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에 테이프를 붙이고 바늘로 구멍을 뚫으면 당장 터지지는 않을 테지만 풍선의 바람은 소리 없이 빠져나간다. <죄 없는 소녀>는 일시에 감정을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서서히 소진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영화다. 그런 점에서 집요하고 사악하다. 큰 틀은 친구 죽음의 가해자로 몰린 소녀가 학교를 떠났다 돌아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여고 2학년 교실, 영희(전여빈)가 돌아와 수화로 인사를 건넨다. 수화의 의미를 모르는 반 친구들은 돌아온 소녀를 환영한다. 가까운 과거, 이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자살로 추정되는 여고생 실종사건이 일어났다. 실종자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던 영희(전여빈)는 이 사태에 모종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몰린다. 사건을 파헤치려는 형사, 사건을 수습하려는 담임, 딸 실종의 원인을 알고자 하는 경민의 어머니(서영희). 각자에게 영희는 추궁을 당한다. 하지만 영희의 진술은 좀처럼 믿을 수 없고 조금씩 드러나는 그 날의 상황도 어딘가 불완전하다. 영희 외에 한솔(고원희)이 새로운 증언을 내놓으면서 사태는 보다 복잡해진다. 이윽고 강물에서 경민의 시체가 발견되고, 장례식을 기점으로 영화의 흐름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죄 많은 소녀>는 원한과 죄책감을 파고드는 영화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이자 나홍진 감독의 <곡성>(2016) 연출부를 지낸 김의석 감독의 첫 장편영화로, 2017년 부산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 및 올해의 배우상(전여빈)을 받았다. 제목에서 특정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은 어느 장면, 어떤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 가는가에 따라 달리 보일 법한 영화다.

영화에는 서로 다른 세대, 직업, 계층의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우선 내부의 희생양을 만들어 결속을 유지하는 여고생들이 있다. 소녀들은 관계 내에서 힘의 이동에 민감하고,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선뜻 가해자의 편에 선다. 다음으로는 교사와 경찰 등 기능적 직업인들이 있다. 타인에 대한 공감보다 자신의 자리보전이 이들에겐 우선이다. 마지막으로 소녀들의 가족이 있다. 이들은 자식을 위해 타인에게 위악적 가해를 서슴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경민의 부모, 특히 엄마는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곡된 방식으로 애도한다. 작품은 이 중 누가 경민의 죽음에 가장 책임이 있는가를 따지지 않으며, 다만 소녀의 죽음이 이들 관계에 던진 파문의 양상에 주목한다.
미심쩍은 정서와 팽팽한 긴장감은 시종일관 보는 이의 심리를 옥죈다. 영화는 자살을 둘러싼 진실 공방을 다루는 미스터리로도, 관계의 미묘함을 드러낸 퀴어 스릴러로도 읽힐 수 있다. 영희는 가해자로 지목되어 박해받을 때조차 무기력하지 않았고, 행동하기로 한 이후엔 모든 상황들을 종결짓는 엄혹한 설계자의 위치에 오른다. 경민 어머니는 차가운 교양과 불쾌한 친절로 영희라는 인물과 대비의 쌍을 이룬다. 평범하지만 신비로운 매력을 지닌 영희 역의 전여빈과 경민 어머니 역의 서영희의 연기가 영화를 묵직하게 끌고 간다. 선우정아가 담당한 영화음악도 무겁게 깔린 분위기 형성에 한껏 일조한다.
<죄 많은 소녀>는 사유의 영화이기보다 감각의 영화다. 인간의 내면엔 관심이 없으며, 자살 및 폭력 등의 사태에 대한 윤리적 책임에도 무심하다. 입시경쟁과 비관용은 서사에 봉사할 뿐이고 배후에 있을 모순의 실체를 지시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응집된 감성이 전달하는 에너지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죄 많은 소녀>는 분명 인상적 작품이다. 비관적 정조는 과잉이 되고 더 나아가 자기 파괴의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그 잔혹함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죄 많은 소녀 After My Death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감독 김의석 출연 전여빈, 서영화, 고원희, 유재명, 서현우 배급 CGV아트하우스 제작연도 2017년 상영시간 113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18년 9월 13일