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도 스펙
<해시태그 시그네>
차한비 / Choice / 2023-01-13

투렛 증후군을 안고 살아가는 일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 인기를 모은 유튜버가 있다. 채널 개설 한 달 만에 구독자는 30만 명을 훌쩍 넘겼고, 힘겹게 젓가락질하며 라면을 먹는 영상의 조회수는 무려 400만 회에 달했다. 하지만 그의 ‘감동 스토리’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거짓으로 장애를 꾸며냈다는 의혹에 휩싸이면서 도전과 용기를 응원한다는 댓글창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결국 유튜버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증상을 과장했다고 시인해야만 했다. 2년 전 한국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해시태그 시그네>의 시그네(크리스틴 쿠아트 소프)가 접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시그네는 진실이나 반전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시그네의 마음을 파고드는 장면은 어느 유튜버의 몰락이 아니라 그가 빠르게 거머쥔 성공이다. 시그네는 대중을 기만한 거짓말쟁이라고 그를 손가락질하기보다 장애와 질환 또한 재화로 삼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할 것이다.

시그네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세상이 이분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다들 시도 때도 없이 인스타그램에 들어가고 유튜브 쇼츠 영상을 보느라 몇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가. SNS에서 ‘좋아요’와 ‘리트윗’ 개수로 채점되는 인기는 그야말로 현실 권력이다. 대표적 사례로 부를만한 존재가 시그네 바로 곁에 있다. 한집에 사는 애인 토마스(아이릭 새더)는 공공장소에서 절도 행위를 반복한다. 식당에서 훔친 고급 와인은 친구들에게 늘어놓을 무용담의 증거요, 갤러리에서 들고 나온 의자는 행위 예술의 소재다. ‘좋아요’와 ‘리트윗’ 덕분에 토마스는 범죄자가 아니라 유명인사가 된다. 그런 시그네와 토마스의 연애는 점차 스포트라이트 쟁탈전으로 변한다. 세간의 이목을 끌려 안달하는 토마스 곁에서 투명 인간 취급당하는 시그네, 시간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허기에 짓눌리는 그녀에게도 드디어 남들을 홀릴 기막힌 이야깃거리가 생긴다. 바로 발진과 염증을 동반한 피부병.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에 앉아 토마스에게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구하는 시그네의 얼굴엔 근심이 아니라 도취가 선명하다.

<해시태그 시그네>
<해시태그 시그네>

<해시태그 시그네>는 진실한 자아 찾기 여정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주인공의 정신적 성숙을 힘겹게 도모하는 건 낡거나 가짜라고 여기는 듯하다. 영화는 차라리 실험관찰 보고서와 같은 형태를 띠며 시그네의 감정 변화를 밀착 취재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여건이 유발하고 강화하는 다양한 감정이 포착되는데, 특히 경제력과 관계 문제에서 비롯한 박탈감에 관심을 갖는다. 해체된 가족, 유명한 애인, 나보다 성공한 친구는 시그네의 소외감을 자극하는 요소다. 누구나 자신만의 캐릭터를 연출하는 사회에서 “나는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시그네는 시시한 존재다. 신자유주의는 자기 계발을 부추기며 각자 상품성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것은 재화가 될 수 있다. 몸을 만들고 이미지를 구현하고 스펙을 쌓아야 한다. 불행 역시 스펙이다. 불행을 긍정하며 위기를 극복한 스토리라면 더할 나위 없다. 시그네의 피부병은 갑자기 일어난 사건도, 원인 모를 희귀병도 아니다. 시그네는 불행을 자초한다. 초조할 때마다 불법 약물을 복용하고, 토마스가 카메라 플래시를 즐기며 잡지 화보를 찍는 동안 아예 한 병을 입에 넣고 털어버린다.

시그네는 최악의 순간마다 최고의 나를 상상한다. 얼굴 살점이 떨어져 나갈 듯하지만, 잘 나가는 모델이 되면 토마스가 무릎을 꿇고 매달릴 것이다. 거짓말이 탄로 나서 친구를 잃을 때조차 직접 책을 펴내 유명 작가가 되는 환상을 본다. 어떻게 시그네는 끊임없이 ‘긍정 회로’를 작동할 수 있는 걸까. 미디어를 통해 매일 수많은 성공 신화를 접해서다. 자본이 원하는 이상적 주체의 모습은 사방에 전시되어 있다. 연예계에 데뷔하지 않아도 인기를 얻을 방법이야 차고 넘친다. ‘나쁜 인기’면 어떤가. 시그네는 이제 “그래, 난 문제가 있어”라고 말하고 싶다. 불행에 의존하는 인물을 묘사하고자 영화는 신체의 분리, 변형, 훼손을 활용하는 바디 호러 장르를 택한다. 해당 장르의 대표 주자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플라이>(1986), <엑시스텐즈>(1999) 또는 신체 변형과 성애를 다룬다는 면에서 <크래쉬>(1996), <티탄>(쥘리아 뒤쿠르노, 2021) 등이 곧장 떠오른다. 하지만 <해시태그 시그네>는 바디 호러 장르가 꾸준히 탐구해온 인간과 기계 장치의 이식 효과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 영화와 공유하는 핵심은 도덕성이 모호한 주인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고민하는 데 있다. <해시태그 시그네>는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신체를 강박적으로 다루고 기괴한 훼손으로 공포를 조성하는, 좀처럼 공감하거나 연민하기 어려운 인물의 극단적 선택을 지켜보게끔 한다.

<해시태그 시그네>
<해시태그 시그네>

시그네의 신체 변형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영화는 시그네의 증상 악화를 점진적으로 노출한다. 불법 약물이라는 지름길을 택한 이상 당연히 부작용이 따른다. 시그네는 각혈과 구토를 반복한다. 피와 토사물은 사회가 바라는 이상적 모델을 수행해내는 자의 고통을 가리킨다. 혹은 그러한 고통을 견디며 쟁취한 역할에 끝내 완벽히 적응하지 못한 잔여물이다. 시그네는 적당히 꼴사나운 ‘관종’에 만족하지 않는다. 무난하고 평범하다는 모욕에서 벗어나 영향력을 차지하길 기대한다. 즉 시그네에게 신체 변형은 존재를 인정받고자 싸우는 과정인 셈이다. 둘째, 신체 훼손은 대부분 얼굴에 집약된다. 카메라는 시그네의 괴사하는 얼굴 표면을 다각도로 비춘다. “피해자를 내세우는 게 트렌드”인 패션 업계는 시그네를 모델로 발탁하며 촬영 콘셉트를 “TRUE FACE”로 정한다. 얼굴은 대개 타인과의 상호 작용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조건이다. 외면할 수 없는 얼굴을 갖는 것, 독특하고 비참한 사연을 상상하게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야말로 시그네가 갈망하는 일이다. 이미 영화는 초반부터 얼굴에 상징을 씌운다. 개에게 목을 물어뜯긴 행인 때문에 시그네가 얼굴에 피를 뒤집어쓰는 순간, 영화는 히어로의 각성과 같은 비장한 톤을 띤다. 시그네는 이제야 자기 잠재력을 깨달았다는 듯 부동자세로 눈을 형형하게 빛낸다. 그리고 피를 닦아내지 않은 채로, 자신을 향한 시선을 의식하며 집으로 걸어간다.

파국으로 치닫는 시그네의 상황과 달리, 영화 배경은 시종일관 아름답다. 화창한 날씨와 짙은 녹음을 자랑하는 도시 풍경은 35mm 필름에 담겨 낭만적인 질감으로 채색된다. 이는 시그네의 신체와 극적으로 대비되며 시그네를 번번이 좌절시킨다. 시그네가 망가져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이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이슈로 교체되고, 스크롤 아래로 밀려난 자는 그제야 선택에 비용이 든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시그네는 어쩔 수 없이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를 단지 자업자득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제 팔자를 꼬아버렸다고 시그네를 조롱하는 대신 영화는 냉정하게 묻는다. 지금 이 순간, 시그네만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느냐고.

 

해시태그 시그네 SICK OF MYSELF 감독 크리스토퍼 보글리 출연 크리스틴 쿠야트 소프, 아이릭 새더 수입·배급 판씨네마 제작연도 2022년 상영시간 97분 등급 15세이상관람가 개봉 2023년 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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