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이렇게나 사랑하는구나. 새 생명을 목격한 것처럼. 나에게 다가오는 너의 걸음까지. 신비한 기적을 보는 듯 아꼈어.” 말미에 흐르는 곡처럼 <만인의 연인>은 사랑의 바다에서 열심히 헤엄치는 유진(황보운)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다만 그 마음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영화를 만든 한인미 감독과 주인공을 연기한 황보운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다 종종 멈췄다.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 여기서부터 다시 생각해볼까?” 한인미와 황보운은 과거로 가는 문을 가만히 두드렸다. 명쾌한 단어들의 집을 벗어나 혼란한 소용돌이 속에서 비로소 얼굴을 보여줬던 바로 그 소녀를 만나기 위해.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유진과 유부남을 사랑해 집 나간 엄마(서영희). 대책 없는 설정처럼 보이지만 <만인의 연인>은 결국 사랑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유진은 말 몇 마디로 자기를 규정하는 법이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만이 그녀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방법이다. 연기에 자신 있어서가 아니라 감독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오디션을 봤다는 황보운만큼 그 인물에 적합한 배우가 또 있을까? 감독이 그 당당함에 반해 손을 내밀었다니 그야말로 운명적 만남이다.
1년 만에 영화를 다시 봤는데 유진이 키가 이렇게 컸나 싶더라. 두 사람도 새삼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을 텐데.
한인미_ 신변의 변화 때문에 유진이 엄마에 예전보다 더 이입됐다. 지금 임신 8개월이다. 그래서 그런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아이의 탄생을 축복할 수 없는 상황이 훨씬 안쓰럽게 느껴지더라. 시나리오 쓸 땐 임신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디테일한 행동이나 자세는 서영희 선배님이 많이 만들어주셨다. 이제 내가 그러고 있는 걸 보며 그때 선배님이 정말 잘해주셨구나 한다.
황보운_ 여러 번 보니까 점차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게 됐다. 처음엔 내 연기 보느라 그러지 못했거든. 그러면서 영화가 점점 더 좋아졌다. 마음도 더 가벼워졌고.
한인미_ 나도 많이 편해졌다. 전에는 계속 부족한 것만 보였다. 확실히 끝맺고 나니까 영화 자체가 보인다.
황보운 배우는 그새 드라마를 촬영했다.
황보운_ <3인칭 복수>(디즈니플러스)다. 한창 촬영하고 이제 오픈했다. 지금은 다른 촬영이 없어서 댄스 학원에 다니고 있다. 몸을 더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다. 몸치 탈출, 방송 댄스 같은 걸 배운다.
몸치인가? 훤칠하니 몸을 잘 쓸 것 같은데.
황보운_ 몸치 맞다. 유진과 강우(김민철)가 같이 춤추는 장면 보면서 너무 부끄럽더라.
한인미_ 이제 와서 부끄러웠어? (웃음)
황보운_ 물론 그때도 부끄러웠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웃음) 몸치 탈출 첫 수업 때 출 수 있는 춤을 한번 춰보라고 한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때처럼 췄더니 그건 춤이 아니라고 하시더라. 열심히 해봐야겠다. 키가 좀 작은 동네 친구랑 같이 배우고 있는데, 그 친구는 조금만 움직여도 되게 멋있다. 근데 난 노력할수록 뻣뻣해 보인다. 액션 영화 보면 놀랍다. 어떻게 저렇게 몸을 자연스럽게 잘 쓰나 싶어서 계속 연구 중이다. 테니스에도 도전해볼 생각이다.


황보운 배우는 줄곧 유진 역을 희망했다고. 막 연기를 시작하는 입장에서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을 텐데,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나 보다.
황보운_ 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디션 준비하면서도 대사를 달달 외우기보다 감정선을 찾으려 애썼다. 감독님께 보여드리고 들려드리고 싶은 게 많았다. 유진이 겪는 일들이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어릴 때 주변에 강우 오빠 같은 애들이 있었거든.
한인미_ 많지. (웃음)
황보운_ 그때 좋아했던 마음까지도 다시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가편집 된 걸 봤을 때 내가 결코 유진을 다 아는 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너무 나와 유진을 비교하려고 했나, 그게 악영향은 아니었을까 싶어서 좀 아쉽기도 했다.
한인미_ 연기를 처음 하면서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고 공감하면서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이 솟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신기하다.
감독은 오래 고민하다가 결국 맨 처음에 봤던 황보운 배우에게 연락했다고.
한인미_ 학교나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배우들의 프로필을 계속 봤고, 마음에 들면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보기도 하며 배우를 찾았다. 그러다 교복 입고 해맑게 웃고 있는 황보운 배우 사진을 봤다. 너무 유진이 같았다. 일정을 잡고 만났는데 사무실에 들어올 때부터 너무 좋았다. 내가 상상한 대로 걸어 들어왔다. 아까 말한 것처럼 오디션 때 보운이는 본인 어릴 적 이야기, 연애 경험, 알바 이야기 같은 걸 들려줬다. 오디션 때문에 만든 느낌이 전혀 아니었다. 정말 편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더라. 거기서 유진의 감정과 겹치는 부분을 발견했다. 배우 자체가 되게 순수하고 열정적인 데가 있다.
황보운_ 지금도 열정적이다.
한인미_ 다만 연기 경력이 없다는 것 때문에 고민을 좀 했다. 그전에도 경험이 별로 없는 아역들과 계속 작업해오긴 했지만, 단편과 장편은 아무래도 좀 다를 테니까. 현장에서 계속 붙어서 일심동체로 디렉팅하는 과정이 과연 이번에도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배우들을 만나보면서 더 확신하게 됐다. 내가 편하게 하자고 연기 잘하는 경력 많은 배우와 하는 건 의미가 없겠더라. 유진이 그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기답게 있을 수 있기를 바랐고, 연기하지 않는 것처럼 편한 느낌이길 원했다. 그런데 많은 분이 캐릭터를 완벽히 해석해왔고 그걸 바탕으로 연기를 보여줬다. <만인의 연인>엔 보운이의 순수함에서 시작된 연기가 더 맞겠다고 판단했다.
성큼성큼 걷는 모습이 떠오른다.
한인미_ 큰 키에서 나오는 당당함이 있다. 다리가 길어서 겅중겅중 걷는데, 오디션 처음 보는 사람 같지 않더라.
유진과 엄마의 걸음걸이가 되게 비슷하다. 털레털레, 휘적휘적. 미리 이야기 한 부분인가.
한인미_ 그렇진 않다. 근데 나도 서영희 선배님 걷는 거 보고 깜짝 놀랐다. 되게 씩씩하고 걸음도 빠르시다. 선배님이 어릴 때 정말 유진이 같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순수하고 털털한 모습, 당당한 태도가 있는 데다 과거의 경험도 비슷하다. 강우나 현욱이 같은 인물들에 대한 썰을 들려주셨는데 그게 또 너무 재밌었다. (웃음)
특히 눈이 닮은 모녀다.
황보운_ 영화제에 친구들을 초대했는데 그런 얘기를 해주더라. 둘 다 눈이 초롱초롱하다고. 그래서 영화에 더 몰입이 잘 됐다고 했다.
한인미 감독과 황보운 배우는 닮았다는 얘기 들어본 적 없나.
한인미_ 객관적으로 닮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그런데 나를 오래 본 지인들이 말투나 걸음걸이, 글에서 나오는 분위기가 닮았다고 얘기해줬다. 단편 찍을 때도 들었던 이야기다.
황보운_ 어느 순간 내가 감독님 습관을 따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감독님은 뭔가 생각할 때마다 하늘을 본다. 근데 얼마 전에 누가 나보고 그러더라. 왜 계속 하늘을 보냐고.
한인미_ 재밌네. 학창 시절에 그런 거 많이 느끼지 않나? 단짝이랑 다니다 보면 습관을 따라 하게 되는 거. 걔가 없는 자리에서까지 그 친구랑 함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만인의 연인>을 완성한 동력엔 ‘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도 한몫했을 법하다. 불안하게 흔들리면서도 솔직하게 나아가는 10대 여성의 이야기니까.
한인미_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기다릴 수 있었다. 재밌게 잘 본 성장 영화가 너무 많은데, 거기서 10대 여자애들은 여우처럼 나오는 경우가 잦았다. 복수의 대상이거나 심지어 살해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게 너무 속상했다. 저들이 주인공인 영화, 우리가 겪은 10대 여성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게 이 영화의 시작이다. 금기시된 것도 워낙 많다. 10대들은 손만 잡을 뿐이지 키스신 같은 게 나올까 말까다. 그것도 답답했다.
황보운_ 감독님 말씀도 공감한다. 근데 난 영화가 끝난 이후의 유진이 너무 궁금했다. 각각의 관계를 다 끝맺고 난 다음엔 어떻게 될까, 성인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며 영화를 기다렸다.
시나리오에 감정을 자세히 묘사하는 편인가. 배우가 채워 넣을 빈칸이 많은 편이었는지 궁금하다.
한인미_ 읽기 편하게 간결한 문장으로 쓰고, 지문도 눈에 보이는 거 위주로 적는 편이다. 습작 만들 땐 시나리오에 내 감정을 너무 많이 썼다. 그걸 빼면 전달이 안 될까 봐. 근데 감정은 결국 배우랑 얘기하면서 서로 공감대를 쌓으며 만들어 나가야 하는 거라는 걸 알게 됐다. 시나리오에 내 감정이 너무 들어가면 배우가 갇혀버리는 것 같더라. 배우와 작업하는 건 창작자로서 만나 협업하는 거로 생각한다.
황보운_ 사실 캐스팅 된 줄 모르고 2차 오디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됐다는 얘기 듣고는 갑자기 긴장되고 부끄러워졌다.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고. 촬영하기 전에 감독님이랑 한 달 반 정도 매일 만났다. 작품 이야기도 했지만 일상적 대화도 자주 나눴다. 대본 리딩 같은 경우에 하루에 너무 많은 양을 하기보다 정해진 만큼만 집중해서 했다. 그렇게 장면들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서로 찾아가는 시간이 쌓였기 때문에 촬영 시작할 때 걱정스러운 마음은 그리 크지 않았다.
유진은 일기장에 늘 감정을 기록한다. 황보운 배우는 감독과 미팅할 때 오랫동안 써온 일기장을 들고 갔다고.
황보운_ 영풍문고에서 파는 5년짜리 다이어리가 있다. 길게는 못 쓰는데, 아무 사건이 없는 날에도 뭘 먹었는지 정도는 적어둔다. 아주 작은 감정도 언젠가 나한테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시나리오의 빈칸엔 어떤 걸 적나.
황보운_ 별거 안 썼다.
한인미_ 나랑 얘기할 땐 이것저것 썼는데?
황보운_ 아, 맞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는 이것저것 많이 적었다. 내 기억과 비교해보기도 하고, 그때그때 생각나는 사람을 적기도 했다. 근데 지저분한 걸 안 좋아해서 아무것도 쓰지 않은 대본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현장에 두 개를 들고 다녔다.


배우가 연기하는 걸 보고 새로 발견한 유진의 면모가 있나.
한인미_ 좀 더 제멋대로일 거로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썼는데, 막상 보니까 꽤 성숙한 느낌이더라. 그게 엄마와 더 대비가 잘 됐던 것 같다. 유진이가 엄마 앞에서는 더 엄마 같은 사람이었구나. 쓸 때는 그런 걸 잘 못 느꼈다.
황보운_ 현욱(홍사빈)이 화낼 때 유진이가 좀 울먹인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그게 너무 좋더라. 그래도 얘가 어리기는 어린 친구였구나, 안쪽에는 힘든 게 있었구나 싶었다.
결국 유진이 엉엉 우는 걸 보며 내심 다행스러웠다.
한인미_ 그 얼굴을 너무 좋아한다. 모든 관계가 깨진 게 다 내 탓인 것 같고 너무 속상해서 아기처럼 우는 얼굴. 뽀뽀하고 싶어서 강우를 쳐다볼 때, 카페에서 다른 커플들을 바라보다가 거울에 비친 본인한테 빠져있을 때 나오는 표정도 좋다. 정말 유진답달까.
황보운_ 우는 장면 찍을 때 좀 힘든 상황이었다. 그 앞 장면도 어렵게 찍었고, 감정도 무거우니까 절로 울게 되더라. 초반엔 어떻게 울었는지 생각도 안 난다. 당시에 우는 신은 모니터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계산하고 생각하게 될 것 같았거든. 그냥 그 상황을 혼자 이겨낸다는 생각으로 울었다. 조감독님이 내가 편할 때 울면 된다고 신호도 일부러 안 주셨다. 대신 카메라를 계속 돌려주셨지.
유진이 세상을 처음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과정, 그 격동의 시기를 각자의 언어로는 어떻게 정리해봤나.
한인미_ 연출 의도를 쓸 때 여러 번 정리했는데 하나로 딱 안 떨어지더라.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쏟고 상처받으며 내가 누군지 알게 된다, 그걸 통해 또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는 게 가장 큰 줄기였다. 그 모든 것들을 종합적으로 처음 경험하는 시기가 영화에 담긴 거다. 근데 또 얘가 남의 시선을 전혀 신경 안 쓰는가 하면 그렇진 않다. 각각의 관계마다 상대에게 장단을 맞추기도 하잖나. 결국 그걸 깨고서 자기다움에서 다시 관계를 시작하는 방법을 배워나가며 영화가 끝난다고 생각했다. 모순적이고 하나로 정리하기 어려운 혼돈의 시기를 보낸 셈이다.
황보운_ 그 과정에서 유진이가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은 안 했다. 사빈 오빠나 민철이와는 친하게 장난치며 지냈는데, 그러다가 상대 배우가 호흡을 주면 그 상황에 몰입했다. 서영희 선배님은 다른 촬영이 있어서 교류를 많이 못 했다. 그런데 그게 좋았다. 그런 관계가 다 드러났으니까.
한인미_ 한 명씩 떠올려보면 어떤 느낌인가?
황보운_ 정말 감정선이 전부 달랐다. 밖에서 담배 피우며 호신술 배우는 게 강우랑 처음 촬영한 건데, 부끄럽기도 하고 좀 간질간질했다. (웃음) 그 호신술이 너무 유치한데 한편으론 멋있어 보이기도 하니까 마음이 복잡하더라. 친근하고 착한 현욱이는 내가 금방 미워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얘는 나를 좋아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거지.
한인미_ 혜선이는?
황보운_ 의지하게 되는 사람이었고 배우로서도 마찬가지였다. 남자 배우들한테 말 못한 어려운 부분을 정연 언니한테 많이 이야기했다. 근데 언니는 촬영 끝나면 바로 집에 가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계속 붙잡았다. (웃음) 점장님은 유진에게 참 감사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고등학교 때 피자집에서 알바했다. 그때 점장님도 항상 “괜찮아.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하며 다독여주는 분이었는데, <만인의 연인> 찍으며 그때 생각이 많이 났다. 우지현 선배님이 워낙 잘하는 분이잖나. “난 피자 만들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해주시더라.
점장님이 “너 왜 그렇게 필터가 없냐.”고 하는데 유진을 설명하기 딱 좋은 말이다. 솔직하고 말 뒤에 숨지 않는다.
황보운_ 동시에 누구한테도 미움받지 않는 인물이길 바랐다. 안쓰럽고 불쌍하게 보이지도 않았으면 했다. 그저 18살 유진이의 당당하고 솔직하고 순수한 모습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야 얘가 더 나이 든 다음에도 상처받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한인미_ 내 상태를 고백하는 솔직함이니까. 그게 유진이를 미워할 근거는 안 될 거다. 그러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되거나 잘못을 깨닫게 되면 그걸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길 바랐다.
독특한 모녀 관계를 그렸다. 둘은 외모만 닮은 게 아니다. 어쩌면 비슷한 문제로 고민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각자의 방식으로 길을 찾는다.
황보운_ 엄마와의 대화에선 날카로움과 정을 함께 느꼈다. 집에 와서 전 부치는 엄마를 볼 땐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아서 유진이가 엄마한테 상처 되는 말을 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엄마가 잘 때 배를 쓰다듬으며 얘기하는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연기할 때도, 관객으로서 볼 때도 속상하고 마음 아팠다.
한인미_ 애증의 관계다. (웃음) 원래 계속 같이 붙어있으면 싫은 점도 더 잘 보이잖나. 어쩌면 나와 닮은 것 같아서 더 싫어지기도 하고. 시나리오 쓸 땐 서로가 좀 더 냉정하게 군다고 생각했는데 서영희 선배님이 읽어보시고 둘이 서로 사랑하는 거라고 말씀해주셨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애정이 더 많이 보인다는 게 신기하더라. 배우들이랑 작업할 때 발견하게 되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황보운_ 그러고 보니 나 현욱이랑 닮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피부가 까매서 그런가.
한인미_ 둘이 같이 있으면 유진이가 엄청 환해 보인다. 색보정을 해보니까 그렇더라.
황보운_ 내 주변에 현욱이 좋아하는 분이 많다. 나중에 현욱이랑 잘 되는 거냐고 드라마 보듯이 물어보기도 하고. (웃음)
한인미_ 현욱이 나중에 샛별이랑 결혼한다.
황보운_ 이런 비하인드가 좀 있다. 집에 나무로 된 식탁이 생긴 것에도 스토리가 있다.
한인미_ 엄마의 새로운 남자친구가 만들어 준 거다. 나무를 만지는 더 선한 사람이지. (웃음)
대체로 숏 사이즈가 큰 편이고, 한 발 떨어져서 인물을 바라보는 장면들도 꽤 있다. 무엇을 고려했나.
한인미_ 숏 사이즈가 클 때 배우의 움직임이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편집으로 가꿔주는 것보다 그런 방식으로 둘 사이의 호흡, 대사 사이의 간격을 살리는 게 이 영화에 더 맞겠다고 봤고. 웬만하면 다 풀숏으로 찍고 싶었다. (웃음) 근데 그러면 너무 불친절해지더라.
<만인의 연인>은 결국 인물 사이에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걸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결말로 나아간다. 캐치볼 하는 거리, 모녀가 찾은 간격 등을 통해 혼자 서는 일의 중요함을 역설한다.
한인미_ 결국 거리 두기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나름의 시작점인 셈이니까.
둘은 평소에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인가.
황보운_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거리를 잘 안 두는 편이다. (웃음) 하지만 거리를 안 둬서 생기는 상처는 내가 안고 가야 하는 거라고 여긴다. 사실 혼자 밥 먹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한다.
한인미_ 원래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결혼하니까 둘이 있는 게 좋다. (웃음) 과거엔 유진처럼 사람을 좋아하며 마음을 쏟고 온당한 리액션을 원했다. 그럴 때 나와 같은 마음으로 반응이 오지 않거나 아예 안 오는 과정을 겪는 게 참 힘들었다. 그러면서 나로서 지낼 수 있어야 좀 더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엔딩 크레딧에 한인미 감독이 작사하고 황보운 배우가 부른 ‘만인의 연인’이라는 곡이 흐른다. 넓은 의미의 사랑에 대한 노래인데, 목소리 톤이 낮은 편인 배우가 종달새처럼 불렀더라.
한인미_ 원래 연주곡으로 완성된 곡이다. 음악 감독님이 영화를 보고 나가는 관객들에게 선물같이 전해주고 싶다며 배우가 직접 노래를 불러보기를 제안해주셨다. 그래서 가사를 쓰게 됐다. 엄마, 꿈, 사랑에 빠질 때의 감정이 녹아있는 가사면 좋겠더라. 물론 엄마와의 사랑은 이성에 대한 사랑과 다르겠지만, 나를 채워주고 내가 마음을 쓰고 싶다는 면에선 닮은 점이 있다고 봤다.
황보운_ 노래하게 될 줄은 몰랐다. 노래방도 별로 안 좋아하거든. (웃음) 그런데 감독님이 노래할 수 있냐고 물어보셨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에 할 수 있다고 답했는데 좀 막막했다. 감독님이 가이드로 노래를 부르셨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괜찮았다. 난 엄청나게 노력해야 했다. 일단 한 번 불러봤는데 다 틀렸다. 감독님이 하나하나 체크해주시며 같이 연습했다. 어디서 숨을 쉬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더라. 이것 또한 내게는 도전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했다. 음악 감독님이 음을 다 안 맞춰도 되니까 감정을 실어서 부르면 된다고, 그러면 다 들릴 거라고 하셨다.


황보운 배우는 올해 초 공개된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넷플릭스)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연기는 어떻게 시작했나.
황보운_ 원래 예고에서 모델과를 다니며 모델을 준비했다. 그런데 먹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너무 어렵고 힘이 안 나는 일이었다. 결국 입시를 안 하기로 하고 엄청나게 먹어서 살이 많이 쪘다. 대신 패션 쪽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학원에 다녔다. 그러다 길에서 1학년 때 알게 된 회사 실장님을 만났다. 날 알아보시고는 같이 일해보자고 하셨다. 그러려면 살을 빼야 해서 도전하는 마음으로 다이어트를 했다. 스무 살 올라가는 겨울이라 뭐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랬더니 3개월 만에 20kg 넘게 빠지더라. 근데 알고 보니 그 실장님이 아이돌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어서 그건 그만두고 연기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한남동 빵집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지금 회사 분들을 만나게 됐다.
한인미_ 빵 사러 갔다가 캐스팅을?
황보운_ 맞다. (웃음)
우여곡절이 많았다. 연기하며 어떤 재미를 발견했나.
황보운_ 사람들이 함께 뭔가 해나가는 게 너무 좋다. 대화하고 호흡을 맞추며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즐겁더라. 여름에는 친구가 찍는 단편 영화에도 출연했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이 일을 좋아한다는 걸 거듭 느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들과 같이하고 있다는 게 마냥 기쁘다.
한인미 감독도 <할 말 있어>(조지훈, 2011) 등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더라.
한인미_ 학교에서 연기로 품앗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연기 자체는 흥미로운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전문적으로 하기엔 부족하다. 날 아는 분들이 내게서 캐릭터와 비슷한 면을 발견해서 써주시면 무난하게 하는 정도였다.
연출자로서 느끼는 영화의 매력은?
한인미_ 영화를 못 찍고 있을 때, 기다릴 때 그런 생각 제일 많이 한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웃음) 그게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밖에 말 못 하겠다. 글 쓰고 촬영하고 그걸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흐름 자체가 좋다. 내가 느낀 걸 이야기하고 거기 누군가 공감해줄 때 기뻐하는 게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만인의 연인>이 남긴 변화가 있다면.
한인미_ 현실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지만 살면서 경험하는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모아서 영화를 만들어왔다. 이번에도 그렇게 한 시기를 매듭짓고 또 그로부터 거리를 두게 됐다. 나름의 소회라면 그런 데서 찾을 수 있겠다.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에 대한 생각은 계속 변한다. 내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읽히는 반응을 접했을 땐, 다음번엔 좀 더 밝고 공감이 되는 요소를 가져와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 쏟아내서 완결을 짓고 나니까 기존의 작업 방식이 최소한의 베이스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더라.
황보운_ <만인의 연인>은 내 감정을 꺼내며 길게 연기해볼 첫 기회였다. 앞으로 만나게 될 작품 중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거다. 그럴 때 나는 또 어떻게 연기하게 될까 궁금해할 수 있게 됐다는 게 변화 같다. 유진이로 살며 느꼈던 감정들이 지금도 가끔 스쳐 지나갈 때가 있다. 그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서 촬영을 마치며 모든 스태프한테 편지를 썼다. 유진이한테 쓴 편지도 있다.
한인미_ 그 편지 너무 궁금한데?
황보운_ 비밀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