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감독이 됐는지 묻자, 형슬우는 엉뚱한 얘기를 뻔뻔히 풀어낸다. 요약하면 이렇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일본어를 배우려고 했는데, 일어과에 떨어지는 바람에 별수 없이 영화과에 진학했다. “담백한” 2000년대 일본 영화와 함께 청소년기를 보낸 직후였다. 자신감 넘치는 동기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며 외딴 기분을 느끼다가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첫 번째 영화를 만들었다. 당연히 물먹을 거라 예상했는데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금의환향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엔 반전이 연속한다. 모처럼 일이 뜻대로 흘러가나 싶더니 중간에 엎어지고, 다 끝났다고 돌아설 때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대화 중 그는 깊이 파고드는 일엔 영 자신 없다고 내뺐지만 그렇다고 위축된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형슬우의 장점은 명확하다. 엉뚱한 시선과 뻔뻔한 화술, 그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통하는 매력이라 관객을 스크린 앞에 꽉 붙잡아둔다. <병구>(2015) <그녀의 이별법>(2016) <바겐세일 킬러>(2021) 등 재기발랄한 단편을 연출한 후, 올해 그는 첫 장편영화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를 선보인다. 길고 불확실한 제목이 일러주듯 영화는 오랜 연인 준호(이동휘)와 아영(정은채)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관계를 다룬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건 이미 아는데, 님에서 남이 되는 시간을 어떻게 삼켜야 하는지 아직 모르는 두 사람. 흔한 주제이니만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싶었다는 형슬우 감독을 만나 영화 안팎의 이야기를 들었다.
요새 설레겠다. 기대가 클 텐데.
매일 인터넷에 영화를 검색해본다. 엄청나게 긴장되진 않는다. 물론 잘 되면 좋지. 내 인지도가 올라가길 바란다기보다는 “얘한테 작업을 맡기면 나쁘지 않은 결과물이 나오겠다” 정도로 인정받으면 만족한다. 관객이 “맞아, 나도 이런 적 있어”라고 공감해주면 더할 나위 없고. 살다 보면 문득 영화 속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지 않나. 이 영화도 그런 순간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데뷔작으로 이렇게 깔끔한 연애 영화를 만들 줄 몰랐다.
내가 연애물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는 뜻인가? (웃음) 전 애인을 만나는 이야기는 흔하다. 차별점을 궁리하며 남자 주인공에게 약점을 주려고 했다. 일단 외형상 우스꽝스럽길 바랐다. 다른 쪽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연스레 담에 걸린 모습을 떠올렸다. 남자가 전 여자친구에게 느끼는 미안함과 무의식 속 불안이 겉으로 드러나는 설정이다. 잠에서 깬 순간, 그녀가 저주라도 내린 것처럼 갑자기 목이 돌아가지 않는 거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실제로 담에 걸린 적이 있다. 종일 한쪽만 보는 불편한 자세로 수업 듣고 밥도 먹고 했다. 아무리 움직여보려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는데 하교 1시간 전쯤 저절로 풀렸다. 문득 내가 학교생활에 스트레스를 느꼈나 싶더라. 성적 때문에 괴로워할 만큼 열심히 공부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웃음) 하여간 그 기억이 영향을 주긴 했다. 준호와 아영이 마음을 정리하자 준호의 담이 풀린다. 그건 일종의 판타지다. 갑자기 ‘뾰로롱’ 하며 튀어나오는 판타지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어느 정도 일상에 묻어가는 느낌으로 표현하려 했다.
가제는 ‘왼쪽을 보는 남자, 오른쪽을 보는 여자’였다. 작업 방향이 변화하면서 제목도 바뀐 건가.
예전에 쓴 단편 <왼쪽을 보는 남자> 시나리오가 원안이다. 담에 걸려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지 못하는 남자가 나온다. 그가 전 여자친구에게 물건을 돌려주러 갔다가 집에 돌아오니 현 여자친구가 떠나 있더라 하는 내용이다. 당시 시나리오를 본 지인들 반응이 괜찮았다. 공모 사업에 여러 번 지원했고 면접까지 본 적도 있는데 결국 최종 심사에서 탈락했다. 글은 나쁘지 않다고 하니 일단 덮어두고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그러다 장편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더라. 내가 단편 찍으면서는 나름 영화 재밌다는 얘기 좀 들은 애거든. 근데 장편으로 넘어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2020년 11월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심정으로 컴퓨터를 뒤졌다. 그때 <왼쪽을 보는 남자>가 눈에 딱 들어왔다. 앞뒤로 살을 붙이면 되겠더라. 둘이 어떤 커플이었고 왜 헤어졌는지, 이별 후에는 어떻게 지내는지. 그렇게 이야기를 역으로 만들면서 ‘왼쪽을 보는 남자’라는 콘셉트가 희석됐다. 기존 시나리오에선 남자가 담에 걸렸다는 설정이 중요했는데 장편에선 무게 중심이 달라졌다. 2021년 1월 초에 초고를 완성해서 피드백을 거쳤다. 보완한 시나리오를 영화사에 보낸 게 1월 말이다. 촬영은 그해 9월에 했다. 9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딱 한 달 만에 19회차로 찍었다.
그럼 엔딩을 정해 놓고 거슬러 올라가는 식으로 시나리오를 쓴 건가.
엔딩 장면도 대사는 새로 썼다. 강동완 조감독 제외하면 연출부 모두 여성 스태프였다. 다 같이 모여서 대사 한 줄씩 따져 가며 난상토론을 벌였다. 내 딴에는 필요한 대사라고 생각해서 썼는데 스태프들은 고개를 젓더라. 여자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내가 버티고 있으니 한 친구가 물었다. “이 대사가 꼭 필요한 이유가 뭐예요?” 할 말이 없더라.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없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한참 얘기하고 싸우면서 대사를 정리해나갔다.


찬란하게 타오르다가 구질구질하게 끝나는 연애의 일상적 풍경을 균형 좋게 담았다. 그중에서도 이별이라는 테마에 집중한 이유는 무엇인가.
글을 쓰다 보니 자문하게 됐다. “내가 이걸 왜 쓰고 있지? 왜 이야기하려고 하지?” 님이란 글자에 점 하나 찍으면 남이 된다고 하질 않나. 유치하고 뻔한 말인데 막상 영화로 본 적은 없는 듯했다. 물론 많이 봤겠지만 강렬하게 기억나는 작품은 없더라. 멜로 영화를 보면 길에서 우연히 전 애인과 재회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근데 뭐랄까, 현실과 좀 동떨어진 풍경? 다케노우치 유타카처럼 잘생긴 남자가 진혜림처럼 예쁜 여자에게 미소 짓는다. 하지만 실제 삶은 <냉정과 열정사이>(나카에 이사무, 2003)와 같이 흘러가지 않는다. 정말 안 좋게 헤어져서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마주쳐도 피하기 바쁘다. 일부러 안경에 입김 불어서 앞이 안 보이는 척하고.
갑자기 휴대폰 꺼내서 오지도 않은 전화를 받고. (웃음)
다들 그런 불편하고 민망한 순간을 겪기 마련이다. 서울이 큰 것 같지만 강남, 홍대, 이태원만 가도 아는 사람 꼭 만나거든. 그중엔 헤어진 연인도 있다. 로맨스 영화의 전형적 구성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상업영화 공식에 어긋난다며 해피엔딩으로 바꾸라는 말도 들었지만 오히려 의구심이 생기더라. ‘이 결말이 새드엔딩인가? 그럼 상업영화엔 어울리지 않는 배드엔딩이 되나?’ 어느 작품이든 핍진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엔딩에서 준호를 마주친 아영의 떨떠름한, 거의 벌레 보듯 하는 표정을 무척 좋아한다. 바로 그런 얼굴이 ‘리얼’에 가깝지 않나. 웃으면서 안부를 묻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보여줄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단편 <병구>(2015)로 화제를 모은 후 꾸준히 새 작품을 선보였다. 장편도 금세 만들겠구나 했는데 앞서 말한 대로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단편을 보고 접근해온 피디가 꽤 많은데 작업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간만 보다가 끝나는 상황이 반복되니 지치더라. 나와 약속하지 않은 채 일을 진행해서 곤란했던 경우도 있고.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지 고민했다.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우리나라는 제작 지원 사업이 많은 편인데 그조차도 따지고 보면 바늘구멍이다. 수백 편 중에 선정작은 열 편 내외니까. 여기에만 매달리면 경쟁력이 없을 테니, 역으로 내가 제작사에 작품을 제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제작사에 보냈고 캐스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본래 규모를 장편 독립영화로 예상했는데 이동휘 배우가 출연을 결심하면서 판도가 달라졌다.
추진력이 좋다. 각본 작업부터 촬영까지 쉼 없이 달렸구나 싶다.
영화사와 많이 싸웠다. 신인 감독이 이렇게 큰소리치는 현장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웃음) 상황이 지지부진하게 흘러갈 때마다 빨리 진행하자고, 스태프도 더 구하자고 설득했다. 정은채 배우의 출연 역시 내가 얘기를 꺼냈다. 다행히 캐스팅 운이 신기할 만큼 좋았다. 은채 씨를 포함해 거의 모든 배우가 한 번에 제안을 수락했다.
그동안 <밤치기>(정가영, 2018) <갱>(조바른, 2020) 등 여러 작품에 조단역으로 출연했다. 정작 본인 데뷔작에선 얼굴을 안 비치다니 의외다.
사실 세 번 나온다. 영화 속 인스타그램 화면을 포함해서 여기저기 숨어 있다. 희수(옥지영)가 아영에게 “소변을 앉아서 보는 남자”라고 소개하며 사진을 보여준다. 영화에 나오진 않지만 내 사진을 썼다. 준호가 듣는 인터넷 강의도 내 목소리로 녹음했다. 그간 동료들의 촬영장에 방문했다가 얼결에 몇 번 출연하긴 했는데 진짜 못 봐주겠더라. 이렇게 못생겨서 어떡하지 싶고. 내 영화에선 그 꼴을 보기 싫어서 목소리와 사진으로 대신했다. 히치콕처럼 등장하는 느낌? (웃음)
캐스팅에 관해 얘기가 많을 듯하다. 이동휘 배우는 어떻게 만났나.
작업 전엔 서로 이름과 얼굴만 알았다. 우리 사이에 (류)준열이가 있다. 난 준열이랑 친하고 준열이는 동휘 형과 친하다 보니 ‘친구의 친구’라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작년 1월, 감독 겸 배우인 이기혁 형과 목포에 놀러 갔는데 형이 불쑥 묻더라.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 시나리오를 이동휘 배우에게 보여줘도 되겠냐고. 나야 고맙지. 동휘 형 특유의 코믹한 에너지가 준호와 잘 어울릴 거라 봤다. 그러고 목포에 도착해서 파스타집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동휘 형한테 연락이 왔다. 근 2년간 봤던 시나리오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재밌다면서 상황만 맞으면 하고 싶다는 거다. 기쁜 마음에 곧바로 피디에게 전화했다. 사실 영화사는 당황했을 거다. 계획한 사이즈를 벗어나는 캐스팅이니까. 근데 난 동휘 형과 얘기하면서 확신이 생겼다. 형이 시나리오를 읽으며 <결혼 이야기>(노아 바움백, 2019)가 떠올랐다고 했는데 그 무렵 나도 흥미롭게 봤던 영화거든. 서로 마음과 시기가 통했구나 싶더라.
처음 미팅했던 날 기억하나.
성수동 오렌지 주차장에서 만났다. 기혁 형과 셋이 만나기로 했는데 형이 좀 늦었다. 주차장을 서성대다가 근사한 클래식 카를 발견했다. 신기해서 구경하는데 그 안에 동휘 형이 있더라. (웃음) 그날 샌드위치 집에서 한참 대화를 나눴다. 저예산이라는 건 본인도 알고 있으니 최대한 힘을 합쳐서 잘해보자고,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라면서 격려해주더라.
정은채 배우는 <더 테이블>(김종관, 2017) 이후 오랜만이다. 역시나 시나리오 읽고 나서 곧장 출연 의사를 전하던가.
은채 씨와는 동휘 형만큼도 접점이 없었다. 그간 작품을 보면서 늘 멋지다고 생각했다. 미인에 키도 크고 보이스 톤도 좋다. 화면을 보고 있으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는, 신비한 매력을 지닌 배우다. 이동휘 배우를 먼저 캐스팅하고 나서 어떤 배우에게 아영을 부탁해야 할지 오래 고민했다. 각자의 개성과 힘이 돋보일 수 있는 페어를 만들고 싶었다. 은채 씨한테 시나리오 보낸 후 3일 만에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실물은 훨씬 압도적이라 처음에는 좀 쑥스러웠는데, 내가 찍은 단편들을 봤다면서 은채 씨가 먼저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줬다. 실제로 소탈하고 유머러스한 성격이다.
이동휘 배우가 유려한 만담과 ‘몸 개그’로 코미디를 주도한다면, 정은채 배우는 정통 멜로라고 부를 만한 차분하고 서정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재밌는 시너지를 발휘하더라.
내가 봐도 이상한 영화다. 은채 씨는 차분하게 가라앉고, 동휘 형은 툭툭 던지면서 튀어 오르고. 그런 이질감을 즐겼다. 한쪽은 무겁고 다른 한쪽은 가벼운데 어느 순간에는 그게 뒤바뀌기도 한다. 영화 초반부를 보면 두 인물이 아예 섞이지 않는다. 삐걱대고 어색한 느낌이 둘의 거리를 드러낼 거라 봤다. 연인이지만 통하는 구석이 없는 관계니까.
조단역 배우 캐스팅에서는 인맥과 동료애를 한껏 자랑했다. 변중희, 김소형, 김금순, 엄하늘, 손예원, 이가경, 정수지, 김정우 등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띈다. 독립영화 현장에서 맺은 인연인가.
내 나무위키를 엄하늘, 김호 감독이 만들었는데 그놈들이 이렇게 써놨더라. “영화제 어느 술자리를 가도 마주친다는 괴담이 있다. 영화제의 요정이라 불린다고.” (웃음) 근데 또 틀린 말은 아니다. 현장도 현장인데 영화제나 사석에서 친해진 사람들이 많다. 우리 영화는 오디션을 진행하지 않았다. 많은 분이 선뜻 시간을 내준 덕분에 캐스팅 과정을 간소화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종수도 캐스팅을 고심한 캐릭터다. 준호와 아영 사이에 불쑥 등장해서 긴장을 만들어내는 히든카드거든. 분량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남길 바랐다. 예전에 소개받고 인사만 나눈 김정우 배우가 떠올랐다. 종수를 통해 관객들이 과거 준호의 모습을 짐작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종수는 아영을 환히 웃게 하는 사람이다. 오래전 준호에게 그와 같은 유머러스함이 있지 않았을까. 직접적으로 말하면 촌스러운 듯해서 뉘앙스만 전했다.


다양한 배우를 만나면서 시나리오와 실제 연기 사이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듣고 싶다. 특히 이동휘 배우의 맛깔난 화술을 보면서 애드리브를 얼마나 허용했는지 궁금하더라.
단편부터 대사는 거의 시나리오대로 간다. 근데 이번 작품에선 동휘 형의 애드리브가 적재적소에 들어왔다.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갑자기 하더라. (웃음) 예를 들어 누군가 던진 쓰레기봉투에 맞고 나서 “담배 새끼들인가?” 혼잣말하는데, 이전 장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대사라 마음에 들었다. 물론 아니다 싶을 땐 다시 가자고 했고 형도 불편한 기색 없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고규필 배우에게 대사가 입에 잘 붙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배우가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는 대본을 쓴다고 하더라.
말하면서 쓰나.
그렇진 않고 그냥 말이 많다. 지금도 계속 떠들잖나. (웃음)
서브 캐릭터 역시 대조적이다. 이별 후 아영은 준호와 달리 무게감 있고 안정적인 경일(강길우)과, 준호는 아영이 타박했던 제 허허실실한 모습을 좋아해주는 안나(정다은)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다. 외모와 분위기 등 상반되는 매력을 지닌 배우를 찾고자 공들였을 텐데.
경일은 아우라가 중요했다. 30대 남자 배우 중에 멋있는 분들은 정말 많다. 근데 정은채 배우와 나란히 붙으려면 특별한 매력이 필요하겠더라. 마냥 ‘잘생긴 실장님’ 캐릭터로 가면 승산이 없다고 봤다. 그 무렵 전주국제영화제에 놀러 갔다. 난 항상 뭔가를 먹는 순간에 일이 벌어지는데 그날은 타코 집이었다. (웃음) 타코 먹으면서 ‘아, 누가 경일이랑 어울릴까?’ 고민하던 차에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더니 길우 씨가 문을 열고 우아하게 걸어오더라. 인사하는 목소리도 어찌나 근사하던지. 길우 씨에게 직접 말한 적은 없는데 난 뒤에서 그를 ‘학길우’라고 부른다. 학처럼 우아하다는 뜻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괜찮겠더라. 정은채와 강길우, 두 배우가 묘하게 엇박자를 타면서 연기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정다은 배우는 <공수도>(채여준, 2020), <마녀>(박훈정, 2018) 등을 통해 처음 봤다. 안나는 자기주장과 직관을 밀고 나가는 캐릭터다 보니 어느 정도 ‘포스’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었다. 다은 씨 프로필을 봤는데 살짝 반항적인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안나의 경우, 어느 순간부터 성질이 변화하는 인물로 표현하고 싶었다. 연애 초반에는 “오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태도가 드러난다.
그런 면에서 안나는 아영의 예전 모습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준호와 막 연애를 시작했을 무렵엔 아영도 활기와 포용력을 간직한 사람 아니었을까 싶더라.
실제 연애도 비슷하지 않나. 전 애인과 아예 다른 사람 혹은 전 애인이 잃어버린 모습을 여전히 가진 사람을 찾는다. 누군가와 얼굴이 닮아서, 내가 좋아하는 성격이나 취향을 지닌 사람이라서 마음이 가기도 하고. 말한 대로 준호는 안나와의 관계에서 아영을 의식한다. 한편, 상황은 다르지만 두 남자 모두 아영을 기만한다는 점에서 준호와 경일은 본질적으로 비슷한 캐릭터다. 한 명은 속 터지게 하면서 기만하고, 다른 한 명은 태연하게 기만하고.
아영과 준호 모두 예술가를 꿈꿨다가 현실에 가로막혀 포기했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왜 하필 미술인지도 궁금하고.
일단 영화라고 하면 재미없을 것 같았다. 그런 영화는 너무 많으니까. 단편 시나리오 역시 화실을 배경 삼는다. 돌려받은 태블릿을 테스트한다는 명목으로 여자가 즉석에서 남자를 그린다는 것, 그 와중에 여자는 다시 미술을 시작하며 제 길을 찾아간다는 것도 이미 결정된 내용이었다. 나를 투영해서 만든 설정이기도 하다. 영화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그래, 너 영화감독 꼭 돼라! 파이팅!” 하셨을 리가 없잖나. (웃음) 반대하셨지만 난 귀를 닫고 버텼다. 시간이 흐른 후에 준호처럼 주변 친구들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다들 자리 잡고 사는데 그에 비하면 난 공중에 떠다니는 인간 같더라. 근데 또 영화제 가면 신나고, 술자리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논다. 그러다 다음날 깨면 ‘현타’ 오고. 방향성이라는 게 진짜 중요하구나 싶더라. 제작진과는 “이거 준호의 패배 서사 아니야?”라면서 농담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준호는 하고 싶은 일도 못 찾고 연애도 실패한다. 자기 과실이 크니 어쩔 수 없지만 생각할수록 짠내 나는 캐릭터긴 하다. 앞으로 괜찮을까? 직장을 구했으니 당분간 먹고사는 걱정은 줄어들겠지. 근데 그걸 준호가 바라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준호와 달리, 아영은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중이고. 우연히 전 애인을 마주쳤을 때 진짜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는 쪽도 아영이다.
근데 왜 아영의 개인전 제목은 ‘맴돌아보다’인가. 미련이나 후회를 암시하는 듯한데.
스태프들과 말장난하다가 나온 제목이다. 본래 ‘마음을 돌아보다’라고 지으려 했는데 대놓고 관계 문제를 가리키는 것 같아서 마음을 ‘맴’으로 바꿨다. 후회보다는 제 마음을 살펴본다는 의미에 가깝다. 전시회 장면에는 슬픈 에피소드가 있다. 내가 전시 기간을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개최 기간으로 맞춰놨다. 영화제에 출품하면서 나름 기대했는데 안 뽑아주더라. 좌절했다니까. 이렇게 날짜까지 명시하면서 의지를 보였는데! (웃음)
현장 분위기가 끈끈했구나 싶다. 촬영하면서 운이 따른다거나 합이 잘 맞는다고 느꼈던 순간이 있다면.
첫 촬영 일주일 전쯤 조감독이 비 소식을 알려줬다. 비 내리라고 고사를 지내는 거냐 싶을 정도로 계속 말하더라. (웃음) 촬영 날엔 다행히 하늘만 좀 우중충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오전에 아파트 촬영을 끝냈다. 근데 다음 장소로 이동하니 비가 말도 안 되게 쏟아졌다. 카페에서 대기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날 교수 역의 민경진 배우가 먼 곳에서 오셨다. 비 때문에 그분을 다시 부르기는 죄송해서 어떻게든 비를 이용해보기로 했다. 밖을 돌아다니다가 영화 속 공간을 찾았다. 건물 로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대기하던 카페의 1층 공간이다. 교수가 자전거를 타고 등장하는데 거기에 마침 자전거 주차장이 있더라. 결과적으로는 훨씬 만족했다. 같은 하루인데 준호는 화창한 실내에 있고 아영이는 야외에서 비 내리는 걸 보고. 두 장면을 대치하니 재밌더라.
교수 캐릭터도 범상치 않다. 대낮에 운동복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등장하는 교수라니.
처음에는 그냥 정장 입는 평범한 교수를 생각했는데 너무 밋밋하더라. 교수지만 교수 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면 재밌을 듯했다. 모든 캐릭터에 그러한 아이러니를 조금씩 심으려고 했다. 전교 1등이라는 고등학생은 담배를 피우고, 준호는 고시 공부한다면서 엉뚱한 짓 하고. 아영도 원래 미술 작가를 꿈꿨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외면할 수 없어 부동산 중개사로 일한다.
아이러니에 관해 좀 더 듣고 싶다. 예상을 벗어나는 인물, 관계가 미끄러지는 순간을 보여주는 데 관심이 많아 보인다.
가장 최근에 찍은 단편 <증발>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만든 작품들의 공통 키워드가 관계다. 연인, 동료, 친구, 가족 등 관계를 둘러싼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타인에게 실수할 때가 있다. 나 역시 종종 난처한 상황에 부닥친다. 서로 싸우기도 하고, 상대의 오해를 풀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영화제 요정”처럼 이곳저곳을 다니는데 사람을 좀 많이 만나겠나. 대체로 즐겁지만 누군가 시비를 건다든지 하는 불쾌한 일도 이따금 벌어진다. 그러면서 한 번씩 관계를 돌아본다. 저 사람은 왜 그럴까? 나를 잘 몰라서 그러겠지? 자연스레 ‘난 어디 가서 실수하지 말자’ 다짐하는데 쉽지 않다. 나라고 완벽할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인지 작품 대부분 유머러스하면서도 묘하게 냉소적이다. 사람을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진 않은데.
소시오패스 같다는 건가? (웃음) 활발하고 사교적인 성격처럼 보이지만 사실 난 개인주의자다.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도, 내 영역을 침범당하는 것도 안 좋아한다. 먼저 연락하는 일도 거의 없거니와 우연히 만난 사람을 붙잡고 떠드는 일도 없다. 그냥 반갑게 인사한 다음 “그럼 다음에 또 봬요!” 이게 끝이다. 두루두루 어울리는 와중에 진짜 친한 친구들은 손가락에 꼽는다. 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소수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쟤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그렇게 생각하는 과정에서 영화의 재료를 얻는다. 물론 나 역시 스케일을 키워 거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기도 한데, 지금 당장은 내가 흥미를 느끼는 주제에 집중하려고 한다.
영화에서 늘 반전을 그린다. 극적 사건이 발생한다기보다는 비밀과 거짓말처럼 누군가 몰래 감춰둔 것들이 들통나는 순간을 포착한다.
따지고 보면 난 해피엔딩을 만든 적이 없다. 다 나쁘게 끝난다.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에서는 모든 연인이 헤어지고, <병구>도 톤 자체는 화사하지만 이상하게 로맨스를 비켜나간다. <그 냄새는 소똥냄새였어>(2016)에서는 심지어 인물을 죽여버리기까지 하고. 말하다 보니 진짜 소시오패스 같네. (웃음) 간지러운 결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속으로는 이런 생각도 한다. 현실에선 언제나 좋은 사람처럼 비치길 바라고 표정도 좀 숨기는데, 영화에선 정말 내 마음대로 하고 있구나.


애초 영화는 어떻게 시작했나. 필모그래피에 처음 기재된 작품은 <벽>(2009)이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난 후에야 <병구>를 만들었는데.
<벽>은 대학생 때 친구들과 만든 단편이다. 영화를 찍긴 해야 하는데 뭘 찍을지 모르겠더라. 그때 친구가 약을 팔았다. 우리 셋이 담배를 이용해서 한 편씩 찍어보자고 하더라. <벽>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한 남자가 꽁초를 줍기 위해 벽 사이에 들어갔다가 머리가 끼여서 못 나오는데 아무도 그를 구해주지 않는다. 말하자면 타인에게 무관심한 현대인을 다룬 영화다. 그게 놀랍게도 영화제에 갔다.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도 탔다.
영화과에 진학하긴 했지만 원래 일본어를 공부하고 싶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야구치 시노부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일본영화 키드였거든. 나도 그렇게 담백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입시에서 일본어과, 영화과 둘 다 지원했는데 일본어과에 떨어지는 바람에 영화과에 갔다. (웃음) 입학하고 초반엔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좀 ‘샤이’했거든. 영화과엔 난다 긴다 하는 애들이 수두룩했다. 난 카메라 조작법도 모르는데 동기 중 몇몇은 이미 촬영에 능숙했다. 다들 끼는 또 어찌나 많은지. 무슨 수를 써도 얘네를 이길 방법은 없겠구나 싶어서 1학년 땐 좌절했다. 제대하고 복학하니 진짜 불안하더라. 마침 친구가 제안해서 무턱대고 <벽>을 만들었다. 영화제 출품도 그때 처음 해봤다. 부산독립영화제에서 상영했는데 창피해서 GV도 안 하고 도망쳤다. 큰 스크린으로 보니 생각보다 더 허접스럽더라. 수치감에 몸부림치다가 마지막으로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출품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게 또 됐다. 덕분에 한국과 일본의 영화인을 여럿 만났고, 영화제 기간 내내 참 재미있게 놀았다. 나중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일본 영화인들이 방문했을 때도 찾아가서 만났다. 다들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분들 눈엔 어린 대학생이 얼마나 귀여웠겠나.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워킹홀리데이로 일본에 갔다.
일본영화 키드다운 결정이다.
일자리는커녕 머물 곳도 마련하지 않은 채 대책 없이 떠났다. 2011년 3월 5일, 출국 날짜도 기억한다. ‘유바리 친구들’에게 소식을 알렸더니 잘 데 없으면 여기로 가라면서 주소를 주더라. 알고 보니 소노 시온 감독 옆에서 조감독으로 일하는 분의 집이었다. 그렇게 처음 보는 사람과 며칠을 지내며 일본 생활을 시작했다. 근데 한 달도 못 채우고 귀국했다. 아르바이트 면접 보러 가기 전에 잠깐 공원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마구 튀어나오더라.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 터진 거다. 나도 불안했지만 부모님이 엄청나게 걱정하셨다. 결국 본가인 부산으로 돌아갔고 얼마 후 서울로 이사했다. 아무래도 영화 일을 하려면 서울에 가긴 해야겠더라.
그동안 제작, 음향, 편집 등 여러 분야를 경험했다. <죽여주는 여자>(이재용, 2016) <베테랑>(류승완, 2014) 등 상업영화 현장에서 경력도 쌓고. 영화 일로 돈을 벌겠다는 의지와 더불어, 영화학교 밖에서 뭔가를 배우려고 한 욕심도 느껴진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선뜻 도전하기가 어려웠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 않나. 일본에서 살겠다는 계획이 틀어지고 나니 시간이 붕 떠버렸다. 유바리에서 만난 감독님 소개로 그때 독립영화 연출부에 들어갔다. 한 작품 마치고서 백수처럼 지내다가 우연히 조감독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차곡차곡 경력을 쌓다 보니 일할 기회가 꾸준히 생겼다. 실은 나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가고 싶었다. 안 간 것이 아니라 못 간 거다. 불합격 통보 받고 ‘나 같은 놈은 안 되는구나’ 했다. 하기야 반에서 1등도 해본 적 없는데 어떻게 100명 중 10명을 뽑는 곳에 가겠나. 전국에서 영화 잘 찍는다고 소문난 놈들은 전부 올 텐데. 아카데미를 포기하고 현장에서 일하다가 오랜만에 만든 영화가 <병구>다. (류)준열의 공이 크다. “너는 왜 영화 안 찍어? 영화도 안 만드는 애가 무슨 감독이야.” 그 말에 자극받아서 시작했거든. 돌이켜보면 <병구>를 공개하고 한동안 취한 기분으로 산 것 같다. 관객들이 좋아해주니 너무 신나더라. 그간 없던 용기도 생기고. 내가 칭찬에 약한 편인가 보다. (웃음)
<병구>를 찍으면서 영화 만들기를 향한 열정이 되살아났나.
당시 시나리오 쓰고 2주 만에 촬영했다. 감이 떨어졌을 거란 생각에 준비하면서 굉장히 불안했고 촬영을 마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에서 (서)현우 형이랑 (공)민정이가 너무 잘해줬지만,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편집을 직접 안 하고 촬영해준 형에게 부탁했다. 형이 먼저 좀 봐주면 그 다음에 내가 붙어서 다듬겠다고. 며칠 후 형한테 연락이 왔다. “슬우야, 재밌는데?” 곧장 형이 사는 집으로 날아갔다. 형이 편집된 화면을 보면서 피식거리는데 내 눈에도 꽤 웃기더라. 그때부터 후반작업에 매달렸다. 미쟝센단편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를 연달아 떨어지면서 상심했지만, 결과적으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큰 응원을 받았다. 선정작 발표했던 날이 기억난다. 아침 일찍 준열이한테 전화가 왔다. 휴대폰 보면서 내심 직감했다. ‘이번엔 됐구나!’ 준열이가 홈페이지 확인 안 하냐면서 웃더라. 한창 <죽여주는 여자> 연출부로 일했던 때다. 피곤한 나머지 좋아하는 티를 못 냈지만 실은 되게 행복했다. 서울독립영화제는 사회적이고 진지한 작품을 주로 소개해온 것 같아서 <병구>처럼 사적이고 이상한 영화를 좋아해주려나 걱정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래서 눈길을 끌었나 싶기도 하다. 작품뿐만 아니라 배우들도 함께 주목 받아서 더 뿌듯했다. 자랑 같지만 당시 이런 얘기가 돌았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영화인들이 주고받는 인사말이 “잘 지냈어?”가 아니라 “<병구> 봤어?” 였다고. (웃음)
모두에게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게다가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오는 부메랑 같은 영화 아닌가. 최근에도 상영했던데.
<병구>는 나한테 <타이타닉>이나 다름없다. 작년 상영 수익이라며 얼마 전에도 4만 원이 입금됐다. 첫 상영하고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현우 형한테 혹시 GV 가능하시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형이 “슬우야, 이제 제발 그만하자”며 농담하더라. 작품이 사랑받는 건 물론 감사한 일인데 하도 여러 번 부르니까.


프리 프로덕션부터 관객과 만나는 시간까지, 언제 제일 즐겁다고 느끼나.
하나만 꼽자면 콘티 작업. 완전히 자유로운 시간이다. ‘인물이 여기서 나오면 좋을 것 같은데?’ ‘저 자리에 그림을 놓으면 어울리겠다’ 그렇게 병정놀이하듯 마음껏 상상하는 거다. 막상 카메라를 대보면 달라지는 부분이 생기지만. 현장에선 스포츠 모드로 전환한다. 공을 패스하듯 촬영감독에게 아이디어를 전달하면서 최선의 장면을 맞춰 나간다.
촬영장에서는 어떤 모습인가. 이제 ‘샤이’한 성격은 아닌 듯한데.
현장이 주는 즐거움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북적이는 공간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준호와 아영 집에서 촬영할 때는 그 좁은 곳에 들어온 사람이 스무 명도 넘었다. 공황이 올 것 같더라. 소음 문제도 스트레스다. 작업하다 보면 큰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데, 이유야 어쨌든 간에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 아닌가. 그럴 때마다 조마조마하다. 스태프들이 좀 살살 걸어 다녔으면 싶고. 난 아파트에서 오래 산 터라 습관처럼 뒤꿈치를 살짝 들고 걷거든. 몸무게는 많이 나가도 발소리는 안 난다. (웃음) 배우나 스태프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순간도 피할 수 없다. 즐거운 만큼 기 빨리고 힘든 곳이 현장이다.
계속 뭔가를 선택해야 하고.
선택할 일이 산더미인데 그 와중에 식사 메뉴까지 고르라고 한다니까. 근데 알다시피 먹는 걸 워낙 좋아하다 보니 그때는 신나서 이것저것 제안한다.
작업 외 시간엔 뭘 하나.
축구 게임. 사람도 자주 만난다. 먼저 약속을 잡는다기보다는 누가 부르면 나가는 스타일이다. 집에서 게임을 하다가 전화 받는다. “형 뭐해요? 저 홍대 왔어요.” 그럼 나도 홍대로 가는 거다. 시사회처럼 영화 관련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일도 많다.
영화하는 사람에게 관계 맺기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계속 일하려면 네트워크를 넓혀야 하고.
나는 날 1인 기업이라고 생각한다. SNS의 중요성도 일찌감치 깨달았다. 상영 일정이 생기면 무조건 페이스북에 정리해서 올린다. 그래서인지 내가 되게 바쁜 줄 알더라. 사실 상영하면 영화가 바쁘지 내가 바쁜 건 아니거든. 그래도 활발하게 작업한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유망한 감독처럼 포장되는 듯하다. (웃음)
유망주 형슬우의 향후 계획은.
아직 모르겠다. 영화가 공개되면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우선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목표다. 작년 3월부터 매니지먼트와 제작사가 결합한 형태의 회사에서 총괄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친구인 정대건 감독의 소설 <GV 빌런 고태경> 판권을 샀고, 현재 각색 단계다. 각본과 연출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작가 역할에서 물러나 제작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내게도 유의미하리라 본다. 그와 동시에 <어른들은 몰라요>(2021) <박화영>(2018)을 연출한 이환 감독과 공동 작업을 시작했다. 아이디어 회의하면서 함께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