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곤경, 이 남자의 사정
SIFF 2022 <표류자들> 최혁진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2-12-05

“내가 자초한 거긴 하지만 너무 잔인하다 현실이” <표류자들>은 곤경에 빠진 한 남자가 일하고 먹고 자는 모습을 기록한다. 그의 이름은 지환. 영화를 만든 최혁진 감독의 친구다. 보험 설계사로 잘 나가던 지환은 어느 날 갑자기 신용 불량자가 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카메라를 든 감독은 그의 사연을 구구히 읊는 대신 별안간 자신의 곤경을 실토한다. “확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표류자들>은 ‘파도 가장자리’까지 밀려간 친구에게 도움을 주고자 촬영을 제안했던 감독이 실은 그 자신도 표류 중이라는 걸 깨닫는 이야기다. 두 사람은 반지하 방에서 함께 지내며 일용직 노동을 시작한다. 한때 주저앉았던 청년은 이제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희망차게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카메라는 꾸밈없이 그 모습을 담아내며 다큐멘터리의 지평을 모색할 것이다. 하지만 페달을 아무리 밟아도 제자리.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변하는 건 없었다. 영화는 고백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그저 순진한 발상이었는지도 모르겠노라고. 그렇다고 <표류자들>이 실패와 체념의 자리에 머무는 건 아니다. 어떻게든 친구와 오늘을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 그에게 행복한 내일이 찾아오길 바라는 간절함이 영화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두 남자의 어색한 동거를 다룬 <방문객들>(2020)에 이어 독특한 표류기로 서울독립영화제를 다시 찾은 최혁진 감독을 만났다.

 

 

<방문객들> 끝내고 충주에 있는 친구를 찍어보고 싶다고 했다. <표류자들>은 그곳을 떠나면서 시작되는 영화다. 언제 촬영했나.

작년 2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찍었다. 떠나기 전에 눈이 왔다. 친구는 원래 충주에서 한두 달 정도만 요양하기로 했는데 점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더라. 걱정되는 마음에 종종 내려가서 같이 술 마시고 산책하고 친구 아버님도 뵙고 그랬다. 난 학교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계속 영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두세 달 하고 끝나는 식이었다. 그런 상황에 친구와 함께 일하면서 장기적으로 작업하는 방식을 떠올렸다.

 

오랜 친구인가.

초등학교 때부터 친했다. 힘들 때마다 고민을 털어놓는 사이다. 소위 말하는 베프. 친구는 음악을 했고 난 영화에 관심이 있으니 나눌 이야기도 많았다. 충주에 친구 부모님이 계신다. 목행동이 충청도를 먹여 살렸던 곳이라는데 지금은 스산하다. 역도 폐쇄됐고. 그런 곳에 한때 외제 차 끌고 잘 나갔던 젊은 친구가 은둔하고 있다는 게 흥미롭기도 했다. 부자(父子)의 다큐멘터리도 생각해봤다.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친구를 이해해주고 기다려주셨으니까. 여러 사정으로 결국 그런 영화가 되진 못했다. 나와 친구가 이사한 곳은 우리가 학교 다녔던 용인이다.

 

영화 찍자고 했을 때 지환 씨 반응은 어땠나.

흥미로워했다. “그래, 너도 찍고 싶은 걸 찍고 나도 일하고. 같이 하면 재미도 있고 추억도 되겠다.” 지금은 걱정이 많다. 자기 때문에 내 커리어에 지장이 생기는 게 아니냐고 만날 때마다 미안해한다. (웃음)

 

지환 씨가 카메라 앞에서 솔직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영화를 찍으며 알게 된 친구의 새로운 면이 있나.

딱히 새로 발견한 게 있진 않은데 생각보다 솔직한 모습이 더 많이 담겼더라. 정말로 나를 믿어줬기 때문일 거다. 나 역시 믿음을 주려고 노력했다.

 

영화엔 감독의 표류 역시 담겼다. <표류자들>은 감독이 애초 만들고 싶어 했던 영화로부터 계속 멀어진다. 처음 떠올렸던 영화는 어떤 모양이었나.

신용불량자 사연은 한국에 이미 너무 많다. 시사 프로그램 같은 느낌을 원했던 건 전혀 아니다. 촬영이 서로에게 실질적으로 시너지가 되길 바랐다. 카메라가 있으면 누가 본다는 생각에 의식이 바뀌기도 하잖나. 친구가 충주에 너무 오래 있었으니, 촬영이 앞으로 함께 나아가는 동력이 되길 바랐다. 한편으론 역설적이지만 개입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기도 했다. 인터뷰나 내레이션 없이 관찰만 하고 싶었던 거다. 연출하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관찰만으로 얻은 장면을 담고 싶었다. 그러려면 계속 곁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합숙하기로 했다.

 

생각만큼 수월하진 않았나 보다.

순진했다. 처음엔 이 다큐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밝은 모습, 눈에 띄는 성과를 볼 수 있길 기대했다. 나도 급했던 거다. (웃음) 하지만 일이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뭐라도 찍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에서도 편히 쉬질 못했다. 생활은 계속 단순해졌고 우리가 나누는 대화에도 변화가 없었다. 애초 기대했던 기쁨이나 성취감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더라. 돈 버는 족족 빚을 갚아야 했으니까. 돈을 버는데 돈 걱정이 더 많아졌다. 친구는 빨리 돈을 갚아야 하는 상황인데 난 영화가 잘 나오길 바라고 있고, 그런 데서 충돌 아닌 충돌이 점점 생겨났다. 같이 있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걸 알게 됐다. 계속 카메라를 갖다 대면 친구도 너무 피로할 테고, 무작정 찍는 건 복잡한 현실을 담는데 적합한 방식도 아니라고 판단하게 됐다.

<표류자들>
<표류자들>

영화에 일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빚을 갚기 위한 노동이지만 오히려 그 몸짓에 온전히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더라. 특히 지환 씨가 방수업체에서 일하는 장면들이 그렇다.

소모적으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친구는 예전에도 다양한 일을 했고, 사무실에 있는 것보다 밖에서 활동하는 걸 좋아했다. 육체의 움직임을 통해 도전 정신 같은 게 느껴지면 좋겠더라. 일이 점점 능숙해지는 모습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게 자연스럽게 담길 거라고 봤다. 그만큼 내 촬영이 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함께 택배 상하차 일할 때 구석에 세워둔 카메라가 곤두박질치는 순간도 인상적이다. 카메라의 한계를 체감하게 된다. 무엇이든 찍을 수 있다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카메라는 여전히 무능하고 무겁다.

맞다. 일이 우선인데 난 계속 찍는 걸 목표로 삼고 있으니까 결국 그렇게 된 거다. 어떻게든 담아내려고 용을 써봤는데 카메라는 자꾸 엎어지고 밟혔다. 일도 힘든데 얘도 말을 안 들어, 뭐 그런 거였지. (웃음) 나도 카메라는 기계일 뿐이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카메라 위치는 어떻게 정했나. 지환 씨가 공사장에서 일할 때는 마치 숨어서 보는 것처럼 찍었다. 집에 있을 때도 카메라는 간혹 밖으로 나가 창문을 통해 안을 본다. 무심한 애정이 느껴진다.

내가 가까이서 찍는 걸 두려워하더라. 기본적으로 거리를 두고 찍는 걸 좋아한다. 생활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공사장에선 너무 가까이서 찍기가 미안했다. 그땐 오직 관찰자로서 찍기 위해서 간 거니까. 스펙터클하게 찍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엔 지환 씨 손에 들린 드릴에 카메라를 달았다.

친구 시점으로는 한번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괜찮다고 하더라. 원래 일하면서 노래하는 편이긴 한데, 그때 특히 노래를 열심히 불러줬다. 마치 마이크를 쥐고 있는 것처럼. (웃음)

 

집 주변의 풍경도 많이 찍었다.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길고양이, 아이들이 주로 등장한다. 카메라를 들고 진득하게 기다리지 않으면 찍을 수 없는 장면들이다.

주변 공간을 통해 친구의 뒷모습을 찍는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월세가 아주 싼데 온전히 거주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더라. 항상 이사하는 사람이 많거든. 버려지는 물건도 늘 바뀌었다. 오토바이를 탄 플랫폼 노동자들이 자주 다니고, 다문화 가정 아이들과 길고양이가 많은 곳이다. 근데 고양이들을 챙겨주는 사람들이 꼭 있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의 네트워크 같은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잘 먹은 고양이들처럼 보여서 다행스럽더라.

처음엔 없었는데 어느 순간 고양이 집이랑 급식소가 생겼다.

 

작업 배경에 늘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있다고 말한 적 있다. <표류자들>을 만들면서 새로 깨닫게 된 게 있나.

기다리면서 얻은 장면이 많지만, 그것도 내가 발견하려고 해야 보인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도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다. 쓰레기 치우는 분께 허락받을 겸 인사드리러 다가갔는데 청각 장애가 있으셨다. 그러니까 나는 겉만 본 것인지도 모르는 거다. 그렇다고 그 분께 허락받고 집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일이 커지잖나. 그런 한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아직은 모르겠다.

<표류자들>
<표류자들>

관찰만 하겠다던 계획도 일찌감치 바뀐 듯하다. 자막으로 심정을 고백하고 카메라 앞에 서기도 하며 연출자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영화가 됐다.

처음엔 친구만 계속 찍었다. 그런데 시너지가 되는 작업을 계획해놓고 내가 안 나오니까 뭔가 이상하더라. 자연스럽게 프레임에 들어가 봤다. 연출자라기보다 그 친구의 단짝처럼 나오길 바랐다. 그러다 내가 일을 안 하게 되면서 화면에서 다시 빠졌는데 그게 또 이상했다. 갑자기 안 나오니까. 통일성을 만들기 위해서 다시 등장하기로 했다. 그렇게 내가 언제 나오고 언제 안 나올지 결정하기 시작하면서, 이 영화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두 사람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실은 그러고도 편집하면서 자꾸 날 빼게 됐다. 프로듀서이자 촬영을 함께해준 김솔 감독이 그걸 보고 조언을 해줬다. 나를 찍은 장면, 촬영하는 동안 내가 느꼈던 것들을 다 넣어야 한다고. 다만 너무 많이 개입하지 않으려고 목소리 대신 자막을 넣었다. 표지판처럼 보이길 바랐다.

 

그렇게 ‘표류자’가 아닌 ‘표류자들’이 됐다.

<방문객들>과 시리즈로 가려던 건 아니다. (웃음)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객관화해보는 과정이 필요했다. ‘들’을 붙이기까지가 좀 힘들었다.

 

후반부에 지환 씨 부모님 댁을 방문한다. 아버님이 꿈과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게 인상적이다.

작년 추석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나니 그 장면에 내가 나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김솔 감독에게 촬영을 부탁했다. 친구 집에서 한가위를 보낸다는 게 신기한 경험이더라. 지환이한테도, 솔 감독한테도 다 신기했을 거다. 아버님은 전에도 나한테 그런 말씀 많이 해주셨다. 독립영화 한다고 했더니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보라고. (웃음) 내게도 의미 있는 말이지만, 친구 상황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노래하고 싶어 했으니까. 카메라가 있어서 아버님이 말씀을 더 많이 해주신 것도 같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나만의 답 같은 걸 찾았나.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는 격차와 거리가 필요하다는 거.

 

후반부에 눈 오는 동네를 배경으로 ‘당분간 못 만날 것 같아 오래 기다렸다’는 자막이 뜬다. 카메라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기다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농사짓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심어놓고 어떻게 되는지 보는 거다. 처음 세운 원칙이나 방향은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게 되더라. 내가 변화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이 공통점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한 편씩 만들었다. 관심사를 재발견하는 계기이기도 했나.

<방문객들>을 만들 때 이미지에 맞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방식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비전문 배우와 함께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게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친구를 찍게 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러니까 관심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면 카메라로 진짜를 담아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방문객들> 만들고 나서는 실제로 생활하는 사람의 모습을 찍어보고 싶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짜를 담을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어떨 땐 연기해야만 느껴지는 진짜가 있으니까. 정답은 없겠지만 당시엔 탐구해보고 싶었던 주제다.

 

지금은 어떤가.

한 사람을 찍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 일이란 걸 알았으니, 다음엔 뭐가 됐든 허투루 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한다. 작은 동작 하나에도 다 그 사람만의 이유가 있다. 만약 계속 영화를 한다면 다음엔 그런 걸 놓치지 않고 담아봐야겠다.

 

영화 만들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나.

카메라를 들고 있으니 더 잘 보게 된다. 그게 신기하고 재밌다. 그건 나의 틀 밖에 있는 걸 담는 과정이기도 하다. 계획했으면 담지 못했을 풍경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폐지 줍는 아주머니가 들어오고, 차가 지나가고, 비가 오는 모든 일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최혁진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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