 그 대사가 눈에 들어왔다. 와 닿았다고 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겠지. (웃음) ‘덕중의 의중’은 모르겠지만 감독님이 뛰어난 공감 능력을 지녔다는 건 알겠다. 은영이 감추고 싶은 마음을 꺼내 놓는 순간이라서 기억에 남는다. 누가 묻지도 않는데 그런 말을 했다는 점이 좋았다. 승진 대사 중에는 “이것이 옳아” 필재에게 쓴 편지에 나오는 문장이다.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는데 최근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그 대사에 울컥했다. 되게 서글프더라.

박종환_ 난 대명(곽진무) 대사가 정겨워서 좋은데. “야! 너도 자고 가!”

조은지_ 아니, 자기 대사를 말하라고.

박종환_ 승진 대사는 다 좋다.

조은지_ 하나만 말한 난 뭐가 되나. 내가 후보를 몇 개 던져줄까?

박종환_ 음, 그럼 엔딩에서 은영 신발 끈을 묶어주며 했던 대사. “너 신발도 정말 끝내준다” 은영이 하도 답답해하니 승진은 영화에서 줄곧 유지했던 자세를 버리고 그렇게나마 마음을 전한다. 이전과는 다르게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모습이 좋더라.

조은지_ 내 지인들은 영화 보고 승진이 얄미워 죽겠다고 하더라. “신발도 끝내준다니 걔는 말이나 못 하면!” (웃음) 블로그에서 재밌는 리뷰를 봤다. 마지막에 승진이 눈에 뭐가 들어갔다면서 주저앉는다. 은영은 아무것도 없다고 다그치는데, 어떤 분이 그때 승진 눈에 은영이 들어간 거 아니냐고 하더라.

박종환_ 진짜 로맨틱한 해석이다.

 

은영은 승진보다 가변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누구와 어떤 시점에 대화하는지에 따라 어조와 표정이 변화하는데 얼마나 염두에 두고 연기했나.

조은지_ 현재와 과거가 교차할 텐데 어떻게 연결할지 얼마나 드러낼지 고민했다. 인물 간 거리와 친밀감 등을 고려하며 말투와 표정에 신경을 썼다. 예컨대 승진과 영화관에서 재회한 장면의 경우, 은영의 심리는 복잡미묘하다. 승진이 싫지 않으니 옆자리로 오라고 부르는데, 자신이 지금 기분 좋다는 걸 스스로 용납하지 못한다. 승진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툴툴대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랬던 적이 있는지, 언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떠올리면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아주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야 했지만. (웃음) 여자 친구들과 함께하는 장면에서는 조금 어색해 보였으면 했다. 실제로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여도 어제 본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구는 편인데, 영화에서는 일부러 불편한 느낌을 살렸다.

조은지 ⓒ이영진

승진은 자신을 잘 바꾸지 않는 인물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연애 혹은 결혼 전후에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조은지_ 승진은 계속 승진이지.

박종환_ 그래도 결혼한 다음에는 뒷모습이 좀 달라 보인다고 하던데. (웃음)

조은지_ 승진은 본인이 뭘 원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 같다. 확신이 없으니 제대로 말을 못 하는 것 아닐까. 그냥 위기를 모면하려고, 대화를 피하려고 실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느낌이다. 남들 앞에선 단단한 척하지만, 상처가 많은 인물일 거라 짐작했다. 타인은 물론이고 자신도 믿지 못할 정도로 깊이 상처받은 사람. “이것이 옳아”라는 대사에 울컥했던 이유다. 승진이 어떤 마음을 먹고 말했는지 알 듯했거든.

박종환_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얘기를 듣다 보니 승진은 차라리 상처가 없어서, 상처라는 걸 몰라서 문제인 것 같은데. 상처를 받은 적이 없으니 자신이 남에게 상처 준다는 것도 모른다. 편지를 쓰면서 처음 깨달았을 수도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겠구나. 필재가 편지를 받으면 반가워할 거라고 예상하면서 편지로 이별을 고하고.

조은지_ 이기적이네!

박종환_ 그렇다니까. 승진은 상처를 안고 사는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

 

옆에 있는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타입이랄까. 필재든 은영이든 그를 바꿔보려 애쓰겠지만 결국 불가능을 인정하고 돌아설 것만 같다.

박종환_ 그래서 꽤 오랜 시간 본인이 주거나 받았던 데미지를 상처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본다. 필재에게 편지 쓸 때는 혹시나 하는 마음 아니었을까. 상처받았다면 그걸 알아주려고 하는 마음. 그러다 승진도 점차 상처를 알고 느끼면서 바뀌는 거다. 어깨가 처지고 생기도 잃고. (웃음)

조은지_ 우리 영화가 이렇게 여백을 남겨 놓는다. 다들 마음을 투영하며 각자 해석하기 나름이다. (웃음)

 

연기하면서 상대와의 호흡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둘이 주고받는 대화로 장면을 구성하지만, 의외로 <컨버세이션>에서 호흡을 맞추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거든. 지금처럼 한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듯, 대화 흐름도 어긋나고 겉돌면 그런대로 수용했던 것 아닌가.

박종환_ 난 호흡이 잘 맞네, 안 맞네 하는 구분에 개의치 않는다. 잘 맞든 안 맞든 그걸 느끼는 일 자체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끔 배우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방금 우리 진짜 잘 맞았어”라는 말을 듣는데, 사실 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애초에 연기에서 신경 쓰는 부분이 아니다.

조은지_ 우리가 안 맞았다는 뜻인가?

박종환_ 아니, 당연히 안 맞으면 영화가 이렇게 나올 수가 없지. 근데 그건 결과다. 장면이 좋게 나오면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 실제로 연기하는 과정에서는 내가 호흡을 의식해봤자 소용이 없다. 다만, 대사를 주고받는 상황이라면 내 대사에 심취한 상태로 머무를 순 없다. 상대방을 살피면서 미세하게 변화하는 말의 세기와 리듬을 포착해야 한다. 그걸 받아서 끌어안든지 튕겨내든지, 혹은 정곡을 찌르든지 하려면 잘 지켜보는 수밖에.

조은지_ 주는 데만 집중하면 받는 걸 놓치기 마련인데, 종환 배우는 촬영하는 내내 능숙하게 받아주더라. 기본적으로 받는 걸 잘하다 보니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닐까? 난 어느 순간 우리가 같은 마음으로 연기한다는 걸 확신했다. 서로 한 곳을 바라보는 느낌.

박종환_ 근데 받는 것만큼 잘 주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 결국 찰나에 이뤄지는 행위다. 그 순간에 집중하다 보니 상대 배우와 호흡이 맞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쪽에 가깝다. 그냥 현재 분위기를 잘 따라가려고 한다. 어느 한쪽이 두드러지면 좋은 장면을 만들기 어려우니까. 근데 <컨버세이션>에서 남자 셋이 나오는 장면은 좀 이상하다. 현장에 어떤 의도를 갖고 들어가진 않았는데 처음부터 다른 신에 비해 톤이 아주 높다. 왜 그랬지? 남자들끼리 희희낙락 떠드는 상황에 사로잡혔던 걸까?

 

세팅이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하지 않았을까? 밤, 옥상, 눈앞에서 지글거리는 불판.

박종환_ 그런 것 같다. 굳이 톤을 높일 필요 없이 차분하게 말해도 됐는데 다들 조금씩 고조된 상태였다.

조은지_ 불편함을 느낄만한 요소가 없기도 하고. 물론 승진은 필재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지만, 남자들의 대화는 대체로 투명하게 흘러간다. 격식을 차리거나 눈치를 봐야 할 관계가 아니다. 승진은 그전에 필재 이름을 듣고 나서 크게 웃기도 했고.

박종환_ 맞다, 필재와 처음 만나는 집안 장면과 옥상 장면을 같은 날 촬영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박종환 ⓒ이영진

화자와 청자 역할을 동시에 소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강력하게 다가온 감정은 뭐였나. 말하기보다 듣기에서 더 풍부한 감정을 마주했을 듯하다.

조은지_ 은영은 ‘투 머치 토커’라서 좀 애매한데. (웃음) 언젠가부터 은영과 내가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진심을 꺼내놓기 어려워하는, 그 순간이 올까 봐 불안해하는 모습을 은영에게서 봤다. 은영은 타인의 말과 마음에 반응하려고 애쓰는 사람 아닐까 한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살아온 사람. 한편, 상담 장면에서 은영은 내담자에게 자신 역시 자아실현과 거리가 먼 삶을 산다고 고백한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할 따름이라고. 그때 연기하면서 느꼈던 감정도 길게 남는 것 같다.

 

여럿이 어울리다 보면 은영 같은 사람이 한 명씩 있다. 가장 믿음직스러워서 관심도 걱정도 덜 받는다. 알아서 잘 살겠거니 하며 연락을 미루다가 나중에야 미안해지는 친구.

조은지_ 이번에 다시 영화를 보는데 은영이 너무 짠하더라. 진짜 ‘눈물 셀카’ 찍어야 한다니까. (웃음)

 

박종환 배우는 어떤 감정에 주목했나.

박종환_ 승진은 결국 영화에서 사랑 얘기를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다. 필재와 헤어졌지만 둘이 계속 만날 수 있는 건, 어떻게 보면 관계를 매듭지으려 노력했기 때문이지 않나 싶더라. 은영이 마지막에 그렇게 붙잡아주지 않았으면 은영과의 관계도 매듭을 짓지 못한 채 지나갔을 수도 있고. 살아가면서 느꼈던 여러 감정이 떠올랐고, 영화에서 느낀 감정이 내 삶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지금도 승진 같다. 알 듯 모를 듯, 말할 듯 말 듯.

조은지_ 캐릭터를 아직 못 벗어났다. 그래서 감정이 뭐냐고!

박종환_ 말하자면 생각이 많아지는 감정? (웃음) 시간을 통과하면서 서서히 알아가는 것들이 생기지 않나. 때로는 감정을 들여다보기가 난처하거나 어렵기도 하다. 거기서 도망치듯 덮어두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난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집중하는 감정도 비슷한가?

조은지_ 난 개봉 앞두고 걱정이 많다. 영화를 만드는 이유, 배우가 작업에 참여하는 궁극적 목적은 관객과 만나는 거다. 많은 분이 <컨버세이션>을 봐주고 공감하길 바라는데 그럴 만한 환경이 쉽게 마련되지 않는 듯하다. 어쨌든 다들 힘내서 잘 됐으면 좋겠다. 종환 배우는 어떤가. 아직도 승진 얼굴이다. ‘손병호 게임’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웃음)

박종환_ 개봉이 다가오면 작업을 복기해야 하는 상황과 마주한다. 동시에 최근 진행하는 작품과 앞으로 할 일에 관해서도 생각해야 하고. 인터뷰하다 보니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두고 바라보게 된다. <컨버세이션> 작업할 때와 지금은 어떻게 다른지, 나는 무엇을 유지하며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 사이에서 자연스레 ‘나 잘하고 있나?’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컨버세이션>을 워낙 즐겁게 찍어서 그런가 보다. 또 좋은 작품을 만나고 싶다. 어서 그래야겠다.

<컨버세이션>
<컨버세이션>

다락에 올라가 먼지 쌓인 상자를 주섬주섬 꺼내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 새 방도 마련해야 하고.

박종환_ 최근에 드라마 촬영을 마쳤는데 스스로 아쉬웠다. 단순한 지점을 벗어나지 못한 채 연기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컨버세이션>에서는 나름대로 복합적인 지점을 놓치지 않으며 재밌게 연기했다고 생각하는데, 드라마에선 왜 그렇게 못했을까. 심지어 드라마를 더 최근에 찍었는데. 대화하다 보니 그런 차이와 괴리를 곱씹게 된다. <컨버세이션>에서 내가 했던 연기가 정말 내가 한 게 맞나 싶기도 하고.

 

단순한 조바심과는 다르게 들린다. 어떤 점이 답답한가?

박종환_ 이러한 고민을 언젠가부터 반복한다. 난 그래도 사람들이 궁금해할 법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인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러지 못하는 상황과 맞닥뜨린다.

조은지_ 드라마, 독립영화, 상업영화 등 다양한 상황에 참여하다 보면 어떤 갭을 느낀다. 내게 요구하는 연기 톤과 감정이 늘 나와 맞지는 않는다. 그건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다. 누군가는 나를 이런 모습으로 활용하고 싶어 하고, 난 기회를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뿐이다. 조금 가볍게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물론 매번 만족할 수는 없다.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오버해야 하지? 난 정말 이것밖에 안 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면 괴롭기도 하다. 특히 난 포지션에서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았다. 근데 어느 순간 ‘굳이 자아 성찰하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고민했네’ 싶더라. 내가 선택했으니 내게도 책임이 있다. 저 사람은 이런 그림을 원했고 나는 그것과는 또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한결 편안해졌다.

박종환_ 감독이든 작가든 완전히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진 않는다는 걸 안다. 자전적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극화하고 재해석한다. 근데 때로는 본인이 전혀 경험하지 않은 것을 작품으로 보여주려 한다. 본인은 그 감정과 이야기를 모르는데 배우가 알아서 잘 표현해주길 원한다. 그게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본인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감독과 만나면 나도 내 경험을 근거 삼아 연기할 수 있다. 아직은 그런 작업이 좋다.

 

나와 전혀 다른 인물, 내가 전혀 모르는 세계로 들어가서 연기하고 싶은 욕망은 없나.

조은지_ 그건 일종의 호기심 아닐까. 배우마다 잘할 수 있는 연기는 분명히 있다. 결국 연기란 건 자아를 꺼내서 보여주는 일이다. 그렇다면 자주 활용하는 자아를 꺼낼 때 가장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겠지. 물론 나도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활용하지 않는 자아를 끄집어내어 연기할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배우도 있을 거고. 그래도 전혀 다른 인물을 꿈꾸는 건 연기 욕구와는 또 다른 지점에서 바라볼 욕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우라면 누구나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기본적으로 연출자에게 맞춰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불안을 말끔히 털어내긴 어렵다. 다만, 오래 고민했던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다들 좀 더 쉽게 접근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일수록 엄살이 심하더라. 내가 보기엔 종환 배우도 마찬가지다. 어느 매체든 참 꿋꿋하게 자기 색깔을 갖고 연기하는구나 싶은데, 자기 눈엔 다를 수도 있지. 기준 자체가 높으니까.

 

그래서 다음 작품이 기대되기도 하고. 차기작 중에 공개할만한 것이 있다면.

조은지_ 얼마 전 드라마 촬영을 마쳤다. 당분간 개봉 일정을 소화하는 데 집중할 예정이다. 확실히 정해진 바는 없지만 시나리오 작업도 계속하고 있다.

박종환_ 코로나19로 인해 개봉 시기를 미룬 작품들이 순차적으로 공개될 듯하다. 작년에 <이 영화의 끝에서>를 재밌게 촬영했다. <파스카>(2015) <나의 연기 워크샵>(2017)을 연출한 안선경 감독님이 오랜만에 찍은 영화다. 주인공이 감독인데 영화를 완성하지 못한다. 연달아 세 작품 정도 엎어지고 나서 더는 영화를 못 하겠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 함께 살던 고양이가 죽어서 묻어주려고 산에 올라가는데, 그곳에서 자기 영화 속 인물들과 마주친다.

 

엄청난 악몽인데? (웃음)

박종환_ 그렇지. 나도 어떤 영화가 나올지 기다려진다.

Interview
한동안 외로운, 그토록 쓰라린
<정순> 정지혜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4-04-17
Interview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바람의 세월> 문종택·김환태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4-04-05
Interview
카메라 걸고 약속
<세월: 라이프 고즈 온> 장민경(with 오지수)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4-04-03
Interview
그늘보다 햇살
<벗어날 탈 脫> 위지원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4-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