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의 풍경
<컨버세이션>
차한비 / Choice / 2023-02-24

김덕중의 두 번째 영화 <컨버세이션>은 쓸모없는 대화의 쓸모를 탐구하는 작품처럼 보인다. 데뷔작 <에듀케이션>(2019)에서 성희(문혜인)와 현목(김준형)은 애써 대화를 청하거나 의도적으로 대화를 중단한다. 소통에 실패하는 관계를 비추며 인물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과 거리를 주시했던 전작과 달리, <컨버세이션>은 스스럼없이 대화를 시작하여 말과 이야기를 생산해내는 인물 사이로 진입한다. 은영(조은지)과 승진(박종환)에게 무게를 좀 더 두긴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주변 인물을 포괄하며 제목 그대로 대화에 긴 시간을 할애한다. 오히려 인물보다는 대화 그 자체와 대화가 이뤄지는 환경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별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으며 대화를 이용하여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겠다는 의지도 찾아보기 어렵다. 카페 옆 테이블에 앉은 이름 모를 커플의 말싸움처럼 사사로운 대화가 연속하며, 영화가 그러하듯 관객 또한 이를 엿듣고 관찰할 수밖에 없다.

<컨버세이션>은 틀을 고수하는 영화다. 장면마다 등장인물의 숫자와 구성은 다르나, 넓게 보면 은영을 중심으로 한 여자들의 대화, 승진을 중심으로 한 남자들의 대화, 그리고 은영과 승진의 대화로 요약되는 3막 형태를 띤다. 각 시퀀스는 2인 이상 모여 말을 주고받는다는 단출한 형식을 따른다. 카메라는 대개 롱숏으로 고정되어 있고, 인물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액션과 리액션을 동시에 지켜본다. 예외적으로 인물 홀로 등장하는 장면이 두어 차례 삽입되지만, 그때도 영화는 각각 전화와 편지를 활용해 어떻게든 화자와 청자를 동시에 존재하게 한다.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도 원칙을 적용한다. 영화는 입 밖으로 터져 나온 말이 어떤 의미를 획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고, 말이 그저 말로만 존재하는 순간에 머물고자 한다. 대부분 원신 원컷으로 이루어진 시퀀스들은 시간 순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시점을 무작위로 오가는 과정에서 대화는 맥락 없이 토막 난다. 그것들 사이에 내러티브를 엮어낼 만한 인과를 부여하지 않기에, 대화는 선후를 상실한 중간토막으로 보존된다.

<컨버세이션>
<컨버세이션>

대화 내용은 사실 별것 없다. 인물들은 젊음과 노화, 일과 사랑처럼 누구나 고민하는 문제로 애태우고, 옛 시절을 추억하거나 시답잖은 농담을 건넨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말은 운동성을 띠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위로, 고백, 추궁, 유혹 등 서로 다른 목적으로 발화된 말들이 인물을 둘러싼다. 물론 영화는 그다음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관계를 진전하거나 종료하는 법 없이 인물들은 그저 같은 자리에서 묻고 답하기를 반복하며 말들 근처를 맴돌 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시콜콜한 대화가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꽉 짜인 형식이 일면 자유롭게 보이는 이유는? <컨버세이션>의 강점은 확실하다. 배우들은 민첩하고 섬세하게 움직이며 실제 모습과 연기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대화를 구사한다. 말의 양이 늘어날수록 리듬감이 살아나고, 말마디마다 누추하고 애틋한 감정이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대화만큼이나 대화를 분리하는 공백과 재차 마주해야 하는 영화에서 배우들은 비언어적 표현에도 신경을 쓴다. 인물이 누구와 함께하며 무엇을 숨기고 싶어 하는지, 얼마나 오래 만난 사이인지에 따라 표정과 말투 등에 미세한 차이가 발생한다.

그러나 영화가 집중력을 획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모든 장면을 우연히 포착한 순간처럼 연출하는 데 있다. <컨버세이션>은 대화의 가능성과 가변성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상태를 가장한다. 영화에서 대화는 완결성을 갖지 못한 채 거듭 태어나고, 죽고, 부활한다. 차라리 대화는 진작 시작됐고 카메라가 한발 늦게 끼어든 듯하다. 반대로 카메라가 빠진 후에도 인물들은 그 자리에 남아 대화를 계속 이어갈 것만 같다. 영화는 인물과 인물, 인물과 공간, 인물과 사물이 빚어내는 화학작용을 서두르는 기색 없이 바라본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바라봄은 수동적인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획하고 실천하는 형식을 일컫는다. 카메라와 그 뒤에 선 감독은 제 존재를 지워내며 무력한 척하지만, 실은 영화 전체를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다. <컨버세이션>은 야심만만하고 음흉하다. 스스로 고안한 형식을 밀어붙이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힘을 발휘할 때를 기다리는데, 그 의지가 어찌나 대단한지 심지어 배우의 기술과 매력에 의존하는 영화라고 오해받기를 자처한다. 느닷없이 일어나는 마법을 기대하지 않을뿐더러 애초에 통제 불가능한 변수는 모조리 차단하면서 말이다.

<컨버세이션>
<컨버세이션>

모국어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종종 말문이 막히거나 화자 역할을 공평하게 배분하지 못했던 은영과 친구들은 그들에게 비교적 불편한 불어로 대화하자 “정말 좋은” 순간을 맞이한다. 이 장면은 규칙과 제한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컨버세이션>의 의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다시 말해 <컨버세이션>은 쓸모없는 대화의 쓸모를 탐구한다기보다는 그렇게 보이기로 작정한 영화다. 연출과 촬영이 흔들림 없이 힘을 행사한다면, 그런 영화 안에서라면 쓸모없는 말 더미를 주인공 자리에 놓아둘 수 있다고 증명하려 한다. 분절된 대화들은 인물들의 관계 흐름과 감정을 유추하도록 호기심을 유발한다. 승진과 필재(곽민규)는 어떻게 연인이 되었으며 헤어진 후에는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지, 둘은 상대에게 또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사는지 궁금해진다. 은영이 프랑스로 떠났다가 한국에 돌아온 과정이나 승진과 연애 혹은 결혼을 결심한 이유 또한 짐작하게 된다. 영화가 구태여 제공하지 않았으나 관객이 자연스레 상상해낸 내러티브, 이건 뭘 의미할까? 떼어놓고 보면 인물을 파악할 단서는 여전히 부족하다. 발 딛고 선 땅을 일구어나가기엔 무기력한데 그렇다고 훌훌 떠나버리기엔 미련이 남아 보이는 정도다. 어중간한 지대에서 제자리걸음 하는 인물들은 영화보다 약하다. 그들의 윤곽을 그려가는 중이라고, 관객 스스로 모자이크를 완성하도록 영화가 여지를 열어준다고 여기는 건 결국 착각에 불과하다.

일상에 잠시 깃들다 흩어지는 아름답고 내밀한 순간을 기록하지만, 영화가 진실로 관심을 두는 것은 삶을 향한 순진한 예찬과는 거리가 멀다.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카메라와 감독은 제 존재를 전면에 드러낸다. 엔딩에서 은영과 승진은 처음으로 열린 공간에 위치한다. 그곳은 사방이 트인 숲이고 대화에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소리 같은 불순물이 섞인다. 승진이 장난을 치자 화가 난 은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때까지 조용히 멈춰 있던 카메라가 인물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둘을 뒤쫓으며 가까이 다가가는 듯하더니 다시 걸음을 멈춰 익스트림 롱숏을 유지한다. 표정조차 확인할 수 없는 거리에서 말들은 공중에 부유하고, 열린 공간처럼 보였던 숲은 어둠과 프레임에 갇혀버린다. 이는 감독의 통제력이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엄격한 지휘 아래 가둬놓아야만 말은, 그리고 말을 주고받는 행위는 비로소 쓸모를 얻는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눈에 뭐가 들어갔다며 중얼대는 승진에게 은영은 “아무것도 없어”라고 다그친다. 승진이 “뭐 있는데”라며 반박하는 순간 여기까지라는 듯 촬영은 단호하게 종료된다. 대화 속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포진하지만, 그렇게 영화는 끝내 문을 닫고 돌아선다.

 

컨버세이션 Conversation 감독 김덕중 출연 조은지, 박종환, 곽민규, 김소이, 송은지, 곽진무 제작 풀잎필름 배급 필름다빈 제작연도 2021년 상영시간 120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3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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